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상

1 衣裳

항목 창조.

2 신라승려

신라 10성
아도이차돈혜숙안함의상
표훈사파원효혜공자장

義湘
625년~7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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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상 진영, 무로마치 시대, 교토 고잔지(高山寺) 소장

2.1 소개

신라 시대의 스님. 고승인 원효와 쌍벽을 이루는 고대 한국 불교계의 고승으로 신라십성(新羅十聖) 중 한 명이다. 시호고려 숙종이 내린 해동화엄시조원교국사(海東華嚴始祖圓敎國師).

2.2 유학

19세 때 황복사로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650년 원효와 함께 당(통일왕조)으로 가서 유학하려 하였다. 그러나 원효가 도중에 해골물 마시고 돌아가고, 의상은 당시의 혼란한 상황 속에서 661년 혼자 중국으로 건너갔다. 중국에서 중국 화엄종의 시조인 지엄대사의 밑에서 화엄종(華嚴宗)을 공부하고 670년 신라로 돌아와 한국 화엄종의 시조가 되었다.

2.3 귀국 이후

신라로 돌아와서 화엄종을 널리 펼쳤다. 그가 동해 바다 절벽에 있는 관음굴에서 기도한 후 관세음보살을 친견하고 수정염주 한 벌을 받았으며 이곳에 절을 지으라는 계시를 받았는데 그곳이 바로 낙산사라는 설화가 있다. 낙산사 이외에도 영주 부석사, 부산 범어사, 공주 갑사, 울진 불영사 등의 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6두품 출신인 원효와 달리 의상은 진골이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전제왕권을 강화하고, 중앙귀족세력과 결탁하는 것을 피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실제로 화엄종은 "하나가 전체이고, 전체가 하나다"라는 입장에서 우주 만물을 하나로 아울러서 국왕 중심의 체계를 잡는데 사상적 바탕을 제공하였기 때문에, 신라와 고려를 통틀어서 가장 대표적인 왕실종파로 자리잡게 된다[1].

2.4 관음 신앙

또한 원효가 극락에 가고자 하는 "아미타 신앙(나무아미타불)"을 주장한 것과 달리, 의상은 현세에서 구원을 얻으려는 "관음 신앙(관세음보살)"을 이끌었다. 자세한 것은 원효 항목 참고. (불교의 대중화와 관련해서 의상도 아미타 신앙과 관련이 있다고 그러던데.. 관음신앙과 함께 아미타 신앙을 이끌었다면서.. 공무원 시험 문제 관련해서 말이 좀 있는 듯?)

702년, 78세를 일기로 열반했으며 저서로는 화엄 사상의 요지를 210자로 축약해 시로 표현한 화엄일승법계도(華巖一乘法界圖) 등이 있다.
  1. 반면에 귀족들이 좋아한 종파는 만물에는 영원히 성불할 수 없는 사람과 성불할 수 있는 사람이 원래부터 정해져있다라는 법상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