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산사

洛山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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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중건 이후 모습. 단원 김홍도의 낙산사 그림을 참고해 복원됐다.)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오봉산에 있는 이다.

관세음보살이 머무른다는 낙산(오봉산)에 있는 사찰로, 671년(신라 문무왕 11) 의상(義湘)이 창건하였다. 의상이 관세음보살의 진신이 이 해변의 굴 안에 머문다는 말을 듣고 굴 속에 들어가 예불하던 중 관음보살이 수정으로 만든 염주를 주면서 절을 지을 곳을 알려 주어 이곳에 사찰을 창건하고 ‘낙산사’라 하였다고 전해진다.

858년(신라 헌안왕 2) 범일(梵日)대사가 중창하였으나 1231년 몽골의 침입으로 소실되었다. 1467년 조선 세조 13년 왕명으로 크게 중창하였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화재를 겪었다. 다시 1624년 인조 원년, 9년(1631)과 21년(1643) 재차 중건이 있었으나 1777년 정조 원년 화재를 당하여 다음해 다시 중건하였으나 6.25 전쟁으로 소실되었다.

전쟁으로 소실된 건물들은 1953년에 다시 지었다. 3대 관음기도도량 가운데 하나이며, 관동팔경의 하나로 유명하다. 경내에는 조선 세조 때 다시 세운 7층석탑을 비롯하여 원통보전과 그것을 에워싸고 있는 담장 및 홍예문 등이 남아 있다. 그러나 2005년 4월 6일에 일어난 큰 산불로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어서백담사급? 2007년 4월 5일에 복원했다. 당시 산불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이전부터 낙산사 주변에서 물을 뿌리며 확산을 막던 소방헬기들도 다른 곳의 불을 끄느라 도저히 낙산사로 올 수 없었고 그나마 온 소방차가 오히려 불에 타 버릴 정도였다. 낙산사의 승려와 신도들이 소화기로 불을 꺼보려 했지만 이 것으로 화재를 막을 수는 없었다.
이 화재로 보물 제479호로 지정되었던 낙산사 동종이 녹아서 소실되면서 그 해 7월 7일 지정해제되었다. 겨우(?) 산불에 어떻게 금속 종이 녹아내리나 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겠지만, 나무가 탈 때 내는 에너지는 생각보다 많다. 산불 같은 대화재의 겉불꽃(제일 뜨거운 부분)은 천 수백도. 녹는점이 천 도 근처인 구리청동은 충분히 녹일 수 있다[1]. 게다가 차라리 종이 넘어져서 땅바닥으로 굴러갔다면 손상은 입어도 녹지 않았을텐데, 하필이면 종루가 불타서 종을 그대로 덮어버려서 화덕에 들어간 꼴이 되어 녹아버린 것이다. 이후 낙산사 화재 자료 전시관을 세워 당시 소실되었던 낙산사 동종의 잔해 등 소실된 문화재들의 잔해 및 화재 당시의 사진 등의 자료들을 전시하고 있다.

이 절의 창건과 관련하여 전하는 이야기가 있다. 의상이 관음보살을 만나기 위하여 낙산사 동쪽 벼랑에서 27일 동안 기도를 올렸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여 바다에 투신하려 하였다. 이때 바닷가 굴 속에서 희미하게 관음보살이 나타나 여의주와 수정염주(水晶念珠)를 건네주면서, "나의 전신(前身)은 볼 수 없으나 산 위로 수백 걸음 올라가면 두 그루의 대나무가 있을 터이니 그곳으로 가보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는데 그곳이 바로 원통보전의 자리라고 한다. 부속건물로 의상대(義湘臺), 홍련암(紅蓮庵) 등이 있고 이 일대가 사적 제495호로 지정되어 있다.

사찰의 규모도 큰 편이고, 바닷가에 붙어있기 때문에 경관이 좋아 관동지방 여행의 필수코스 중 하나로 자리잡고 있다.

인근에 동해북부선의 낙산사역이 있었으나 동해북부선이 제진역~감호역구간을 제외하고 전부 폐선되버려서 지금은 이용할 수 없다. 역 터는 강현면 정암리 448-2번지에 남아있다. 다만 직선거리로만 3㎞가 넘을정도로 떨어져 있어서 걸어서 가기엔 절대로 무리였다.[2]
  1. 여담으로, 반대로 용암은 의외로 800°C 언저리다.
  2. 버스를 타면 30분정도에 주파가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