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의 젊은 닐 영
오늘날의 닐 영
목차
캐나다 출신의 싱어송라이터. 본명은 Neil Percival Young.
1 소개
포크 록, 컨트리, 블루스, 하드록, 개러지 록, 심지어는 일렉트로니카까지 두루 섭렵한 다재 다능한 음악인으로 가사의 문학적 가치도 밥 딜런에 비견될 정도이다. 또한 1979년에 발표한 Rust Never Sleeps에 수록된 Hey Hey My My(Into The Black)을 통해 '그런지의 대부'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다.
2 커리어
2.1 유년기
저널리스트 스캇 영과 레시 영 사이에서 1945년 11월 12일 태어났다. 태어난 곳은 토론토였지만 이후 캐나다 여러 곳으로 이사다닌다. 어렸을 적부터 로큰롤, R&B, 컨츄리 음악 등을 들어오면서 음악 세계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하이 스쿨에 입학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만 두었고, 여러 친구들과 함께 밴드를 결성하지만 이후 이런 저런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베이스를 치던 동료 브루스 팔머와 함께 LA로 밀입국한다.
2.2 버팔로 스프링필드 시절
LA에서 영은 팔머, 스티븐 스틸스, 리치 퓨레이, 듀위 마틴과 함께 버팔로 스프링필드를 결성한다. 포크, 컨츄리, 록 장르가 베이스였던 밴드는 잘나가는 듯 했으나 팔머가 밀입국 및 약물 문제로 인해 활동하기가 어려워지면서 밴드는 휘청거렸고, 결국 1968년 5월 밴드는 해체된다.
이 시절 Again은 지금도 명반으로 회자되며, 멤버들 대부분이 솔로로 성공했기에 슈퍼밴드 취급 받는다.
2.3 크레이지 호스, 그리고 CSNY
영은 해체직후 리프라이즈 레코드와 계약을 맺고 첫 솔로 앨범 'Neil Young'을 발매한다. 그리고 대니 휘튼, 빌리 탈봇, 랄프 몰리나와 함께 앨범 작업에 들어가는데, 이 셋은 '크레이지 호스(Crazy Horse)'라 불리면서 이후 영이 이들과 작업할 때는 항상 Neil Young & Crazy Horse로 크레딧이 올라간다. 이후 2012년까지 크레이지 호스는 영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사실상 네 명이 한 밴드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의 행보를 보인다.
크레이지 호스 결성 직후 1969년 'Everybody Knows This Is Nowhere'를 발매하는데, 이 앨범에 수록된 Cinnamon Girl, Cowgirl in the Sand, Down by the River가 잇달아 히트를 치면서 영의 주가도 올라간다. 놀라운 건 이 세 곡이 단 하루만에 작사되었다는 것이다.저 한 곡 한 곡을 살펴봐도 명곡인데 세 곡을 하루 만에
크레이지 호스와의 작업 후에는 스프링필드 시절 동료인 스틸스와 함께 Crosby, Stills, Nash & Young이라는 그룹을 결성한다. 처음에 영은 정식 멤버가 아니었지만 이후 정식 멤버가 되면서 1969년 그레미 상에서 Best New Artist 상을 거머쥐고 승승장구한다. 그러나 당시 CSNY는 영이 메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스틸스와 영은 갈등을 빚는데, 영이 포크 록을 원했던 반면 스틸스는 "록 밴드에서 무슨 포크를 연주하냐"면서 영을 비판했다. 결국 CSNY는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영은 1970년을 끝으로 CSNY를 나온다. [1]
2.4 리즈시절
이렇게 갈등이 있긴 했지만 CSNY 시절이었던 1970년에 'After the gold rush'를 발매하면서 상승세를 이어갔고, 1972년에는 'Harvest'를 내놓는다. 빌보드와 UK 차트를 석권하면서 닐 영의 디스코그래피 사상 최고의 성적을 거둔 이 앨범에 수록된 Heart of gold는 닐 영의 수많은 곡들 중에서 1, 2위를 다투는 곡으로 유명하며, Old man 역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다.
하지만 Harvest에 성공에 힘입어 추진됐던 투어가 대니 휘튼의 과다 약물 복용으로 인한 사망하고, 캐리 스노드그래스와 4년만에 파경을 맞이하는 등의 악재가 겹치면서 잠시 주춤했지만, 이후 'On The Beach', 'Tonight's The Night', 'Homegrown'의 Ditch 3부작이 잇달아 발매되면서 다시 재기한다.
