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성기의 휘트니 휴스턴. 1991년 'Saving All My Love for You' 을 부르는 모습.
2010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내한했을 때 모습.
팝 여제의 '현신' ((現身)이었던 The Bodyguard (1992) 활동기의 앤→다↗~~~~리↗아↘ 〈I Will Always Love You〉 [1]
목차
1 개요
The Voice # [2]
위대한 가수, 슈퍼스타, 흑인여성 최초의 아메리칸 스윗하트
팝뮤직 역사상 최초의 디바이자, 가스펠 뮤직에 음악적 뿌리를 두고 모든 장르를 지배한 최고의 보컬리스트
Whitney Elizabeth Houston
1963년 8월 9일 ~ 2012년 2월 11일. 미국 뉴저지 뉴워크 태생.
휘트니 휴스턴은 미국 팝 가수로서 팝계의 전설적인 디바였다. 가창력이 빼어난 여자 가수에게 디바라는 호칭을 부여하기 시작한 것은 휘트니 휴스턴이 최초였다. 말하자면 디바의 원조인 셈이다. 가창력도 유례없는 원탑으로 불렸다. 보통 최고의 여자 보컬리스트를 뽑을 때 항상 최고로서 인구에 회자된다. 보통 'Queen of Soul' 아레사 프랭클린 바로 다음으로 친다. 국내에서도 머라이어 캐리, 셀린 디옹과 함께 90년대 3대 팝 디바로 꼽힌다. 특히, 머라이어 캐리와는 매체들의 기사 소재 발굴로 인해, 종종 라이벌로 표현되기도 했다.
비록 말년엔, 전성기 시절인 보디가드 이전부터 시작한 마약의 남용으로 심신이 망가졌고 흡연으로 인해 그 목소리를 상당히 잃어버렸지만 여전히 많은 미국인, 세계인들은 그녀는 The Voice로 추억한다. 휘트니 휴스턴의 데뷔는 1985년으로 다른 둘보다 무려 5년이나 빨랐으며 데뷔부터 이미 올킬모드로 차트를 접수했고 전세계적으로 솔로 여가수 붐을 일으켰다. 그 때문에 시기상 쇠락기도 생각보다 일찍 찾아왔으며[3] 한 번 침체기를 겪었다가 다시 재기에 성공한 머라이어 캐리와 달리 결국 마약중독, 과다한 라이브 공연으로 인한 목소리의 변화 등 여러 이유로 완벽한 재기에는 실패했다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1990년대를 산 위키러라면 대표곡은 몰라도 '엔다~ 이야~'는 다 알 것이다. 'I Will Always Love You'은 그녀의 대표곡이자 주연작인 1992년 개봉 영화 보디가드 OST로 널리 알려졌으며 워낙 명장면에 명곡이라 한국에서 엄청나게 패러디되기도 했다. 초사이언의 왕자인 베지터조차도 모창했을 정도 [1]
2 예술성 및 영향력
2.1 가창력
별명이 'The Voice (목소리)'인 데서 알 수 있듯, 여자 보컬 가창력의 전형을 제시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흑인 보컬로서 흑인 음악의 두 뿌리라고 할 수 있는 가스펠과 리듬 앤 블루스 양자를 당대에 맞게 세련되게 풀어내는 해석력이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녀의 라이브 영상을 본다면 동일한 곡을 단 한 번도 동일하게 부르지 않는다. 본래 가스펠 음악 집안 출신으로 데뷔 초기에는 백인 취향의 컨템포러리 팝에 흑인 목소리만 얹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으나, L.A Reid와 Babyface를 위시한 여러 흑인 아티스트들의 집중지원을 받아 흑인으로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시발점이었던 3집에 이르러서는 흑인사회에서도 비로소 그 예술성이 인정받기 시작한다.
'집대성'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여성 흑인 보컬의 모든 것을 상징하는 인물이지만, 그중에서도 휘트니 휴스턴이 가진 가창력의 핵심이라면 특유의 음색과 그를 뒷받침하는 공명감이다. 휘트니의 음색은 막힘없이 쭉 뻗으면서도 깊은 배음이 울려서, 아주 두텁고 단단한 공명감이 곡 전체에 울린다. 이러니 아무리 노래를 잘 하는 보컬이 휘트니의 노래를 불러도, 분명 휘트니의 공명감보다는 약하기 때문에 '뭔가 부족하다'고 느껴지는 것.
