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잭슨

198319872006
마이클 조셉 잭슨 (Michael Joseph Jackson)
출생1958년 8월 29일, 미국 인디애나 주 개리
사망2009년 6월 25일, 미국 캘리포니아로스엔젤레스 홈비 힐스
국적미국
신체175cm, 61kg[1], B형
별명King Of Pop (의 제왕), MJ, 마잭, 마이크
종교개신교
데뷔1969년 잭슨 파이브 1집 Diana Ross Presents The Jackson 5
활동시기1964년 ~ 2009년
역대 그래미 시상식[2]
올해의 앨범상
제25회
(1983년)
제26회
(1984년)
제27회
(1985년)
TOTO IV - 토토Thriller - 마이클 잭슨Can't Slow Down - 라이오넬 리치
올해의 레코드상
제25회
(1983년)
제26회
(1984년)
제27회
(1985년)
Rosanna - 토토Beat It - 마이클 잭슨What's Love Got To Do With It - 티나 터너
올해의 노래상
제27회
(1985년)
제28회
(1986년)
제29회
(1987년)
What's Love Got To Do With It - 티나 터너We Are The World - 마이클 잭슨(USA For Africa)"Higher Love" - 스티브 윈우드
그래미 레전드상
1992년1993년1994년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마이클 잭슨커티스 메이필드
그래미 평생공로상
2009년2010년2011년
Gene Autry, The Blind Boys of Alabama, The Four Tops, Hank Jones, Brenda Lee, Dean Martin, Tom Paxton 마이클 잭슨[3]Julie Andrews, Roy Haynes, Juilliard String Quartet, The Kingston Trio, Dolly Parton, Ramones, George Beverly Shea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입성자
이름마이클 잭슨
MICHAEL JACKSON
분야음악
입성날짜1984년 11월 20일
위치6927 Hollywood Blvd.

목차

1 개요

팝의 황제 (King Of Pop)
인종간의 음악 장벽을 부수어 없앤 동시에 듣는 음악의 시대에서 보는 음악의 시대를 열어젖힌 대중음악의 신화적인 인물


팝 역사상 가장 성공한 가수이자 전 세계 최고의 슈퍼스타 가수로 천재가 노력까지 하면 이렇게 된다는걸 보여준 위인. 이같은 명성은 결코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마이클 잭슨은 1963년 우리나라 나이로 6세쯤부터 아버지의 고된 교육을 견뎌내며 가수 생활을 시작해 70년대 잭슨 5로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보이 밴드에서 팝의 황제(King Of Pop)로 등극했다. 1991년 발매한 'Dangerous' 앨범의 성공과 슈퍼볼에서 새로운 퍼포먼스 개념을 정립하며 80년대 못지 않게 많은 사랑과 지지를 받으며 팝의 황제로서 명성을 더 높였지만 1993년 거짓 아동 성추행 혐의로부터 비롯된 불면증과 스트레스 그리고 진통제 중독은 마이클 잭슨의 삶을 힘들게 했다. 그리고 2009년 잭슨의 주치의 콘래드 머레이의 과실치사로 사망했다. 머레이는 체포됐고 2급 살인죄로 감옥에 수감됐다.

마이클 잭슨은 90년대 중후반부터는 언론에게 완전히 먹잇감이 돼 버렸고 실제로 그를 미친 사람(Wacko Jacko)으로 취급하는 분위기가 팽배했었다. 퀸시 존스는 2001년 자신의 자서전에서 비평가들이 마이클을 음악사에서 지우려는 것 같다며 걱정을 토로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마이클 잭슨이라는 이름이 잊혀지지 않고 여전히 세계 곳곳에 기억될 수 있는 것은 그가 남긴 음악과 퍼포먼스와 뮤직비디오는 일개 80년대와 90년대의 오락거리가 아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세대에게 전승되는 문화의 정수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2 바이오그래피

2.1 1958년~1978년 : 잭슨 파이브

전설의 시작
밴드 경력을 고려한다면 역대 최연소 빌보드 Hot 100 차트 1위 아티스트

1958년 8월 29일 미국 인디애나 주 개리에서 마이클 잭슨이 태어난다. 마이클의 집안은 매우 가난했는데 아버지 조지프 잭슨은 특별한 직업이 없이 떠돌아다니며 막노동을 했고 어머니 캐서린 잭슨은 가정부를 하며 돈을 벌었다. 조지프는 고된 일을 끝마치고 집에 와서는 기타를 쳤으며 친구들과 밴드를 구성하는 등 음악에 열의를 보였다. 이에 잭슨 집안 전체는 음악적인 영향을 크게 받아 대부분이 솔로 가수로서 커리어를 쌓았다.

조지프는 자신의 자녀들이 음악에 큰 재능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아들들을 모아 잭슨 브라더스라는 밴드를 결성한다. 마이클은 나이가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초기에는 밴드에 들어가지 못 했지만 어머니 캐서린이 마이클의 재능이 매우 뛰어나다는 것을 보고 조지프에게 추천 마침내, 마이클도 잭슨 브라더스에 합류할 수 있었다. 이후 잭슨 브라더스는 '잭슨 파이브' 로 이름을 바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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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나이로 7살 때 마이클은 밴드에서 가장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가창력을 인정받아 형 저메인과 함께 메인보컬을 맡기 시작했고, 잭슨 파이브는 여러 탤런트 쇼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특히, 1966년 고등학교 축제에서 마이클이 노래를 불러 우승한 것이 유명하다.

1969년 잭슨 파이브는 뛰어난 재능을 인정받아 유명 레이블인 모타운 레코드와 계약을 체결하는데 성공했다. 잭슨 파이브는 5명이 모였지만 그 중 중심축은 마이클이었다. 모타운 레코드에선 나머지 4명은 없어도 된다. 마이클만 있으면 된다고 할 정도로 마이클의 존재감은 독보적이었다. 언론에서도 어린 마이클을 뛰어난 가창력을 가진 천재 신동이라고 극찬했다.

이쯤에서 잭슨 파이브의 커리어를 짚어보고 가자.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마이클의 70년대 시절 커리어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1969년 1집 'Diana Ross Presents The Jackson 5'로 빌보드 앨범 차트 5위로 데뷔하고 1972년 발매한 6집까지 총 1집의 크리스마스 앨범만 제외하면 모두 빌보드 앨범 차트 10위 안에 들었으며 1989년 해체까지 총 4곡의 빌보드 1위곡과 2곡의 빌보드 2위곡과 전 세계적으로 3500만장 이상의 음반 판매량을 기록했다. 또 잭슨 파이브는 지금까지도 평단에서도 인정하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보이 밴드로 평가받고 있으며 음악인들에게는 가장 영예적인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도 헌액됐을 정도이니 이들이 가진 위상이 얼마나 대단했는 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인들도 2014년 여론조사에서 잭슨 파이브를 역사상 가장 위대한 보이 밴드 1위로 선정했다.

1971년 마이클은 자신의 커리어에서 최초로 솔로 데뷔를 한다. 이때 빌 위더스의 Ain't no sunshine을 멋지게 커버해서 또 주목을 받았다. [유튜브] 1972년 발매한 'Ben'은 빌보드 차트에서 1위를 차지하는 등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큰 인기를 끌어 모았다.

1972년부터는 모타운 레코드와 분쟁을 겪는다. 잭슨 파이브는 공산품 찍어내듯이 비슷한 사운드를 찍어내는 모타운 레코드의 창작 방식을 거부했고 창작의 자유가 부여되길 원했지만 모타운 레코드는 "너희들은 어려서 아무 것도 못 한다"며 거절했다. 잭슨 파이브는 결국 1975년 모타운을 떠나 에픽 레코드(현재의 소니뮤직)와 계약을 체결하고 밴드 이름을 잭슨스(The Jacksons)로 바꾼다. 하지만 잭슨스는 잭슨파이브 시절에 비해 인기를 끌지 못 했고 음반 판매량과 차트 순위는 저조해져갔다.

잭슨 파이브(잭슨스)는 음악 활동과 더불어 1970년도부터 활발하게 투어 활동도 진행했었다. 잭슨 파이브의 확인된 총 공연 횟수만 500회에 가까우며 노래의 대부분을 마이클이 라이브로 진행했다. 한편 이때, 마이클의 첫 번째 아내인 리사 마리 프레슬리가 잭슨 파이브의 광팬이라 아버지인 엘비스 프레슬리의 손을 잡고 자주 공연을 보러 왔다고 한다.

1978년 'The Wizard'라는 영화에 출연한 마이클은 영화 촬영 중 프로듀서 퀸시 존스를 만났고, 같이 음악을 제작하기로 약속한다. 퀸시는 훗날 회고에서 마이클의 첫인상에 대해 지나치게 조용하고 내향적인 사람이라 걱정했다고 한다. 그러나 Off The Wall 앨범을 제작하며 잭슨의 재능이 무척 뛰어남을 발견해 놀랐다고.


2.2 1979년~1981년 : Off The Wall

그의 첫 전성기[4]

1979년 마이클은 그의 신화를 시작하는 첫 앨범 'Off the Wall'을 발매한다. 이 앨범은 빌보드 앨범 차트에선 3위를 했고, 앨범에서 커트된 4장의 싱글들 모두 빌보드 TOP 10 안에 들고 그중 2곡은 빌보드 1위에 오르는 쾌거를 이뤘다. (당시 기준으로 한 앨범에서 4개의 빌보드 TOP 10위 진입 싱글이 나온 것은 오프 더 월이 처음이었다.) 앨범 판매량도 2000만장이나 되어 마이클 잭슨은 1980년 음반 도매 수익의 37%를 가져갔는데 당시 음악 업계에서는 가장 높은 로열티였다고 존 브랑카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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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의 마이클 잭슨. 코 성형수술 이후의 모습이다.

마이클 잭슨은 이 앨범으로 음악계에서 가장 권위 높은 시상식인 그래미에서 1개의 상을 탔는데 마이클은 '앨범도 많이 팔렸고 평론가들에게도 인정을 받았는데 고작 1개밖에 상을 타지 못한 것은 자신이 흑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음악계에서 차별을 당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하며 크게 낙담했다고 한다. 얼마나 심했는지 집에서 하루종일 울었는데 그 모습을 본 가족들은 자신이 미친 줄 알았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또 그래미에서 받은 상은 본상이 아니라 실망감이 더욱 컸을 것이다.[5] 마이클은 이에 대해 분함을 느끼고 조금이나마 자신을 알리고 싶어 홍보팀에게 미국의 유명 음악 잡지 <롤링 스톤>이 자신의 사진을 커버 사진으로 쓸 수 있는 지 물어봐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롤링 스톤>은 그럴 계획은 절대 없다는 답변을 했고 이에 대해 마이클은 "흑인이 잡지의 커버가 되면 잡지가 안 팔린다는 말을 너무나 많이 들었다. 다음에는 결코 이들이 나를 무시할 수 없는, 나한테 한번만 인터뷰 하자고 매달리게 만드는 그런 앨범을 만들겠다"라고 굳게 다짐했다. 복선


2.3 1982년~1985년 : Thriller - 문워크, 그래미 8관왕

현대 음악 역사상 가장 중요한 순간 중 하나
그의 두번째 전성기이자 최전성기

음악계의 패러다임 자체를 뒤바꿨으며 모든 가수들이 평생에 걸쳐 이루고 싶은 업적을 마이클 잭슨은 25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이루게 됐다.

현재까지 6500만장 이상이 팔려서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앨범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된 'Thriller' 는 1982년 11월 발매되었다. 이 앨범은 빌보드 앨범 차트에서 무려 37주동안 빌보드 1위를 차지했고 싱글 'Billie Jean'은 7주 동안 빌보드 1위를 차지하고, 다른 가수의 곡이 1주간 1위를 차지한 다음 'Beat it'이 1위를 차지한다. 한 가수의 곡이 이렇게 1위를 차지한 건 비틀즈 이후 19년 만에 처음 있던 일이라고 한다. 또한 앨범에서 커트된 7개의 싱글은 모두 빌보드 TOP 10 안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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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의 마이클 잭슨. 요즘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80년대의 마이클의 잘생긴 얼굴 또한 많은 소녀 팬들을 울린 요소 중 하나였다.[6]

이 앨범에서 가장 눈에 띄는 점은 뮤직비디오이다. 이전까지는 음악에 있어서 뮤직비디오의 비중은 크지 않았고 따라서 뮤직비디오가 부각되지도 않았다. 그러나 마이클은 역으로 뮤직비디오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Billie Jean'과 'Beat it' 뮤직비디오를 영화계의 스텝들과 연계하여 대규모로 제작하였고 스토리텔링에 맞춰서 현란한 춤을 추는 마이클의 모습은 시대의 패러다임을 바꿔서 보는 음악의 시대를 열어 버렸다. 1983년 3월에는 모타운 25주년 공연에서 마이클은 빌리 진을 부르며 나타나서 문워크를 최초로 선보였는데 해당 공연은 녹화돼 5월달에 TV로 전국으로 송출됐으며 미국 전역은 아주 난리가 났다. 뛰어난 노래, 뛰어난 뮤직비디오, 거기다 뒤로 가는 듯한 그의 신비한 춤으로 인해 그는 단번에 미국의 영웅으로 등극했고 마이클의 큰 대중적 성공을 본 뮤지션들과 레코드사들은 이후 마이클과 같은 스타일을 추구하게 된다.

이후 1983년 11월, 역사상 가장 위대한 뮤직비디오로 뽑히는 'Thriller' 뮤직비디오가 발매됐고 앨범은 또 몇 백만 장이 불티나게 팔려나간다. Thriller 앨범은 흑인이 음악으로 세계를 정복했다는 사실 때문에 흑인들에게 큰 자신감을 불어 줬고, 당시 암암리에 있던 방송국들의 인종차별 정책을 부숴버리는 큰 업적을 쌓았다. 당시 언론 보도를 보면 방송국에선 백인 아티스트들의 음악만 온종일 트는 게 일반적이었는데 이례적으로 마이클의 음악과 뮤직비디오만큼만은 꾸준하게 방영되었고 이는 인종간의 경계를 넘나드는 대변화를 일으켰다고 한다.

'Thriller의 영향력은 음반 업계에도 이어졌다. 당시 전 세계의 음반 시장은 퀸시 존스를 비롯하여 Thriller 제작에 협력한 사람들이 마이클에게 '요즘 음반 시장 상황을 보면 Thriller는 200만장만 팔려도 잘 팔린 것' 이라고 할 정도로 침체된 상태였는데[7] 사람들은 마이클의 음반을 사기 위해 다시 레코드 가게로 모이기 시작했고 이들이 덩달아 다른 가수들의 음반도 사면서 쇠퇴하던 음반 시장을 살리는데 큰 기여를 한 것. (Thriller는 일주일 동안 꾸준히 50만장 이상이 팔려나갔다고 한다.) 레코드 사장 길 프리슨도 당시 음반 업계는 마이클의 성공으로 크게 도움을 봤다고 말했다.

1984년 'Thriller'는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앨범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된다. 이는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는 기록. 참고로 Thriller는 84년 3월 5일 시점에서 CBS 레코드의 집계에 의하면 전 세계적으로 3090만장이 팔렸다고 한다.

Thriller 앨범의 대성공으로 2월 그래미 어워드에서 마이클은 12개 부문 후보로 올라 8개의 상을 받아간다. 이는 최다 후보/최다 수상'이라는 신기록으로 현재까지도 유효한 기록이다. 5월달에는 백악관에 가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에게 마약 퇴치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상을 받는다. 레이건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인 적이 없다며 놀랄 정도로 수많은 인파들이 상을 받는 마이클을 보기 위해 백악관으로 몰렸다. 잭슨은 언론에서 비틀즈 이후로 가장 대단하며 엘비스 프레슬리 이후로 가장 인기있는 단일 현상이라고 평가할 정도로 큰 성공을 거뒀다. 미디어들은 잭슨이 흑인을 음악의 주류로 올려놨으며 심지어 아프리카에도 마이클의 유명세가 알려져서 인종차별까지 완화시켰다고 보도했다. 마이클의 유명세는 대한민국에서도 엄청 났다. 조용필과 비견될 정도였다는 것이 80년대 신문기사에서 확인됐다. 또 1988년 9월 7일자 한겨레 신문 보도에서는 요즘 학생들이 마이클 잭슨의 생일(8월 29일)은 기억하면서 정작 국치일이었던 8월 29일은 잊었다며 학교 선생님이 서글프다고 심정을 토로한 부분까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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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악관에서 레이건 대통령(왼쪽)과 영부인 낸시 레이건(오른쪽)과 함께

1985년 자선과 기부에 관심을 많이 가진 마이클은 We Are The World라는 초대형 자선 프로젝트에 참여한다. 마이클은 라이오넬 리치와 함께 곡을 만들었고 이 싱글은 1400만장 이상이 팔린다. 'We Are The World'의 작사/작곡은 마이클과 라이오넬 리치가 공동으로 했는데 증언에 따르면 노래의 두 소절을 제외하고는 전부 마이클이 만들었다고 한다. 또 예상 외로 상당히 빨리 곡이 완성됐다고.


2.4 1986년~1990년 : Bad - 루머와 언론, King of Pop의 자리에 오르다

세 번째 전성기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마이클 잭슨'에 대한 대표적인 이미지는 크게 양분된다. 바로 '팝의 황제'와 '기괴함'이다. 이런 이미지가 생기게 된 일화를 보자.

마이클이 1984년 펩시 광고를 찍는 도중 화상을 입고 화상 치료 센터에서 치료를 받을 무렵, 마이클은 산소로 가득 차 있는 챔버를 보게 된다. 마이클과 동행한 의사는 아직은 이론적인 이야기지만 훗날 기술이 발전돼서 챔버 안에서 자면 노화도 막을 수 있을 거라고 한다. 그 이야기에 호기심을 가진 마이클은 챔버 안에 들어가 보고 싶다고 요청, 기념사진을 한 장 찍었다. 아래가 그 당시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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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은 기상천외한 생각을 하는데 이 사진을 "마이클 잭슨이 노화를 늦추기 위해 산소체임버 안에 자고 있다"는 내용과 함께 고의적으로 타블로이드 언론에 흘려 자신이 언론을 통제할 수 있는지 시험해보겠다는 것. 흘리자마자 이 사진은 미국 주요 언론들의 헤드라인을 장식했고 마이클은 자신이 언론을 통제할 수 있다는 사실에 만족했다고 한다. 죽은 사람의 시체를 마이클 잭슨이 산다거나,프린스와 마이클 잭슨이 라이벌이라는 소리는 마이클 측이 의도적으로 흘린 내용이다. 문제는, 이후인데 마이클 측이 흘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말도 안 되는 내용의 수위는 훨씬 높아진 이야기가 온갖 언론들을 통해 보도되기 시작한 것. 심지어는 평소 동물에 관심이 많던 마이클이 애완동물로 키우기 위해 침팬지를 구매한 것도 언론들에게 먹잇감이 되고 말았다. 결국 1986년 마이클에게는 Wacko Jacko (괴짜 잭슨) 라는 별명이 탄생했고 이것은 마이클의 이미지에 타격을 줬다. 이 시기 타블로이드지 <피플>은 팝계 간단퀴즈라며 마이클 잭슨은 이상한 건가? 아닌 건가? 라는 [특집기사]를 싣기도 했다.

마이클 잭슨이 왜 이런 짓을 했는가? 언론에 대한 불신 때문인데 마이클은 70년대 때부터 자신을 공격하는 타블로이드 언론에 기겁해 있었다. 잭슨 5 시절 마이클 잭슨이 성전환을 받고 결혼할 거라는 황당한 보도가 있고 나서 마이클의 소녀팬이 그 기사를 보고 마이클에게 울음을 터뜨렸다는 일화까지도 있다. 스릴러 앨범의 대성공으로 타볼로이드의 거짓 공세가 더욱 더 심해지자 1984년 9월 공개적으로 마이클 잭슨 측은 루머에 반박 성명을 낸 적도 있다.이미 안 좋을 대로 안 좋은 언론들을 자신이 통제할 수 있을까? 그리고 자기가 거짓 루머를 유출시켜 자기 자신을 현실 세계에서 제외된 존재로 '홍보' 까지 하고 싶은 욕구가 결합됐다고 한다. 캐서린 잭슨은 이같은 홍보 방식이 마음에 안 들어 매니저 등에게 찾아가 그만 둬야 하는 게 아니냐고 물었지만 마이클은 이런 방식을 즐겼다고 한다.

1987년 마이클의 새 정규앨범. ' Bad' 가 5년 만에 발매된다. 앨범은 발매 5개월 만에 1100만장이 팔려 나갔고 현재까지 3200만장 이상을 팔아치운 것으로 추정된다.[8] 발매된 5개의 싱글이 모두 빌보드에서 1위를 차지했는데 이는 한 앨범에서 가장 많은 빌보드 1위곡이 나온 대기록이다. 20년 후 케이티 페리도 5곡을 1위로 만들어 타이기록을 이뤘지만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는 기록. 물론 판매량만큼이나 평론가들에게도 좋은 반응을 얻었다.[9]

마이클 잭슨은 'Off the wall'의 기록을 깨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Thriller'가 깼으니 'Bad'도 스릴러를 깨는 것이 가능하다며 그것을 위해 모든 수록곡이 히트해야만 한다는 생각으로 작업에 임했다고 한다. 또, 빨간 마커를 들고 항상 화장실에 갈 때는 100,000,000장을 썼는데 이건 배드 1억장 팔아서 당시 기준으로 4000만장 이상 팔린 스릴러를 찍어 누르기 위해서 였다고! 퀸시는 모든 곡이 히트곡이어야 해서 미칠 지경이었다고도 말했다. 마이클 잭슨은 'Bad' 작업을 위해 60~65여곡을 녹음했고 전작들과 달리 앨범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단 2곡만을 제외하고 모두 단곡으로 작곡했다. 마이클 잭슨의 정규앨범 중에서 마이클이 가장 많이 단독으로 작사/작곡한 앨범이 'Bad'다! 프로듀싱 과정에도 모두 참여했다. 하지만, Bad 앨범은 스릴러의 아성을 넘어서지 못 했다. 'Bad'가 세운 기록은 팝 앨범들을 통틀어봐도 거의 없는 대성공이지만 마이클 잭슨에게는 상당한 실망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CBS의 사장 월터 예트니코프는 마이클 잭슨이 상당히 경쟁 욕구가 강했다고 하며 "마이클은 자신이 발매한 게 1위를 못 하면 전화를 해서 어떡해요 월터 제가 작업한 게 1위를 못 했어요" 라고 하소연을 했다고 회고했다.