이후 크레이지 호스와 함께 'Zuma'를 발매하고, 1979년에는 'Rust Never Sleeps' 라이브 투어 현황을 담은 앨범을 발매한다. 여기에는 그 유명한 'Hey Hey, My My (Into the Black)'이 수록되어 있다. 섹스 피스톨즈의 리더였던 존 라이든이 말했던 '로큰롤은 죽었다'에 반박하면서(Rock 'n' Roll can never die) 엘비스 프레슬리를 추모하는(king is gone but not forgotten - 왕은 갔지만 잊혀지지 않는다) 가사는 후에 수많은 뮤지션들에게 영감을 준다.
후에 너바나의 리더였던 커트 코베인이 유언장에서 My My, Hey Hey(Out of the blue)라는 노래[2]에서 It's better to burn out than to fade away(서서히 사라지는 것보다 타오르는 게 낫다는 것을)라는 구절을 인용했는데, 닐 영은 이 사실을 알고 한동안 의기소침해져 이 노래들을 연주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후 코베인을 추모하는 의미에서 닐 영은 라이브에서 항상 Hey Hey, My My를 부를 때도 본래의 가사였던 Rust Never Sleeps 대신 이 가사를 넣어 부른다.
2.5 침체기
하지만 1980년부터 그가 실험적인 시도를 하게 되면서 그의 음악은 상업적으로 서서히 하락세에 접어든다. 일렉트로니카, 신시사이저의 도입 등을 통해 수많은 도전을 했지만 영의 이미지가 너무나도 깊게 박힌 나머지 대중의 주목을 받는데에는 실패했다.
이러한 변화는 영이 Reprise 음반사를 떠나 Geffen으로 들어가게 된 계기와도 맞물려 있는데, 게펜은 영에게 다양한 실험작을 약속하는 바람에 영이 게펜 레코드로 옮기게 된 것. 비록 영은 자신의 이러한 시도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했고 오늘날에는 이러한 시도도 모두 긍정적으로 평가되지만 당시에는 평이 좋지는 않았다.
어찌됐건 명성이 아예 죽은 건 아니라 1985년 에티오피아 기근을 위한 자금 마련의 목적으로 열린 Live Aid 콘서트에도 참여했다.
하지만 1988년에는 This Note's for you를 발매하면서 다시 리바운드의 기회를 마련했는데, 앨범 제목과 동명의 타이틀 곡에서 로큰롤의 상업화를 깠다. 문제는 MV에서는 한술 더 떠서 마이클 잭슨, 휘트니 휴스턴과 같은 거물물론 영 앞에서는 꼬맹이들이지만들을 까버린다. 그래서 잭슨빠인MTV에서는 처음에 이 MV를 방송하지 않았지만 이에 빡돌은 영은 '니네 MTV의 M은 음악(MUSIC)을 뜻하는 거냐 아니면 돈(MONEY)을 뜻하는 거냐?'고 까면서 나중에는 정상적으로 방송되었고, 89년에는 베스트 MV 후보에 오를 정도로 리바운드에 성공한다.
또 CSNY와도 오랜만에 재결합하여 'American Dream' 등을 발매하는 등 활동은 여전히 왕성했다.
2.6 재기
1989년 Freedom 앨범을 발매하면서 재기한 그는 rockin' in the free world에서 홈리스, 환경 파괴 문제 등을 이야기하면서 조지 H. W. 부시를 까버린다.어째 나이 들면서 점점 디스하는 곡이 많아지는 거 같긴 하지만[3]
90년대 들어서는 상업적으로 70년대에 비견될 정도로 상승세를 달리는데, 'Harvest Moon', 'Sleeps with angel'[4], 'Mirror Ball' 등이 영미에서 10위권에 진입하는 등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줬다.
2000년대에도 8개의 스튜디오 앨범을 내면서 지속적으로 음악 활동을 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 도대체 영의 영감은 언제쯤 떨어질까가 궁금할 정도이다.
2.7 근황
2012년 10월 30일 크레이지 호스와 함께 'Psychedelic Pill'을 레코딩, 발매했다. 러닝 타임이 87분이며 2 Disc로 나뉘어있다. 롤링 스톤이나 NME에서는 극찬하고 있다. 근데 둘다 전통 락커들에 대해 콩깎지 씌여진 리뷰로 욕을 많이 먹곤 한다.
