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가니스탄/역사

중앙아시아의 국가 아프가니스탄역사를 다루는 항목.

국기의 변화가 매우 현란하다# 링크 참조.

1 이슬람 도래 이전

이 지역은 과거 페르시아인도 지역의 경계였던 곳이었고 그러다보니 알렉산드로스 3세의 원정 이후 인도와 그리스, 페르시아계 국가의 번갈은 지배를 받게 되었다.

2 이슬람의 도래

서아시아의 이슬람이 상업활동을 통해 퍼지면서 이슬람 문화권이 되었다.

3 몽골의 정복

연이은 칭기즈 칸이 이끈 몽골의 침공으로 국토가 초토화된다.

호라즘 왕조 무함마드 2세의 아들이던 잘랄 웃 딘이 바미얀에서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런데, 1222년 칭기즈 칸 손자무투겐이 이 전투 와중에 전사한다. 분노에 찬 칭기즈 칸은 바미얀 왕조 도성인 샤흐르 에 조아크 성을 차지하면 성 안 모든 살아있는 것을 다 죽인다고 다짐했다. 그럼에도 몽골군은 1년이나 고전하다가, 잘랄 웃 딘의 딸인 릴라 하툰 공주가 배신하는 바람에[1] 결국 바미얀을 불바다로 만들고 공언대로 살아있는 모든 것을 다 죽이며, 이후 페샤와르와 가즈니를 비롯한 곳을 차례로 점령했지만, 막판 죽길 각오하고 필사적으로 저항하던 잘랄 웃 딘 왕에게 막혀 결국 아프가니스탄 전역 점령을 포기한다.[2]

이후로 일 칸국티무르 제국, 무굴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4 두라니 왕조

그 이후 자체적인 첫 통일 국가라 할 수 있는 두라니 왕조가 세워졌지만 이마저도 오래 못 가고 내분으로 멸망하였다.

5 근현대

  • 아프가니스탄 아미르국 (Emirate of Afghanistan, 1826 ~ 1919)
  • 아프가니스탄 왕국 (Kingdom of ~, 1919 ~ 1973)
  • 아프가니스탄 공화국 (Republic of ~, 1973 ~ 1978)
  • 아프가니스탄 민주공화국 (1978 ~ 1992)
  •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아미르국 (Islamic Emirate of ~, 1996 ~ 2001)
  •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 (Islamic Republic of ~, 2001 ~ 현재)

5.1 영국의 침공

1901년부터 1919년 독립까지 쓴 영국 치하의 국기. 원래 그 이전엔 아예 문양 없는 검은색이었다.

19세기 제국주의 시대가 되자 아프가니스탄은 러시아영국의 완충지가 되었다. 영국은 아프가니스탄을 식민지로 삼으려 하였지만, 세 차례에 걸친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영제국군은 오랫동안 고전하였다. 결국 제3차 영아전쟁 끝에 1919년 아프가니스탄은 아프가니스탄 왕국을 성립시키고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얻어냈다.[4]

이 때 영국은 '듀런드 라인'이라는 선으로 아프가니스탄과 영국령 인도 사이의 국경을 지었는데 이것이 오늘날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사이의 국경이 되었다.

5.2 아프가니스탄 왕국 시대

1931년부터 1973년까지 쓴 아프가니스탄 왕국 국기.
흑-적-록의 전통색을 사용하게 된건 1928년부터다.

아프가니스탄은 왕국으로써 역사를 이어가게 되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을 거쳐 냉전 시절까지도 왕국을 유지했다.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얻어낸 국왕 아마눌라는 근대화를 위한 개혁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여기에 반발한 세력으로 인해 강제로 퇴위당했다. 그러나 아마눌라의 사촌인 나디르 샤 왕자가 이를 진압하고 왕위에 올랐다. 그가 죽은 후 무함마드 자히르 샤가 왕위에 올라 40년간 왕국을 다스렸다. 이때 아프가니스탄은 안정기를 맞았다. 인터넷에서 볼 수 있는 아프가니스탄의 리즈시절은 바로 이 시절의 사진이다.