본래 데뷔했을 때엔 기존의 흑인 알토들이 공유하는, 비성으로 집중된 두성의 공명감을 사용했고, 이때에도 이미 따라올 사람이 없었지만, 그 이후로 휘트니는 점점 더 공명감을 늘려갔고 벨팅, 특히 인 골라 테크닉까지 결합하기 시작했다. 즉, 야구의 투수가 팔 근육을 뒤틀어 인간이 일반적으로 낼 수 없는 시속 140km의 공을 던지듯, 음을 만드는 조음부의 근육을 한계 이상으로 확장시켜 거대하게 울리는 소리를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런데 휘트니 휴스턴의 위대함은 그 이후에 드러난다. 당연히 이런 식으로 조음부 근육을 확장시켜 깊은 소리를 만들어 내면, 벨팅에서 그렇듯 발음이 무너지고 특히 섬세한 리듬감에 취약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휘트니 휴스턴은 그 한계까지 울리는 공명감을 가진 소리로 완벽한 발음과 그루브를 만들어냈다. 두성은 아름다운 음색과 뛰어난 공명감을 가지고 있지만 발음이 부정확하고 파워가 딸리며, 믹스보이스는 성구 변환이 자유롭고 그루브를 타는 데 좋지만 얇고 약한 소리이며, 벨팅은 파워 하나만은 최강이지만 발음이 무너지고 성대근육이 긴장해서 리듬을 타기 어렵다. 휘트니 휴스턴은 그 모두를 섞어버렸다. 그리고 모든 소리를 완벽하게 컨트롤했다. 물론 그 대가를 혹독하게 치러야 했지만...
멜리스마(melisma) 기교를 팝에 본격적으로 도입한 인물이기도 하다. 멜리스마는 한 음절을 다양한 음으로 쪼개 부르는 기교를 말한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앤다~이야~'가 멜리스마의 대표적인 예. 'And I'에서 I라는, 한 음절에 불과한 가사를 8개의 음으로 쪼개서 부르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휘트니 휴스턴이 멜리스마를 최초로 사용한 아티스트인 것은 아니며 스티비 원더를 비롯한 흑인 아티스트들이 제한적으로 사용한 것을 휘트니가 본격적으로 도입한 것. 이후 극한까지 멜리스마를 밀어붙인 기교의 머라이어 캐리가 등장하며 멜리스마는 가창의 기본적인 기교로 자리잡게 된다. 2010년대에 들어서야 개나소나 다 하는 멜리스마지만 당시에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2.2 상업성과 영향력
또한 그녀는 여성가수의 상업성을 한단계 업그레이드한 가수로 평가받는다. 그녀는 여가수중 가장 많은 기간동안 앨범차트 1위를 차지했고 가장 많은 상을 받은 아티스트이다. 즉 압도적 가창력을 상품가치로 지닌 가수가 얼마나 굉장한 상업적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 첫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 전에도 노래를 잘하는 가수는 많았지만 휘트니처럼 싱글 앨범 비평까지 모두 성공한 여가수는 없었다. 그 결과 미디어에서는 뛰어난 여가수에게 붙여주던 '디바라는 칭호를 휘트니에게 붙이기 시작했다.
'디바'라는 칭호를 가지고 소위 '3대 디바'인 머라이어 캐리, 휘트니 휴스턴, 셀린 디옹의 팬들이 끊임없이 치고받았고 심지어 지금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휘트니 휴스턴의 위대한 점은 '최초'라는 데 있다. 현대에 와서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우아한 롱 드레스를 입고 무대에서 웅장한 오케스트라 반주에 맞추어 고급스러운 발라드를 부르는 뛰어난 가창력의 흑인 여가수'를 대중들과 평론가들에게 인정하고 받아들이게끔 만든 것이 휘트니 휴스턴이기 때문이다.
휘트니 이전에도 저 멀리 아레사 프랭클린, 다이애나 로스, 티나 터너를 비롯한 위대한 흑인 여성 보컬리스트들은 많았지만 주로 가스펠, 리듬 앤 블루스나 소울, 훵크, 디스코 등 흑인음악에 치우치며 '백인음악보다는 뒤떨어진 저질음악' 취급을 받은 것이 사실이고, 휘트니 휴스턴은 바로 이런 인종차별적인 분위기에 정면으로 맞선 아티스트라고 할 수 있다.
