아흐마드 샤 마수드

massoud_reza.jpg
페르시아어, 우르두어, 페슈토어: احمد شاہ مسعود
아랍어: أحمد شاه مسعود
Ahmad Shah Massoud

1 개요

1953.9.2 ~ 2001.9.9
판지시르의 사자.
세계 최강이었던 외세의 압제와 맞서 싸우며 민중의 안생과 조국의 발전을 도모한 리더.
아프가니스탄의 명장.
진정한 무자헤딘
살라딘의 환생이자, 이슬람의 수호영웅

아프가니스탄의 무자헤딘 지도자. 군인. 원래는 카불 대학에서 건축을 전공하였으나 후에 이슬람 원리주의[1] 운동가가 되었다.

소련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자 고향인 판지시르 계곡에서 무자헤딘을 이끌고 무장 투쟁을 했다. 이른바 '페샤와르 세븐'이라 칭해지는 아프가니스탄 저항운동의 지도자들 중 유일한 타지크족 출신이다.

친소 공산정권이 무너진 후 세력을 키운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하자 북부 동맹을 결성해 대항했다. 9.11 테러가 일어나기 이틀 전인 2001년 9월 9일 알 카에다의 자살폭탄테러로 암살당했다. [2]이는 테러 이후 미국의 대규모 지원을 받을 마수드와 북부 동맹이 탈레반 정권을 붕괴시키는 것을 예방하고 9.11 테러 후 탈레반이 알 카에다를 은신시켜 줄 것에 대한 보상이었다.

2 젊은 시절

1953년 9월 2일 판지시르 계곡에 있는 자갈라크에서 경찰지휘관 도스트 모하마드 칸의 아들로 태어났다. 학교 교육과 종교 교육을 같이 받은 마수드는 특히 언어 쪽에서 상당한 재능을 발휘했는데 공용어인 다리어는 물론 프랑스어, 파슈토어우르두어에 유창했으며 아랍어에도 매우 뛰어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3] 1972년 카불대학 건축과에 재학하던 마수드는 부르하누딘 랍바니[4]가 지도자로 있는 이슬람 사회(Jamiat Islami)의 학생 조직인 무슬림 소년 단체(sazman-i jawanan-i musalman)과 관계를 가지기 시작했다.

1973년에 무함마드 다우드가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후 이슬람주의 운동을 탄압하자 이슬람 사회(Jamiat Islami)의 멤버였던 굴부딘 헤크마티야르[5]가 선동한 봉기에 참여하였다. 마수드는 자신이 담당한 판지시르 지방의 선동에 성공했으나 헤크마티야르가 아프간 장교들을 반란으로 끌어들이지 못하면서 봉기는 실패로 끝났다. 이후 다우드는 이슬람주의자들의 씨를 말릴 기세로 탄압을 가했고 마수드는 파키스탄으로 간신히 탈출했다. 이 때부터 마수드와 헤크마티야르는 원수지간이 되었고 1976년 아프간의 이슬람운동이 랍바니와 헤크마티야르의 세력으로 갈라섰을 때 당연히 마수드는 랍바니의 정당에 가입했다.

3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시기

download.php?grpid=AqeX&fldid=20k&dataid=3371&fileid=3&regdt=20050911212729&disk=35&grpcode=bulkot&dncnt=N&.jpg
자식 놈이 편지를 다 보냈어 사진은 당시 무자헤딘 활동 당시의 마수드.

1978년 아프가니스탄 공산당 세력이 쿠데타로 아프가니스탄 인민 공화국을 수립하자 마수드는 자신의 고향인 판지시르 계곡에 본거지를 구축하고 게릴라 운동을 시작했다. 이듬해인 1979년, 소련군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해 자신들의 꼭두각시 카르말 정권을 출범시키자 마수드는 이들을 몰아내기 위한 전략적 계획을 아래와 같이 수립하였다.

  1. 민중들의 지원을 받는 게릴라 군대 양성
2. 비정규전의 수행과 그 동안 거점인 판지시르의 적극적 사수
3. "전략적 공세"로 마수드의 군대가 북 아프가니스탄의 대부분을 제압
4. 마수드의 원리를 나라 전체에 일반적으로 적용하여 최종적으로 아프가니스탄 공산주의 정권을 붕괴시킨다.