Bad 앨범 발매 후 마이클은 첫 솔로 투어인 'Bad Tour'를 돌기 시작한다. 일본을 처음으로 시작된 Bad Tour는 총 123회 공연, 440만 명의 관중들을 불러 모으며 80년대 가장 높은 수입을 거둔 투어 2위, 솔로가수의 투어로는 1위라는 대기록을 세운다. 특히, 영국의 웸블리 스타디움에선 7회 연속 매진이라는 신기록[10]을 세웠고 공연 도중 마이클의 공연에 열광한 나머지 기절하는 사람과 부상자가 속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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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슨은 너무 독특해지려다 다소 기괴하게 됐지만 잭슨에 대한 기업들의 사랑은 계속된다. 잭슨은 늙지도 젊지도 흑인도 백인도 여자도 남자도 아니다. 잭슨은 완벽한 마케팅 로고가 되기 위해 완벽함을 추구한다."
ㅡLA타임즈 브리짓 바이른.
1988년 그래미 시상식이 열린다. 마이클은 당연히 'Bad'가 큰 성공을 거뒀기에 상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시상식에 참여했지만 단 한 개의 상도 얻지 못 하는 큰 이변을 겪는다. 당시 시상식 중계를 보면 마이클의 표정이 시종일관 언짢았던 모습이었다.[1988년 그래미 시상식] 주위 지인들의 증언에 의하면 마이클은 그래미 시상식이 끝난 후 집에 돌아와 펑펑 울었다고 한다. 마이클이 상을 하나도 못 받은 이유는 당시 마이클의 지인이 한 말에서 잘 나타난다. "그래미가 산소 체임버 안에서 자는 사람에게 상을 주겠어요?"

분명히 1980년대 그 누구도 도달하지 못 할 기록을 세웠고,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가수인데도 'Wacko Jacko' 논란으로 '기괴함. 즉 잭슨 미친 거 아니야?'라는 이미지를 갖게 돼 음악적 공로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것이다. 미국의 음악잡지 <롤링 스톤>에서 1988년 실시한 가장 최악의 컴백 가수에서 독자들은 1위에다 마이클을 뽑았을 정도 ... 논란이 많았지만 인기도 높아 영국 갤럽에서 조사한 여론조사에서 영국 왕실을 제치고 영국 젊은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사람으로 뽑히기도 했다. 이 시기 마이클 잭슨은 괴짜라는 이미지를 가지기도 했고, 극성 안티팬들도 꽤 있었지만 그 어떤 가수도 넘볼 수 없는 폭발적인 상업성과 대중성도 소유하고 있었다. 한 마디로 뭐라고 딱 정의하기 어려운 셈. '캐서린 잭슨'은 이맘때쯤 마이클 잭슨이 어땠는 지 회고한 부분에서 마이클이 어느 마을을 갔다고 하면 그 마을 언론사는 하루종일 마이클을 취재하기 위해 극성이었다고 한다. 물론 일반인들도 마이클 얼굴 좀 보려고 엄청나게 몰렸다고 한다. 또 'Bad' 앨범 발매 때와 'Bad' 투어 발표 때도 언론들이 마이클의 가쉽거리만 보도하고 있어 불만이라고 썼었다. 80년대 후반부터 그 엄청난 양의 가쉽은 마이클과 운명을 함께한 것이다.

1989년 마이클의 친한 친구인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시상식에서 마이클을 'King of pop rock soul'이라 칭했다. 이는 대중들에게 공감대를 얻게 되고 잭슨의 별명이 'King of pop'이 됐다는 설이 있는 반면, 마이클 잭슨을 'King of pop'이라 칭했다는 증거는 1984년 신문 기사에도 있어 언제부터 마이클 잭슨이 king of pop의 대명사가 된 것인 지는 확실하게 정의하기는 어렵다.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 대통령은 마이클을 백악관으로 초청하여 '세기의 아티스트 상' 을 수여한다.

1990년 확인된 바에 의하면 마이클 잭슨의 평균 로열 티는 41%로 당시 슈퍼스타들의 평균 로열티 인 12% 보다 훨 높았고, 앨범 하나당 소속사에게서 받는 돈도 500만 달러로 브루스 스프링스틴의 250만 달러, 마돈나의 100만 달러보다 훨씬 높았다.


부시와 마이클, 마이클 잭슨은 음악인이 누릴 수 있는 온갖 영예란 영예는 다 누렸다.


2.5 1991년~1993년 : Dangerous - 슈퍼볼, 그래미에서 살아있는 전설상을 수상하다

그의 네번째 전성기이자 마지막 전성기[11]

1991년 마이클은 새 정규앨범 'Dangerous' 를 발매한다. 'Dangerous' 앨범은 'Bad' 까지 함께한 프로듀서 퀸시 존스와 헤어지고 뉴 잭 스윙으로 유명한 테디 라일리와 합작한 작품으로 기존에 마이클이 발매한 앨범들보다 적인 면이 강해진 앨범이었다. 싱글 차트 순위는 전작 Bad에 비해 부진했지만 'Dangerous' 앨범은 1992년 한 해 동안 가장 많이 팔린 앨범이며 공식적으로 3000만장 이상을 팔아치워 앨범 판매량은 Bad와 비슷했다. 싱글 'Black or White'도 빌보드 차트에서 7주간 1위를 차지했고 싱글 'Jam'의 뮤직비디오에는 당시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던 마이클 조던이 나와 큰 화제를 모았다.

지나치게 많이 팔린 음악을 듣는 것은 어렵다. 그러나 이 앨범은 훅 기법이 너무 이류적이고 그의 보컬 매너리즘은 종종 거슬리지만, [Off The Wall](벽에서 떨어져)이후 가장 일관성 있는 앨범이고 [Bad](배드)에서 한 단계 발전한 것이다. Teddy Riley(테디 라일리)는 혼자서 이렇게 불쾌하게 예측불허인 비트를 만들어 낸 적이 없고, 더군다나 그러한 비트를 능가할 가수는 배출한 적이 없다. 만약 10살짜리 아이가 원하는 만큼, 쉽게 다가오는 곡이 아니었다면 언제나처럼 그건 Michael(마이클)이 리듬적인 순간을 타는 것이다. 지금 자신이 비틀즈보다 인기있다고 확신하는, 보이지 않는 남자(Invisible Man)의 연애사를 분석하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지만 그는 자신의 커리어에서 가장 그럴듯한 섹스와 로맨스를 외치며 팔고 있다. 'In The Closet(벽장 속에서)'에서 그는 그의 신비의 여인에게 그들의 욕정을 숨길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하고 있다. 곧 그는 흥분하거나 예전 모습에 대한 간절한 향수를 재연한다. 그리고 그는 꽉 다문 입술 사이로 'Can't Let Her Get Away (그녀가 떠나게 할 수 없다)'라고 반복하여 내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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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로버트 크리스트가우,미국의 음악저널리스트이자 락 비평가 Dangerous 앨범 평점 : A-,1991년, 멜론 번역
Dangerous는 다시 마이클 붐을 일으켰고 마이클은 이에 보답하기 위해 1992년부터 'Dangerous Tour'를 진행한다. Dangerous 투어는 동구권 공산주의 국가들의 붕괴로 동유럽에서도 진행할 수 있었는데[12] 러시아 사람들은 마이클 잭슨을 미국의 제왕으로 생각해 왔던 공산주의 국가 사람들은, 마이클이 러시아에서 공연을 한다는 것이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고 말하기도 하였다.[13] 루마니아 부카레스트에서 진행된 공연은 미국의 케이블 채널인 HBO에서 구매하여 방영되었고 해당 중계는 무려 21.4%라는 시청률을 거두며 케이블 TV 역사상 가장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부카레스트 공연은 2005년 DVD로 발매되었다. 루마니아 공연 당시 공연티켓 가격이 루마니아 노동자들의 평균 임금 4분의 1에 달할 정도로 매우 비쌌으나 이마저도 금방 매진됐고 마이클 잭슨은 삼엄한 경호를 받으며 국빈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한 고아원에 들릴 때는 루마니아 대통령이 직접 나왔다고. 또, 총리와 여러 정치가들이 공연을 보러 왔으며 공연의 광란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실신되고 고막이 파열돼 수술받아야 할 사람이 넘칠 정도였다고 한다. 잭슨의 공연이 끝나고 얼마 안 있어 새 대통령 선거가 있었는데 의외로 투표율이 저조한 이유 중 하나가 유권자들이 '잭슨 후유증'에 빠져서 그런 거라는 추측도 있었으니 공산주의 국가에서도 마이클 잭슨이 얼마나 유명하고 인기가 많았는 지 알 수 있다. 이때 남미국가들을 투어에 추가시켰는데 멕시코의 아즈텍 스타디움에서 5일간 50만명을 끌어모으는 위엄을 보여줬다.

1992년에는 'Heal The World Foundation' 라는 자선단체를 설립해 많은 어려운 사람들을 도왔다. 이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또 다시 조지 부시에게 'Point of Right' 라는 상을 받는다. 부시 대통령은 마이클을 흑인의 본보기라며 치켜세웠다.

1993년 1월 16일에는 빌 클린턴의 초청을 받고 클린턴갈라쇼의 메인 게스트로 나와 Gone Too Soon과 Heal The World를 공연했다.[14][15]

1993년 1월 30일에는 미식축구의 결승전 슈퍼볼 하프타임에 나와 역사적인 공연을 선보였는데. 전년도 하프타임에 비해 시청률이 8.6% 상승했다. 마이클이 나온 이후에는 많은 가수들이 홍보를 위해 슈퍼볼 하프타임에 나오기 위해 경쟁하고 있다. 이후에는 오프라 윈프리TV에서 1시간 이상 인터뷰를 했다.[16] 9천만 명의 이상의 미국인들이 시청하며 시청률은 47.9%로 미국 TV 역사상 가장 시청률이 높은 프로그램 9위 (현재까지도)라는 기록을 세운다. 이후 마이클은 그래미 어워드에서 살아있는 레전드 상을 받으며 커리어에서 최절정을 이뤘고, 음악 활동 외에 자신을 모델로 하는 초콜릿 바를 만들어서 수억 원을 버는 등 앞으로도 걱정이 없을 듯싶은 탄탄대로를 걷는 듯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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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볼에서의 마이클 잭슨

1991년 데인저러스를 발매하고 1차투어를 끝낸 1993년 초반에 마이클 잭슨은 단순히 팝스타가 아니라 엄청난 돈을 벌어들이는 기업같은 존재였고[17] 그 누구보다도 독보적인 절정의 커리어를 이룬상태였다. 마이클은 신격화 된 연예인이었고 미국의 대통령들은 마이클 잭슨과 함께 사진을 찍기 위해 백악관으로 초청하기 까지 했으며 LA 시장 'Tom Bradley'는 마이클 잭슨의 날을 선포할 정도였다. 마이클 잭슨의 신화는 절대 무너질 것 같지 않았다.


2.6 1993년~1994년 : 1차 아동 성추행 혐의와 첫번째 결혼

그의 최악의 고난1[18]

약간은 묘하지만 근면하고 도덕적인 그는 80년대 가장 완벽한 '미국적' 성공사례를 창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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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로큰롤 스토리의 저자 폴 두 노이어
성추행 혐의 이전 마이클 잭슨의 이미지가 어떠했는가? 비록 'Wacko Jacko' 논란으로 괴짜에다 좀 독특하다는 시선을 받았지만 천재들이란 원래 좀 유별나니까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는 게 대중들의 생각이었다. 마이클 잭슨이 범죄를 저지른 것도 아니니까 말이다. 마이클 잭슨은 그저 완벽한 '아메리칸 드림'의 주인공이었고 성적인 문제도 일으키지 않는 근면 성실하면서도 좀 묘한 천재 흑인 뮤지션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래미 시상식 6개월 이후 터진 거짓 성추행 민사소송 사건으로 진퇴양난에 빠진다. 이 사건은 마이클의 음악적 명예와 상업적 매력, 대중적 이미지를 크게 악화시켰고 신화적인 커리어를 구가한 마이클 잭슨은 이 사건으로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너무 당연한 일이지만 아동 성범죄는 동서양 막론하고 매우 무거운 형벌로 처벌받고 사회적 시선도 최악이다. 근데 이런 일에 연루됐고 결국 합의를 한 점에서 마이클의 이미지 타격은 상상을 초월했다. 펩시와 2000만 달러의 계약도 파기됐고 백화점에서 진열됐던 마이클 잭슨을 상표로 한 물건들이 모두 회수 조치 되는 등 심한 재정적 피해도 입었다. 또 이전에 있던 타블로이드 언론들의 보도도 설득력을 얻게 됐다. "마이클 잭슨 이제 보니 완전히 미쳤었구나?"라는 것.

1992년 5월 마이클 잭슨은 운전 중 도로 한복판에서 차 고장이 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때 그것을 본 카센터 직원은 마이클 잭슨이 차가 고장 나 어쩔 줄 몰라 한다며 사장 데이브 슈워츠에게 알렸다. 데이브 슈워츠는 당시 아내 준 챈들러[19]와 사이가 좋지 않았고 데이브는 의붓아들인 조단이 마이클 잭슨의 열렬한 팬이니 '마이클을 이용하면 다시 준과 사이가 좋아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데이브는 마이클에게 차를 렌트해주는 대신 아들 조단과 놀아주면 안 되냐고 제의했고 마이클은 수락한다. 준, 조단, 릴리(조단의 여동생) 챈들러는 네버랜드 랜치 등에서 마이클과 함께 놀았으며 외로움을 자주 탔고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 하는 성격이었던 마이클은 유머가 많고 다재다능한 소년이었던 조단을 마음에 들어 하였다. 이후 한 타블로이드 언론은 마이클의 새 가족이라는 특종으로 보도했을 정도로 두 사람의 사이는 급격하게 좋아지게 된다.

이들 사이가 파멸되기 시작하게 된 것은 조단의 친아버지 이반 챈들러가 둘의 관계에 간섭을 하게 되는 시점부터였다. 이반은 치과 의사였지만 6만 달러의 위자료를 지급하게 되면서 재정 상황이 좋지 않은 상태였고 자신의 아들이 마이클과 가깝게 지내는 것에 질투를 느꼈다. 하지만 이반이 직접 마이클을 대면하게 되고 나서부터는 마이클에 대한 악감정이 풀렸고 이반은 마이클에게 자신의 집 옆에 집을 지어 가깝게 지내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의했을 정도로 친한 사이가 되었다. 마이클도 이반을 최고의 아버지라며 칭찬했다. 그러나 아들 조단이 마이클과 함께 있기 위해 학교생활을 소홀히 하면서 또래 친구들과의 관계가 소원해지는 것을 목격하고, 마이클과 함께 있고 싶다는 이유로 조던에게 어버이날에 만나는 것을 거절당하는 순간 이반은 마이클과 조단의 사이를 부적절한 사이로 혼자 단정 지어 버린다. 이후 이반은 마이클에게 찾아가 2000만 달러를 내놓지 않으면 당신의 부적절한 행위를 폭로하겠다고 협박했다. 당연히 마이클 잭슨은 부적절한 행위는 결코 없었으며 당신에게 돈은 한 푼도 못 준다며 이반의 협박을 거절했다. 하지만 이때부터 이반은 배리 로스라는 한 변호사를 고용하여 본격적으로 법적인 대응을 준비한다.

한편 이반 챈들러는 조던 챈들러가 이가 아프다고 하자 치과에 데리고 가는데 치과의사였던 이반은 치과에서 사용되는 마취제인 아미탈 소디움(Amytal Sodium)이 거짓 기억을 조작하기 쉽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마취전문의에게 마취제로 아미탈 소디움을 써달라고 부탁한다.[20] 이후 이반은 조단에게 '마이클에게 성추행을 당했느냐'고 묻고 여기서 조단은 정신이 혼미해진 상태에서 그동안의 자신의 입장을 뒤바꿔버리고 '그렇다'라고 말을 한다. 이를 토대로 이반 측의 정신과 의사는 이를 경찰에 보고하고 경찰들은 자체적으로 형사 수사에 착수, 마이클의 집인 네버랜드 랜치를 압수수색 한다.

이반의 전 아내인 준 챈들러는 형사 수사에서 "마이클은 결코 성추행을 할 사람이 아니다"라고 증언했지만 형사 수사 이후 이반 챈들러가 마이클 잭슨에게 3천만 달러의 민사소송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되자 준은 입장을 바꾸고 이반을 지원한다. 조던의 의붓아버지인 데이비 슈워츠는 이러한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고 이반에게 전화를 걸어서 따지게 된다. 이반은 데이브와의 전화에서 "마이클 잭슨은 파멸될 것이고, 나는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것이다. 배리 로스(변호사) 잔인하고 악질적인 사람이다. 나는 배리에게 모든 권한을 위임했고 그는 그런 방식으로 마이클 잭슨을 파괴시킬 것"이라고 발언했다. 천하의 개쌍놈 이 전화는 녹음되어 공개되었다.

마이클 잭슨은 초기에는 절대 그들에게 한 푼도 줄 수 없다며 강경한 태도를 취했지만, 해당 소송으로 극심한 스트레스와 심한 불면증을 앓게 되고 당시 마이클의 여자 친구이자 후에 결혼하게 될 리사 마리 프레슬리와 마이클 잭슨의 절친인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대중들에게 비춰지는 이미지도 중요하지만, 잠을 잘 자는 것이 더 중요하다"며 합의를 권유한다. 결국 마이클은 1994년 1월 1500만 달러를 주며 법정 외에서 민사소송 합의를 한다. 하지만 검찰청 검사 'Gil Garcetti'는 민사소송 합의는 형사 수사 건에 영향을 줄 수 없다고 말했으며, 경찰과 검찰은 마이클 잭슨을 기소하여 재판에 회부하기 위해 수많은 증인들을 탐색하고 증거를 모았지만 마이클 잭슨을 기소하기에는 증거가 부족했고 결국 불기소 처분을 발표한다. 마이클과 챈들러의 민사소송 합의문이 유출된 적이 있는데 합의문에서 마이클 잭슨은 끝까지 성추행 혐의는 인정하지 않았고, 챈들러 측은 민사소송이 합의되더라도 형사수사에서 증언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조단은 증언하지 않았고 2005년 재판 때는 검찰 측의 증인 요청을 거절하고 해외로 갔다고 한다.

마이클은 무죄추정의 원칙을 주장하며 결백을 호소했지만 민사소송을 법정 외에서 합의를 하여 많은 사람들이 마이클에 대한 지지를 철회 해버렸다. (성추행 소송 보도 초기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국인들의 75%는 마이클 잭슨은 죄가 없을 것이라고 응답했다.) 미국인들의 25%는 마이클 잭슨이 더 이상 음악 활동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할 정도로 분위기가 안 좋았다. 또 타블로이드 언론들과는 애초에 사이가 좋았지도 않았지만 이 사건 이후로 완전히 파탄난다.

이후 이반 챈들러와 조단 챈들러는 몇 차례의 성형수술로 얼굴을 바꾸고 합의금으로 고급 아파트에서 거주하는 등 호화스러운 생활을 지냈다. 그러나 물질적 호화생활과는 별개로 애당초 이반과 준은 이혼을 했을 정도로 사이가 안 좋았고 이반은 자녀들에게 애정이 별로 없었으니 챈들러 가는 분쟁을 일으키며 여러모로 문제가 많다고 한다.

2005년 이반 챈들러는 조단 챈들러의 눈에 스프레이와 후추를 뿌려 실명시킬 뻔 했으며, 조단을 졸라 질식사로 죽이려고 했다는 충격적인 사실이 확인됐다. 조단은 법정에다 이반 챈들러에 대한 접근금지 명령 신청을 했고 법원은 이를 받아 들였다.

2009년 11월 5일 이반 챈들러는 집에서 권총으로 자살했다. 마이클 잭슨이 죽은 지 4개월 이후 일이다. 유서는 발견되지 않아 정확한 자살 원인은 파악되지 못 했다.

한편 마이클 잭슨의 변호사는 재판이 끝난 후 하버드 대학교 강의에서 조단이 자신의 친구들에게 잭슨에게 성추행을 당하지 않았다고 말했다고 주장하나 구체적으로 확인은 되지 않았다

1994년 5월달에는 리사 마리 프레슬리와 깜짝 결혼을 발표했다.! 미국의 전설적인 가수 그리고 마이클 잭슨이랑 같이 'King'으로 인정받는 가수의 딸이 마이클 잭슨과 결혼했다는 점에서 미국 사회는 큰 충격을 먹었고 마이클이 이미지 회복을 위해 리사를 이용하고 있는 거 아니냐는 여론도 상당히 들끓었다.


2.7 1995년~2000년 : HIStory - 이혼과 데비 로우와의 재혼, 자녀 출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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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범 홍보 영상에서의 마이클 잭슨.

그의 성공적인 재기[21][22]

마이클은 복귀를 위해 1995년 'HIStory' 앨범을 발매한다. 성추행 사건의 여파로 앨범의 판매량은 크게 떨어져 1800만장 정도였고 싱글 차트 성적도 사건의 여파로 미국에서는 크게 실패했지만 'You are not alone'은 발매 첫 주 만에 빌보드 1위라는 최초의 핫 샷 기록을 세웠다.그러나 유럽에서는 Earth Song을 필두로한 곡들이 여러 국가들의 차트를 초토화 시켰으며 역사상 가장 많은 비용이 투입되어 제작된 싱글 'Scream'의 뮤직비디오는 그래미에서 상을 받아 여전히 음악적 역량은 건재함을 보여줬다. 'HIStory' 앨범은 구설수에 휘말리기도 했는데 싱글 'They don't care about us'의 가사 중 'Jew'는 유대인을 비하하는 용어였고, 'HIStory' 홍보 동영상은 자기 우상화가 아니냐는 것. 이에 대해 마이클은 'Jew라는 용어는 사회 문제를 고발하기 위해 선택한 용어이지 결코 인종차별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며 사과했고 가사를 수정하여 재발매했다. 홍보 동영상은 마케팅을 목적으로 고의적으로 노린 것이라고 말했다.

1996년부터 진행된 'HIStory Tour'는 82회 공연 450만 명의 관중 동원으로 관중 수로만 보면 투어 역사상 가장 성공한 투어를 이뤄냈다. 1997년 1월 진행된 하와이에서 2번 있던 공연은 모두 매진됐다. 이는 마이클만이 이룬 기록으로 이전까지는 하와이에서 매진을 기록한 메이저 가수가 없다고 한다. 롤링 스톤즈엘튼 존도 못 했던 기록을 마이클 잭슨은 이뤄냈다. 대중들은 마이클 잭슨을 기이하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그의 음악과 무대에는 큰 관심을 보인 것이다.