'블루 아이드 소울'이라는 단어에서 볼 수 있듯 80년대 이전까지 팝의 역사는 과장해서 말해 '흑인들이 새로운 장르를 만든다 → 백인 업계에서 이 음악장르를 백인 가수들에게 부르게 한다 → PROFIT! → 주도권을 빼앗긴 흑인들이 다시 새로운 장르를 만든다 → ...'의 반복이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드림걸즈에서 묘사하듯 저작권 의식이 발달하지 않았을 때는 아예 곡 자체를 마음대로 가져다가 백인 가수한테 부르게 시키는 일도 많았다. 엘비스 프레슬리에 대해 거의 언급되지 않는 어두운 면이며 저스틴 비버나 저스틴 팀버레이크의 예에서 볼 수 있듯 현재에도 이런 경향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이런 경향에 정면으로 저항하여 깨부순 최초의 아티스트가 마이클 잭슨 이었으며[4] 음악의 엄청난 흥행과 함께 현란한 춤기술로 백인댄서들을 압살하며 음악의 인종적 장벽을 허물었다. 그리고 그 분위기에서 등장한 것이 '흑인' '여성'이었던 휘트니 휴스턴이다.
마이클 잭슨이 가창력, 음악성, 댄스, 세트와 무대, 뮤직비디오까지 완벽하게 결합된 '엔터테인먼트' 그 자체를 상징한다면 휘트니 휴스턴은 압도적인 가창력을 상징한다. 휘트니 휴스턴은 백인 취향으로 여겨졌던 (소위 MOR이라고 하는) 고급스러운 발라드 음악을, 그 어떤 백인 여가수도 흉내낼 수 없을 만큼 뛰어난 가창력으로 불러냈다. 아무리 곡을 모방하거나 스타일을 모방한다고 해도 휘트니 휴스턴의 가창력만큼은 누구도 모방할 수 없었다. 아니, 오히려 휘트니 휴스턴 자신이 'I Will Always Love You'를 리메이크 하며 누구도 자신을 모방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휘트니의 음악적 예술성과 영향력을 보여줄 수 있는 가장 단적인 예는 바로 유명한 그녀의 미국 국가 제창이다. 슈퍼볼에서 제창한 이 국가는 휘트니 이후에 대형 이벤트에서 불리는 국가의 스타일 자체를 바꿔 놓았다. 우선 이 버전을 위해 국가를 기존의 3/4 박자에서 4/4 박자로 편곡해 한음한음 더 곱씹어 의미를 담아 부를 수 있게 바꿨고, 이 노래의 하이라이트 부분인 "free" 부분에서 가성 애드립을 처음으로 선보였다. 이 이후에 대형 행사에서 유명 가수가 부른 미국 국가에서 *한번도* 이 애드립이 빠진 적이 없다. 곡 자체가 대중에게 인식되는 방식 자체를 바꿔버린 것이다. 비록 본 행사에서는 음향과 바람 등의 이유로 립싱크를 했지만 후에 라이브 버전을 부름으로써 립싱크가 실력이 모자라서라는 의심을 바로 없애버렸다. 역대 슈퍼볼 국가제창하면서 츄리닝에 머리띠두르고 나와서 부른사람으로도 유일하다. #link
비록 휘트니 휴스턴 본인이 인종차별 운동에 참여한 건 아니지만, 그녀 스스로 흑인이기에 그녀의 엄청난 성공이 결과적으론 흑인사회에도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더불어 미국 국가는 휘트니의 제창 이전에는 흑인에게는 꺼려지는 국가였다. 인종 차별과 미국 노예제도의 이미지가 너무나도 많이 서려있는 가사 내용이기 때문이었는데, 가장 자랑할만한 보배와 같은 흑인 디바가 미국을 대표해 이 곡을 부름으로써 흑인이 국가를 부르기 자랑스러워 지는 효과를 낸 것이다. 그녀의 음악 활동은 보수적인 80년대 사회에 MTV에는 그녀의 뮤직비디오들이 주구장장 나오게 했고 그녀의 성공은 단순히 미국뿐 아니라 전세계로 퍼져나갔다. 그녀가 단순히 흑인 여가수중 1등이 아닌 모든 가수 통틀어 최고의 자리에 올라간 것만으로도 흑인들에 대한 업계 대우는 달라졌다.