1980년, 파키스탄 쪽의 루트로부터 어렵게 입수한 7백여 정의 구식 소총과 제대로 훈련되어 있지 않은 1천여 명에 불과한 병사들을 이끌고 마수드는 무자헤딘 활동을 시작하였다. 말이 좋아 게릴라지 난민이나 마찬가지였던 마수드 휘하의 무자헤딘은 마수드의 지도를 거치면서 1984년 5천 명의 강병으로 성장했고, 종전이 된 1989년, 마수드 휘하 무자헤딘의 수는 무려 1만 3천 명에 이르렀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시기 전쟁을 이끌었던 주요 세력이 아프간 밖이나 소련군의 공세가 덜한 아프간 남부 등에 자리잡은 데 비해 마수드가 근거지로 삼은 판지시르 계곡은 소련의 유일한 보급로가 지나가는 페샤와르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마수드는 적의 주력과 정면에서 맞붙어야 하면서 외부의 지원은 거의 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자기 휘하의 무자헤딘을 저 정도 규모로 키워낸 것이다.

소련군 역시 자신들의 유일한 보급로를 위협하고 있는 마수드를 최우선 제거대상으로 상정하고 있었다. 마수드와 그 휘하의 무자헤딘에 활약에 학을 뗀 소련이 수천 명 규모의 게릴라를 때려잡겠다고 스페츠나츠를 포함하여 만 명 단위의 병력을 동원하고 폭격기까지 투입해서 대공세를 가한 횟수만 무려 9회였다. - 당시 카불 방송이나 소련군 발표에서 마수드의 체포 또는 제거를 거짓으로 보도한 것만 세 차례였다. - 하지만 소련군은 마수드를 잡기는커녕 오히려 마수드에게 역관광만 당하며 판지시르 계곡을 붉은 군대의 무덤으로 만들어버리기 일쑤였다.

1982년에 행해진 5차, 6차 공세에서 소련군은 3만 명의 병력과 200여 대의 헬기를 투입했지만 3천여 명 이상의 사상자만 발생했고, 이 와중에 공산 아프간 군 1천여 명이 무자헤딘 측에 가담해버렸다. 판지시르 무자헤딘 전부를 무장시키고도 남을 무기와 물자까지 빼앗겨버린 건 덤. 마수드에게 물자를 조공한 꼴이 되어버린 소련은 육로 수송을 대폭 축소하고 대신 항공 수송을 크게 늘린다. 당연히 소련의 전비 부담은 더 커졌다.

1983년, 소련은 마수드에게 정전을 제안하였고 마수드는 고민 끝에 이를 받아들였다. 소련의 속셈은 일단 자신들의 전력을 재정비하고 다른 곳부터 정리하겠다는 것이었는데... 이 기간을 적절히 사용한 것은 오히려 마수드였다. 1983년 7월 마수드는 파완, 라그만, 카피사, 쿠나르, 바다크샨 타카르, 바그란과 쿤드즈를 포함하는 북 아프가니스탄 7개 주의 130명의 무자헤딘 지도자들을 모았고, 그 곳에서 무자헤딘들의 행동을 확실히 조절하기 위한 군사 협의체인 감독 의회(Shura-ye-nazar)를 창설한다. 감독 의회를 통해 마수드는 정치적, 인종적인 문제로 분열되어 있어서 각자 움직이던 무자헤딘 세력들을 하나로 묶는데 성공한다.[6]

이로써 마수드의 영향력은 본거지인 판지시르를 넘어 타카르, 발한 주까지 뻗어나갔고 카르말 정권은 기겁하며 소련군에게 판지시르에 대한 공격재개를 요청한다. 자신들이 생각한 것과는 전혀 다르게 흘러가는 상황에 당황하기는 소련군도 마찬가지였고 아예 마수드 세력의 씨를 말려버리겠다며 Tu-16 폭격기를 동원하여 판지시르 계곡에 전략 폭격을 감행한다. 하지만 마수드는 이미 카르말 정권에 침투시킨 첩자로부터 이 사실을 전달받았고 소련군의 폭탄은 5만 명의 거주민이 모두 떠난 텅 빈 계곡에 떨어졌다. 이것이야말로 빈 집 떨이