자히르 샤 국왕은 사촌인 무함마드 다우드를 총리로 기용하였으나 다우드는 급진적 개혁 정책을 추진하였고, 여론을 의식한 자히르 샤는 다우드를 퇴위시켰다. 자히르는 입헌 군주제 도입, 정당 설립 자유화 등 민주화를 추진하였으며 냉전 체제에서 중립 외교를 고수하였다. 반면 다우드는 소비에트 연방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려 했던 것이다.

결국 자히르 샤 국왕이 해외순방을 하던 도중 다우드가 쿠데타를 일으켜 무함마드 자히르 샤 국왕을 몰아냈다. 다우드 칸은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국을 선포했다.[5] 그리고 여기서부터 아프가니스탄의 고난이 시작되었다.

5.3 아프가니스탄 공화국 시대

1974년부터 78년까지 쓴 공화국 시대의 국기.

1973년, 쿠데타를 통해 바라크자이 왕정을 폐지하고 아프가니스탄 공화정을 선포한 다우드 칸은 새 공화국 정부의 초대 대통령 겸 총리가 되었다. 그리고 보수적인 이슬람교의 영향력의 지배하에 있었던 아프간 사회를 바꾸려고 강력한 개혁 정책을 추진했고 외교적으로 친소련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한편으로 친소련 정책을 펼쳤던 다우드 대통령은 정작 자국내에 있던 공산주의 및 사회주의 정치 세력들을 탄압했고 더욱이 다우드 칸은 공산주의자들 이외에도 이슬람주의자들을 탄압하는 등 권위주의적인 독재 정치를 펼치면서 국내의 불만을 키웠다.

결국 1978년 좌익계 군인들과 아프가니스탄 최대의 공산주의 정당이었던 아프가니스탄 인민 민주당이 쿠데타를 일으켜 다우드 대통령을 살해하였다. 그리고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장악한 인민민주당은 다우드 대통령이 건강상의 이유로 대통령직에서 사직했다고 거짓 발표를 내보냈고 이후 아프가니스탄 인민 민주당 당수였던 누르 무함마드 타라키가 아프가니스탄 민주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어 인민 민주당 1당 공산 독재 정권이 수립되었다.

5.4 공산정권 시대

78년부터 80년까지 쓴 소련 필나는 국기.

공산 독재 정권을 세운 인민민주당은 아프가니스탄에 공산주의 체제를 심는 급진적인 공산화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이러한 인민민주당의 급진적 공산화 정책은 보수적인 아프가니스탄 국민들의 반발을 키웠고 특히 종교를 부정하는 공산주의의 특성상 종교의 영향력이 상당히 미쳤던 아프가니스탄에서 이슬람교 세력들을 탄압하면서 보수적인 이슬람교 지도자들의 공산정권에 대한 반감은 나날히 커져갔다.

결국 아프가니스탄 전역에 공산 독재 정권에 저항하는 소위 '무자헤딘(مجاهدين)'이라는 이름의 이슬람주의 반정부 게릴라들이 들고 일어나면서 아프가니스탄은 정부군과 무자히딘간 충돌로 나라 전역이 내전 상태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인민민주당 내부에서도 심각하게 여러 파벌들로 분열되어 매우 취약했다. 이듬해인 1979년 당내 권력 투쟁에서 타라키가 실각당하고 하피줄라 아민이 대통령이 되었는데, 실각당한 타라키의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된 하피줄라 아민은 스스로를 아프간의 티토를 자처하며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소련의 내정간섭을 거부하였고 이슬람 세력들과 반공 세력, 당내 정파 세력들에 대한 탄압을 더욱 강화하는 정책을 취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아민의 정책은 오히려 아프간의 분열을 더욱 고착화시켰고 이로 인해 아프간 공산 정권은 붕괴위기에 몰리기 시작했다.

결국 이러한 아프가니스탄의 혼란상에 인접국이었던 소련은 아프간 내부의 정치적 불안이 이 지역에서 쌓아온 소련의 영향력 상실과 이슬람 인구가 밀집된 소련남부의 공화국들로까지 그 여파가 미칠 가능성을 판단해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무력 개입 가능성을 슬슬 보이기 시작했고 1979년 12월 27일 소련은 육,공군 전체 병력을 이끌고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무력 침공을 개시해 수도 카불을 점령시켜 아민 대통령을 사살했다.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시작이었다.