1997년 히스토리 투어의 전반기가 끝나고 1000만장 정도 팔려 가장 많이 팔린 리믹스 앨범 Blood on the Dance Floor: HIStory in the Mix를 발매한 다음 후반기 투어를 시작했다. 이 앨범에서는 5개의 신곡과 HIStory의 앨범의 리믹스곡을 8곡 포함시켰다. 싱글로 발매된 곡은 Blood on the dance floor, Ghosts, Is it scary인데 Blood On The Dance Floor는 영국, 에스파냐, 뉴질랜드, 덴마크에서 1위를 했다.

그러나 이런 성공 속에서도 사생활 문제가 안 좋은 쪽으로 불거졌는데, 미국의 전설적인 가수 엘비스 프레슬리의 딸 리사 마리 프레슬리와의 결혼은 대중들에게 숱한 조롱을 받고 있는 상태에서 결국 마이클은 리사와 이혼을 했다. 얼마 안 가 데비 로우라는 여자와 재혼을 하지만 얼마 또 다시 이혼을 한다. 이혼은 성추행 사건 후 또 다시 마이클 잭슨의 이미지에 타격을 줬다. 타블로이드 언론에서는 연일 마이클 잭슨의 사생활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미친 듯이 루머를 보도했고 이로 인한 마이클은 엄청난 스트레스와 심한 불면증을 앓아 Dangerous 투어 시절부터 복용하기 시작한 진통제중독돼 가며 몸이 망가져 갔다. 잭슨의 사후, 진통제 중독 문제로 잭슨의 주치의들에 대한 비판이 있자 주치의는 매일 마다 잠을 못 잔다며 울고 도와달라는 잭슨을 어떻게 외면할 수 있겠어요? 라고 말했다.

데비와의 결혼 생활에서 총 2명의 자식 프린스 잭슨과 패리스 잭슨을 낳았는 데 마이클 잭슨의 말로는 이 아이들이 태어났을 때 언론에서 애들 사진 좀 찍어보겠다고 헬기까지 동원하면서 난리를 피우고, 마이클의 아들에 대한 가짜 사진이 퍼지는 바람에 결국에는 마이클이 직접 사진을 찍어서 줬다고 한다.


2.8 2001년~2002년 : Invincible - 소니와의 분쟁, 호텔 발코니 사건

그의 고난의 시작점[23]

2001년 9월에는 뉴욕에서 마이클 잭슨 30주년 공연을 하는데, 당시 뒷이야기에 의하면 이때 잭슨이 심한 진통제 중독으로 몸도 제대로 못 가눈 상태에서 공연을 한 것이라고 한다. [30주년 공연 빌리 진]

10월에는 무려 6년 만에 정규앨범 Invincible을 발매한다. 토미 모톨라에 회고에 의하면 이 앨범을 발매하기 위해 150곡을 녹음했다고 한다. 앨범은 700만장 정도 팔렸으나, 마이클의 이전 앨범들의 비해서는 낮은 수이다. 인빈서블 앨범에서 가장 크게 히트 친 싱글 <You rock my world> 는 뮤직비디오를 보면 전작 'Smooth Criminal' 을 그대로 답습한 것에 불과해 잭슨이 음악적으로 상당히 지쳐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견이 제기되기도 했다. <Butterflies>[24] 등의 좋은 R&B 발라드 곡이 있긴 한데 어느 평론가는 이 앨범이 너무 무난한 R&B 앨범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수록곡 중 <2000 watts>는 이전에서 들을 수 없었던 잭슨의 목소리가 담겨 있어 신선한 면을 준다. 현재는 몇몇 사람들에게 재평가를 받고 있다.

앨범의 실패는 사실 너무나도 당연한 것일 수도 있었다. 1997년 히스토리 투어 종료 이후 잭슨은 그동안의 진통제 중독과 불면증으로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렸고, 웃을 날이 없는 지경에 처했다. 이런 상황에서 음악적으로 좋은 성과를 내는 것은 힘들 것이다. 인빈서블 앨범 발매 이후 마이클이 은퇴할 거라는 관계자의 말이라며 언론 보도도 있었고 사실상 마이클의 음악적 커리어가 마무리 돼 가는 분위기도 조성되기 까지 했다.

이 기간 동안 마이클 잭슨은 자신의 레이블인 소니에게 상당한 불만을 쌓아 직접 거리에 나가 팬들과 함께 反소니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2002년에는 마이클의 이미지를 돌이킬 수 없는 길로 보내버리는 사건이 발생한다. 일명 '호텔 발코니' 사건으로 마이클이 자신의 자녀이자 갓난아기인 블랭킷 잭슨을 독일의 한 호텔 발코니에서 보여줬는데 하필이면 매우 위험하고 아찔한 모습 즉, 흔드는 것 같은 모습으로 비춰졌다. 언론들의 헤드라인을 곧바로 장식했으며 아동 학대 범이라는 비난까지 당한다. 마이클은 이에 대해 끔찍한 실수였다며 인정했고, 절대로 흔든 것이 아니라며 팬들이 아기를 보고 싶다고 원하기에 팔로 꽉 잡고 보여준 것이라고 해명했다.


2.9 2003년~2005년 : Living With Michael Jackson과 2차 아동 성추행 재판과 무죄

그의 최악의 고난2[25][26]

2003년 2월에는 영국기자 마틴 배셔가 마이클을 240일 동행하면서 찍은 'Living with michael jackson' 이라는 프로그램이 방영되었는데 이 또한 마이클의 커리어를 완전히 망쳐놓는 사건이 됐다. 프로그램 내에서 마이클이 아주 이상한 사람으로 비춰졌기 때문. 마이클 잭슨 측은 크게 반발하며 즉각 성명을 발표하여 악의적으로 자신을 편집한 거라고 했지만, 이 프로그램은 영국에서는 50%가 넘는 시청률을 보였고 "잭슨이 이상한 행동을 기자 앞에서 보인 것은 분명 사실이 아닌가?" 라며 많은 사람들이 잭슨 측의 성명에 공감하지 못했다. 이 프로그램에 대해 마이클의 첫째 부인인 리사 마리 프레슬리는 이렇게 말했다. "그 프로그램 속에 마이클은 내가 알던 마이클이 아니다. 실제 마이클은 그 프로그램에서 방영된 모습과는 무척 다르다. 아마도 그 프로그램이 찍힌 시기에 마이클은 진통제에 심하게 중독된 것 같다. 그래서 인터뷰에서 그런 모습을 보여준 것 같다. 또 마틴 바시르가 악의적으로 편집을 했을 것이다."

Living With Michael Jackson은 우리나라에서는 온스타일이 수입하여 '마이클 잭슨의 잔인한 진실'이라는 제목으로 방영했다. 개빈 아르비조와의 만남은 나오지 않는다. 재판이라는 법적인 문제가 있어 삭제된 듯.

또한 프로그램 후반부 장면에서 잭슨은 개빈 아르비조라는 에 걸린 13살 소년과 함께 출연함으로써 'Living with michael jackson'은 2005년 마이클 잭슨의 성추행 재판을 몰고 오는 원인이 된다.

사건의 발단은 이렇다. 암에 걸렸다는 진단을 받고 인생을 포기한 채로 LA의 한 코미디 클럽에서 놀고 있던 개빈 아르비조에게 클럽의 사장이 개빈의 딱한 사정을 듣고 원하는 것을 물었다. 개빈은 만나고 싶은 유명인사 3명을 적었고 사장은 그 중 3위였던 마이클에게 연락을 한다. 마이클은 어려운 아이들을 도우는 자선 단체에 많은 돈을 기부할 만큼 불우한 어린이들을 도우려 했고 기꺼이 개빈을 만난다. 이후 마이클은 개빈의 모든 치료비를 지원하여 개빈이 암을 극복하도록 도와주었다.

프로그램의 장면 중 논란이 됐던 장면은 잭슨이 개빈에게 너무 친밀하게 행동했으며 한 방에서 같이 잔다는 것이다. (개빈은 침대에서 마이클은 바닥에서 잤다고 한다.) 기자가 이러한 의문점을 마이클에게 제기하자 "아이들과 자는 게 왜 이상한가? 그것을 성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것 아닌가"라고 항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다큐를 본 일부 심리학자와 정신과 의사들은 잭슨과 개빈의 관계가 부적절 해 보인다며 산타 바버라의 어린이 보호당국과 LA의 아동복지국에 자체적으로 조사에 착수해야 한다고 서신을 보냈다. 결국 산타 바버라 보안관 부서와 아동복지국은 비밀리에 조사에 착수했다. 이들은 개빈과 그의 가족들과 접촉하여 마이클과 어떤 관계인지 물었다. 개빈은 결코 마이클과 성적인 행위 같은 건 없었다고 말했으며, 개빈의 어머니인 재닛 아르비조는 마이클은 우리들에게 아버지 같은 존재이며 다정한 사람이라고 칭찬하며 눈물을 흘렸고, 개빈의 누나 데블린은 마이클은 우리에게 축복이나 마찬가지였다며 울었다. 개빈의 아버지인 데이비드 아비조는 마이클 덕분에 자신의 아이들과 관계를 회복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아동복지국은 이 같은 조사 결과와 함께 모든 가능성을 검토한 후 성추행 혐의가 없음을 밝히면서 사건을 종결했다. LA의 경찰당국과 산타바버라 카운티 보안 국 또한 마이클 잭슨에게는 죄가 없다며 사건을 공식적으로 종결했다. 그러나 훗날 이번 사건으로 잭슨을 기소한 검사인 톰 스네던은 아동복지국과 경찰당국의 조사 결과를 엉터리라며 무시하고 은폐했다. 심지어 톰 스네던 검사는 개빈 가족들과 인터뷰를 하지도 않았다.

이 같은 소식이 마이클 잭슨 측에도 들려오자 마이클의 측근들은 1993년의 일처럼 또 다시 안 좋은 일이 터질까 엄청난 긴장을 했다. 마이클의 변호사인 마크 제라고스는 이번 사건에 정보를 얻기 위해 이리저리 발을 움직였다. 측근들은 마이클에게 자칫하면 또 위험해질 수 있으니 개빈 가족들과 거리를 두라고 충고했고 마이클도 이에 동의하여 개빈 가족과 서서히 거리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마이클이 거리를 두기 시작하자 개빈 아르비조의 어머니인 재닛 아르비조는 레리 펠드먼이라는 1993년 잭슨에게 소송을 건 이반 챈들러의 아들 조단 챈들러를 변호한 변호사를 찾아갔다.

이쯤에서 개빈 가족들의 과거 전력을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1998년 8월 개빈 가족은 캘리포니아에 있는 J.C 페니 백화점에서 절도 혐의로 구금된 적이 있다. 구금에서 풀려난 뒤 개빈의 어머니인 재닛은 백화점을 상대로 경찰에게 폭행을 당했다며 300만 달러의 민사소송을 걸었다. 백화점 측에서 고용한 정신과 의사는 재닛이 정신분열증과 망상증을 앓고 있다며 진단했다. 재닛을 직접 치료했던 다른 의사는 그녀는 불안장애우울증을 앓고 있지만 망상증은 없었다고 했다. 재닛은 2년 후 백화점을 상대로 구금 당시에 경찰들에게 성추행을 당한 적이 있다며 또 다시 민사소송을 걸었다. 백화점 사건은 마이클의 재판이 열리기 전인 2001년 13만 달러의 합의금을 주고 종결된다. 이후 백화점 측을 변호했던 톰 그리핀 변호사는 개빈 가족이 마이클 잭슨을 고소 한 것에 대해서 "재닛은 끔찍한 이야기를 지어내서 아무 생각 없이 주위에 지껄이는 경향이 있고 이번에는 아예 홈런을 치려는 작정인 것 같다며 이를 갈취사건 제2부라고 말했다."

한편, 레리 펠드먼은 개빈을 데리고 스탄 캐츠라는 한 정신과 의사를 찾아간다. 스탄 캐츠는 그 자리에서 마이클이 개빈에게 술을 먹였으며 그에게 자위행위를 하도록 강요했으며 아동복지국의 조사에서 성추행을 당한 적이 없다고 한 것은 마이클 측의 협박 때문이었다는 개빈의 증언이 담긴 내용의 보고서를 작성했다. 또한, 스탄은 보고서 말미에서 마이클에 대해 소아성애자는 아닌 걸로 보인다. 다만 정신 연령이 10살에서 멈췄을 뿐이라고 소견을 내렸다. 스탄은 이 같은 보고서를 캘리포니아 법에 따라 경찰에 제출했다.

2004년 11월 20일 경찰은 마이클 잭슨에 대해 체포 영장을 발부하고 곧 마이클 잭슨을 기소했다. 당시 특공대가 마이클 잭슨을 체포하기 위하여 네버랜드 랜치를 급습하였는데 이는 어느 강력범죄자나 테러리스트에게나 적당한 조치로 많은 논란의 여지가 있었다. 결국 마이클은 21일 경찰에 자진 출두하여 구속당한 뒤 300만 달러의 보석금을 내고 풀려난다. 2005년 재판이 시작되고 4월 13일 재닛 아르비조는 마이클이 열기구로 자신과 아이들을 납치하려 했다고 주장하는 등 수많은 증언들을 했다. 그런데 주장들이 너무나도 황당해서 당시 공판을 직접 본 기자들의 대다수는 잭슨이 무죄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재판이 진행되면서 마이클을 위해 네버랜드 랜치에서 잭슨과 같이 있던 아이들이 나와서 자신들은 마이클에게 결코 성적인 일을 당한 적이 없다며 마이클을 옹호했다. 또한, 마이클에게 납치를 당할 뻔 했다는 재닛 아르비조의 주장과 달리 재닛이 주장한 납치시기에 아르비조 가족들은 고급 식당에서 무단으로 한화 700만 원 이상의 식사를 하고 잭슨에게 이를 대신 내줄 것을 요청했던 것이 드러났으며 검찰의 주장과는 달리 성추행 증거를 입증할 DNA가 발견되지도 않았다. 결국 재판 결과 배심원들의 만장일치 무죄로 마이클 잭슨이 승리하였다.

재닛이 잭슨에게 합의금을 요구한 것도 마이클 잭슨이 무죄 판결을 받은 이유 중 하나이다. 자신의 아이가 성추행을 당했는데 어째서 합의금을 먼저 요구한 것이냐는 배심원들의 생각이었던 것. 마이클 잭슨이 죽고 나서 2009년 잭슨의 성추행 혐의에 대한 FBI 파일이 공개됐는데 FBI는 마이클에게 혐의점을 찾을 수 없었고 아동복지국 조사 결과에서도 마이클이 개빈 아르비조와 가족들에게 성추행을 했다는 증언을 얻지 못해서 검찰에게 불기소 처분을 할 것을 권유했지만 검찰은 FBI와 아동복지국의 의견을 무시하고 마이클 잭슨을 기소한 것으로 확인됐다. 또한 FBI는 검찰이 네버랜드 랜치와 마이클 잭슨의 주변 인물들에 대한 수사에서도 성추행에 대한 단서를 찾지 못하자, 루머로 마이클 잭슨을 괴롭혔던 타블로이드들의 보도가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하나의 가정을 가지고 이들 보도에 대한 수사까지 진행 했고 실제로 타블로이드 언론들의 보도는 개연성과 증거가 없었다는 것도 밝혀냈다...

마이클 잭슨은 무죄를 받았지만, 일반 대중들은 마이클의 무죄 판결을 신뢰하지 않았고 마이클은 가장 바보스러운 미국인 1위에 뽑히는 등 '엄청나게 까였다. 이때 얼마나 분위기가 안 좋았냐면, 타블로이드의 광적으로 연이은 왜곡, 추측성 보도로 마이클 잭슨의 팬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볼 정도로 안 좋았다.

마이클 잭슨과의 재판 이후 재닛 아르비조는 2007년 공문서 위조를 통해 최저생계비용을 부당으로 취득한 사실이 드러나 기소당하여 벌금과 사회봉사명령을 받았다.


2.10 2006년~2009년 : 네버랜드 랜치 폐쇄와 This is it

그의 마지막 고난이자 두번째 재기시도

재판 이후 마이클 잭슨은 시상식에 여러 차례 등장한 것과 일본의 한 TV 프로그램에 나온 것 외에는 눈에 띄는 활동은 하지 않았고 레코드사에서 몇 차례의 베스트 앨범을 발매했을 뿐이었다. 또 자주 휠체어를 타는 모습을 보여줘 건강 상태 문제가 심한 거 아닌 가, 마이클 잭슨은 이제 미국에서는 끝났다라는 반응도 많이 나왔었다.

재정적인 문제도 심각해졌는데 마이클 잭슨은 상당한 부채를 감당하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의 네버랜드 랜치를 관리하는 직원들에게 제때 돈을 주지 못 하기도 까지 해서 캘리포니아 주정부로부터 네버랜드가 강제로 폐쇄되는 등 큰 곤란을 겪었다. 이때 마이클이 파산한 거 아니냐는 소리가 상당히 나왔는데 일단 마이클이 심한 재정적 문제를 겪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부채는 마이클 잭슨이 가지고 있는 자산을 다 팔면 충분히 해결될 수 있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파산까지 가지 않았다. 다만 바로 사용 가능한 현찰이 66만 달러 수준 밖에 안 돼 문제가 됐다.

또 아랍국가 바레인 국왕의 아들안 알 칼리파에게 100억원대의 피소를 당했다. 알 칼리파는 마이클이 자신에게서 100억원을 받고 음반과 자서전을 발매하기로 했으면서 안 했다고 돈을 찾으려고 소송을 낸 것. 재판까지는 가지 않았고 합의로 사건은 종결됐다. 이런 문제가 있다보니 판단력도 흐트러진 것이 아니냐는 여론도 있었다.

그러다 2007년부터 마이클 잭슨은 슬슬 컴백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는데, 일단 몇 차례의 잡지 화보를 찍었고, 'Thriller'의 발매 25주년을 기념하여 'Thriller'의 기존 수록곡과 Akon, Will.i.am 등과 재작업한 곡들을 함께 담은 'Thriller 25'를 발매하였다. 그리고…


2009년 3월, 팬들과 취재진 앞에서 컴백을 발표하는 마이클 잭슨[27]

'2009년 3월 마이클 잭슨은 영국 런던 O2 아레나에서 열릴 'THIS IS IT' 콘서트 발표로 컴백을 선언한다. "이번이 정말로 내 마지막 공연이 될 것이며 팬들이 원하는 노래를 부르겠다"고 말한 마이클은 See you in July! (7월에 봅시다!)' 라는 말을 남겼다.[28]

이맘때쯤 마이클 잭슨과 관련된 타블로이드 언론들의 악성 보도가 있었다. 슈퍼 박테리아나 피부암에 걸렸다는 것인데 사실이 아니다. 하지만 이 보도가 있고 난 뒤 얼마 안 가 사망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진짜인 줄 알고 있다. 심지어 우리나라의 주요 언론들도 기본적인 사실 확인없이 마이클 잭슨이 슈퍼 박테리아, 피부암에 걸렸다는 허위 보도를 한 바 있다.

이와 별개로, 마이클 잭슨의 컴백 발표 후의 열기는 그야말로 뜨거웠다. 'This is it' 공연은 2009년 기준으로 역사상 가장 빨리 매진된 공연으로 기록될[29] 정도로 불티나게 팔려나갔고 첫 컴백 무대의 표를 못 산 사람들이 이베이에서 우리나라 돈으로 2천만 원에 해당하는 금액을 지불해서라도 표를 구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팬들의 엄청난 반응에 마이클은 10회로 예정되었던 공연을 50회로 늘리겠다고 했으며 백댄서와 코러스, 무대효과, 의상 등의 공연을 준비하는 모든 부분에 직접 관여하는 열정을 보이고 3D특수효과와 특별마술을 요청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하면서 매우 열심히 공연을 위해 노력했는데...


2.11 팝의 황제, 떠나다

2009년 6월 25일 마이클 잭슨은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인해 숨을 제대로 못 쉬는 상태로 발견되어 로스앤젤레스의 현지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향년 50세에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났다. 결국 팬들이 그렇게 기다려 왔던 마이클 잭슨 자신도 기다려왔던 무대 복귀를 한 달 앞둔 상황에서 20세기 제일의 황제는 두번째 재기 시도도 하지 못한 채 그렇게 떠났다.[30]

그 뒤 이미 발권된 런던 공연에 대해서는 환불이 진행되었는데 대다수는 런던 공연의 티켓을 잭슨의 유품으로 여기며 환불하지 않고 소장하여 회수율이 매우 낮았고 오히려 이 티켓은 이베이 등지에서 원래 가격의 10배가 넘는 비싼 값에 거래되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모차르트 등과 비교하며 천재는 요절한다는 말이 사실인 것 같다며 매우 안타까워했다. 마이클 잭슨은 세상을 떠나기 전날까지 7월 13일런던에서 열릴 컴백 콘서트 '[THIS IS IT]'을 준비 중이었다.

마이클이 불면증을 호소하며 프로포폴을 찾았다. 그러나 난 거부했는데 사망 4일 전 마이클의 직원 한 명에게서 전화가 왔다. 마이클이 지금 당신을 보고 싶어한다고 말하는 데 그 뒤에서 마이클이 '몸 한쪽이 아주 뜨거운데 다른 한쪽은 춥다. 매우 춥다'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곤경에 처해 울부짖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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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마이클 잭슨의 간호사, 셰릴린 리
마이클 잭슨의 사망 전 건강 상태는 50대 미국인에 비춰봤을 때 괜찮은 수준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심한 스트레스와 불면증으로 인한 약물 문제가 있었다. 참고로 여기서 말하는 약물은 마약을 말하는 게 아니다. 마이클 잭슨은 절대 마약을 하지도 않았고, 오직 합법적으로 구할 수 있는 것만 구했다고 한다.

2009년 6월 25일에 세상을 떠난 후 수많은 빚이 있었다는 말이 나와 여러 사람들을 놀라게 했는데 사실 그는 소니EMG의 50%의 지분을 가지고 있었고 마이클 잭슨 본인의 것은 물론 75만개의 노래에 대한 저작권을 소유하고 있기에 이러한 지분과 저작권의 현 시가만 해도 5억 달러 그 이상에 이르며 수많은 부동산, 세계 각국의 건물과 성을 소유하고 있으니 돈으로 환산한다면 실제로 빚이 있었더라도 갚고도 남는다. 실제로 빚이 있다는 언급이 있은 지 몇 주 후에 그의 재산은 빚을 제외하더라도 1조 5천억 원 정도가 남을 거라는 기사가 나왔으며 2010년 3월에선 이제 잭슨이 지고 있던 빚은 없다는 말이 나왔다.