1984년, 소련-공산 아프간 군은 2만 1천여 명이 동원된 7차 공세를 시작했으나... 무자헤딘 5천여 명의 반격에 2천 5백여 명의 사상자를 남긴 채 후퇴해야 했고, 1985년의 9차 공세에서는 공산 아프간 군 5백여 명이 무자헤딘 측에 가담한 데 이어 공산 아프간 군 여단장이 무자헤딘의 공격에 사망(...)하는 막장 상황에 이른다. 결국 소련측은 1986년 판지시르에 대한 공세를 중단, 1988년 즈음 소련군은 판지시르 계곡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소련군은 마수드를 상대로 매우 무력했는데, 그 원인 중 하나는 소련군 장성들이 마수드와 내통하여 작전을 모두 알려주었다는 것이다. 이건 마수드가 종전 이후 직접 러시아 기자들에게 밝혔고, 마수드를 오래 취재해왔던 다큐멘터리 작가 크리스토프 드 퐁피이는 그전부터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7]

이 시기 마수드는 서방의 지원을 거의 못 받았는데 그 이유는 파키스탄 정보부 ISI의 농간과 CIA의 삽질, 그리고 영어를 몰랐기 때문. 그런 제한적 상황에서 저 정도의 활약상을 펼친 것이다.

인도와 대치 중인 파키스탄은 자신들의 배후인 아프가니스탄을 우호국 내지는 위성국으로 만들고 싶었고 자국 내의 상당수 존재하는 민족인 파슈툰족을 지원했다. 마수드는 타지크족이라는 이유로 변변한 지원을 못받았던 것. 일례로 미국이 휴대용 대공미사일 스팅거 1,000여 기를 지원하면 파키스탄은 그 절반을 떼어먹고 나머지는 퍄슈툰족에게 주면 또 그중 불과 몇십 기만이 마수드에게 지원되었다. 파키스탄의 지원을 얻은 헤크마티야르 등은 대 소련 투쟁보다는 기반 유지와 보신에 더 급급했고 이는 소련 철수 이후 파키스탄이 그들 대신 탈레반을 지원하는 원인이 되었다.

사실 미국도 별반 다를 게 없는 게, 파키스탄의 정보부 말만 듣고 방관하였고, 그 때문에 마수드에게 호구 잡힌 구소련이나 프랑스어를 할 줄 아는 마수드와 접촉에 어려움이 없었던 프랑스 측에서 마수드에 대해 더 잘 아는 현상이 벌어졌다. 일례로 미국 매스컴이 프랑스 매스컴에게 아프가니스탄 게릴라 취재 도움을 요청하자 프랑스 측에서 마수드와 연결해주겠다 하니 영어를 못 하는 사람이라고 영어를 하는 게릴라 지도자를 찾아달라고 하는 황당한 일이 있기도...(문제는 이건 CIA도 마찬가지...)

실제로 이 당시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의 정치, 사회적 상황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다'고 해도 무방할 지경이었다.[8] 파키스탄의 ISI를 통해 지원을 한 것은 소련과의 직접적 충돌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지만, 실제로 미국 CIA가 아프가니스탄 무자헤딘 조직들을 지원할 때 가장 중요한 기준은 '영어를 할 수 있느냐'였다. 이로 인해 두고두고 미국의 골치를 썩이는 헤크마티야르는 영어를 그나마 안다는 점에서 미국으로부터 많은 지원을 받았고, 마수드는 영어를 몰라서 지원은 고사하고 거의 듣보잡 취급을 당했다. 심지어 때로는 헤크마티야르와 ISI에서 조작한 정보로 인해 마수드를 경계해야할 대상으로 간주하기도 했다.

마수드 자신도 미국 정부의 군사적 지원을 받을 생각이 별로 없었다. 애초부터 마수드는 자신의 조국 아프가니스탄이 외세에게 휘둘리지 않는 자주적인 국가가 되기를 원했다. 그래서 서방 세계에 교육이나 의료, 식량 등 민간 지원은 여러 차례 호소했지만 군사적 지원은 단 한 번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갑자기 쳐들어와서 꼭두각시 정부를 세운 소련이나 이를 핑계로 무자헤딘에게 무기 지원을 하려는 미국이나 똑같은 외세로 봤기 때문이다. 마수드가 탈레반을 적대시한 이유 중 하나가 90년대에 파키스탄을 통해서 미국의 지원을 받아서였다.[9]

그리고 정말 놀라운 건, 소련이라는 강력한 적과 대치하고 외부의 변변한 지원도 없었음에도 마수드는 주민들에 대한 배려를 결코 잊지 않았다는 점이다.[10] 마수드는 판지시르를 비롯한 그의 통치 하에 있는 지역에 법과 명령을 요구할 수 있는 관리 시스템을 구성했다. 판지시르는 군사 지도자와 민간 관리인에 의해 통치되었고 판사, 검찰, 관선변호인을 가지고 있는 22개의 구역으로 다시 나뉘었다.