3 두 디바와의 관계
휘트니의 3집이 전작에 비해 다소 부진한 성적을 기록중이던 1990년 (그래도 싱글차트 1위곡 2개 배출), 소니 레코드의 토미모톨라는 휘트니 휴스턴의 위대한 아성을 조금이라도 무너트리기 위해 브랜다 케이 스타의 백업싱어로 일하고 있던 머라이어 캐리라는 보컬리스트를 발굴하고 데뷔시키게 된다. 머라이어 캐리의 데뷔는 간접적으로 미국의 대중이 휘트니를 평가하는 방식을 바꾸게 되었다.[5] 둘의 창법과 곡 스타일이 유사하지만 머라이어의 피부색이 좀 더 하얗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휘트니는 "흑인이기 때문에 태생적으로 노래를 잘한다", "흑인 특유의 타고난 것이지 빼어난 인간승리라고 보기 힘들다" 라는 평가를 받게 되었으며 머라이어 캐리는 "노력파" 에 "태생적인 한계를 노력과 재능으로 극복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게 된 것이다.[6] 이런 평가가 그녀의 전성기때 크게 바뀌지 않은 것은 굉장히 아쉬운 일이다. 머라이어 캐리에 비해 휘트니 휴스턴의 가창적 음악 역량이 뛰어나고, 대신 머라이어 캐리는 다른 디바들이 하지 못한 '송라이팅'과 '프로듀싱' 능력을 갖고 있다고 정리하는 게 맞다. [7]#link
이후 셀린 디옹이라는 어덜트 컨템포러리 팝계의 막강한 뉴페이스가 등장하자[8] 97년 두 디바는 합심해 이집트 왕자 OST인 'When You Believe'를 내놓는다. 한편 'When You Believe'를 녹음할 때 두 디바가 누구 이름을 먼저 넣는지로 싸웠다거나 사이가 너무 안 좋아서 서로 얼굴조차 마주치지 않고 녹음을 따로 했다는 둥 루머가 많았지만 둘이 같은 녹음실에서 녹음한게 맞고 두 디바는 공식적으로는 이 설을 부정하며 자신들이 좋은 친구다 라고 했다.
결과적으로 'When You Believe'는 빌보드 15위라는, 두 디바의 이름값에 비해 초라한 결과를 내고 만다. 그리고 몇 개월 뒤 셀린 디옹이 타이타닉의 'My Heart Will Go On'를 터트리며 세 디바는 라이벌 구도를 떠나 각자의 길을 걷게 된다. 휘트니 휴스턴은 마약 등으로 계속 내리막길을 걷다가 재기의 발걸음을 내딛었으나 2012년 결국 사망했고, 머라이어 캐리는 몇 년 간의 암흑기를 겪다가 디바 자리를 내려놓고 힙합 노선을 타며 자유로운 아티스트의 길을 걷게 된다. 셋 중 가장 모범생이었던 셀린 디옹은 디바다움(?)을 유지하며 앨범과 투어 활동에 집중하고 있다. (물론 셀린디온도 남편 암투병에 의한 병간호로 몇년동안 본의 아니게 음악활동을 못하긴 하였다.)
4 데뷔 및 초기 경력
어머니가 가스펠 가수인 씨씨 휴스턴이며 사촌인 디온 워윅, 그리고 대모가 '전설의 가창력' 아레사 프랭클린 등 사촌 형제들도 가수인 뮤지션 집안 혈통이다. 어머니 공연 때 코러스로 서다가 음반 기획자이자 프로듀서인 클라이브 데이비스 눈에 들어서 데뷔했다. 1985년 셀프 타이틀 데뷰 앨범인 'Whitney Houston'을 내게된다. 이 앨범 장장 2년에 걸친 프로젝트로 제작비로 40만불을 쏟아부은 대형 프로젝트다. 데뷔음반은 초반에는 부진했지만 싱글히트 (You Give Good Love 3위, Saving All My Love for You 1위, Greatest Love of All[9] 1위, How Will I Know 1위)와 입소문으로 뒤늦게 빌보드 차트에서 14주동안이나 1위를 차지하고 미국 내 총판 1000만장 및 월드와이드 2500만장이 넘게 팔리면서 여자 가수 데뷔 음반 최고판매기록을 갱신했다.[10]
하지만 당시 그래미 어워드 신인상에는 후보에도 오르지 못하게 된다. 공식적인 이유는 과거 참여했던 듀엣곡들 때문. 그러나 이후 앨라니스 모리셋이나 에이미 와인하우스, 노라 존스 등의 예를 보면 그냥 당시 그래미가 지금보다 훨씬 흑인에게 매정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11] 80년대는 흑인 여자 솔로가수의 존재 자체가 금기시되던 시절이다.[12][13] 반대로, 휘트니 휴스턴이 큰 성공을 거둠으로서 흑인 여자 솔로 가수의 유리천장이 깨지기 시작했다. 이 시기부터 빼어난 가창력을 바탕으로 오페라의 주역 프리마돈나에게 쓰였던 호칭인 디바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1987년에 발매된 2집은 소포모어 징크스[14]는 개나 줘버리고 대성공을 거두면서 80년대 마이클 잭슨의 뒤를 이어 마돈나, 프린스와 함께 대표가수로 자리매김한다. 대중적 인기의 마돈나를 87년 AMA에서 떡실신 시켜버릴 정도로 대중성과 음악성 모두를 겸비한 그녀였다. 2집 Whitney 앨범은 전작의 히트메이커였던 나라다 마이클 월던과 마이클 매서를 주축으로 하여 적작의 히트공식을 충실히 따라갔으며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여성최초로 빌보드 앨범차트 1위로 데뷔했고 총 11주간 정상에 머물렀으며 4곡의 빌보드 1위곡과 월드와이드 합산 2100만장의 판매량을 기록했다. 특히 이 앨범은 유럽쪽에서는 전작보다 더욱 히트하여 그녀를 확고부동한 월드스타로 만들어준다.