5.5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1980년대 아프가니스탄 공화국 국기.

한편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여 하피줄라 아민을 제거하는데 성공한 소련은 인민민주당 당내 권력투쟁 과정에서 패해 체코 영사로 밀려나다시피한 바브라크 카르말을 대통령으로 옹립하여 아프가니스탄에 새로운 친소련 공산 정권을 수립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아프가니스탄 전역에서 공산정권을 상대로 저항하던 무자헤딘 반군 게릴라들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점령한 점령 소련군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이후 아프가니스탄은 무자헤딘 게릴라와 소련군과의 전쟁으로 이어졌다. 한편 소련군과의 전쟁 와중에 무자헤딘은 친소 카르말 정부군도 공격하였고 무자헤딘은 산악지대가 많은 아프가니스탄의 지형을 이용해 산악전밑 게릴라전 형태의 전투 방식으로 소련군과 카르말 정부군을 끈질기게 괴롭혔다.

소련은 막대한 양의 돈을 전비로 쏟아붓고 병력을 추가 증파하였지만 상황은 좀체 나아지지 않았고 1985년에 접어들면서 소련은 아프가니스탄 주둔 소련군 철수를 고려하기 시작했다. 한편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에서의 군사적 개입 중단을 고심할 무렵, 아프가니스탄 공산 정권 내부에서도 카르말이 물러나고 무하마드 나지불라가 대통령이 되는 권력교체가 일어났다. 한편 대통령이 된 무함마드 나지불라는 무자헤딘을 비롯 비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연정 수립등의 유화 정책을 제시했지만 무자헤딘은 이런 나지불라의 제안에 반발하여 결국 나지불라의 유화 정책은 실패했다.. 한편 이때 소련은 1988년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철수를 시작했고 이듬해인 1989년 마지막 주둔 소련군 병력마져도 철수하면서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은 소련군의 퇴각으로 막을 내렸다.

5.6 나지불라 - 무자헤딘 내전

1987년부터 92년 멸망까지 쓴 국기.

한편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사실상 손을 떼자 무자헤딘은 이번에는 나지불라 정부를 공격하였고 결국 아프가니스탄은 나지불라 정부군과 무자헤딘 반군간의 유혈 내전으로 변질되었다. 내전 초기에는 소련군의 철수 이후에도 소련의 꾸준한 무기 지원과 주둔 소련군이 두고 간 전투기와 전차, 장갑차, 헬리콥터 같은 화력 강한 무기들로 무장한 나지불라 정부군이 우세했었고 강력한 정면전 구사로 무자헤딘 세력에 어느 정도 큰 타격을 입혔다.

하지만 정면전에서 나지불라 정부군에게 워낙 열세였던 무자헤딘들은 다시 산악지대로 숨어들어 산악지대를 거점삼아 나지불라 정부군에게 저항했고 정부군은 무자헤딘의 게릴라 전 공격에 수도 카불과 일부 평야 지대만을 장악한체 산악지대를 중심으로 강력한 게릴라전을 펼치는 무자헤딘에게 밀리다시피했다. 더욱이 무자헤딘을 잡는다는 미명하에 시작된 정부군의 공군폭격으로 애꿏은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하고 민간 산촌 마을에 대한 약탈과 강간, 방화등을 일삼으면서 나지불라 정부은 국민들의 민심마져 잃고 말았다.

결국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자 나지불라 정부군은 패퇴에 패퇴를 반복했고 정부군 내에서도 무자헤딘에 투항하거나 탈영하는 병사들과 장교들이 늘어났으며, 더욱이 1991년 소련마저 붕괴되면서 나지불라 정권에 대한 소련의 지원마저 끊기면서 위기에 몰리게 되었다. 그리고 무자헤딘은 카불을 제외한 아프간 전역을 장악하였다.