3 음악 스타일
닐 영의 매력은 하드록을 방불케하는 강렬한 기타연주와 흐느끼는 듯한 하이톤의 보컬이었다. 그리고 그것으로써 '어디엔가 숨어버렸지만 반드시 존재하는' 인간의 진실성을 찾으려 했다. 그가 처해있던 어지러운 세상 속에서 빛을 발할 수 있는 고귀한 것은 지고지순한 마음일 것이었다. '도덕성의 붕괴'라는 문제점을 안고있던 그 무렵 닐 영의 이같은 간구의 메시지는 일대 경종을 울렸다.
닐 영은 세련미를 갖춘 스타일리스트로 정평이 나있다. 그의 노래가 지성인들의 애청을 받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그들에 의해 닐은 '고독한 음유시인'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거친 들판을 외롭게 걸으며 타는 목마름으로 진실과 순수를 찾아헤매는 닐 영의 참된 멋이 이 앨범(Everybody Knows This Is Nowhere)에 있다. - 팝 평론가 임진모
비단 위에서 언급된 임진모의 평뿐만 아니라 영은 정말 현대 음악의 모든 것을 시도했던 뮤지션이다. 비록 대중들에게 영의 이미지를 묻는다면 어쿠스틱 기타와 하모니카를 연주하는(마치 Heart of Gold에서의) 방랑시인의 인상을 많이 답하겠지만 그것만이 전부라는 건 아니라는 것. 여기에 그의 송라이팅 능력을 보면 그가 왜 수많은 후배들에게 추앙받은지 알 수 있다. 영에게 영향을 받은 뮤지션만 봐도 커트 코베인, 펄 잼의 에디 베더, 라디오헤드의 톰 요크, 노엘 갤러거[5] 등 화려하다.
4 기타
- 캐나다 음악 명예의 전당에는 82년에 일찌감치 들어갔고,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도 1995년, 1997년에 입성했다. 전자는 솔로 활동으로, 후자는 버팔로 스프링필드의 일원으로서.
- 영은 미국의 농업 종사자들을 위한 기금 마련의 일환으로 Farm Aid를 개최하는데 초대 멤버로서 89년을 제외하고 매번 개근했다.
- 1970년에 발표한 앨범 After Gold Rush에 실린 곡 'Southern Man'에 관하여 이런 일화가 있다. 이 곡의 가사는 미국 남부인의 역사적인 과오와 타락을 비판한 곡인데, 이는 미국 남부의 한 술집에서 보수적인 남부인에게 머리가 길다는 이유로 험담을 들어 이에 빡돌아서 쓴 곡으로 알려져 있다. 가사가 저렇다보니 논란이 일어난 건 말할 것도 없다. 이에 대해 미국 남부 출신의 록밴드, 즉 서던 록 밴드인 레너드 스키너드가 자신들의 노래 Sweet Home Alabama에 닐 영을 언급함으로써 이에 응한다.[6] 이 때문에 닐 영과 레너드 스키너드 사이에서 싸움이 일어났나 싶었는 데 오히려 이러한 음악적인 교류를 통해 서로 친해졌다고.
- 한때 The Missing Six라고 CD 미발매 앨범이 있었는데, 그 중 닐 영 최고 앨범 중 하나로 꼽히는 On the Beach[7]가 있어서 팬덤을 애태우게 했다. 하지만 2003년 홀연히 재발매되었다.
- ↑ 닐 영이 나와도 그들은 Crosby, Stills & Nash로 계속 활동하며 승승장구한다.
- ↑ Hey Hey, My My는 전기 기타기반으로 밴드 단위로, My My, Hey Hey는 어쿠스틱으로 연주하는 노래이며 가사도 조금씩 다르다.
- ↑ 실제로 80년대 후반부터 사회 비판적인 곡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 ↑ 1994년 발매되었는데 이 해 요절한 커트 코베인을 추모하는 느낌이 강한 앨범.
- ↑ 비틀즈 빠돌이질에 가려져서 그렇지, 노엘 갤러거는 닐 영도 엄청 좋아한다. 대놓고 현역 최고 뮤지션이라고까지 한 적이 있고, 한국 방송에 출연해서 한 현역 락 가수 순위메기기에서 닐 영이 1위라고 한 적이 있다.
- ↑ 내용은 대략 닐 영이 뭐라하든 우린 그가 필요 없다.
- ↑ 70년대 초중반에 우울증에 시달렸을 때 녹음한 거라 앨범에 실린 노래 가사가 매우 살벌하다. 닐 영 본인도 이 앨범에 담긴 적나라한 표현을 싫어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