그의 사후네 CNN을 비롯한 몇몇 해외의 유명 언론들이 정규 뉴스를 중단하고 긴급 속보 체제에 돌입하였으며 전 세계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애도를 표하면서 '세계에서 제일 유명한 엔터테이너' 이라는 타이틀이 과장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다. 더불어 사망 소식 이후 음반 판매량 1~5위까지 잭슨이 석권할 정도로 당시 1위였던 블랙 아이드 피스의 앨범보다 많이 팔렸으나 빌보드에서는 발매 된 지 2년이 지나면 차트에 집계하지 않아 빌보드 앨범 200 차트에 마이클이 올라가지 못 했다. 이에 대해 말이 많자 빌보드는 결국 아무리 오래 전에 발매됐어도 언제든 성적만 좋다면 200 차트에 올라갈 수 있도록 규정을 수정했다. 세계적 음반체인점 HMV는 잭슨의 사후 음반판매가 1977년 엘비스 프레슬리, 1980년 비틀스의 존 레넌이 사망했을 때의 반응을 압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타임즈에서는 9.11 테러 이후 처음으로 특집판이 발매됐다.[31]

잭슨의 사망 소식이 보도되고 뉴스 웹사이트는 사용자 폭주로 빠르게 과부하에 걸린다. 잭슨의 사망 소식을 최초 보도한 TMZ와 뉴욕타임즈는 서버 폭파 현상을 겪었으며, 구글은 마이클 잭슨 검색어 량이 수백만씩 폭등하자 DDoS 공격으로 간주하고 30분동안 마이클 잭슨 관련 검색을 차단했다.

그때 사상 최초로 사람들이 다 함께 인터넷을 무너뜨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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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셔널 지오그래픽 <세계적 문화 아이콘, 마이클 잭슨의 사망> 데이비드 셀링거(아마존 닷컴)
팝의 황제로 놀라운 명성과 영예를 누렸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다지 행복하지 못했던 사람. 여러 가지 구설수가 있었지만 아까운 사람이 죽은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의 춤과 음악은 영원히 남으리라.

그리고 사망 이후 그의 인격적인 측면이 지인과 자녀들을 통해 증언되고 과거에 있었던 몇몇 추문들의 진실들이 밝혀지며 본국인 미국에서도 영웅적인 이미지를 많이 회복했다. 놀라운 것은 그의 사후 유튜브에 그의 공연 영상들이 마구 업데이트되어 잭슨에 대한 미국 10대들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그의 10대 팬 층도 상당히 증가했다. 덕분에 2009년 말 미국 여론조사에서 미국 10대, 20대들이 가장 좋아하는 뮤지션 1위에 마이클 잭슨이 올라갔었다.

팝의 황제답게 '이 모든 것이 쇼이며 새로운 모습으로 돌아올 것이다' 라는 팬들의 극성적인 말들이 나오기도 했으며 그 덕분에 한동안 영문판 위키백과에서는 죽었다 안 죽었다 가지고 수정전쟁이 발생하기까지 했다(...) [관련 기사].

미 현지 시각으로 2009년 7월 7일 [마이클 잭슨 추모식]이 열렸고 약 3만 명이 그 자리에 참여했다. 가수 한 명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해 이러한 행사가 열릴 정도라는 것은 그가 얼마나 위대했는지를 알려주는 또 하나의 증거. 이 추모식은 미국에서만 3100만명이 시청했는 데 역대 추모식 시청률 3위라고 한다.[32]

그의 생일인 2009년 8월 29일에는 뉴욕, 베이징, 도쿄, 서울, 파리, 런던, 베를린, 상파울루 등등 전 세계에서 그를 추모하기 위한 'Beat it' 플래시몹이 벌어졌으며 2014년인 현재까지도 진행 중이고 앞으로도 계속 진행 예정이다.

2009년 7월 11일, LA 경찰에서 타살 설을 제기했고 15일에 잭슨의 사망을 미국 법상 살인으로 결론지었다. 의도적인 살해는 아닐지언정 치료과정 중 과다한 약물투여로 인한 2급살인(=과실치사)라는 듯. 참고로 미국 법의 1급 살인이 우리나라의 살인죄(고의 있음)이고 2급 살인은 우리나라의 과실치사(의도 없음)에 해당한다. 즉, 미국 법에는 '과실치사'라는 용어가 없고 일단 사람을 죽였다면 살인이며 그 고의 유무에 따라 1급과 2급으로 분류하는 것이다.

2011년 9월 28일부터 미국에서 잭슨의 주치의이자 천하의 개쌍놈인 콘래드 머레이(Conrad Murray)에 대한 공판이 시작되었다. 이 과정에서 잭슨의 사망 직후의 사진이 공개되어 논란이 일고 있다. 머리는 공판에서 잭슨이 자의에 의하여 불면증 치료제인 프로포폴을 주입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재판을 통해 잭슨 스스로는 주입할 수 없는 것이 밝혀졌다. 사진과 함께 사망 전의 음성 녹음파일도 공개되었다.[#] 결국 2011년 11월 7일 [#] 과실치사(involuntary manslaughter) 유죄로 판결이 내려지고 11월 29일 과실치사 최대형인 4년형을 받게 되었으며 교도소가 꽉 차서 빨리 보낼까봐 캘리포니아 교도소로 보내겠다고 할 만큼 엄중한 처리를 받았고 2015년에 4년 만기를 채우고 풀려났다.

'사람들이 이 쇼를 떠날 때, 사람들이 내 쇼를 떠날 때 나는 사람들이 '내 생애에 본 적이 없는 최고의 쇼 였어.' 라고 말하기를 바란다.' 는 내용이 담겨있었다고 한다. 언론에서도 '약물에 취한 것 같은 목소리' 라고 말하며 잠정적으로 그의 약물 남용 설을 미는 눈치다. 슬프게도 육성 속 고인의 꿈이 실현되지 않았지만 마지막 공연에 대한 고인의 열정을 잠시 느낄 수 있다.


2.12 사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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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7월 6일 마이클 잭슨이 한때 머물렀던 대저택인 ´네버랜드´에 정체불명의 그림자가 카메라에 포착됐다.[[1]][33] 얼핏보면 셰도우 맨과 흡사하다. 일부 팬들은 "그림자는 잭슨의 영혼일 것"이라며 "마이클 잭슨이 애착을 갖고 있던 네버랜드를 떠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며 안타까워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팬들은"여러 가지 측면에서 가능성이 존재하는 만큼 억측은 금물"이라며 신중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이후 이 그림자의 행방은 알 수 없다.

2009년 10월 12일 신곡 'This is it' 의 음원이 공개되었다. 또한 'This is it' 은 개봉하지도 않은 상황인데도 갖은 기록을 세웠다.
사망 직전 준비 중이던 런던 투어의 리허설 영상과 인터뷰 영상이 포함된 다큐멘터리 영화 'This is it' 이 2009년 10월 29일 전 세계에서 동시 개봉되었다.[#]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으며 영국에선 당일 가장 빨리 매진된 영화라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미국에서만 1억 달러 이상을 벌어들였다.

사망 직후 국내에서도 마이클 잭슨의 음반 판매량은 133배 이상 급증하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수립했다. 한국은 물론 해외에서도 마찬가지였으며 나온 지 수년이 지난 그의 베스트 앨범이 갑자기 앨범판매 차트 1위에 오르기도 했다. 이 오래된 앨범들은 당시 빌보드 차트 정상에 위치했던 블랙 아이드 피스의 [The E.N.D.]보다도 많이 팔렸는데, 이런 현상은 빌보드 사상 최초였다. 오래된 앨범은 빌보드 메인 차트에 랭크될 수 없는 룰이 있었지만 이를 계기로 이후 12월 5일부터는 과거의 앨범들 또한 랭크될 수 있도록 변경됐다. 마이클 잭슨이기에 가능한 일들이었다.

11월 8일 신보인 'Breaking News'가 공개되었다. 잭슨이 완성하지 못한 노래를 소니에서 완성시킨 것. 미국의 팬들은 빌보드 TOP 200 데뷔 1위를 기대하고 있는 눈치다.[34] 결국 이번에도 발매하자마자 1위를 찍어버린 위용을 자랑했다. 은 마이클 잭슨을 이길 수 없다는 걸 다시 한 번 증명.

2009년 12월 24일 미국 FBI는 마이클 잭슨에 대한 수사 파일들을 공개했다. 여기에는 살해 협박 편지등을 포함해 마이클 잭슨의 아동 성추행 수사 파일들도 들어있다. 이 정보 공개를 통해 그가 아동 성추행에 혐의가 없음을 다시 확인하게 됐다.

2010년 12월에는 앞서 공개한 'Breaking News' 가 수록된 첫 번째 사후앨범 'MICHAEL'을 발매했다. 전 세계적으로 150만장이 팔렸다. 앨범에 수록된 곡 중 몇 곡이 마이클 잭슨의 목소리가 맞냐 는 논란이 있었다.

2012년 Bad 앨범 25주년 기념으로 미공개곡과 다큐멘터리 영화 그리고 1988년 배드 투어 공연 영상을 수록한 배드 25가 발매됐다.

2013년 6월 마이클 잭슨의 딸인 패리스 잭슨이 자살을 기도한 것이 드러나 충격을 주고 있다. 다행히 목숨에는 지장이 없지만 유산 싸움으로 인한 스트레스 및 여러 고달픔이 크다고 한다. [기사].

2014년 5월 14일에는 2번째 사후앨범 'Xscape'가 발매됐다. 전작 'Michael'이 평론가들과 팬들에게 엄청나게 까인 반면 'Xscape'는 긍정적인 평가를 많이 받았고, 49개국 아이튠즈에서 앨범 차트 1위에 올랐으며 빌보드 200에서 2위를 기록했으며 싱글 'Love Never Felt So Good'은 빌보드 차트에서 9위를 하며 마이클은 197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50년대 연속으로 빌보드 TOP 10안에 든 유일한 가수가 됐다. 18일에는 미국에서 열린 빌보드 뮤직 어워드 2014에 홀로그램으로 등장해 'Slave to the Rhythm'를 공연했다.[35] [기사].

2015년 사망 6주기 기념으로 소니에서 드디어 음원을 스트리밍으로도 들을 수 있도록 공개했다! 12월에는 Thriller 앨범이 미국 내에서 최초로 30X 플래티넘 (3000만장 판매)을 인증받으며 또 다시 기록을 세웠다.

2016년 2월 1일 'Thriller'앨범은 미국 내 32X 플래티넘 (3200만장 판매)을 인증 받았다.


3 영향력

마이클 잭슨의 대표적인 업적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흑인으로서 인종적인 장벽을 허물었다.
2. 보는 음악의 시대를 여는 음악적 혁명을 이뤄냈다.

영국 대학 연구팀이 1만 7천개의 빌보드 차트에 오른 곡을 분석한 결과 대중음악계는 1964년(비틀즈,롤링스톤즈를 중심으로 한 브리티시 인베이전),1983년(마이클 잭슨,더 폴리스,유리스믹스 등의 팝 스타와 신기술의 유행),1991년(힙합) 3차례의 혁명기를 맞았다고 한다. [영국 연구진 발표…1964년·1983년 포함해 모두 3차례 혁명] 1983년은 마이클 잭슨이 차트를 완전히 휩쓸던 시기.

잭슨 집안은 흑인 사회의 케네디가이며 흑인 가수들을 주류 TV쇼에 출연시켜 인종에 관계없이 대중에게 표를 팔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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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제임스 워커 연예계 전문 변호사 2009년
잭슨이 'Thriller'로 인종차별이 심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의 공간에 다리를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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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1984년
마이클 잭슨은 스릴러 발표 훨씬 이전에 이미 인종의 벽을 허물었다. 1972년 영화 Ben을 상영했던 극장의 상당수는 흑인들이 들어갈 수도 없었던 곳이었다. 그러나 잭슨은 백인들이 장악했던 할리우드의 영화 주제곡 'Ben'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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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 포스트 2009년
마이클 잭슨 이전에도 항상 흑인 스타는 있었어요. 그런데 그 흑인 스타가 1등은 못했어요. 항상 백인한테 뒤졌죠. 그런데 마이클 잭슨에 와서 흑인이 제대로 톱이 된 겁니다(2015년),그는 또한 음악적 현상을 넘어 사회적 현상이었다. 그의 슈퍼스타덤에는 백인지배사회에서 신음한 흑인들의 비상 욕구와 자긍심이 저류하고 있다. 그와 같은 흑인스타들의 분발로 설움과 차별에 시달려온 흑인들은 자신감을 획득했고 그 결과 우리 생애 어려울 것 같던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을 보게 됐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생전이던 사후던 엘비스 프레슬리, 비틀스와 같은 높이를 자랑하는 그의 음악사적 위상이 견고하다는 점에는 아무도 이의를 달지 못한다. 1980년대의 음악계는 마이클 잭슨의 것이었다. 그 이상으로 백인들의 사랑을 받은 흑인은 없다.(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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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임진모
마이클 잭슨의 등장 이전까지 팝의 역사는 과장해서 말해 '흑인들이 새로운 장르를 만든다 → 백인 업계에서 이 음악을 가져다가 백인 가수들에게 부르게 시킨다 → PROFIT! → 주도권을 빼앗긴 흑인들이 다시 새로운 장르를 만든다 → ...'의 반복이었으나 마이클 잭슨은 Off The WallThriller를 통하여 이 순환을 깨부쉈으며 근 20년간 음악계를 제패하며 음악의 황제로 대접받았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일이 최대의 음악 매체인 MTV의 장벽을 돌파한 일이다. 1981년 개국한 MTV의 사장 밥 비트먼은 로큰롤 위주로 음악 방송을 편성했고 이렇게 되니 대다수의 방송 구성에서 흑인은 거의 제외됐다. 비트먼은 '로큰롤'을 핑계로 흑인의 음악방송 출연을 거의 불허했다. 흑인들은 이런 MTV를 인종을 차별하고 있다며 거센 비난을 쏟았다. 잭슨이 빌리 진 뮤직비디오를 제작했는데 MTV는 방영을 거부했다.! 그러자 MTV에서 방영되는 대다수 백인 뮤지션들의 소속사였던 CBS는 MTV에게 잭슨의 'Beat it' 뮤직비디오를 주며 방영하지 않을 경우 모든 자사 소속 가수들을 MTV에서 빼버리겠으며 MTV의 인종차별적 발언을 폭로하겠다고 협박통지했다. 결국 MTV는 이에 굴복하여 잭슨의 노래와 뮤직비디오를 방영했다. 거대 소속사가 흑인 가수를 위해 이렇게 움직였는데 흑인들이 자부심을 안 느낄 수가 있을까. MTV는 한 때 잭슨을 거부했지만 MTV와 마이클 잭슨이 떼어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됐고 MTV에서 1991년부터는 'Michael Jackson Video Vanguard Award' 상까지 만든 걸 보면 참 묘한 셈.
그 이후 나온 흑인 가수들은 마이클 잭슨 덕분에 MTV에 자연스럽게 비디오가 나갈 수 있었습니다. 마이클의 후광 효과를 본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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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바브 슬레이드/ Kiss FM 뉴스 국장 2009년
이 외에도 수많은 방송국들의 인종 차별의 벽을 부숴 미디어는 잭슨이 흑인을 다시 음악의 주류로 올려놨다고 평가했다. 당시(겨우 1980년대 초반에) 잭슨은 백인들의 스타인 비틀즈와 엘비스에 비견될 정도로 화제였다. 음악으로 세계를 제패했다는 사실로 흑인들은 잭슨을 영웅으로 생각했으며 1984년 타임지는 잭슨의 이름이 아프리카에 끼쳐 인종차별을 해소하고 있다고 보도할 정도. 이런 엄청난 영향으로 유색인 협회에서 상을 받았고 잭슨 사후 마틴 루터 킹 3세와 매직 존슨 등에게 흑인을 위해 많은 일을 해줘 감사하다는 애도를 받았다.

가장 큰 업적은 잭슨이 보는 음악의 시대를 연 주인공이라는 것. 단순히 멋진 춤을 췄다는 것만이 아니라 뮤직비디오와 공연연출을 통하여 시각적인 효과를 매우 많이 만들어냈다. 대표적으로 Dangerous World Tour때 공연의 시작과 함께 땅에서 튀어나오는 토스터기법, Thriller를 부르고 끝부분에 관에 들어간 다음 관에 큰 송곳을 박아넣고 불을 지른다음에 전혀다른곳에서 다음곡을 시작하는 것, Black or White의 끝부분에 벽밑에 깔리는 것, Earth Song공연에서 뒤에 무대장치들과 탱크를 동원하여 주제의식을 전달하는점. 등등 그냥 넘어가는 부분이 없다해도 과언이 아닐정도로 매우 많은 기법을 사용하여 다양한 효과를 냈다. 빌리 진과 비트 잇, 스릴러 뮤직비디오에서 환상적인 춤을 선보이며 사람들을 사로잡았고 비트 잇과 스릴러 뮤직비디오에서 집단 군무는 뮤직비디오에서 선보인 최초의 집단 군무다. 잭슨 파이브의 멤버일 때는 로봇 춤 등을 유행시켰고 문 워크라는 획기적인 춤을 선보여 사람들에게 큰 문화충격을 선사했다. 이 외에도 수백 개의 영화 장면을 응용한 데인저러스의 안무 등 잭슨은 참신한 시도를 마다하지 않았다. 미국 국회에 등재 돼 보관 중인 유일한 뮤직비디오가 잭슨의 스릴러인데 스릴러 뮤직비디오가 공개된 뒤 앨범 'Thriller' 는 무려 몇 백만 장이나 더 팔려나갔다. 잭슨의 이 같은 대성공을 보고 다른 뮤지션들도 뮤직비디오와 보는 음악의 위력을 실감하게 됐고 음악의 패러다임이 바뀌게 된다. 즉, 잭슨이 음악 산업에서 뮤직비디오를 독립적인 상품으로 내놓은 첫 주자였고 대중음악을 연예사업으로 돌린 주인공인 것이다. 또한 사람들도 잭슨처럼 춤을 추고 싶어 했고 제 2의 잭슨이 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댄서가 되기 위해 도전했다. 잭슨 사후 유명 댄서들은 춤의 아버지를 잃었다고 슬퍼했다.

마이클 잭슨의 스릴러 이전 1980년~1982년 사이 레코드 출하량은 무려 5000만장이나 감소됐다. 음반 시장은 망해가고 있었고, CBS 에픽의 1982년 8월 13일은 직원들의 주요 해고가 있던 날로 검은 일요일이라고도 불렸다. 그러나 마이클 잭슨은 모든 걸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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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보드 2009년
잭슨의 앨범을 사기 위해 레코드 가게로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당시 레코드 업계는 상업 침체로 크게 망해가는 분위기였는데 잭슨의 충공깽한 앨범 판매량이 이들에게 도움이 됐다. 사람들은 잭슨의 앨범을 사면서 다른 뮤지션들의 앨범도 사갔고 타임지는 레코드 업계 최호황인 78년의 한 해 총 수입이 잭슨의 스릴러 한 장 수입보다 못 하다고 했을 정도(...) 이 외에도 잭슨이 입는 옷도 불티나게 팔렸고 'Thriller 25th' 기념 앨범에 들어있는 동영상에 잘 나와 있는데 스릴러가 한참 유행일 때 개나소나 잭슨이 비트 잇 때 입은 레드 자켓을 입고 다녔다고 한다. 덕분에 일부 학교에서는 잭슨의 복장을 금지하기도 했고 이런 현상을 보고 매체는 그 어떤 톱스타도 잭슨을 따라올 수 없을 것이라고 보도했다.

잭슨은 사운드 면에서도 극찬을 받는데 임진모에 의하면 잭슨의 음악은 사운드가 시대를 앞서갔고 훌륭하고 완벽해 옛 스튜디오 엔지니어들 책상에는 항상 잭슨의 앨범이 꽂혀있던 정도라고 한다. 또한 정일영 평론가도 잭슨의 앨범은 단순히 팝이라고 흘려보내기엔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나다고 평가했다.


4 영향을 준 아티스트

저스틴 비버는 자신의 롤 모델이자 우상은 마이클 잭슨이라고 직접 밝혔다. 마이클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인기를 끈 것은 음악이 다양하고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했기 때문이니 내 목표도 마이클 처럼 사람들을 즐겁게 만들고 활력을 주어 모두와 인연을 맺고 싶다고 말했다. 또 마이클이 존경을 받는 이유는 깨끗한 삶 때문이기에 자신도 마이클 잭슨을 본받아 깨끗한 이미지를 심어주고 싶다고 했지만 현실은... 한편 최근 인터뷰에서 가장 좋아하는 마이클의 노래는 'Dirty Diana'라고 밝혔다.

레이디 가가는 마이클 잭슨이 입었던 옷,장신구들을 대량으로 구매하여 마이클 잭슨 박물관을 건립하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할 정도로 극성적인 팬이다. 한번도 마이클을 안 좋아했던 적이 없다고 했다.

셀린 디온은 마이클 잭슨은 자신의 아이돌이었다고 말했다.

비욘세는 마이클 잭슨은 그 어떤 뮤지션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영향력을 남겼고 마법이었고 우리 모두가 꿈꾼 존재라며 추모했다. 비욘세는 마이클 잭슨의 'I Wanna Be Where You Are'을 커버한 적도 있고 2016년 슈퍼볼에서는 마이클 잭슨의 복장을 오마쥬하고 나왔다.

어셔는 마이클 잭슨을 무척이나 존경했고 같은 무대에 설 수 있었던 것 (30주년 공연)에 대해 감사하며 그는 음악으로 경계를 무너뜨렸고 그가 남긴 음악은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으며 영원히 기억될 것이라고 말했다.

브리트니 스피어스저스틴 팀버레이크는 마이클 잭슨이 'Invincible' 앨범을 발매하기 전 현재 팝 음악계의 흐름에 대해 파악하기 위해 이 둘의 팝 뮤지션과 미팅을 한 적이 있었다. 이때 브리트니와 저스틴이 마이클에게 'Thriller' 뮤직비디오의 대성공 등에 관해 이것저것 묻고 칭찬하자 마이클이 무척이나 좋아했다고 한다. 브리트니는 마이클 잭슨 사망 이후 그는 내 평생에 영감을 줬다고 말했으며 저스틴은 천재를 잃었다고 말했다.