주민들을 위한 정책은 각각 다른 위원회에 의해 실행되었다. 경제 위원회는 전쟁 자금 마련의 책임을 맡았다.[11] 건강 위원회는 Aide médicale internationale와 같은 외국의 인권 NGO 자원봉사자들의 지원을 받아 의료 서비스를 제공했다. 교육 위원회는 군대 양성과 관리 간부 육성의 책임을 맡았다. 문화와 선전 위원회, 사법 위원회 역시 만들어졌다. 마수드가 통치한 지역에는 수도와 전기시설, 이슬람식 남녀공학 초등학교와 12개의 의원(醫院), 그리고 외과 수술도 가능한 세 개의 종합병원까지 세워졌다.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 그나마 살 만했던 곳이 마수드가 장악한 지역이었다. 이 분이 떠오른다. 그럼 헤크마티야르는 이 사람인가?

4 전쟁 이후

1989년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에 완전히 손을 떼자 무자헤딘들은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해 나가기 시작했다. 이와 동시에 무자헤딘간의 파벌다툼이 격화되었고 아프가니스탄 북부에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있던 마수드도 피할 수 없었다. 1989년 7월 9일, 숙적은 개뿔 헤크마티야르가 부하 사예드 자말에게 지시하여 판지시르로 기습해 왔지만 오히려 마수드에게 박살이 났다. 이 외에도 무자헤딘 사이의 다툼이 수없이 많았지만 마수드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카불의 공산정권을 붕괴시키고 새로운 아프간 공화국을 세우는 것이었다. 우즈벡족 군벌 압둘 라시드 도스툼[12]과 손을 잡은 마수드는 1992년 4월 18일, 카불에 입성하고 공산 정권을 무너뜨린다. 곧바로 카불에 같이 입성한 랍바니, 도스툼은 물론 타지역 무자헤딘 지도자들도 모두 포섭해서 새로운 정권을 세우려 했지만...

미국과 파키스탄의 지원을 등에 업은 헤크마티야르는 카불을 자신에게 넘기라고 요구하며 모든 수단을 동원해 수도 카불을 무력 점령하려 했고 결국 4월 25일, 카불은 헤크마티야르에게 넘어간다. 하지만 얼마 후 마수드와 도스툼은 헤크마티야르의 군대를 격파, 카불 탈환을 눈 앞에 두었다. 그런데 천하의 개쌍놈헤크마티야르가 철수하면서 자신이 넘겨주게 된 카불에 무차별 공격을 퍼부으면서 애꿏은 주민 1만 명이 죽는 참사가 벌어진다. 카불에 돌아온 마수드는 카불의 참상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

download.php?grpid=AqeX&fldid=20k&dataid=3371&fileid=4&regdt=20050911212729&disk=6&grpcode=bulkot&dncnt=N&.jpg

그가 우는 것을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 프랑스 작가 크리스토프 드 퐁피이[13]

이후 랍바니를 대통령으로 하는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연방 공화국이 성립, 마수드는 국방장관을 맡는다. 하지만 아프간 정부의 부패와 무자헤딘 간의 내분에[14] 염증을 느낀 마수드는 새 정권이 출범한지 2개월만에 사임하였고 고향 판지시르로 돌아가려 했지만 랍바니의 설득에 결국 카불에 남아 새롭게 창설된 아프간군의 지휘관이 되었다.

1994년 1월, 헤크마티야르가 도스툼을 포섭해서 다시 정부를 공격을 해왔으나 마수드는 7월 20일 헤라트에서 헤크마티야르의 군대를 다시 격파했고 이듬해 3월 6일, 마수드는 재차 헤크마티야르를 공격하며 큰 피해를 입힌다.헤크마티야르를 살려두긴 빵이 아까워 하지만 탈레반의 세력이 커져가자 1996년 6월 25일 정부와 마수드는 헤크마티야르와 도스툼을 자신들 쪽으로 회유하였다.