드디어 1992년 4월 무자헤딘은 나지불라 정권의 최대 거점지자 수도 카불을 점령하기 위한 대대적인 무력 공세 작전에 돌입하였고, 치열한 전투끝에 마침내 카불 도심지 진입에 성공하며 결국 나지불라 정권은 붕괴되었다. 그 결과 아프가니스탄은 부르하누딘 라바니, 시브가툴라 모자데디, 굴부딘 헤크마티야르, 아흐마드 샤 마수드, 압둘 하크 등 무자헤딘 출신 인사들이 정국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5.7 무자헤딘 - 탈레반 시대

무자헤딘의 국기로, 탈레반 정권을 인정하지 않은 UN에게는 2001년 탈레반 패망 때까지 정식 국기로 인정되었다. 지금의 아프간 국기는 2002년을 기해 바뀐 것으로 이후로는 국장 도안만 조금씩 바뀌었다.

그러나 나지불라 정권을 무너트리고 아프가니스탄 정국을 장악하다시피한 무자헤딘도 각기 다른 여러 무장군벌과 파벌들로 이루어진 엉성한 연합체에 지나지 않았다. 아흐마드 샤 마수드 같이 몇몇 걸출한 무자헤딘 지도자들이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소련군 철수후 나지불라 정부군과 무자헤딘 사이에서 벌어진 유혈 내전의 와중에서 서로 다른 파벌들을 통합시켜 단일 조직체로 만들려는 노력을 했지만 거의 실패했고, 결국 나지불라 붕괴 후 무자헤딘들끼리 전후 처리와 권력 배분 문제를 놓고 서로 전투를 벌이면서 아프가니스탄은 다시 내전 상태로 돌변하였다.

그러나 이런 내전의 혼란속에서 이슬람 성직자였던 물라 무함마드 오마르가 여러 이슬람 학생들을 규합하여 1994년, 탈레반이라는 이슬람 원리주의 무장 조직을 결성하였고 탈레반은 내부분열로 약화되다시피 한 무자헤딘 세력들을 격퇴하였다. 그리고 탈레반은 나지불라 정권 붕괴후 군벌 세력들의 횡포와 약탈에 지치다시피한 아프간 일반 민중들의 지지까지 얻어내어 그 영향력을 부풀려가기 시작했다..그리고 1996년 탈레반은 수도 카불에 입성하면서 이후 아프가니스탄은 탈레반 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

탈레반 정권의 국기. 매우 심플하다. 그나마도 96년도에는 1년간 오로지 흰색 깃발이었다.

한편 정권을 장악한 탈레반은 엄격한 이슬람 율법에 입각한 극단적인 이슬람 원리주의 독재 정치를 시작했다.TV 방송과 라디오 방송을 금지시키고 여성들의 부르카 착용을 의무화하는가 하면 음주,담배흡연,면도,영화도 금지하였다. 연날리기나 부즈카시같은 아프간의 전통놀이도 이슬람 율법에 어긋난다며 이마져도 엄격하게 금지했고 이들은 집권기 동안 문화재 파괴[6]에 민간인 학살,법 위반자에 대한 손목절단과 잔인한 총살형등으로 아프가니스탄을 공포로 몰아갔다.

그러나 탈레반이 장악한 국토는 3/4에 지나지 않았고 탈레반 정권 성립후 부르하누딘 라바니, 아흐마드 샤 마수드 등 몇몇 무자헤딘 세력들이 1/4에 해당되는 북부 산악지역으로 달아나 북부동맹(아프가니스탄 구국 이슬람 통일 전선)을 결성하여 탈레반 정권에 대한 무력 저항에 나섰다. 아프가니스탄 남부 지역 3/4를 장악한 탈레반은 나머지 북부 지역도 장악하기 위해 북부 동맹도 공격했으나 북부동맹군의 완강한 저항에 성과를 이루지 못했다.[7] 한편 북부동맹도 탈레반이 장악한 남부 지역으로 남진하여 탈레반 정권을 무너뜨리려는 계획도 세웠지만 군사력이나 규모에 있어서 북부동맹은 탈레반에게 열세에 지나지 않았고 탈레반과 북부 동맹간 불균형한 대치 상태가 이어졌다.[8]

5.8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

그러나 2001년 9월 11일 9.11 테러가 발발하고 테러의 주모자 오사마 빈 라덴과 그가 이끄는 알 카에다가 아프간의 탈레반들과 연합했으며 그들이 아프간에서 신변을 보호해주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이 지역은 다시 한번 뜨거운 감자가 된다. 미국은 탈레반에게 이들의 신변을 넘겨 줄 것을 요구했으나 탈레반은 이를 거부, 결국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이 발발한다.