마돈나는 마이클 잭슨의 'Billie Jean'을 직접 공연 중 선사한 바도 있고 그녀의 히트곡 'Like a Virgin'도 빌리 진과 흡사하다. 마이클 잭슨이 사망한 뒤 '마이클에게서 영감을 받지 않은 아티스트를 모른다, 모두가 마이클 잭슨을 경외하며 자랐다.'고 말했다.

이 외에도 그린 데이, 브루노 마스, 크리스 브라운, 칸예 웨스트, Jay Z, 머라이어 캐리, 마룬 5, 더 위켄드, 테일러 스위프트 등 주요 팝 뮤지션들이 영향을 받았다. 팝 뮤지션들이라면 대다수가 마이클 잭슨에게서 영향을 받았다. 한국에서는 박진영이 마이클 잭슨의 'Off The Wall'을 듣고 자신의 음악 인생이 시작됐다고 말했고 보아, 문희준 등도 영향을 받았다고 말했다. 사실 요즘에는 가수라면 춤과 노래가 돼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고 실제로도 가수들이 춤을 필수적으로 추는데 가수는 춤이 돼야 된다고 생각하게 만든 사람들 중 한명이 마이클 잭슨이다.


5 유명세/인기와 평가

팝 음악의 세계에는 마이클 잭슨과 그 외 모두가 있다. 전 세계적인 돌풍을 일으킨 이 가수의 인기는 1960년대 비틀매니아를 연상시킨다. 마이클 잭슨은 대중문화 그 자체이지. 단순한 팝 뮤직이 아니다. 이런 가수는 한 시대에 한명 나올까 하는 가수다. 그는 인종 간의 경계를 무너뜨렸으며 흑인 음악을 백인 관객들에게 가져왔다. 그리고 빈민가에서 탈출할 수 있으며, 에너지만 있다면 뭐든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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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타임즈 1984년
마이클 잭슨은 역사상 최고의 연예인입니다. 여태까지 내가 살면서 본 가장 충격적인 공연은 모타운 25주년에서 마이클이 문워크로 무대를 가로질렀을 때였습니다. 우리는 보자마자 알 수 있습니다 위대하다는 것을 그리고 그보다 미치지 못 하는 것은 한 단계 아래라는 것을, 마이클 이전에는 프랭크 시나트라, 엘비스 프레슬리 그리고 비틀즈가 있었습니다. 마이클 잭슨은 그 위인들과 함께 합니다. 빌리 진은 상업적 성공과 음악적 깊이가 함께 한 그가 만든 가장 중요한 레코드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들은 어떤 노래보다 빌리 진은 가장 훅(hook)이 많았습니다. 빌리 진은 기억하기 쉬우며 빌리 진 안의 모든 악기는 각기 다른 훅을 연주합니다. 당신은 거기서 12가지의 음악적 조각들로 나눌 수 있고 다양한 영감을 얻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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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링 스톤 2004년 선정 Rock N roll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아티스트 35위 'Michael Jackson' 설명문
잭슨은 20세기 대중문화의 진정한 아이콘이었다. 1980년대 잭슨신드롬 이후 그 어떤 가수가 그보다 더 엄청난 일을 저질렀을까? 일찍이 전설이 된 엘비스와 비틀스를 빼놓고 대중적 파급효과를 따진다면 잭슨을 능가하는 가수는 아무도 없었다. 이 지구상 모든 인류가 열광한 가수는 잭슨이 유일했다. 그의 음악 앞에선 피부색을 떠나 모든 인종이 하나가 됐다. 매번 그는 당대 최고 수준의 세션 연주자들을 초빙, 빈틈 없는 마술 같은 스튜디오 레코딩을 창조했다. 'Billie Jean' 'Man in the Mirror' 'Black or White' 등 그렇게 탄생된 잭슨의 음악은 지구촌 수억 인구에게 감동과 전율, 눈물과 환희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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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IZM 2009년, 김獨 기고
마이클 잭슨은 한동안 팝의 황제였다. 그리고 그는 우리가 아는 팝의 마지막 황제였다. 그가 등장하기 전에는 프랭크 시나트라와 엘비스 프레슬리 그리고 비틀스가 있었다. 하지만 잭슨 뒤로는 아무리 기교가 좋고 인기가 높은 팝 스타라고 해도 갈수록 분화되는 음악 팬들의 다양한 맛을 맞추지 못했다. 커트 코베인,퍼피,머라이어 캐리,셀린 디온,비욘세,라디오헤드도 '아니올시다'였다. 그의 가장 치열한 경쟁자였던 마돈나마저 그의 수준엔 못 미쳤다...(생략)... 사실 잭슨보다 재능이 뛰어난 연예인이 결코 무대에 오른 적이 없었다. 전설적 댄서인 프레드 아스테어는 잭슨에게 전화를 걸어 그의 춤을 칭찬했고 가수로서도 잭슨은 지나치리 만큼 카멜라온이었다. 부드러움과 거침,감칠맛 나는 비통함까지 너무도 다양했다... (생략) ... 안에서 느끼는 그의 삶이 뭐든 간에 밖에서 볼 때 그의 삶은 분명히 천재가 빚어낸 작품이었다. 대성공이라고 하든 기묘한 서커스라고 하든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예술적 창의성에서나 예술적인 자기 개조에서나 마이클 잭슨 같은 사람을 만나보지 못했다. 그리고 우리는 그를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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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위크 2009년
세계에서 제일 유명한 사람 중 한명이며 길에 나가서 마이클 잭슨을 아냐 모르냐를 물으면 100명중 99명은 안다고 말할정도로 유명하다. 같은 아티스트라도 마이클 잭슨보다 유명한 아티스트는 없다고 봐도 된다.20세기 미국의 영웅이라는 소리까지 들었다. 대한민국에서는 1984년 신문 기사를 보면 "한창 인기가 절정이던 조용필의 이름은 몰라도 마이클 잭슨의 이름을 모르는 젊은이는 없다던가. 국민 학교 어린이까지도 그의 노래에 열광한다"고 보도했으며 또한, 국민 학교 어린이 2000명을 대상으로 한 세계적으로 존경하는 인물 조사에서 링컨, 레이건, 에디슨에 이어 4위로 뽑히기도 했다. 전라남도 다도해라는 먼 시골에서도 섬사람들이 청바지 차림을 하고 마이클 잭슨의 노래를 부른다고 할 정도. 북한의 최고 권력자인 김정은도 유학 시절 마이클 잭슨의 노래를 즐겨 들었다고 한다 .북한은 자신들의 체제 선전용 동영상에다 잭슨과 라이어넬 리치가 작사/작곡한 'We Are the World'의 음을 무단으로 도용하기도 했다.

잭슨 열풍은 옆 국가인 일본도 마찬가지. 일본에서는 잭슨이 '태풍 마이클' 로 불렸다. 일본은 마이클 잭슨의 인기가 가장 큰 국가중 하나다. 모든 월드투어에서 대상으로 선정되었으며 도쿄, 오사카, 요코하마, 후쿠오카에서 공연을 가졌으며 도쿄돔의 전신인 고라쿠엔 스타디움 시절부터 꾸준히 공연하여 도쿄돔 포함 공연횟수가 24회로 일본가수들을 포함해도 전체 2위, 솔로로는 1위이다. 일본에서 진행했던 투어에서 관중총합이 39회 160만명이었고 전회매진이었다.[36] 그리고 SMAP이 진행하던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에 출연한적도있고 일본을 방문한 일이 많았고 일본 사람들도 좋게 인식했다.

아프리카에 까지도 잭슨의 이름이 알려져 인종차별을 해소하고 있다고 보도되었고 아프리카의 흑인 빈민촌 소년인 제이콥은 제 2의 마이클 잭슨이 되기 위해 춤을 따라 하고 있다니 아프리카의 빈민촌에도 그의 이름은 유명한 것.

잭슨은 공산주의 국가들에게는 엄청난 골칫거리였다. 1988년 서독베를린 Bad Tour를 앞두고 동독비밀경찰슈타지가 바짝 긴장했었다는 비밀문서가 공개됐다. 당시 독일은 분단국가로 베를린 장벽을 사이에 두고 자유진영인 서독과 공산진영인 동독으로 나뉘었는데 슈타지는 장벽 인근에서 열릴 잭슨의 공연으로 인한 사회 혼란을 우려했다. 잭슨의 공연을 보기 위해 동독 청년들이 장벽 쪽으로 몰려가면 수습하기 힘든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다는 판단이다. 슈타지는 고민 끝에 대형 스크린으로 잭슨의 공연을 중계하여 동독 청년들이 장벽 쪽으로 몰려가는 것을 막는 계획을 세웠으나 정작 공연이 열리는 날 이 계획은 시행되지 않았다. 결국 청년들은 잭슨의 노래를 듣기 위해 장벽으로 몰려 동독의 경찰들은 이를 막기 위해 진입하는 등 유혈사태가 일어났다고 한다. 독일의 통일 현장을 경험했던 탈북자 김영일 씨에 의하면 당시 동독의 한 중학생이 서독에 마이클 잭슨이 공연을 하러 왔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서독이 동독보다 잘 산다는 글을 썼는데 이게 슈타지에 적발되기도 했다. 잭슨은 공산주의 체제를 위협한 인물이기도 한 것이다. 소련의 경우는 엄청난 인기를 몰고 오는 마이클 잭슨을 악마라며 강력히 비난했다. 한편 러시아에 대항하여 러시아로부터 분리 독립을 요구하는 체첸의 지도자 'Salman Raduyev' 은 체첸 사람들에게 'Michael Jackson' 으로 불렸다. 체첸인들은 그가 마이클 잭슨의 노래인 'Heal the World'의 독립투사 버전이라고 믿었다.

마찬가지로 골칫거리였던 게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고집하던 남아프리카 공화국. 1980년대 마이클의 인기에 흑인이 세계적인 인기를 얻는 것에 대하여 정식 소개를 금했지만 그래도 흑인들에게 당연히 알려져 인기를 끌자 부랴부랴 명예백인이라느니 개소리를 했지만 마이클 잭슨은 당연히 비웃으며 남아공 인종차별 정책을 비난해왔다. 이러한 성원에 힘입어 그는 HIStory World Tour의 마지막을 남아공에서 장식했고 5회공연에 23만7천명의 관중과 함께했다.

멕시코에서는[37] 마이클 잭슨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하여 멕시코시티 광장으로 1만 4천명이 집결하여 잭슨의 노래에 맞춰 춤을 선보였는데 이는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플래시몹으로 기네스북에도 등재됐다.

게다가 잭슨은 월드 투어가 열린 나라마다 지도자를 만났던 유일한 가수다. 25개국 국가 수장들과 파파라치들을 만났으며 아프리카의 코트디부아르에서는 5개의 부족장들과도 만났다. 특수부대까지 출동한 대통령급 경호 대접을 받았다.

이런 뜨거운 인기를 얻었지만, 93년 성추행 사건 이후에는 미국에서 부정적인 반응들이 대부분이었다. 80년대 후반 Wacko Jacko 논란으로 이미지에 피해를 입은 적은 있지만 그건 당시까지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니었다. 여론조사에서 미국인들의 65%가 마이클 잭슨을 인간적으로 존경한다고 할 만큼, 93년 성추행 사건 이전까지만 해도 마이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많이 긍정적이었지만, 93년 사건 이후 그리고 결혼과 이혼의 반복과, 후에 있었던 또 한 번의 사건으로 인해 명예가 크게 실추됐다. 2005년 진행된 여론조사에서 미국인들의 40%는 마이클이 더 이상 음악 활동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응답했고 70%나 마이클을 부정적이라고 응답했다.

하지만 잭슨이 세상을 떠나고 나서는 반전됐는데 2014년 Yougov라는 기관에서 진행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미국인들의 60%가 잭슨을 긍정적으로 평가했으며 가장 위대한 로큰롤 가수로 2위로 뽑는 등 실추된 명예가 회복된 것을 볼 수 있다.


당신은 마이클 잭슨에 대해 긍정적/부정적이십니까?
2003년 갤럽 조사 - 긍정 18% 부정 65%
2014년 Yougov 조사 - 긍정 61% 부정 32%

역사상 가장 위대한 로큰롤 뮤지션은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출처 : 파일:56b0bbe7090c76b00a2a.jpg
1위 엘비스 프레슬리 36%
2위 마이클 잭슨 21%
3위 존 레논 9%

참고로 2002년 'ABC'에서도 같은 여론조사를 했었는데 결과는 엘비스가 40% 였고 마이클 잭슨이 2% 였다.

한상철 팝 칼럼니스트는 “가장 거대한 임팩트(impact)를 가진 지구상 가장 완벽한 팝 뮤지션”이라고 평가하였으며 팝 DJ 김광한 씨는 "엘비스 프레슬리가 로큰롤의 제왕이라면 마이클 잭슨은 장르를 초월한 황제이다"라고 평가하였다. 뉴욕 록 라디오 방송국 WNEW-FM의 피디인 찰리 캔달씨는“그가 굉장한 목소리와 다양한 스타일을 가졌으며, 귀신같이 춤을 잘 춘다는 걸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는 모든 연령대와 모든 종류의 팝 청취자들에게 어필하죠. 이런 가수는 한 시대에 한 명 나올까 하는 가수죠”라고 평가하였으며 <빌리지 보이스>는“마이클은 엘비스의 비주얼과 비틀즈의 음악적 재능 모두를 가지고 있으며 지금까지 스스로 작사, 작곡, 프로듀싱, 어레인지먼트, 의상, 스타일, 안무, 퍼포먼스, 영상, 자신의 이미지 로고 등을 직접 소화해내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고독하겠지만 팝은 천재를 만난 것이다”라고 평가하였다.

각종 매체와 팬들이 선정하는, 최고의 아티스트나 가수를 꼽는 차트에서 항상 상위권에 위치해 있다. 2010년 VH1에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아티스트 100] 2위를 차지했다. 롤링 스톤은 2004년 로큰롤 탄생 50주년을 기념해 특집 기사를 내보내는 가운데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아티스트 100]에서 잭슨을 35위로, 2008년 보컬로서의 능력치를 평가하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가수 100]에서는 25위[38]로 선정했다. 또한 영국의 음악 매체 NME의 [독자들이 선정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가수]에서는 프레디 머큐리와 엘비스 프레슬리, 액슬 로즈 등을 제치고 1위로 뽑히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1999년 배철수의 음악캠프에서 전문가들이 20세기 가장 최고의 팝 아티스트로 3위에 마이클을 뽑았다. [20세기 팝 아티스트 투표] 현대 음악에서 솔로 아티스트로 최고의 반열로 평가받는다. 비교적 마이클의 커리어가 초반이었던 80년대 초반에 이미 비틀즈, 엘비스 프레슬리와 같은 레벨로 평가받았으며 데인저러스 월드 투어를 진행할 때 마이클의 인기는 전세계적으로 폭발했고 평론가들도 후한 평가를 내렸다. 마이클 잭슨이 활동할 때 등장했던 수많은 아티스트들과 후대에 등장한 아티스트들 중에 마이클 잭슨 보다 뛰어나다고 평가받은 아티스트는 단 한명도 없다.

잭슨에 대한 평가는 앞으로 올라갈 여지가 매우 많다. 90년대 중후반부터는 논란이 되는 사생활 문제와 'Jacko' 이미지 때문에 평단이나 미디어들, 대중들에게 하도 까여서… 지난날의 명성들이 먹칠을 당했지만 (예로 위에서 잭슨에게 박하게 평가한 '롤링 스톤' 의 경우 2002년 잭슨의 발코니 사건 때 잭슨의 기괴함은 끝이 없다며 '아동 학대범' 이라고 편집장이 대놓고 조롱을 한 적도 있다. 퀸시 존스는 2001년 집필한 자서전에서 비평가들이 잭슨을 역사 밖으로 쫓아내려고 하는 것 같다고 썼다.) 그러나 막상 잭슨이 사망하고 나서는 그의 음악적 커리어를 재조명하는 분위기가 형성됐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1996년 10월 11일, 13일에 첫 공연을 가졌고 매진은 되지 않았으나 당시 한국 최대 스타디움인 잠실주경기장에서 5만명을 넘는 관중을 동웠했다. 이후 레이디가가가 2012년 같은 곳에서 공연하여 5만명의 관객 동원에 성공했는데 무려 16년 만의 일이었다. 사실 이전부터 내한공연을 가지려 했지만 위에 서술한 아동 성추행이라느니 여러 모로 논란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개신교계에서 유달리 그가 게이라느니, 별별 엉터리 이유로 결사반대했는데 레이디 가가 내한 반대 사건에 나선 먹사 신상언은 당시 낮은 울타리라는 잡지에서 마이클 잭슨은 사탄이라느니 발광하듯이 결사반대했다. 하긴 이 작자가 사탄은 마침내 대중문화를 선택했습니다라는 불쏘시개를 쓰던 자였으니.

그리고 1999년 6월 25일 2번째 내한공연을 가졌는데 이번에는 왜 하필 6.25에 오냐며 또 결사반대를 했었다. 당시 아이들을 동원하여 6.25는 어떤날? 사탄이 공연을 가지는 날이라는 개신교 광신자들의 발악 시위는 되려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불러일으켰고 오히려 홍보를 해줬다는 비아냥과 같이 3년전보다는 관객수로는 더 성공했다.

오히려 위 내용들은 마이클 잭슨이 가진 업적을 상당부분 축소하였고, 그걸 짓밟으려는 가해 세력을 옹호하는 듯한 문장이라 할 정도로 가치를 낮추고 있다.

이러한 주장에는 그가 냉전에서 오히려 서방권이 문화 우위적 성격을 갖는 동시에 자국 내 흑인 권익을 상승시키는 이중업적이 강력함에도 자극적 광기나 바라는 대중들이나 그러한 광기를 정치적으로 이용해 먹으려는 티가 역력한 미국 사회 지도층들 행태가 아직도 남아 있기 때문이다. 위대한 로큰롤에서 사후에도 2위라는 평가부터가 냉전의 광기에서 살아남아 미국이 냉전을 승리로 이끈 국가가 된 원동력 인식은 물론이고, 냉전이란 광기로 인해 효성 지극한 앨비스 프레슬리가 제작사 강요로 하게 된 강제적 군 복무로 인해, 지극히 아낀 모친의 마지막을 보지 못 했다는 점도 비웃겠다는 인식이 1위라는 결과에서 역력히 들어나는 형국이다.

아직 더더욱 긍정적 재평가가 진행될 시기는 한참 남아있겠지만, 이러한 결과를 부른 이 일련의 행동들은 미국사회가 보인 추태와 흑역사에 대한 연구가 심각하게 남아 있고, 그러한 찌꺼기를 피하기는 커녕, 자랑으로 하는 한국 사회 역시도 자유롭지 못 할 것이다.

6 재능

6.1 작사작곡

잭슨은 자신의 자서전 문 워커에서 사람들이 나를 댄스 가수로만 알고 나의 작사 작곡 능력을 몰라본다고 섭섭함을 토로했다. '사람들이 이 곡 누가 만들었어?' 라고 물을 때마다 슬프다고 ... 편견과 달리 잭슨은 자신의 빌보드 1위 13곡 중 상당수를 단독으로 작사/작곡하였고 재능을 인정받아 2002년 작사/작곡가 명예의 전당에도 헌액된 사람이다. 마이클 잭슨이 작곡을 하는 방식은 떠오른 선율들을 테이프로 녹음한 뒤 이를 다른 뮤지션을 시켜 악보로 옮겨 적게 했다고 한다.[39] 마이클은 기타 연습을 위해 만든 손가락 연습곡을 바탕으로도 새로운 곡을 만들어 냈고, 최고의 작곡 훈련을 받은 뮤지션들도 이런 마이클을 보고 종종 놀랐다고 한다. 드림윅스 레코드사의 존 맥클레인은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작곡가 중 한명으로 마이클을 뽑았다. 'Invincible' 앨범 작업을 함께한 프로듀서 로드니 저킨스도 마이클은 음에 대한 이해가 뛰어나다고 말했다. 2015년 롤링 스톤 잡지가 선정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곡가 리스트 100인에 마이클도 포함됐다.

마이클 잭슨의 작사/작곡 실력은 평단에서 인정하고 있지만 정작, 일반 대중들은 마이클이 작사/작곡을 안 하는 댄스 가수로만 아는 사람이 많다... 80년대나 지금이나 댄스를 전문으로 하는 팝 아티스트들에겐 편견이 심한 모양.


6.2 주제의 다양성

그의 음악적 특징 중 하나가 곡의 주제가 매우 다양하다는 것이다. Off The Wall의 타이틀곡인 Off The Wall은 힘들어도 즐겁게 살자는 내용이고 Get on the floor는 신나게 놀아보자는 내용이다. Beat It은 폭력만은 안 된다는 내용이다. Bad에 수록된 Dirty Diana는 돈 많고 유명한 남자를 잡아서 잘살고 유명해지려는 여자를 까는 곡이고, Man in the mirror는 자신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자신뿐이고, 세상이 좀더 좋게 바뀌길 원한다면 니부터 똑바로 하라는 내용이다. Dangerous에 수록된 Heal the World는 기아나 병으로 죽어가는 아이들을 우리가 함께 도와주자는 내용이다. 대부분의 곡을 자신이 작업한 HIStory에 수록된 곡은 대다수가 일반적인 사랑과 관련되는 내용은 거의 없고 대부분이 다른 이야기가 주제이다. 자신을 괴롭히던 타블로이드를 저격하는 Tabloid Junkie, 그러한 루머에 대한 자신의 느낌을 표현한 Scream, 자신을 성추행 소송 혐의로 수사한 검사 톰 스네던을 비판하는 내용의 D.S, 지구의 여러 문제점[40]을 지적하는 내용의 Earth Song, 세계의 여러 문제를 외면하지 말고 함께 해결하자는 내용의 Jam, 당시 자신을 둘러싼 문제에 대한 힘든 마음과 외로움을 표현한 You are not alone, 인종차별을 비판하는 Black Or White, They Don't Care About Us 등등이 있다. 저런 자전적이고 시사적인 내용 외에도 괴물 이야기가 주가 되는 Thriller[41], Ghosts[42] 웬 여자가 자신의 아이를 가졌다면서 들이대자 아니라고 항변하는 Billie Jean, 불의의 폭력에 희생된 Annie라는 사람의 내용인 Smooth Criminal, 여자 잘못 만나서 시간 잃고 돈 잃고 망하는(...) 남자의 내용인 Dangerous 등등 그의 곡을 살펴보면 온갖 내용이 다 있다.