1996년 9월, 세력을 키운 탈레반이 헤라트를 점령하고 카불로 진군해오자 정부 요인들을 호위하며 카불에서 탈출하여 아프가니스탄 구국 이슬람 통일 전선(속칭 북부동맹)을 결성하였고 마수드는 다시 국방장관에 취임한다.[15] 이후 아프간군을 지휘하며 미국과 파키스탄의 지원을 등에 업은 채 아프간 통일을 노리고 진격해온 탈레반과 전투를 벌였다.

한국에서는 북부동맹이 탈레반에게 밀리고 밀려 북쪽 귀퉁이에 찌그러져 있다가 미국이 아프간 공습을 시작한 덕에 이겼다고 알고있는 경우가 많은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16] 상식적으로 산적으로 돌변한 지잡군지방 군벌들이나 상대하던 탈레반전략폭격까지 감행한 소련군을 관광보냈던 마수드를 이길 수 있었겠나?[17] 탈레반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고 2001년에 접어들어서는 마수드의 반격에 카불 근처까지 밀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자 탈레반은 마수드를 암살하기로 결정한다.

2001년 9월 9일, 벨기에 여권을 소지한 서방 기자들이 마수드를 취재하러 왔었고 그들을 응대하던 마수드는 기자들로 위장한 알 카에다 소속 자폭테러범들에게 암살당했다. 이때 그의 나이가 48세였다. 이틀 후 9.11 테러가 벌어졌다. 미국은 오사마 빈 라덴과 알 카에다를 내놓으라고 탈레반에게 요구했으나 자신들의 숙적인 마수드를 제거해준 알 카에다를 탈레반 정권이 내놓지 않았고 결과는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이었다. 그의 죽음은 수많은 아프간인들이 슬퍼했다.

현 아프가니스탄 정부가 수립된 후 마수드는 국가의 영웅으로 선포되었고 기일인 9월 9일은 아프가니스탄에서는 국가기념일이기도 하다. 물론 비탈레반 지역에서만.

Massoud_Memorial.jpg
매년 9월 9일, 마수드의 기념관에서 아프간 육군이 거행하는 기념식

5 평가

'판지시르의 사자'등의 별명으로 불렸으며 말 그대로 전설이나 다름없는 게릴라 지도자였다.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시기에는 타지크족이라는 특성상 미국의 지원을 거의 못 받는 상황에서도 가장 혁혁한 전공을 올렸다. 특히 아프가니스탄의 국방장관으로 취임하고 나선 세운 공적을 보면 명장이 따로 없었다.

게릴라전과 무력 투쟁으로 점철된 인생이었지만 그가 역사적으로 훌륭한 평가를 받는 것은 무고한 양민을 대상으로 하는 테러만큼은 철저히 반대했기 때문이다. 약자에게는 명분이 무기이며, 그리고 그 명분이 이슬람의 진정한 전통이라고 생각한 마수드는 평생 동안 거친 사막과 먼지바람 부는 산악을 떠돌며 게릴라전을 펼쳤지만 결코 테러리즘의 유혹에는 빠지지 않았다. 오히려 카불을 잿더미로 만들겠다는 탈레반의 협박에 카불 근처까지 진군한 마수드가 무고한 주민의 생명을 해칠 수는 없다며 판지시르로 철수한 경우가 있었다.하지만 카불은 결국 잿더미가 되었지

진정한 이슬람 원리주의자답게 저항하지 않는 자, 아이, 여성들에게는 절대로 손을 대지 않았다. 또한 다른 사상에도 관용적이었다. 수피즘[18] 관련 책을 항상 가지고 다녔으며, 유대인 프린스턴 교수 마이클 베리(Micheal Berry)의 증언에 따르면 마수드는 유대인과 크리스천을 같은 신을 믿는 형제라고 생각하고, 그들의 교리에 호기심을 보였다고 한다.