침공 자체는 한달만에 미군의 압도적인 화력으로 금방 끝났고 이후 아프가니스탄은 반(反)탈레반 정권인 하미드 카르자이를 대통령으로 하는 새로운 정부가 들어섰다. 그러나 미군과 NATO군의 침공에 정권을 잃어버리다시피한 탈레반은 산악지대로 숨어들어 카르자이 정권에 항거하고 있고 아프가니스탄은 여전히 내전상태에 놓여있다. 결국 미국도 나토도 견디질 못하고 2014년부터 치안권을 아프가니스탄 정부에게 넘겨주고 서서히 철수하고 있다. 버틸 수가 없다 덕분에 한국군 파병은 흐지부지.

한마디로 미국에게는 이라크와 더불어 여기도 베트남 전쟁 재방송이 되었다.[9]

이렇듯 아프가니스탄은 19세기 해가 지지않는 세계최강 대영제국을 상대로 세차례 싸워서 이겼고,[10]20세기 후반 초강대국 소련과 10년 전쟁을벌여서 승리했고, 21세기 지금 유일 초강대국 미국과 싸웠으며 결국 미국도 이기지 못하고 사실상 지고 나갔다. 무서운 나라다(…). 여기에 엮이고 나서 멀쩡한 나라가 없다. 몽골또한 바미얀 왕조만 박살내고 나머지 나라들은 항복을 얻어낸것이지 여기에 머무르면서 지배하던 것이 아니다. 그야말로 근성과 투쟁의 역사.[11]

6 아프가니스탄은 어째서 막장이 되었는가

이랬던 곳이(1967년)이렇게 변했습니다;; (2007년)[12][13].

그래도 이 나라도 좋은 시절이 있었다. 1960~70년대에는 이란과 더불어 서구화 정책도 이뤄져서 미스 아프가니스탄[14]을 뽑고 미스 유니버스 대회에도 나가던 매우 드문 이슬람권 나라였었으며 왕국시절인 1960년대까지는 다민족, 다종교가 평화롭게 공존하는 땅이었다. 심지어 공화정인 1970년대까지만 해도 현대식 '아시아에서 가장 깨끗한 나라' '과거와 현대가 조화롭게 공존하는 땅' 다원주의의 성공모델이자 명상 명소였다. 1960년대 초에는 1인당 gdp도 우리나라보다 약간이긴 하지만 높았었다. 그야말로 천국에서 지옥으로 변한 것.

그러나 위와 같은 온건한 개혁을 이루어냈던 아프가니스탄은, 70년대 급진 공산주의 정당의 쿠데타로 인해 혼란에 빠졌다. 국가의 상황을 파악하지 않고 공산 정권부터 수립하려다가 보수파들의 반발을 샀고 이는 소련의 개입을 초래하여 나라 꼴을 엉망으로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오죽하면 자히드 칸 왕이 2002년 거의 30년만에 조국으로 돌아와 탈레반이 물러난 칸다하르를 둘러보고 30년동안 내 조국이 이렇게 폐허가 되었단 말인가? 서글퍼했고 결국 그는 2007년 93살로 세상을 뜨면서 죽기 전 지인들에게 "난 죽어서 알라에게 혼쭐날거야, 아름다운 곳을 이렇게 만들게 방치했으니...."라고 두고두고 한탄했을 정도이다.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이 터지기 전의 아프간 모습과 그 이후의 지옥도는 할레드 호세이니가 쓴 연을 쫓는 아이천 개의 찬란한 태양에서 살짝 엿볼 수 있다

역사란에서도 보듯 이 지역은 고대부터 서에서 동으로 가는 길목이었으며 현재도 미국러시아중국, 그리고 이란을 견제할 수 있는 거의 최적의 요충지이다. 이 지역은 그렇기 때문에 매우 큰 가치가 있다. 그러나 영토 대부분이 산지이니 공격하는 입장에서도 상당히 피해가 크다.