6.3 보컬

팝 역사상 가장 유니크한 보컬
신이 내린 미성

모든 장르를 잭슨화 시키는 천재 보컬리스트. 어릴 때부터 엄청난 가창력을 가진 신동으로 극찬받았다. 그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흑인 밴드로서 가장 성공한 잭슨 5의 리드 보컬을 맡았을 정도다. 'Bad' 투어 당시 춤추면서 노래를 부르는 것과 'Dangerous' 투어 당시 부카레스트 라이브를 보면 사람이 아닌 수준으로 날라다닌다. 인간 리듬머신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 애초에 마이클 잭슨은 그 뛰어난 가창력을 인정받아 모타운과 에픽 레코드에서 아주 좋은 대접과 높은 로열티를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 가창력이 20대에서는 뛰어난 작사/작곡/프로듀싱의 재능과 결합돼 팝의 황제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런데 아쉽게도 그의 라이브 보컬로서의 실력은 한국 인터넷 상에서는 꽤 나 저평가를 받고 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위 '공연' 항목에서도 언급했지만 마이클 잭슨의 공연 동영상으로 그의 목소리가 매우 상했으며 대부분이 립싱크로 진행됐던 'HIStory 투어' 동영상이 광범위하게 많이 퍼졌기 때문이다. 반면 그의 라이브 보컬 전성기 시절인 80년대 영상물은 거의 나돌지도 않았으며 뭣보다 화질의 문제 때문에 마이클 잭슨의 화려한 댄스를 보지 못한다는 점에서 인기가 없는 듯 하다.

마이클 잭슨의 80년대 시절 화려한 라이브 보컬로서의 실력을 보고 싶으면 'The Jacksons: Live (1981년)'을 필히 들어보길 바란다. 가장 카랑카랑 했을 때의 음색 그리고 댄스의 개입이 적었을 때라 마이클 잭슨의 화려한 가창력을 맘껏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또 'Bad Wembley Tour'도 필수적이며 이 2개가 잭슨 측이 공식적으로 발매한 유일한 라이브 앨범물이다. 화질은 썩 좋지 못 하지만 그래도 나름 보고 들을 만한 수준으로 나돌아 다니고 있는 Victory Tour (1984년) 시절 영상도 봐보자. 켄자스 시티와 달라스,뉴욕에서의 공연이 괜찮다. 반면 캐다나 토론토 투어 영상은 화질 음질이 도저히 볼 수준이 아니다..

남성과 여성, 어른과 아이, 흑인인지 백인인지 구별히 힘들 정도의 맑은 미성 덕에 확실한 개성을 가진 음색과 4옥타브의 음역을 넘나들며 특유의 억!(...)이라는 딸꾹질을 추임새로 자주 사용하기도 한다.[43] 마이클 잭슨의 노래는 실제로 불러보면 알겠지만 일반 남성의 파사지오에 해당하는 음역부터 여성의 고음역때까지 걸쳐져있는 경우가 다반사라 일반인들이 제대로 소화하기는 매우 벅차고 정작 마이클도 춤추면서 라이브로 다 구사하는 것에 꽤 벅차한다(...). 주 장르인 팝 뿐만 아니라 발라드, 댄스, 리듬 앤 블루스 등의 장르와 그 외의 여러 장르를 결합시킨 음악들도 무리없이 보컬로 소화한다. 깔끔하게, 거칠게, 맑게, 허스키하게, 까랑까랑하게도 부르는 등 곡 해석력 또한 다양하다. 이러한 보컬능력은 Invincible 앨범에서 잘 표현되었지만 앨범이 부진하면서 묻혔다. 안습...

악명높은 타블로이드 언론에서도 마이클 잭슨의 가창력은 인정했다. "관객들이 마이클 잭슨을 세계 최고의 댄서라고 생각할 때 그는 발라드 노래를 흐느끼며 열창한다. 그러면 나는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나 그를 꼭 껴안아주고 싶다"라고 썼을 정도다.

롤링 스톤에서는 2008년 가장 위대한 가수로 마이클 잭슨을 25위로 선정했는 데 오해하지 말아야 할 점은 이 순위는 보컬리스트로서의 면을 반영한 것이나 가창력 순위는 아니다. 애초에 가창력의 정의를 정하기도 모호한 점이 있고 상위권에 오른 가수만 보더라도 가창력 순위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가령 당신이 어떤 가수가 썩 노래를 못 부른다고 생각해도 그 가수가 노래로 감동을 준다면 위대하다고 투표할 수 있는 것이다.


7 댄스

전문댄서가 아니면서 팝과 록을 겸비하는 뮤지션으로는 최초로 미국 국립 무용수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인물
마이클 잭슨은 동작을 동작 그 자체를 위해 사용하는 무용의 달인,마이클 잭슨은 아방가르드 무용가다. 그의 댄스는 추상적이며, 세계적인 현대 무용가 머스 커닝햄처럼 그는 우리에게 동작이 그 자체의 가치를 지닌다는 점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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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타임스 1988년
댄스에 있어서는 펑크의 제왕 제임스 브라운과 영화배우이자 전설적 춤꾼으로 유명한 프레드 어스테어에 지대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유년 시절에 열렬한 팬이었으며 그의 스텝을 연구했다고 한다. 이것이 그의 완벽주의 적 성향과 결부되면서 어린 시절부터 꽤나 춤의 달인이었다고도 하며 그와 함께 작업했던 다이애나 로스는 그가 춤을 배우는 속도가 너무 빨라서 댄서들이 따라갈 수 없다며 불평했다는 회상을 했다. MTV를 통해 전 세계를 강타했던 'Thriller' 뮤직비디오의 안무도 직접 했다(마이클 피터스와 공동 안무).

재키윌슨은 마이클 잭슨이 무대 위에서 어떻게 해야하는 지를 모두 익혔다고 했으며 잭슨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배웠다고 인정했다.

모타운 25주년 공연에서 그는 빌리 진 무대를 선보였는데 프레드 아스테어가 그것을 보고 마침내 자신의 후계자를 찾았다며 매우 기뻐하여 잭슨의 전화번호를 조사하여 전화까지 걸었다. 프레드는 잭슨에게 "네가 진짜 춤을 보여줬어" 라며 분노의 댄서라고 잭슨을 평가했다. 잭슨의 보컬 트레이너인 세스 릭스는 당시 장면을 회상하며 잭슨이 너무 흥분하여 병이 날 지경이었다고 한다. 이후 프레드는 직접 잭슨을 만나 문워크를 배운다.

[1983년 최초의 마이클 잭슨 문워크 영상]
문워크는 그가 전부를 직접 개발한 것은 아니다. 문워크와 비슷한 스텝은 1930년대부터 존재했고 마이클은 캐스퍼라는 한 소년에게서 백 슬라이드 스텝을 배운 뒤 이를 체계화된 현재의 문워크로 발전시켜 'Billie Jean' 공연에서 처음으로 선보였다. 이 공연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순간 500개의 순위 중 202위를 차지했으며 미국인들이 가장 다시 보고 싶은 장면 7위로 뽑히기도 했다. 하지만 후일담에 의하면 본인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서 공연이 끝나고 엉엉 울었다고 한다.[44] 그런데 지나가던 소녀가 너무 잘했다고 칭찬해줘서 그제야 기분을 풀었다고. 문워크의 뜻은 마치 을 걷는 듯 유연하게 미끄러진다며 붙어진 이름으로 초반에는 그저 미끄러지듯 뒤로 걷는 동작이었지만 87년 'Bad' 앨범 때 이후로는 옆으로 가는 문워크나 제자리 문워크, 마지막에 회전하는 문워크 등 몇 가지 변형 동작이 추가되었고 조금 더 복잡해졌다.

'Smooth Criminal'의 안무로 유명한 Lean 동작(30도 가량 비스듬히 기울어졌다가 다시 올라오는 동작)을 무대에서 보이기 위한 장치를 고안해서 특허를 받기도 했다(다른 스텝들과 공동 특허). 이 Lean 댄스는 특수 신발과 무대 고정 장치를 사용한다고 알려져 있는데 댄서 개인도 몸이 똑바로 기울어졌다가 다시 올라오는 과정에서 지구력과 추진력이 필요하기에 한때 아킬레스건이 남보다 2배는 길다느니(...) 재미있는 루머들이 난무했다. 장우혁2006년에 'Mr. 잭슨' 이라는 곡을 내면서 오마주한 적이 있다.

스텝에 있어서는 가히 기예와 같은 실력을 발휘한다. 발끝으로 서는 동작은 마이클 잭슨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모습. 그의 '빌리 진' 퍼포먼스는 83년 초연 이후 다른 스텝과 동작이 추가되었는데 [1992년 루마니아 공연] 때를 보면 거의 발이 무대에서 날아다닌다. 문워크야 지금은 웬만한 댄서들이야 다 하는 동작이지만 원조는 원조인지라 잭슨 같은 유연함, 스피드, 능수능란한 테크닉을 재연하는 것은 힘들다. 발동작이 매우 빠르고 가벼운데 'Black or White' 뮤직비디오 뒷부분을 보면 뛰어난 스텝을 감상할 수 있다. 이렇게 현란한 스텝을 밟으면서도 온 비트가 정확하며 정지된 동작에서도 팽팽한 긴장감을 보여 대중의 호응을 유도해내는 것이 특징인데 어느 평론가는 '잭슨은 춤의 본질이 움직임이 아니라 멈춤에 있음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라고 평했다.

참고로 마이클 잭슨을 대표하는 의상 중 하나인 검은색 바지-하얀 양말-검은색 구두는 마이클 잭슨의 안무를 보고 무대 기획자가 공연을 직접 보러 온 관객들에게 마이클 잭슨의 현란한 스텝을 멀찌감치 서 조금이라도 잘 보이기 위해서 제안했다고 한다. 비록 꽤나 촌스럽고 격식에 안 맞는 조합이 될 것임에도 마이클 잭슨은 흔쾌히 허락했다.



[45]
스핀 실력도 수준급인데 그의 팬이 편집한 스핀 짜깁기 영상만 봐도 무지 어지럽다(...) 여기에서 포인트는 스핀을 실컷 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바로 다음 동작으로 넘어가는 것. 응용도 있는데 뱅글뱅글 돌다가 순식간에 자리에 털썩 무릎을 꿇고 주저앉는 동작이다.[46]

그의 댄스 트레이드마크 중 하나인 사타구니 잡는 동작은 87년 'Bad' 뮤직비디오 촬영 때 처음 나온 것이라고 한다. 춤을 추다가 우연히 했던 동작인데 그게 느낌이 좋아서 계속 하게 되었다고. 사실 지금이야 댄스 여기저기에서 사용하기 때문에 익숙해서 그렇지 사실 굉장히 섹슈얼한 동작이다. 적당히 사타구니를 잘 쥐어잡은 채로 각을 잡고 엉덩이를 유연하게 튕겨줘야 하는데 이게 내공이 없는 일반인이 하면 똥마려운 포즈로 보이거나(...) 개그 요소가 될 수 있는 등 은근히 난이도를 필요로 한다. 사실 저 동작을 잘못 추면 그게 바로 저질 댄스가 된다...

현란한 스텝을 보여주고 있지만 디테일한 면에도 신경 쓴다. 'Dangerous' 퍼포먼스에서 볼 수 있듯이 손에 감은 밴드 등으로 시각적인 포인트를 주는 것이다. 영상을 찾아보면 미묘하게 손가락을 움직이는 동작을 볼 수 있는데 한때 신화이민우가 오마주한 적이 있었다.

사실 잭슨은 군무보다는 독무를 좋아한다. 이유는 군무는 에어로빅 같아서 힙합 음악은 좋아하지만 힙합 댄스는 에어로빅 같아서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 적이 있었다.

마이클의 이러한 능력은 공연 때 마다 발휘되었으며 마이클이 보는 음악의 시대를 여는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8 공연(투어)


마이클 잭슨이 월드투어를 진행한 곳을 표시한 지도.[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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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잭슨 'Dangerous' 투어의 시작을 알리는 부분. 일명 토스터 기법으로 많은 가수들이 공연에서 채용하고 있다.

잭슨은 자신의 생애에서 총 15번의 투어[48]에 900회에 가까운 공연을 했지만 정작 남아있는 동영상은 거의 없다.
투어는 아니지만 탤런트 쇼나 스크립트 공연에서 노래를 부른 것만 합치면 횟수는 훨씬 늘어날 것이다.

1984년 잭슨스 (잭슨 파이브는 잭슨스로 이름을 바꿈.)의 일원으로 빅토리 투어를 하였는데 가는 곳마다 사람이 엄청나게 몰렸다고 한다. 당시가 스릴러 열풍으로 팝 역사상 최강의 괴물인 잭슨이 미국 전역을 돌며 투어를 한다는 데 사람들이 안 보고 못 빼길 수가 있나. 별로 공연하지도 않았는데 80년대 가장 좋은 성적을 거둔 투어 7위를 기록한다.

1987부터 1989년까지 1년4개월간 그의 첫 솔로 투어인 Bad 투어가 열렸다. 123회 공연으로 440만명의 관중들을 불러왔고 영국 웸블리에서 7회 연속 매진이라는 대기록을 세우며 50만 4천명과의 관중들과 만났다. 배드 투어는 일본을 시작으로 열렸는데 일본에서 당시 잭슨의 공연 표가 매진되는 건 당연하고 암표가 횡행하여 암표상들이 엄청난 돈을 벌었다고 한다. 배드 투어의 라이브 영상으로는 2012년 발매된 영국 웸블리 공연 DVD가 있다. 1억 2천 5백만 달러[49]를 벌어들여 80년대 가장 좋은 성적을 거둔 투어 2위 솔로 가수로는 1위를 기록했다. 또, 당시 관객들이 잭슨의 공연을 보고 기절하고 부상당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런 사태는 데인저러스 투어도 마찬가지. 잭슨의 말에 의하면 공연을 열 때마다 3천 명씩 실신해서 실려 갔다고 한다.

1992-1993년에는 Dangerous 투어가 열렸다 마이클 잭슨의 진통제 중독으로 후반부 스케줄이 취소되어 총 69회의 공연으로 350만 명의 관중들과 만났다. 이전 투어와는 달리 퍼포먼스가 더 과감해졌다.[50] 데인저러스 투어의 라이브 영상으로는 루마니아 부카레스트 공연이 2005년 DVD로 발매됐다. 이 투어는 공산주의 국가들의 붕괴로 동구권 유럽에도 진행됐는데 러시아 PD인 블라디미르 이바넨코는 CNN에 나와 마이클 잭슨은 러시아 사람들에겐 미국의 제왕이었다고 말했다.

1996년 7월 16일 히스토리 투어 시작전에 브루나이에서 브루나이 국왕의 50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하여 Royal Brunei 공연을 개최하여 6만명의 관중을 무료로 받았다. 내용적으로 보면 시작은 데인저러스 투어로 하는데 끝은 히스토리 투어로 끝나는 공연.

1996-1997년에는 HIStory 투어가 열린다. 35개국 82회 공연 450만명[51]의 관중들과 만났다. 이때 처음으로 우리나라에서도 공연을 했다. 마이클 잭슨은 1993년 Dangerous 투어 당시에도 우리나라에 오려고 한 적이 있는데 김영삼 정부는 근검절약 분위기에 맞지 않다고 거절한 바 있었고 이번에도 좌절되는 가 싶더니 겨우 겨우 공연이 성사됐다. 하지만 반미를 외치는 세력들과 개신교 목사들이 주축이 되어 마이클 잭슨 공연 반대 대책위가 꾸려지고 잭슨 내한 공연 반대 운동이 매우 격렬하게 펼쳐졌다. 심지어는 공연 반대 대책 위원회에서 마이클 잭슨측과 계약을 하고 표를 판매하기로 한 태원예능에게 서점들과 은행 등에서 표를 판매할 경우 해당 서점과 은행의 불매 운동을 전개하겠다고 협박했고 태원예능은 협박에 굴복, 표 판매를 철회하고 전 직원들이 동원되어 밤낮으로 돌아다니며 수작업으로 표를 판매했다고 한다. 더욱이 공연 퍼포먼스가 선정적이라는 이유로 심의위원회에서 19금 이상의 성인용으로 처리되었고 덕분에 표 판매는 큰 타격을 입었다. 당시 기사를 보면 매진에는 실패했고 관객의 70% 가까이를 채우는데 성공했다고 한다. 2회 동안의 총 관중 수는 9만명. 총 2회 공연 중 두 번째 공연은 매진을 기록했다. 근데 7만 8천명도 당시 잠실 주경기장의 다른 행사의 입장 인원을 생각해 보면 꽤 많이 들어온 거다. 공연이 끝나고 태원예능의 사장님인 정광택씨가 당시 겪은 일을 바탕으로 '마이클 잭슨이 어쨌다구요?' 라는 책을 쓴 바 있다. 현재는 절판되어 사지는 못 하고 도서관에서 빌려볼 수 있다. 정광택씨는 책 뒷면에서 이렇게 꼬집었다. "정부가 허가한 공연의 표도 못 팔게 한 나라가 이 지구상 어디에 있습니까?"

1999년에는 'Michael Jackson & Friends'라는 자선공연이 우리나라 서울독일 뮌헨에서 열렸다. SBS에서 서울 공연을 생중계 해줬는데 시청률이 최고 42.3%였다.

2001년에는 뉴욕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마이클 잭슨 30주년 기념공연을 했다. 이때 You Rock My World를 공연할 때 어셔와 크리스 터커가 난입하여 함께 공연했다. 또한 휘트니 휴스턴 역시 참가하여 공연했다.

말년에 있던 솔로 투어에서 립싱크 논란이 불거지기도 했는데, 배드 투어 때는 체 세트리스트 중에서 3곡을 립싱크 하는 것을 제외하면 전곡을 라이브로 소화했지만[52] 데인저러스 투어부터는 과감한 퍼포먼스가 추가돼 라이브 비중이 60% 정도로 줄었다. 문제는 히스토리 투어인데 당시 1-2곡을 제외한 모든 노래를 립싱크 처리했다. 마이클 잭슨의 댄스는 상당한 테크닉이 필요로 하여 체력 소모가 심하다. 거기다 마이클은 통증까지 앓고 있어 데인저러스 투어부터는 진통제를 맞아가며 버텨왔지만 1993년 재판 이후 급속도로 몸 상태가 안 좋아지고 정신적인 스트레스로 인한 불면증 거기다 목 상태도 나빠져 히스토리 투어부터는 립싱크 없이는 공연을 할 수가 없었다. 거기다 인터넷 동영상 사이트에서는 가장 최근 시기에 있던 히스토리 투어의 동영상만 많이 풀렸지. 그 이전인 데인저러스나 배드 투어는 거의 없어 그의 70,80년대를 겪어보지 못 한 팬들은 마이클 잭슨이 당시 어떤 목소리로 공연을 했는 지 일부 유출된 소수의 영상과 잭슨 5 시절 공연 영상 그리고 '마이클 잭슨 노래 존나 잘 불렀다'는 당시 사람들의 증언말고는 공식 동영상이 없어 갈증을 심하게 느꼈다. 그래서 배드 투어를 라이브 앨범으로 발매하라는 요구가 많았는데 마이클 잭슨의 사망 3년 이후인 2012년 웸블리 투어 영상이 공개되면서 팬들의 숙원이 어느 정도 풀렸으나 아직도 풀어야 할 라이브 동영상은 무척이나 많이 남아 있다. 그래서 일부 극성팬들은 해킹을 해가며 투어 동영상을 야금야금 빼오고 있다. 그래서 최근에야 몇 개의 불법적인 공연 동영상이 유출돼 볼 거리가 더 많아진 것이다. 하지만 음질 리마스터나 화질의 개선없이 단지 빼오기만 했을 뿐이라 아쉬움은 여전히 남아 있다(...)

마이클은 월드 투어에 대해 "별로 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투어는 나에게서 많은 것을 가져간다. 한번 공연을 하고 나면 몸무게가 500g이 빠져 나간다" "실컷 공연해 봤자 동영상으로 기록되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라고 말했다. 전 세계를 넘나들며 시차 적응을 위해 노력해야 하고 거기에다 2시간 동안 움직이며 노래를 부르는 것은 아무리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이어도 어지간한 일이 아니었을 거다. 퍼포먼스가 세계에서 가장격렬했기 때문에 투어의 진행과 계획에 큰지장이 생겼고 이것은 그가 다른 아티스트들의 3분의 1~4분의 1수준인 3번의 투어만 진행하는 것에 큰 원인으로 작용했다. 투어 동영상을 보면 투어마다 확연히 잭슨의 목소리가 변해가고 있고 안무도 다르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마이클 잭슨이 성인이 되어 참가한 Victory World Tour, Bad World Tour, Dangerous World Tour, HIStory World Tour의 총 관중수를 합치면 1440만명에 달한다. 거기에다가 로얄 브루나이 공연[53]의 6만명을 더하면 1446만명이 된다. 말이 1446만명이지 이는 엄청나게 많은 수인데 피파 월드컵 중 최다 관중인 3,587,538명을 동원한 1994년 미국 월드컵의 관중수에 4배를 곱해도 마이클 잭슨의 월드투어 관객수보다 작다. 즉 평균관중이 68991명이었던 미국 월드컵 경기를 108번해도 1446만명이 안된다는 의미이다. 이는 그 어떤 팝 아티스트의 관중동원 기록보다도 압도적인 수치다.[54] 또한 마이클은 투어 때 마다 어마어마한 양의 돈을 끌어모았는데[55][56] 아무런 계산없이 합쳐도 3번의 투어 평균수익이 1억 3천만 달러이고 과거와 현재의 차이를 고려하여 계산하면 3번의 투어동안 평균수익이 2억 1천 5백만 달러에 달한다. 투어횟수 자체가 적다는것과 21세기들어서 투어를 한적이 없다는 점 때문인지 총관중 총합과 수익총합 순위에서 밀려났다.[57] 또 가장많은 관중을 동원할 수 있는 미국본토[58]를 데인저러스 투어때부터 제외하기 시작했는데 투어의 흥행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59]

또한 마이클 잭슨은 투어중에 전세계의 유명한 스포츠구단들의 홈구장을 모두 섭렵했다.[60]

일본의 도쿄돔이 생기기전에 고라쿠엔 스타디움에서 3연속 매진을 기록하며 배드 투어를 시작했고 1988년을 시작으로 1997년까지 도쿄돔에서 21번이나 공연했다. 배드 투어 당시에 요코하마 스타디움에서도 3회 공연했고 90년대에 들어서 후쿠오카 돔이 완공되자 후쿠오카 돔에서도 공연을 4회나 소화했다. 그외에도 일본의 니시노미야 스타디움과 오사카 스타디움에서도 공연을 했다.