한국군 소속으로 유엔 평화유지군 고문단으로 아프가니스탄에 간 적이 있는 채수문 중령의 저서에 의하면, 마수드는 한국 인삼을 좋아했고 여성들에게 개방적인 모습을 보이며 여성의 권리에도 상당히 관심을 기울이는 등 탈레반과 정반대 정책을 취했다고 한다. 대표적인 것이 학교 등의 건설. 여성 인력 또한 아프간의 재건에 필요하다 여겨 여성 교육에 신경을 썼다. 아프가니스탄 최초의 여성 외교관인 체케바 하체미는 마수드의 아내의 친구이기도 하다. 탈레반 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이슬람교 종파의 교리와 그 교리를 따르는 신자들이 여성들에게 얼마나 잔혹한지를 생각하면 의미하는 바가 크다.
그 외에도 마수드의 지인들을 만났을 때 지인들이 마수드가 죽기 며칠 전까지도 탈레반을 우습게 보지 말라면서 알카에다탈레반미국 본토에 심각한 테러를 저지를 것이라고 누차 경고하는 등 상당한 선견지명이 있었던 사람이었다고 말했다고 적고 있다.

인권 단체인 휴먼 라이츠 워치에 따르면, 마수드 장군이 지배하는 북부 지역에서 인권 탄압의 사례는 거의 없었고, 마수드는 인권 탄압을 명령한 적도 없다고 한다. 다만 카불에 있을 때는 탈레반을 견제하기 위해 각종 무장단체들을 끌어안았고, 그 결과 카불에서 인권을 탄압하는 극단주의적 무자헤딘의 난립을 막는 것이 어려웠을 뿐이다.

NGO, 즉 비정부기구의 활동에도 호의적이었던 것 같다. 오래 가지는 못했지만 국제 적십자사와 협력하여 아프가니스탄 내전의 평화를 중재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소련군이 철군한 이후 민간단체에게는 지원을 호소하기도 했다.

2002년 노벨 평화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작가 프레드릭 포사이스는 <아프간인(The Afghan)>에서 탈레반의 골칫거리이던 마수드의 암살을, 9.11 테러 거사 이후 미국이 탈레반 정권에 알카에다 핵심세력의 인도를 요구할 것을 예상하고 이를 막기 위해 미리 탈레반에게 준 선물이라고 묘사했다.

저널리스트 아흐메드 라시드는 <혼돈 속으로(Descent into Chaos)>에서 마수드와 압둘 하크[19]를 살해하면서 탈레반이 '국민적 지지를 받을 수 있는(national standing)' 아프간 지도자들을 모두 제거해 나갔다고 기술했다.

만일 마수드가 알카에다에게 암살당하지 않고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 이후 아프가니스탄의 지도자가 되었다면 지금 양국간의 정치적 관계는 전혀 다른 양상이 되었을 것이라는 의견이 많다. 마수드는 아프가니스탄의 모든 민족에게 존경을 받은 유일한 인물이었고[20]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에 보여준 훌륭한 민생 정책, 그리고 타 민족도 포용하려 했던 물론 헤크마티야르나 탈레반 같은 놈들은 빼야겠지 그의 성향을 감안하면 탈레반 정권 축출 이후 아프간 정국이 안정되었거나 혹은 축출된 탈레반 세력과의 내전이 벌어졌어도 이를 조기에 제압했을 가능성이 크다. 무엇보다 이슬람교 신자로서 여성을 차별하지 않고 동등하게 대하는 등 전반적으로 인권문제에 관심도 많고 인권을 수호할려 했던만큼 인권탄압종교가 되어버린 이슬람교의 반면교사가 됐을 수도 있다.

6 전술

주 전술은 아프간 전통 전술에 마오쩌둥의 전술을 결합한 것으로서 각 거점을 지키는 부대와 별동부대를 운용해 빠른 기동을 통한 각개격파를 장기로 삼았다.

마수드는 자신의 부대를 셋으로 나누었다. 지역군(mahalli)은 판지시르 계곡과 거점의 전략적 방어를 담당하였다. 지역군의 정예를 따로 뽑아 편성한 충격군(i-zarbati)은 각 지역에 위치한 중요 요새를 방어하는 준 기동부대였다. 마지막으로 이동군(i-mutaharek)이란 이름의 부대가 있었는데 이들은 경무장한 특수부대로 주로 판지시르 계곡 외부에서 치고 빠지는 게릴라 전을 수행하였다. 1983년부터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이동군은 거점에서 100km나 떨어진 지역까지 진출하기도 하였다. 이동군은 말이 좋아 무자헤딘이었지 사실상 전문 군인이었다. 훈련도 가장 잘 되어있었으며 무자헤딘의 상징과도 같은 파쿨(pakul)이라는 모자와 군복을 착용했다.