근성으로 외세와 싸운 역사가 있기 때문에 타국군이 주둔하고 있다는 상황 자체를 용납하지 못하며 사람들도 상당히 배타적이다. 게다가 기나긴 내전을 겪으면서 부족들 간에도 계속 투닥대며 싸우고 있다. 어느 정도냐면 현지 정보원이 연합군에게 자기가 속한 부족과 적대하는 부족들을 테러 조직이라고 구라를 쳤다. 결과는 당연히 민간인 대량 살상... 인구의 다수인 파슈툰족 자체도 파슈툰어를 할 줄 아는 부족을 파슈툰족이라 통칭하는 것이지 부족 내에서도 여러 파벌이 존재하고 서로 투닥대는 상황이니 말 다 했다.[15]

게다가 이 모든 문제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탈레반은 파슈툰족이 아프간과 파키스탄을 걸쳐서 분포한다는 점을 이용해 파키스탄을 근거지로 다시 부활하였다(…).[16]

더불어 하도 많은 역사적 침입을 받다보니 무수한 인종이 뒤섞여서 지방 곳곳에서 자기들 나라를 이뤄 살고 있는 점도 골치다. 이를테면 미국-아프간 전쟁 중 터키가 미국에 여러 도움을 준 것에 대하여 이슬람 보수파들이 비난하자, 한다는 변명이 군벌 가운데 하나인 압둘 라시드 도스툼이란 자가 튀르크계 형제라서 도왔다고 할 정도. 파키스탄에도 많이 살고 있는 파슈툰인, 오랫동안 아프간 산지에 살던 우즈베크인(우즈베키스탄의 원주민으로 주치의 후손), 투르크멘인(투르크메니스탄의 원주민이자 터키인과 같은 오우즈 부족), 하지라인(몽골제국의 원정 당시 따라온 투르크계 군인들의 후손으로 완전한 북방 황인종이다. 몽골제국의 군사력은 투르크인이었고 그들의 후손으로 남은 자들이 하자라인이다)등의 투르크계나 소그드인(토카라인)의 후손인 이란계 타지크인 같이 언어와 문화까지 다른 이들이 뒤섞이면서 오랫동안 피튀기며 싸우고, 통합 자체를 해본 적이 없다는 점이 막장상황에 기여했다.

역사에 만약이란 없다지만, 사실 미국은 최소 두 번이나 이 나라와, 그리고 어쩌면 스스로를 구할 기회가 있었다.

1990년대 초반에 소련군이 물러나고 아흐마드 샤 마수드같은 친서방[17] 온건 이슬람 군벌들이 아프간의 정권을 확실히 잡았다면 탈레반이 득세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9.11 테러도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21세기의 세계사가 크게 변했을 듯. 문제는 소련이 아프간에서 물러나고 냉전이 끝나자 미국은 아프간에 대한 지원과 관심을 끊어버렸고[18][19] 이는 아프간을 막장상태로 만드는 도화선이 되었다. 탈레반이 집권하는 결과를 낳았으니.

before(...) (2001년 3월)[20]after(;;)

그리고 미국의 아프간 침공으로 이 나라에도 어쩌면 희망이 보였을 수도 있었다. 2002년 말경엔 탈레반이 사실상 궤멸 직전까지 갔었다. 이런 상태가 지속되어 탈레반이 완전히 와해 되었다면 지금 처럼 아프간이 막장이 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미국이 엉뚱한 데에 한눈을 파는 바람에 탈레반이 다시 세력을 모을 기회를 얻었고 상황은 또다시 막장으로 치달아 현재에 이르게 된다.

7 전망

위와 같은 서술을 보면 이렇게 막장인 나라에도, 아예 희망이 없는 건 아니다. 2004년 첫 대선이 실시된 이후, 2009년, 2014년에 중단 없이 선거가 계속 이루어지고 있다. 카르자이가 힘 없는 정부, 막장 정부라는 평가를 받기는 하지만 민주적 대표성은 최소한 갖추고 있다는 이야기. 2009년 대선에서는 카르자이가 재선되었다. 2014년 대선의 경우, 결선투표 끝에 아슈라프 가니 후보가 당선되었다. 결선투표에서 낙선한 압둘라 압둘라 후보는 부정선거 의혹과 재검표를 주장했다. 무려 2달에 거쳐 재검표를 진행하였고, 선관위는 아슈라프 가니 후보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후 두 후보가 만나 권력 분점에 합의함에 따라, 2014년 9월 29일 카르자이 정부는 막을 내리고 새로운 행정부가 출범하게 되었다.