영국에서는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15회 공연했으며 Cardiff Arms Park와 라운드리 파크에서도 공연을 했다.

에스파냐에서는 배드 투어 때 FC 바르셀로나의 홈구장인 캄프 누에서 95000명의 팬과 함께했으며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홈구장인 비센테 칼데론에서도 6만명의 관중과 함께했다. 데인저러스 투어 때는 지금의 세군다리그인 레알 오비에도의 홈구장인 Estadio Carlos Tartiere에서 공연했고 비센테 칼데론을 다시 방문했다. 히스토리 투어 때는 레알 사라고사의 홈 구장인 라 로마레다와 레알 바야돌리드 CF의 홈구장인 에스타디오 누에보 호세 소리야에서 공연했다.


프랑스에서는 배드 투어 때 파리 생제르망의 홈구장인 파르크 데 프랭스와 몽펠리에 HSC의 홈구장이었던 Stade Richter, OGC 니스의 홈구장이었던 Stade Charles-Ehrmann에서 공연했다. 데인저러스 투어 떄는 툴루즈 FC의 홈구장인 스타디움 뮈니시팔에서 공연했다. 히스토리 투어 때는 올랭피크 리옹의 홈구장인 스타드 드 제를랑과 파르크 데 프랭스에서 공연했다.


독일에서는 배드 투어 당시 서독이었던 함부르크 SV의 홈구장인 폴크스파르크슈타디온, 당시 이름이 Mungersdorfer Stadium였던 FC 쾰른의 홈구장인 라인에네르기 슈타디온,FC 바이에른 뮌헨TSV 1860 뮌헨의 공동홈구장이었던 올림피아 슈타디온에서 공연했다. 데인저러스 투어 떄는 투어의 시작을 올림피아 슈타디온에서 했으며 Mungersdorfer Stadium에서 재공연했고 SV 베르더 브레멘의 홈구장인 베저슈타디온,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의 홈구장인 코메르츠방크 아레나, 1.FC 카이저슬라우테른의 홈구장이었던 Südweststadion, 헤르타 BSC의 홈이었던 Friedrich-Ludwig-Jahn-Sportpark에서 새로 공연했다. 히스토리 투어 때는 헤르타 BSC의 새로운 홈구장이 된 올림피아슈타디온 베를린, Mungersdorfer Stadium, FC 샬케 04가 홈으로 쓰던 Parkstadion에서 공연했다.

이탈리아에서는 배드 투어 때 이탈리아 럭비 대표팀의 홈구장인 Stadio Flaminio와 유벤투스 FC, 토리노 FC의 홈구장이었던 스타디오 올림피코에서 공연했다. 데인저러스 투어 때는 Stadio Flaminio와 A.S. Giana Erminio의 홈구장인 Stadio Brianteo에서 공연했고 히스토리 투어 때는 AC 밀란인터 밀란의 홈구장인 산 시로에서 공연했다.

네덜란드에서는 페예노르트 로테르담의 홈구장인 당시명칭이 페예노르트 스타디움이었던 더 카위프에서 배드 투어때 3회, 데인저러스 투어 때 2회 공연했고 히스토리 투어 때는 AFC 아약스의 홈구장인 암스테르담 아레나에서 5번 공연하여 모두 매진시켰다.

마이클 잭슨이 방문한 유명구단의 홈구장
국가구장명사용구단연도
일본고라쿠엔 스타디움요미우리 자이언츠1987년
오사카 스타디움[61]난카이 호크스1987년
요코하마 스타디움[62]요코하마 디엔에이 베이스타즈1987년
도쿄 돔 [63]요미우리 자이언츠1988년, 1992년, 1997년
후쿠오카 돔[64]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1992년, 1997년
영국웸블리 스타디움[65]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1988년, 1992년, 1997년
에스파냐캄프 누FC 바르셀로나1988년
비센테 칼데론[66]아틀레티코 마드리드1988년, 1992년
Estadio Carlos Tartiere레알 오비에도1992년
라 로마레다레알 사라고사1996년
에스타디오 누에보 호세 소리야레알 바야돌리드 CF1997년
프랑스파르크 데 프랭스[67]파리 생제르맹 FC1988년, 1997년
스타디움 뮈니시팔툴루즈 FC1992년
스타드 드 제를랑올랭피크 리옹1997년
Stade Charles-EhrmannOGC 니스1997년
독일폴크스파르크슈타디온[68]함부르크 SV1988년, 1992년
Mungersdorfer Stadium[69]FC 쾰른1988년, 1992년, 1997년
올림피아슈타디온[70]FC 바이에른 뮌헨, TSV 1860 뮌헨1988년, 1992년, 1997년
베저슈타디온SV 베르더 브레멘1992년, 1997년
코메르츠방크 아레나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1992년
Südweststadion 1.FC 카이저슬라우테른1992년
Friedrich-Ludwig-Jahn-Sportpark헤르타 BSC1992년
ParkstadionFC 샬케 041997년
이탈리아Stadio Flaminio이탈리아 럭비 국가 대표팀1988년, 1992년
스타디오 올림피코유벤투스 FC, 토리노 FC1988년
Stadio BrianteoA.S. Giana Erminio1992년
산 시로AC 밀란, 인터 밀란1997년
네덜란드페예노르트 스타디움[71]페예노르트 로테르담1988년, 1992년
암스테르담 아레나[72]AFC 아약스1996년, 1997년

그 밖에도 스위스 FC 바젤의 홈구장이었던 St. Jakob Stadium[73]에서 공연하기도 했다.


8.1 대표적인 공연영상

좋은 공연 동영상은 더 많이 추가바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Ben' 공연] 목소리가 아주 죽여준다.

[1983년 빌리 진] 최초의 빌리 진 공연과 최초의 문워크! 참고로 당신이 보고 있는 모든 장면은 마이클 잭슨이 직접 카메라 위치를 선정하여 촬영한 것이고 편집한 것이다.!
[1984년 빌리 진] 1984년 빅토리 투어 빌리 진 동영상 중 유일하게 남은 고화질(?) 이다. 그러나, 환호하는 관중들 모습만 많이 보이지 정작 마이클 잭슨은 마지막 하이라이트 부분빼고 보여주지 않고 있다.!
[1987년 일본 요코하마 빌리 진]
[1988년 영국 웸블리 빌리 진]
[1992년 부쿠레슈티 빌리 진] 가장 전설적인 빌리 진 공연 영상이다. 1984,1987,1988,1996 공연과 비교해서 보면 그 차이를 확실히 느낄 수 있다.
[1996년 로얄 브루나이 빌리 진] 공식적으로 확인된 마지막 라이브 빌리진이다.

마이클 잭슨의 80년대 가창력이 궁금하다면 [one night japan] 앨범을 들어보자. 87년 요코하마의 라이브 앨범이다.

80년대 추천 공연 동영상
[1988년 Wanna Be Startin' Somethin']
[1988년 The Jackson 5 Medley]
[1988년 I Just Cant Stop Loving You]
[1988년 Rock With You]
[1988년 Thriller]
[1988년 Beat it]
[1988년 Human Nature]
[1988년 Dirty Diana]
[1988년 Another Part Of Me]
[1988년 The Way You Make Me Feel]
[1988년 Smooth Criminal]
1987년 그래미 어워드 축하 공연 [[2]]

90년대 추천 공연 동영상
[1992년 Jam]
[1992년 Beat it]
[1992년 Smooth Criminal]
[1992년 Man in the Mirror]
[1995년 데인저러스]
[히스토리 투어 어스송]
[히스토리 투어 스무스 크리미널]
[히스토리 투어 스릴러]
[히스토리 투어 Beat it]
[히스토리 투어 오프닝]
[히스토리 투어 You Are Not Alone]
[1999년 서울 공연 빌리 진]

2000년대 추천 공연 동영상
[2001년 30주년 공연 영상]
[2002년 Dangerous]

더 많은 동영상이 궁금하면 유튜브에 검색하자.


9 사생활&일화

9.1 언론과의 관계와 루머

언론과의 관계를 한 마디로 표현하면 아주 좋지 않다. 그 때문에 루머도 많은 편이다.

지금까지도 마이클 잭슨을 괴롭히는 루머는 여전하고, 주로 폭스뉴스나 타블로이드 언론에서 나온다.[74] 온라인 인터넷 기사에 '충격, 마이클 잭슨 OO하다.' 이딴 식으로 올라오는 기사는 100% 출처가 폭스 아니면 타블로이드이니 전부 무시해도 좋다.

최근에 있던 가장 황당한 보도는 예를 들어 2013년 7월 영국의 선데이 피플이라는 타블로이드 언론이 큰 병크를 터뜨렸다. 자신들이 단독으로 입수한 FBI 파일에는 마이클 잭슨이 24명의 어린이들 성추행하고 3500억 원의 돈으로 어린이들의 입을 막았다는 것. 물론 말도 안 되는 황당한 기사다. 이미 FBI는 2009년에 마이클 잭슨의 성추행 혐의 파일을 전부 공개한 적이 있다. 2009년 공개된 FBI 파일 내용을 전부 검토해 보면 선데이 미러라는 타블로이드 언론에서 주장하는 것들과 달리 '입을 막았다는 내용' 은 단 한 구절도 볼 수 없으며, 오히려 마이클 잭슨이 결백함을 보여주는 자료들 뿐(FBI는 마이클 잭슨의 유죄를 입증하기 위해 필리핀까지 가서 조사를 했지만 아무 증거도 얻지 못 했다.)이다. CNN에서는 7월 4일 선데이 피플의 보도는 말이 안 되는 황당한 기사라며 공개적으로 반박했을 정도.

타블로이드 언론 보도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잭슨의 유죄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메저로우는 바레시(브로커)가 르마르크 부부를 대신해 타블로이드 언론 매체에 그들의 스토리를 팔려 했다고 말했다.
르마르크도 재판에서 스토리를 팔아 돈을 벌려고 했다는 사실을 인정했으며, 심지어 바레시와 만났다는 것도 인정했다. 바레시는 그에게 타블로이드 언론으로부터 10만 달러를 받을 수 있다고 약속했으며, 스토리가 더 추잡해지면 돈을 더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가격이 올라가니까, 그는 스토리를 점점 자극적으로 만들기 시작했죠.” 필립 르마르크에 대해 메저로우는 이렇게 말했다.

“잭슨 씨의 손이 (맥컬리)컬킨의 바지 속에 있었다고 하면 돈이 더 올라간다고 브로커가 말했다는 게 사실입니까?” 메저로우는 반대심문 중 이렇게 물었다.

“그가 그렇게 말했어요.” 르마르크가 말했다.

1994년 PBS방송국의 “Frontline”이란 다큐멘터리를 위한 인터뷰에서 바레시는 르마르크 부부와 거래했던 것을 얘기했다.

“그들을 도왔던 이유는 그들이 받을 돈의 일부를 내게 약속했기 때문이었죠.” 바레시는 말했다. “난 누군가를 정의를 위해 끌고 가는 정의의 사도 같은 사람이 아니에요. 마이클이 당시에 진짜 죄가 있었던 없었던 간에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죠. 제 관심은 오로지 돈이었어요, 추가하자면 그들 돈도요.”
[마이클 잭슨의 ‘FBI 파일’에 대한 타블로이드 보도의 신빙성]

이것뿐만이 아니다. 최근에는 마이클 잭슨의 前 가정부가 폭로를 했다며 '충격, 마이클 잭슨 집안 세상에서 제일 더러워 ...' 라는 황당한 뉴스까지 보도됐다. 이 또한 타블로이드 언론 발 뉴스.

자세히 파헤쳐 보면, 마이클 잭슨의 前 가정부들은 꽤 나 문제를 일으켰다. '맥 마 누스' 라는 가정부는 마이클 잭슨의 고가의 물건들을 훔쳐 해고됐고 심지어는 친척들에게 까지도 비슷한 일을 저질러 소송을 당했다. 이후 맥 마 누스는 영국과 미국의 타블로이드 언론과 인터뷰를 하며 마이클이 마약 중독자였다느니 .. 이딴 개소리를 하고 다닌다.

또, 타블로이드들은 자넷 잭슨(마이클의 친 여동생)이 마이클의 자녀들에게 욕설을 퍼부었다는 거짓된 보도를 하며 가족들끼리의 관계도 망치려고 작정 중이다.

타블로이드뿐만이 아니라, 기존 주류 미디어와의 사이도 좋지 못 한데, 마이클 잭슨 사망 소식이 보도되고 타임지, 롤링 스톤 등이 추모 특집 판을 찍어냈는데 내용을 보면 잭슨을 까 내리고 있는 부분이 있다. '잭코' 라고 특히 타임지는 2면을 크게 할애해서 한 쪽에다 마이클의 굴욕짤을 크게 붙여놨다. 그래서 잭슨의 팬들에게 사진만 좋은 거 나열해놓고 팔아먹으려는 심보냐고 까였다. 하지만 주류 미디어와 타블로이드의 차이점은 적어도 주류 미디어는 타블로이드처럼 잭슨을 근거 없이 비난하는 원천 소스를 제공하지 않는다. 폭스뉴스만 빼고

마이클 잭슨 본인역시 이러한 말도 안되는 개소리들을 매우 싫어했으며 언론과 파파라치, 루머들을 대놓고 저격하는 곡들을 발표하기도 하였다.[75]

당시 추모특집 판 커버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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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어린시절

jacksons_childhood.jpg [76]
마이클 잭슨이 직접 그린 어린 시절 자신의 모습. 이 그림을 봐도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한 슬픈 추억을 엿볼 수 있다. 'HIStory' 앨범에 실림.

'너무 일찍 데뷔해서 내 유년 시절은 없다고 생각한다.' 며 어린 나이에 데뷔한 것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한 것을 보면 그로 말미암아 일반적인 사람들과 다른 유년기를 보내야 했던 것이 상당한 트라우마가 된 것으로 보인다. 잭슨 가는 형제가 9명이나 되었던 가난한 가정이었으므로 그의 아버지는 음악적 재능이 있었던 자식들을 밴드로 구성하여 공연을 다니게 했는데, 위에도 언급됐지만 잭슨 파이브시절 확인된 공연만 500회이고 스트립 댄서들이 공연하는 성인 클럽에서 아이들을 노래하게 하는 등 지금으로 봐서는 아동학대 수준으로 자식들을 굴렸다. 이러한 생활로 인해서 마이클 잭슨은 어린 시절에 공연을 다니면서 놀이터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을 보며 그들의 평범한 일상을 동경했다고 한다.[77]

또 나머지 형제들이 아버지에게 맞는 것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이 맞았으며 싸대기는 기본에 걸핏하면 폭언과 채찍에 맞기도 했다. 또한 성숙되지 않은 초등학생 나이부터 여자들의 누드와 난잡한 성생활에 노출돼 섹스 자체에 혐오감을 가지게 된 것 아니냐는 분석도 있다. 조지프 잭슨은 본래 부인 캐서린을 냅두고 걸핏하면 다른 여자들과 외도를 해 사생아까지 낳았고 그럼에도 가족 관계를 위해 "아무 일도 없었다고" 엄마에게 말할 때 심한 고통을 입었다고 한다.

정규 교육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는데 초등학교는 몇 년 다녔으나 잦은 공연 활동과 팬들의 교실 난입(...) 등으로 학교생활이 불가능했고 개인 교사에게 따로 지도를 받아서 정규 교육 코스를 마쳤다.

그가 아동 성범죄자로 의심받은 이유 중 하나는 이 트라우마로 인해 아이들을 자신의 집에 초청하여 아이들과 노는 것을 좋아했고 아이들을 자기 침대에서 재우는 것을 개의치 않아했기 때문이었다. 그냥 자기 집에 놀러온 애들에게 자기 침대를 양보하고 자신은 바닥에서 잠을 잤다고 하는데 거기에 그 어떤 성적인 의미나 행동도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면모가 2003년 방영된 《마이클 잭슨과의 삶(Living With Michael Jackson)》이라는 다큐멘터리에서 아동에 대한 이상한 취향을 가진 사람처럼 묘사가 되어 곤혹을 치렀다. 천하의 개쌍놈들[78] 하지만 자신의 트라우마를 아동에 대한 각별한 애정으로 승화했으며 'Heal the world' 재단을 설립하는 등 아동보호에 앞장서기도 했다. 'Childhood' 와 'Heal the World' 등의 노래와 그가 그린 그림들에서도 그런 트라우마가 엿보이기도 한다.

평범한 어린 시절에 대한 동경 때문인지 스스로 '제 인생은 내 안에서 잃어버린 어린 시절을 찾아가는 과정이에요' 라고 얘기했을 정도로 생전에 장난감을 사 모으거나 집을 놀이동산처럼 꾸며놓고 즐기는 등 키덜트적인 면모도 보였다.[79] 잭슨이 2005년에 아동 성추행 혐의로 소송을 벌이고 있을 때[80] 절친인 코미디 배우 크리스 터커가 코미디 쇼에 나와 80% 이상을 잭슨 이야기만 한 적이 있었는데[81]러시 아워 2》에 나와서 잭슨 춤을 흉내 내고 잭슨 집에 불려가서 하루 종일 산더미 같이 쌓아둔 피터 팬 동화책만 읽었다고 하며 그런 마이클 잭슨이 아이들을 나쁜 짓을 했을 리 없을 거라면서 그를 옹호했다.

실제로 잭슨 형제들이 음악 연습을 할 때 잭슨 형제들의 아버지 조 잭슨은 노래를 잘 부르지 못한다는 이유로 벨트채찍처럼 휘두르고 구두 신은 발로 차는 등 온갖 학대를 하였다. 또한 아이들이 밤에 창문을 열고 나가지 못하게 밤중에 무서운 가면을 쓰고 어린 마이클 잭슨의 방에 들어왔는데 그 공포에 대한 기억이 큰 충격이 되어 10대 시절 마이클 잭슨이 악몽에 시달리는 원인이 되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 조 잭슨은 자신의 기타를 건드렸다는 이유만으로도 애들을 두들겨 패는 등 집안에서 공포의 대상이었고 심지어 어린 시절 마이클 잭슨은 아버지의 얼굴만 봐도 부들부들 떨면서 기절하거나 구토 증세를 보이는 등 아버지를 심하게 무서워했다고 한다. 그 때문에 생전 아버지와는 사이가 나빴으며 유언장에서도 아버지 언급을 전혀 안했고 유산 분배에서도 어머니 캐서린과 자신의 세 자녀들에게만 유산을 상속, 아버지는 제외시켰다. 자녀들의 양육권 문제에서도 어머니만 언급되었고 심지어 자신이 사망한 후 자신의 자녀들을 아버지가 자신처럼 스타로 만들려고 할지도 모른다며 싫어했다는 루머까지 있다.

마이클 잭슨 본인은 인터뷰에서 이야기하기 꺼렸지만 그가 를 성인이 되어서 성형하게 된 이유중 하나는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코가 못생겼다는 말을 하도 들어서 코에 대한 콤플렉스가 매우 심했기 때문이다.

많은 팬들이 그의 아버지의 행동을 비난하고 있지만 사실 잭슨 남매들의 가수로서의 트레이닝은 다 이 사람 손에서 이뤄진 것이기에 그 공헌도는 무시 못 한다. 마이클 잭슨도 인정했듯이 아버지 조 잭슨은 그 자신에게 미스터리한 존재였을 뿐 부동산 투자니 뭐니 어린이 스타들이 돈 때문에 겪는 일들을 하나도 겪지도 않고 음악만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버지 덕분이었다고 했다. 그리고 조 잭슨은 자식들이 번 돈을 착복하지도 않았고 그대로 자식들에게 투자했다. 그러나 그 아버지로 인해 잭슨 남매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받았고 마이클 잭슨은 성장하고 나서도 애정 결핍에 자기애가 부족한 모습으로 살아가게 되었다. 그리고 9남매 전부 성인이 된 후 전부 폭력적이고 고압적이었던 아버지로부터 독립했다. 마이클 잭슨은 후에 여러 인터뷰에서 아버지와의 관계는 다소 좋아졌고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한다고 이야기했다. 그래도 여전히 껄끄러웠는지 끝내 앙금을 풀지 못한 채로 눈을 감았다.

지금도 몇몇 찌질이들이 '마이클 잭슨은 어린 시절 이야기로 동정 마케팅이나 한다.' 며 비난을 하지만 사실 잭슨 본인이 직접 나서서 어린 시절 얘기를 공식적으로 방송에서 한 건 두 번밖에 없다. 나머지는 자서전에서 몇 번 언급한 것이나 'Childhood' 같은 자전적인 곡에서 드러낸 것이다. 대부분 언론과 팬들이 그 부분에 과도한 관심을 표했던 것인데 정작 본인은 남들이 어린 시절에 대한 어두운 얘기를 물어오면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것인지 그다지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여담으로 2010년 조 잭슨은 마이클 잭슨 사망 관련 인터뷰에서 자신의 기업을 자랑스럽게 홍보했다고 하는데 결국 아내가 아들의 죽음을 홍보로 이용하는(...) 남편의 행동에 이혼을 요구하였고 결국 부부의 60년 부부 생활은 종지부를 찍었다.


9.3 여자와의 관계

다들 알다시피 잭슨은 여자 같이 곱상한 외모와 여자 같은 목소리를 가졌다. 또 한 때 잭슨이 80년대 친구를 따라 게이바에 출입했던 사실이 있어 동성애자가 아니냐는 소문이 돌았다. 얼마나 사람들이 잭슨의 성에 관심이 많았냐면, 우리나라 국내 언론 80년대 보도에도 잭슨이 동정인가와 관련된 보도가 있다. 93년 오프라 윈프리는 잭슨에게 아직도 동정이냐고 물어본다. 잭슨은 당황하며 자기는 신사라고 대답하는데

이에 대한 문제에서 잭슨의 전 매니저 프랭크 딜레오는 사람들의 편견과는 달리 잭슨은 활발하게 여성과 동침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같은 정보가 흘러나가면 팬 층에 큰 타격을 입게 될 것이라 쉬쉬 했다고 한다. 잭슨은 94년 엘비스 프레슬리의 딸인 리사 마리 프레슬리와 결혼을 하는데 리사 마리의 친구들은 리사는 남녀 간의 활동에서 성적 만족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며 리사가 잭슨에게 푹 빠진 걸 보면 (...) 잭슨이 침대에서는 고수가 아니냐는 의견을 제시했다. 이것이 맞다면 역설적으로는 잭슨이 소아 성애자라는 세간의 의혹에서 확실히 벗어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물론, 이 주장의 진위여부들은 잭슨 본인만이 알겠지만 ..