7 의혹

하자라인들에 대한 학살에 동조했다는 주장이 있다. 카불의 아프샤르 구역에서 하자라족 무장단체인 헤즈비 와흐닷(Hezb-i-Wahdat)과 압둘 라술 사야프[21]의 군대가 충돌했다. 마수드를 비롯한 연맹군은 사태를 중재하기 위해 군대를 보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학살이 발생했다. 사야프군은 약 700명의 하자라인들을 학살하거나 유괴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아프가니스탄에 취재하러 와있었던 AP 기자 존 제닝스(John Jennings)는 이 사건을 근거로 아흐마드 마수드가 하자라족 학살에 동조했다는 주장을 했다. 당시 마수드는 사야프와의 교전을 피하려고 했고, 사야프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학살에 동조한게 아니냐는 것이다. 이 때문에 마수드의 기일을 하자라족 거주지역에서는 기념하지 않고 그의 초상화도 사격 연습용으로 쓰이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론도 존재한다. 우선 존 제닝스 기자가 사야프군이 학살한것을 목격하긴 했으나 마수드군이 오기 전에 현장을 떠나 마수드군의 학살 여부를 직접 확인 할 수 없었던 점, 하자라족이 1996년 마수드가 이끄는 북부동맹에 참가했다는 점,[22] 마수드 장군이 하자라족을 보호하기 위해 탈레반과 격렬하게 싸웠고, 사야프군과 하자라족의 충돌을 막기 위해 중재에 노력했다는 점[23] 등을 고려해보면 학살 동조설이 사실이 아닐 가능성도 높다. 거기에 이슬람 특유 신발 던지기를 생각하면 위 사격 연습은 아프간 지도자한테 하는 억울함 호소이지. 완전 적대가 아님도 고려해야 한다. 신발 쪽이 더 비속 요소가 강함을 생각하자.

8 명언

여자와 아이를 죽이는 것이 어찌 '지하드'인가?

- 탈레반의 테러 행위를 비난하며

조국을 재건하려면 여자도 배워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닌가?

- 탈레반이 자신이 세운 남녀공학 학교를 부쉈다는 소식을 듣고

전쟁은 누구도 좋아서 하는 게 아니오. 이건 의무이지. 국민이 침략의 희생자가 되었을 때 싸워서 스스로를 지키는 것 외에 다른 해결책은 없소.

- 크리스토프 드 퐁피이와의 인터뷰에서

마수드는 다른 지도자들과 달리 한 번도 조국을 떠나지 않았으며 한시도 적을 향한 총구를 내려놓은 적이 없다.

마수드가 살아 있었다면 카르자이는 대통령이 될 수 없었다. 그랬다면 마수드는 명실상부한 이 땅의 지도자로 지금의 혼란상을 극복하는 확고한 리더쉽을 발휘했을 것이다.
- 크리스토프 드 퐁피이

미국이 빈 라덴을 키운 거다. 내 눈앞에 보이기만 하면 당장 죽이고 싶은 단 한 사람은 내 친구 오사마 빈 라덴이다.

-북부 동맹 지도자 사예드 지아 아흐마드, 마수드가 알카에다에 의해 암살당한 후 <르몽드>와의 인터뷰에서

9 대중문화에서

라이트노벨 풀 메탈 패닉!의 주인공 사가라 소스케아프카니스탄 시절의 양부격인 바티크샨의 호랑이 마지드 장군은 이 사람을 모델로 한 것이 확실한 것으로 여겨진다.