아슈라프 가니 대통령은 기존에 없던 직책인 최고행정관을 신설해 총리격으로 두고 그 자리에 압둘라 압둘라를 임명했다. 아슈라프 가니는 전 재정부 장관으로, 서방세계에서 엘리트 코스를 밟은 관료 출신이다. 아프가니스탄 인사 중에서는 친 서방 인사로 분류된다. 탈레반의 반발과 공격 속에서도 투표장으로 나온 아프가니스탄 국민들이 있는 한,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예전의 위용을 되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2016년 5월 30일에 아프간 정부는 전쟁으로 파괴된 1920년대에 지어진 옛궁전을 복원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2016년 7월 23일, IS가 카불에서 자살폭탄 테러를 일으켜 81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며 정정불안이 야기되고 있다.#

9월 30일. 탈레반 다음으로 큰 규모의 조직을 가진 것으로 평가받는 반군세력 '헤즈브-에-이슬라미 아프가니스탄'(HIA)과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

  1. 릴라 하툰이 배신한 원인은 바로 잘랄 웃 딘 왕이 이웃 나라 가즈니 왕조 공주와 재혼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 덕에 권력이 줄어들 것을 우려한 그녀는 아버지와 나라를 배신하고 칭기즈 칸에게 성으로 들어오는 방법과 척박한 이 땅에서 그나마 성을 지탱하던 길 위치같은 중요한 정보를 죄다 일러바치고, 자신을 이 곳 군주로 남기고 칭기즈 칸과 결혼하길 원했다. 이 정보로 금세 성을 함락시킨 칭기즈 칸은 약속을 깨고, 릴라 하툰 공주도 결국 이 성에 살던 생물이라고 병사를 시켜 돌로 머릴 깨뜨려 죽였다고 한다. 자업자득. 그런데 잘랄 웃 딘은 가즈니로 결혼하러 가는 통에 이 참극을 피하고, 그 뒤로 몽골군을 상대로 10년 가까이 저항을 한다.
  2. 이후로 몽골군이 점령지에 남아 거주하면서 가즈니나 페샤와르를 비롯한 지역민들과 혼혈을 이룬 게 오늘날 하자라인이라고 한다. 이걸 봐도 알 수 있듯이 지방 각 부족나라나 외세 지배보단 부족들로 나누어진 작은 나라들이 이 나라 오랜 역사를 차지한다.
  3. 압둘라 압둘라 전 장관과 공동 정부
  4. 코난 도일의 소설 셜록 홈즈에서 왓슨이 홈즈와 만나기 전 바로 영-아 전쟁에 참전했다고 설정되어 있다. 그의 지팡이는 그 공로로 여왕이 하사한 것
  5. 자히르 샤 국왕은 이탈리아에서 긴 망명 생활을 이어가다가 탈레반이 축출된 2002년에 아프가니스탄으로 돌아와 국부 칭호를 받았다. 2007년 사망.
  6. 바미얀 석굴 파괴가 대표적이다. 사실 바미얀 석굴은 이미 11세기에 한번 이슬람에 의해 우상으로 두상이 박살난 것이 (보통 우상을 이렇게 없엔다) 완전히 산산조각 난 것. #
  7. 북부동맹의 리더인 아흐마드 샤 마수드는 이름값이 떨어져서 그렇지 20세기 가장 뛰어난 지휘관 중 하나이다.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 마수드와 그를 따르는 수 천명 규모의 게릴라 때려잡겠다고 소련군은 스페츠나츠를 중심으로 수 만단위의 군대와 대형 폭격기까지 동원했지만 오히려 소련군쪽이 만 명이상 전사하며 마수드에게 역관광당했다. 소련조차 어쩌지 못한 마수드를 지방 잡군이나 때려잡던 탈레반이 상대할 수 있을리 없었다.