마이클 잭슨의 첫사랑은 흔히 '테이텀 오닐'[82]이 거론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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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둘이 구체적으로 어떤 사이였는지 돌아다니는 정보는 많지 않지만, 마이클은 2003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오닐이 나를 침대에서 성적으로 유혹했다. 하지만 나는 부끄러워서 이를 거절했다" 1년 뒤 오닐은 이 주장을 반박하고 "아니다, 잭슨이 나를 유혹했다" 고 주장하는데 ... 그렇다면 진실은 무엇? 이 또한 본인들만이 잘 알겠지만, 국내에 알려진 테이텀 오닐의 인터뷰 중에는 마이클 잭슨의 키스가 매우 서툴렀다는 내용이 있다. [[3]] 오닐은 친구 세서 잭슨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마이클은 섹스를 무서워하는 거 같아. 또 그가 제대로 된 연애를 할 수 있을 거 같아? 그는 나랑 같이 있을 때 고작 두 마디 정도 밖에 안 할 정도로 부끄러움을 타는 애야. 누군가는 이 부분에 대해 그 애랑 이야기를 해봐야 해" 이렇게 까지 말한 오닐을 생각하면 마이클의 말이 맞다 고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또한 앞서 언급한 잭슨이 오닐을 유혹했다는 말은 오역이라는 주장도 존재한다.

잭슨의 첫사랑이 15살 연상의 다이애나 로스라는 설도 있다. '에보니 매거진'과의 인터뷰에서 다이애나 로스를 사랑하고 있다고 하였다. 인터뷰어가 큰 누나로서 말인가? 라고 되묻자 마이클은 그런 종류의 사랑이 아닌발끈그녀와의 결혼을 원한다고 단언한다(!) 80년대초에 다른 인터뷰들에서도 로스와 결혼하고 싶다는 얘기를 한다.결과는.. 다이애나 로스의 결혼 후엔 대놓고 [시상식에서 굳은 표정을 짓기도 했다.] 눈치 보는 듯한 리즈 여사

80년대초 도청된 마이클의 통화녹취록을 보면 상술된 오닐과 다이애나 둘과 연관이 있었지만 진짜 남녀관계로 발전한것 같지 않다고 한다. 특히 다이애나에 관해서는 짝사랑이었다고 토로한다.

배우자에 대해서는 아래 가족 관계 항목으로.

9.4 가족 관계

결혼을 총 두 번 했다.

첫 부인은 엘비스 프레슬리의 딸인 리사 마리 프레슬리. 리사 마리와 결혼 이전에 세기의 스캔들이 있었기에 스캔들을 잠재우기 위해 유명인의 딸을 이용한다고 비난을 받기도 했다. 또한 당시까지도 빈민가 출신에서 용 된 흑인 스타라는 이미지가 있던 마이클 잭슨이 남부 출신 백인(정확히는 혼혈)인 리사 마리와 결혼을 하는 것은 미국 사회에서도 상당히 충격으로 다가왔다고 한다. 결국 리사 마리와는 9개월가량의 짧은 결혼생활을 유지하고 이혼했다.

이혼 이유는 연애할 때는 몰랐지만 성격 차이가 생각보다 심했고 자녀 문제에 있어 리사는 마이클의 아기를 낳는 게 과연 옳은 일일까? 고민을 해서 미뤘지만 마이클은 재촉하는 상황으로 이게 가장 큰 문제였다고 한다. 마이클이 "너가 아이를 안 낳으니까 데비가 아이를 낳아준다고 했어" 라고 말할 때는 죽여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 하지만 당시 타블로이드 언론에서 말했던 것처럼 '가짜 사이'는 결코 아니였고 리사와 마이클은 섹스도 하는 정상적인 부부였다고 한다. 이혼 후에도 잭슨에게 투어 공연을 초청받는 등 같이 식사도 하고 사이는 좋았다고 한다. 리사는 마이클이 "엘비스처럼 죽을 것 같아"라고 말했다고 증언했는 데 실제로 마이클은 엘비스와 비슷하게 죽어버렸다.

두 번째 부인은 자신의 친구이자 피부 치료를 돕던 간호사 데비 로우 이며 그녀에게서 연년생 남매 프린스와 패리스를 얻었다. 그러나 로우와도 99년에 이혼했다. 다만 잭슨은 별로 로우를 사랑하지 않았다고 하며 비주얼 상으로도둘의 어울리지 않는 조합에 주변에서 많이 의문을 제기했다고 한다. 그러나 로우와의 이혼 이후에도 계속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고 그가 성추행 누명으로 소송 중일 때 검사 측을 비판하기도 했다.

자녀로는 1997년 2월 13일생 프린스 마이클 잭슨, 1998년 4월 3일생 패리스-마이클 캐서린, 2002년 2월 21일생 블랭킷(아명)[83]이 있다. 생전에 자기 아버지가 9명이나 되는 자녀를 거느렸으니[84] 자기는 더 많이 가지고 싶다는 인터뷰를 했었는데 그가 세상을 떠나면서 실현되지 않았다. 참고로 프린스와 패리스는 아이들이 백인이라는 이유로 마이클 잭슨의 친자식이 아니다라는 설이 돌았고 심지어는 인터뷰에서 실제로 로와 성관계를 한 게 맞냐는 당혹스러운 질문을 받기도 했다. 사망 이후 친부가 아니라는 소문도 돌았다. 그러나 두 아이의 어머니 로가 프린스와 패리스는 마이클의 아이라고 인정했고 블랭킷은 루머가 많지만 지인들이 친부가 맞다 고 인정했다. 그런데 최근, 프린스 잭슨이 자신의 SNS에 "계약으로 맺어진 피는 자궁으로 맺은 물보다 진하다"라는 글을 올리기도 해 자녀들이 친자식인지는 다시 미스테리로 빠졌다. 그러나 입양에 대해 열린생각이었던 마이클이 친생자가 아닌 아이들을 양자로 들이지 않고 친생자라고 주장할 이유는 없다. 한편 첫번째 아들 프린스 잭슨은 수영복을 입고 있는 사진등에서 마이클과 같이 유전병인 백반증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마이클의 젊은 시절처럼 겨드랑이부분은 이미 변색이 많이 진행되었고 몸 전체적으로 군데군데 하얗게 변한 흔적이 보인다. 물론 마이클도 부계에서 이 유전병을 받은것. 마이클의 형제들도 마이클만큼 심하진 않지만 백반증이 있다. 또한 막내 블랭킷은 클수록 마이클의 외모를 빼닮아귀엽다마이클의 아이들 중 가장 관심을 많이 받기도 한다.

실제로 흑인과 백인의 결혼에서 흑인 우성이 보이는 경우가 많은데 예외도 많다. 《프리즌 브레이크》에 출연한 배우 웬트워스 밀러의 경우는 쿼터인데도 거의 완전한 백인 얼굴이다. 그럼에도 어떻게 연속적으로 아이 셋이 백인이 나올 수 있는지에 대한 논란이 많았는데 최근 성장한 패리스 잭슨의 공식 사진을 참고하면 피부 빛이 미디엄 브라운에 가까운 것을 알 수 있다.[85] 혈통 상으로 마이클 잭슨도 쿼터이기 때문에 아이들의 피부 빛이 상대적으로 밝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97년에 첫 아이인 프린스가 태어났을 때 병원 근처에 아기 사진을 찍으려는 취재진이 가득했고 헬리콥터까지 동원되는 등(...) 큰 이슈를 끌었는데 그 때문에 아이들의 납치나 범죄를 우려하여 생전에 항상 애들 얼굴을 가리고 다니게 했다. 그러나 그의 사후 장례식에서 아이들이 공식적으로 얼굴을 드러내면서 이제는 언론에도 자주 얼굴을 내비친다. 그의 생전에는 자녀 모두 홈스쿨링을 했으나 사후에는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패리스 힐튼은 잭슨 사후에 그의 딸 패리스의 이름은 마이클 잭슨이 자기 이름을 너무 마음에 들어 해서 자기 엄마에게 동의를 얻고 패리스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얘기한 적이 있는데 그냥 헛소리 중 헛소리다. 마이클 잭슨과 패리스의 어머니는 유년 시절에 같은 학교를 잠시 다녔고,[86] 힐튼가 사람들은 사적으로도 잭슨의 집에 초대받아서 노는 등 절친한 사이긴 하지만 딸 패리스의 이름은 딸이 태어난 곳이 프랑스 파리였기 때문에 붙여졌다. 이때 패리스 힐튼은 괜히 잭슨과의 친분이나 부각시키려고 헛소리를 한다며 미국 팬들에게 가루가 되도록 까였다. 천재들 주변에는 항상 똥파리들이 꼬인다.

잭슨 남매들과는 언론에 보여 지는 것처럼 그리 사이가 썩 좋은 편은 아니었다고 한다. 어렸을때부터 자신을 키워준 큰 형인 잭키[87]와 한 살 터울인 말론과 막내 동생인 자넷 잭슨과는 절친한 사이였지만 다른 남매들의 경우는 자신들의 명성과 비교도 안 되게 크게 성공한 형제인 마이클을 질투했다고 하며 형제자매들이 벌이는 사업에 음반 작업에 돈을 대주는 등 80년대 말까지 마이클 잭슨이 형제들을 거의 업어 키웠다. 마이클 잭슨이 90년대 초부터 거의 형제들과 연을 끊고 살았던 이유이기도 하다. 특히 저메인, 랜디, 라토야가 잭슨 가족의 명성에 흠집을 내는 짓을 워낙 많이 했고[88] [89]특히 랜디에게는 금전적, 정신적 피해를 크게 입었다. 마이클 잭슨이 두 번째 성추행 스캔들로 고생하고 있을 때 마이클 잭슨을 협박하여 금전을 뜯어내고 판권을 매각하라고 강요하기도 했고, 이를 들어주지 않을 시에는 마이클 잭슨이 끔찍히 싫어하는 타블로이드지에 마이클에 대한 루머를 뿌리겠다고 위협하는 바람에 마이클 잭슨이 법원을 통해 친형제를 대상으로 접근금지 신청까지 받아냈다. 그러자 랜디는 마이클 잭슨 자택의 대문을 자동차로 들이받아서 쳐들어왔는데(...) 하도 막장짓을 심각해서 랜디를 개인 경호원으로 위협해서 쫓아냈을 정도였다. 이러한 사정을 아는 사람들은 잭슨 사후 그의 형제들이 그의 유산을 놓고 육탄전을 벌이거나 잭슨의 이름을 걸고 사업을 벌이며 VIP 대접을 받으며 다니는 것에 공분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이를 주도하고 있는 사람들은 잭슨의 생부인 조셉 잭슨(...) 아들이 죽고 나니 드러나는 본심

잭슨 남매의 생년월일이다.

  • 장녀 래비 잭슨 - 1950년 5월 29일 생
  • 장남 잭키 잭슨 - 1951년 5월 4일 생
  • 차남 티토 잭슨 - 1953년 10월 15일 생
  • 3남 저메인 잭슨 - 1954년 12월 11일 생
  • 차녀 라토야 잭슨 - 1956년 5월 29일 생
  • 4남 말론 잭슨 - 1957년 3월 12일 생
  • 4남 브랜든 잭슨 - 1957년~1957년
  • 5남 마이클 잭슨 - 1958년 8월 29일 생
  • 6남 랜디 잭슨 - 1961년 6월 23일 생
  • 3녀 자넷 잭슨 - 1966년 5월 16일 생


9.5 목소리

마이클 잭슨은 가수로 데뷔 이후부터 죽을 때까지 변성기가 안온 것 마냥 여리고 가는 목소리를 유지했는 데 이 때문에 그가 여성호르몬 주사를 맞는 거 아니냐, 고자냐는 루머가 퍼졌다. 그러나 변성기가 안온 건 아니고 실제로 오긴 왔고 그래서 70년대 후반에는 예전처럼 자유롭게 노래를 부를 수는 없었다.

친어머니 캐서린 잭슨에 의하면 잭슨 집안은 선천적으로 고음을 가진 사람이 많았고, 마이클의 형제 재키 잭슨의 목소리도 들어보면 60대 남자답지 않게 목소리가 되게 얇다... 모든 남자들이 변성기가 온다고 목소리가 굵어지는 건 아니다 남자와 여자의 목소리 차이는 성대의 차이인데 마이클 같이 극소수의 남자들은 변성기가 와도 여자 수준까지 자라고 멈춘다..

세스 릭스와 리사 마리 프레슬리의 증언에 따르면 마이클의 실제 목소리는 'You are not alone'이나 'Heal the World'에서 듣는 만큼 매우 고음은 아니고 우리가 생각하는 목소리보다 좀 더 낮았다고 한다.

마이클 잭슨의 목소리는 투어 때 마다 확연히 달라져갔으며 Bad World Tour의 빌리진과 Royal Brunei의 빌리진을 비교하면 그 차이를 극명하게 알 수 있다.


9.6 백반증과 외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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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중반 사진. 이미 백반증이 상당히 진행되고 있던 때였다.

잭슨의 안면백화에 대해서는 말이 많은데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수차례의 박피 수술을 통해 피부가 점점 하얗게 되었다거나 성형수술의 후유증이라고 생각하지만[90] 사실 피부에서 멜라닌이 점점 사라지는 백반증이란 병에 걸렸을 뿐이다. 원래 마이클 잭슨에게는 백반증 유전자가 있었고[91] 자극을 받으면 증상이 심해지는 백반증의 특성상 80년대 중반 펩시 CF 촬영 중 입은 화상 이후에 특히 심해졌다. 그런데 그 백반증이란 피부 표면 전체의 멜라닌이 서서히 옅어지는 것이 아니라 부분적으로 탈색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피부가 표범처럼 얼룩덜룩해진다. 또한 80년대 중반까지는 결핵성 피부 질환인 루푸스를 앓고 있었다. 특히 두피에 2도 화상을 입은 후에 산소 치료를 받는 과정에서 피부색이 점차 변하기 시작했는데 흰 피부 부위가 넓었던 잭슨은 짙은 화이트 메이크업으로 변색 부위를 가리고 다녔다. 80년대까지만 해도 일반적인 메이크업으로 커버가 가능했는데 변색 부위가 넓어져 가면서 보통 파운데이션으로는 커버가 거의 불가능한 지경까지 갔다고 한다. 가장 밝은 샤넬 파운데이션으로도 커버가 안 되어서 마이클 잭슨의 메이크업 담당자 카렌 페이가 다른 연예인의 메이크업 아티스트에게까지 파운데이션을 빌리러 갔었다는 후문이 있다. 그래서 실제로 그를 본 사람들은 화면에서 본 것 이상으로 백납 같이 하얗다고 전한다.

백반증에 걸리면 피부가 상당히 약해지기 때문에 항상 햇빛을 가리고 다녀야 한다. 그 때문에 피부가 옅어진 이후 마이클 잭슨의 필수품(?)은 양산과 모자(중절모), 장갑[92], 선글라스였다.[93]
덧붙이자면 백반증은 유전될 확률이 상당히 높다. 백반증 유전자는 아버지 쪽에서 온 듯하며 실제로 잭슨의 형인 티토 잭슨이나 말런 잭슨도 백반증 증상이 있다고 한다. 말런의 경우는 등에 백반증이 심하다고. 게다가 마이클 잭슨의 첫째아들인 프린스 잭슨마저 백반증이 있는것으로 사진으로 확인되었다. 프린스는 겨드랑이 부분에 넓은면적으로 백반증이 진행되고 있다. 마이클잭슨의 백반증 병력은 93년 오프라 윈프리 쇼에서 처음 밝혀졌는데, 이로 인해서 그 당시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백반증이라는 병에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사후 LA 검시 청에 의해 실제로 백반증(vitiligo)을 앓고 있었다고 밝혀졌다. 피부색이 완전히 하얗게 변한 데는 마이클의 친어머니인 캐서린에 의하면 잭슨은 병으로 피부가 얼룩덜룩 해지는 것이 보기 싫어 탈색제를 발라 피부를 완전 하얀색으로 착색했다고 한다.
마이클의 주치의에 따르면, 마이클 본인이 원해서 탈색을 한게 맞다고 한다.출처:백반증 알파에서 오메가까지 한승경저
또한 위 책에 의하면, 상기한 장갑 및 모자등을 쓰는 이유는 탈색소수술을 받았기 때문에 멜라닌 색소가 약해져서가 더 강하다고 한다.

흔히 인터넷에 잘못 알려진 정보로는 마이클 잭슨이 탈색치료를 받지 않았는데도 그냥 전신[94]이 하얗게 되는 백반증에 걸려서 하얗게 됐다고 와전된 정보가 돌아다닌다. 하지만 어머니인 캐서린 잭슨과 담당의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확실히 탈색치료를 받았다고 하는데 이 부분을 백인이 되고 싶어서 그랬다고 해석하기는 어렵다. 또한 대중에 노출된 그의 하얀피부가 100% 백반증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것 역시 무리가 있다. 그러나 원래 검었던 그의 얼굴에 하얀 부분들이 나타나 하얀 부분이 검은 부분보다 많아지게 되었다면 당연히 검은색을 다시 칠하는 것보다는 검은 부분을 하얗게 탈색하는 것이 효율적이기 때문에 그런 의도에서 그가 탈색치료를 받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즉 최종적으로 80년대 후반과 90년대에 접어들면서 나타난 그의 하얀 얼굴은 백반증으로 인한 탈색치료를 하고 그 상태에서 하얗게 메이크업을 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햇빛에 노출되는 것을 꺼려하여 선글라스와 모자, 긴소매옷, 검은 옷 등을 애용했다고 할수있다.

마이클 잭슨의 성형 전 본래 외모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흑인과는 달리 아프리카계(그의 고조부가 흑인 노예 출신이다)+아메리칸 원주민 계(아버지 혈통)+히스패닉(마이클 잭슨의 어머니) 계통이 섞인 외모이고 형제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피부가 구릿빛이 아닌 사람들도 있다. 누나인 라토야 잭슨만 봐도 백인이 살짝 태닝한 듯한 피부색이다. 티토 잭슨의 아들들인 3T 역시 마찬가지. 참고로 백반증은 흑인뿐만 아니라 다른 인종에게도 올 수 있다. 피부가 검은 흑인에게 유독 두드러질 뿐이다. 흑인이 얼굴 부위에 백반증을 앓게 될 경우에는 큰 정신적인 고통을 경험하며 대부분은 검게 변한 부위를 짙은 파운데이션으로 가리거나 흰 부위에 맞게 다른 피부를 밝은 파운데이션으로 가리기도 한다. 한때 잭슨 사후에도 피부색 변화에 대해 말이 많자, 한 방송에 백반증을 앓고 있는 저널리스트 리 토마스가 출연하여 자신의 민낯을 공개하고 백반증 환자들의 고충을 고백하면서 마이클 잭슨을 옹호하기도 했다.

또한 마른 몸매의 소유자였다. 키가 175cm인데 몸무게가 심할 땐 50kg밖에 안 나갔다. 본래는 채식주의자[95]이자 소식(少食)주의자였다. 어머니인 캐서린 잭슨의 자서전에 의하면 사람이 아무것도 먹지 않고도 살 수 있다면 난 음식을 먹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음식을 잘 먹지 않았다고 한다. 심지어는 다이애나 로스가 억지로 음식을 먹이려고 노력도 했다고 한다. Dangerous 투어 당시에는 체력 증진을 위해 적절한 닭고기 섭취와 헬스를 병행했다고 한다. 그래서 나오미 캠벨과 함께 한 'In the Closet' 뮤직비디오에서는 하악하악한(...) 팔 근육을 만들기도 했다.[96]

마이클 잭슨은 아버지의 외모 학대로 인해 코 부분에 컴플렉스를 가져 성형수술에 대해 고민을 가졌지만 막상 성형수술의 부작용 때문에 두려움을 겪고 망설이다 1979년 영화 《위즈》 촬영 당시 무대에서 넘어져 코가 부러지는 사고가 발생해 처음으로 수술을 했다. 잭슨은 자서전에서 두 번의 코 성형과 턱에 홈을 파는 성형 사실을 인정했다[97] 마이클 잭슨의 외모 변화는 86년부터 이뤄졌는데 거의 유러피안처럼 변한 얼굴로 87년에 'BAD' 로 컴백했을 때 그야말로 충공깽이었는지 당시 전 세계적으로 격렬한 논쟁거리였다고 한다. 정보 교류가 빈번한 지금도 마이클 잭슨의 성형은 논쟁이 되곤 하는데 인터넷도 활성화되지 않았던 당시에는 그때 서서히 나타난 백반증 증상 때문에 피부까지 옅어져 백인이 되고 싶어서 피부 표백과 성형을 했다는 등의 카더라 통신이 엄청나게 돌았다. 성형의 경우는 본인이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은 세 군데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마이클의 말을 믿지 못 했고 더 많은 성형을 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마이클의 모친 캐서린 잭슨 여사의 증언에 따르면 마이클은 성형 중독일 정도로 외모에 집착했다고 한다. 사후에 부검 결과 눈썹과 이마라인, 입술에 문신이 되어있었다는 것이 밝혀졌는데 생전에도 얼굴 몇 군데에 문신을 해서 이미지에 변화를 준 것으로 보인다. 눈썹하고 이마라인 문신이야 흔한 미용 문신이고 입술은 아마도 백반증 때문에 한 것으로 추정된다. 백반증이 입술에 번지면 입술이 하얗게 된다. 사람들이 놀랐다고 말할 때 하얀 게 아니라 물감 칠한 것처럼 하얗다. 비주얼 변화에는 체중 감량이 큰 요인이었는데 91년 'Dangerous' 활동 시기의 체중은 48kg(...)이었다고 한다.

또한, 머리가 전형적인 흑인의 곱슬머리에서 직모로 변하는데, 이는 펩시 광고 화상 사건 이후에 두피가 손상 되어 가발로 대체한 것이 아니냐는 말이 있다. 그런데 투어 때의 모습을 보면 분명한 곱슬머리를 하고 있다.

40대에 들어 그의 성형 부작용에 대해서 말이 엄청나게 많았었는데 사실 장기간에 걸친 SONY와의 불화, 2년 동안 이어진 성추행 소송으로 스트레스가 심했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