Cat Shit One '80에도 주요 등장 인물로 등장하며, 여기서는 마수드 왕자라고 불린다. 다만 여기서는 실제와 다르게 CIA 소속으로 마수드에게 군사고문으로 파견된 래츠 화이트로부터 많은 군사적 도움을 받는것으로 묘사된다. 나중에는 보타스키가 자신의 중국 컨넥션을 통하여 마수드에게 중국제 무기를 지원하며, 퍼키 역시 종종 군사적으로 마수드를 지원한다.
  1. 단 그는 이슬람 극단주의와는 구분이 필요한 인물이다. 이슬람 극단주의 항목 참고.
  2. 마수드는 생전에 자기가 죽으면 뭔가 큰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2001년 9월9일 기자로 위장한 탈레반의 자살 폭탄 테러의 의해 사망하였으며, 그로부터 이틀 후..
  3. 이슬람 원리주의자로 활동하려면 쿠란을 읽기 위해 아랍어는 필수다.
  4. 공산정권이 무너진 후 아프가니스탄 대통령이 되었고,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하자 마수드와 북부동맹을 결성하여 탈레반에게 저항한다.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 이후 아프가니스탄 하원 의장으로 재임하였고 탈레반과 평화협상을 시도하던 도중 자살 폭탄 테러로 암살당한다.
  5. 당시 아프가니스탄에서 가장 강력했던 군벌 중 하나. 후술하겠지만 마수드가 숭고한 이슬람 전사의 전형이라면 헤크마티야르는 기회주의자의 전형이다. 헤크마티야르는 2015년에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국가에 대한 지지를 선언하기도 했다.
  6. 나중에 감독의회는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하자 그에 저항한 북부 동맹의 뼈대가 되었다.
  7. 퐁피이가 저술한 판지셰르의 사자 마수드 참고. 이에 대해 퐁피이는 그들이 러시아의 명예를 지켰다고 평가했다. 비록 신변 보호 차원에서 마수드가 누가 내통했는지 이름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장성쯤 되는 자들이 적과 내통, 그것도 매수하거나 종전 후 이권을 보장해줄 위치가 아닌 아프가니스탄의 무자헤딘들과 내통했다는 것에 비추어볼 때 타당한 평가다. 당시 그들을 움직일 수 있는 건 도의적인 문제뿐이었다.
  8. 세계적인 헤로인 생산국가, 탈레반 - 이와 같은 것 모두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미국의 무지에서 출발했다고 해도 될 정도다. 현재 아프가니스탄의 막장 상태는 더할 나위 없고...
  9. 탈레반이 이웃 국가인 이란을 적대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이 탈레반을 지원해주고 있었다.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거지
  10. 이 점에서 다른 무장 세력이나 탈레반과는 하늘과 땅 차이다.
  11. 주요 수입원은 에메랄드 수출이었고, 주민들에게는 걷는 세금은 될 수 있으면 주민들에게 돌아갈 수 있도록 했다.
  12. 도스툼은 무자헤딘이 아닌 공산 정권의 지역 사령관으로 2만 명이 넘는 민병대를 이용해서 아프간 북부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다.
  13.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시기부터 마수드와 교류를 한 작가이다. 마수드의 일대기를 다룬 <판지시르의 사자 마수드>를 쓰기도 했다.
  14. 애초부터 무자헤딘은 통일된 반군 조직이 아니라 무장 군벌들간의 엉성한 연합체에 불과했다. 그러다보니 이들간의 내분은 예상된 문제였다.
  15. 파슈툰족이었던 헤크마티야르는 이듬해 탈레반에 투항하여 탈레반의 일원이 되었고 이후 북부동맹은 물론 미국과도 싸운다. 답이 없다
  16. 미군을 중심으로 북부동맹은 곁다리로나 전황을 보도했던 미국 언론을 그대로 인용한 한국 언론들의 잘못이 크다.
  17. 탈레반이 (정확히는 파키스탄 정보부를 통해) 미국의 지원을 받자 러시아와 이란이 북부동맹을 은근히 도와주고 있었다. 마수드도 이에 대하여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18. 신비주의 계열 종파. 같은 이슬람을 표방하고 있기는 해도 교리가 하늘과 땅 차이라 수니파, 시아파 양쪽에서 탄압받는다.
  19. 한 때 헤크마티야르 밑에 있기도 했던 파슈툰족 출신 무자헤딘 지도자로 소련군이 철수한 뒤 무자헤딘으로는 거의 유일하게 무기를 내리고 평화 협상을 호소한 인물이다. 미국이 아프간 공습이 시작된 후, 강경한 탈레반 지도부를 몰아내기 위하여 온건파 탈레반을 규합하는 도중 강경파 탈레반에게 살해당했다.
  20. 동생 아마드 지아 마수드가 아프가니스탄 부통령이 된 것도 형 아흐마드 샤 마수드의 후광이 컸다.
  21. 사우디아라비아의 지원을 받는 극단주의자다. 알카에다와 밀월 관계였고, 실제로 마수드를 암살한 유력한 용의자이기도 하다.
  22. 학살이 일어난것이 1995년이다. 주장이 사실이라면 하자라족은 1년만에 학살자와 동맹을 맺은 셈.
  23. 이는 존 제닝스 기자도 인정하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