  8. 북부동맹의 공세에 카불 근처까지 밀린 탈레반이 카불을 잿더미로 만들겠다고 위협하자 마수드는 주민들을 다치게 하면서까지 카불을 함락시킬 이유는 없다며 북부동맹군을 퇴각시켰다. 사실 어느정도의 희생을 각오했다면 카불은 북부동맹의 손아귀에 들어갔을 가능성이 높다.
  9. 미국 우익들은 미국이 진 게 아니라고 항변하지만 이건 베트남 전쟁조차도 미국이 진 게 아니라능 징징거리고 있는 터라. 결국 못 이기고 철군하는 게 진 거 아니냐? 라는 비아냥을 듣고 있다. 미국 논객 토머스 프리드먼이 결국 미국은 승자인 탈레반과 협상하는 게 전쟁 끝났다고 한거다라고 깠을 정도.
  10. 사실 미국,소련과 달리 영국상대로는 비긴거라 할 수 있다. 독립전까지는 결국 보호국 신세가 되고 말았고 1919년에 독립한 것도 1차대전으로 영국의 국력이 약해졌기 때문이다. 문제는 독립당시 전쟁에서 오히려 아프간 쪽이 영국의 만만치 않은 반격으로 불리했다는 것.
  11. 천년넘게 중국과 싸워왔고 20세기 들어선 프랑스-일본-미국과 100년에 걸친 전쟁끝에 통일독립국가를 건설한 베트남 정도가 비교가능할듯.
  12. 믿기 힘들겠지만 같은 장소다.
  13. 구글 이미지검색에서 '1950s, 1960s afghanistan' 따위로 검색해 보면 차도르를 쓰지 않은 여자들 사진도 꽤 많이 나온다
  14. 1974년을 마지막으로 막장이 된 뒤로 사라졌던 미스 아프가니스탄은 2004년 30년만에 대회가 열렸으나 엄청난 반발로 정작 미스 아프가니스탄이 된 여성은 국적을 박탈당했다.
  15. 게다가 대부분의 파슈툰족은 탈레반을 증오하고 있으나 우습게도 탈레반 상당수가 파슈툰 족이다...
  16. 사실 이문제도 거슬러 올라가보면 과거 제국주의 시절 강대국들끼리 멋대로 그은 국경선이 문제이다. 파키스탄이 과거 인도의 일부로 대영제국의 식민지였던 시절, 러시아제국이 인도양으로 향하는 통로를 노리고 남하하자, 양쪽이 협정을 맺어서 세력권을 분할했는데 이때 파슈툰족 거주지역을 반으로 뚝 짤라서 남쪽은 영국이 인도식민지로 먹고, 북쪽은 러시아 세력권의 아프가니스탄으로 정한 것이다. 현재 파키스탄은 카라치를 중심으로 한 남부출신들의 주도하며, 북부의 파슈툰족들은 파키스탄인이란 정체성이 거의 없다. 따라서 국경선이 의미가 없으며, 탈레반과 알카에다가 양쪽을 맘대로 오가면서 활동하는 것이다.
  17. 딱히 친서방, 친미로 보긴 힘들다. 소련과의 전쟁기에 미국의 지원을 전혀 받지도 못했고. 하지만 탈레반처럼 무조건적인 반미도, 현 아프간 정권처럼 무조건적인 친미도 아니고 '도움이 되면 손을 잡는다' 정도의 유연한 성향이라 실제 집권을 했다면 미국과도 무난하게 지냈을 가능성이 높다.
  18. 사실 냉전이 끝나고 CIA도 대규모 구조조정을 겪어 관심가져줄 여력이 없었겠지만.
  19. 톰 행크스가 주연한 2007년작 <찰리 윌슨의 전쟁>이 이부분을 다루고 있다. 소련과의 전쟁기에 찰리 윌슨 하원의원은 동료 의원들의 전폭적인 협조로 수천만달러의 무기를 반소게릴라(무자헤딘)에 지원하는 예산안을 손쉽게 얻어냈지만, 막상 소련군이 철수하자 학교건설 지원예산 단 5만달러는 의회와 언론의 무관심속에 완전히 묻히게 된다. 마지막에 '우리가 그 사람들을 전쟁터로 내몰았는데 책임을 져야한다'는 톰 행크스의 이야기가 인상적...
  20. 참고로 탈레반은 이 짓거리로 인해 전세계적으로 욕을 처먹었다. 심지어 같은 이슬람 국가인 파키스탄에게서도 문화재 훼손하지 말라는 공식 규탄을 받았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