하지만 1~2집 당시 휘트니는 다분히 백인취향의 음악만 한다는 비판에 시달리기도 했다. 백인 취향 어덜트 컨템포러리 팝을 소울 창법으로 부른 것에 불과하다는 평. 실제로 백인 대중의 입맛을 잡기 위한 마케팅이기도 했다. 휘트니보다 조금 일찍 활동을 시작하고 80년대의 리듬 앤 블루스 계를 불태운 아니타 베이커에 비하면 확실히 덜 검은 음악임은 사실이다. 일례로 1989년 대표적 흑인음악 시상식인 소울트레인 어워드에서 후보로 휘트니 휴스턴을 지명하자 관객들이 일제히 야유를 터트릴 정도였다고 하니 흠좀무. 이런 비판에 그녀 스스로도 스트레스가 많았던 것 같다. 하지만 한 인터뷰에서 자신은 특정 집단의 취향에 맞춘 음악이 아닌 자신만의 음악을 한다는 당당한 답변으로 그녀가 가진 생각을 대중에게 나타냈다. 동 시기 당시 잘나가던 바비브라운 (앨범의 5 싱글이 모두 top 10에 안착하고 싱글차트 1위곡 2곡 배출, 뉴 잭 스윙의 신성이자 당해년도 빌보드 종합 1위 가수...이었던)을 만나기도 했는데 그가 그녀에게 흑인 가수로서 자부심을 심어줬다고 한다. 회사에 요구에 충실히 따르기만 했던 1~2집 과 달리 이젠 슈퍼스타가 돼 버린 휘트니는 3집에 자신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반영했고 결국 1991년 발매된 3집 I'm Your Baby Tonight에서 그녀는 기존 프로듀서진의 참여를 최소화 시키고 베이비 페이스와 엘에이 레이드를 메인 프로듀서로 수혈했으며 그녀 자신도 프로듀싱에 참여하여 본격적인 흑인음악을 시도하게 된다. 결과는 전작들의 눈부신 성공에 비해서 다소 초라한 성공으로 돌아왔다. 알앤비 소울에서 뉴잭스윙까지 당시 흑인음악 트렌드를 충실히 반영했고 흑인 음악의 대부 스티비 원더와 R&B계의 신사 루더밴드로스까지 참여한 이 앨범은 흑인사회에 휘트니의 위상을 재정립한 큰 의미가 있는 작품이다. 상업적으론 '2곡의 1위곡' 을 배출함에 그쳤고, 앨범차트에서도 최고 3위에 판매량은 '1200만장의 판매량' 에 그쳤다. 이 앨범을 실패로 명명함에 있어 주저함이 없는 것은 바로 휘트니 휴스턴이었기 때문이다. 한 앨범에서 2곡의 1위곡과 단일앨범판매량이 월드와이드 1000만장을 넘는 앨범을 상업적으로 '망했다'고 감히 표현할 수 있음은 당시 팝계에서 그녀의 위세를 간접적으로나마 짐작케 한다.
5 영화 보디가드
"역대 여가수 단일 싱글 최다 판매량 싱글 1위"
"역대 여가수 단일 앨범 최다 판매량 앨범 1위"
아직도 깨지지않는 싱글 + 앨범 단일 판매량 1위
그 누구도 막을수없는 휘트니 천하무적 시절
1992년, 휘트니는 바비브라운과의 결혼과 보디가드라는 영화 출연을 통해 가수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 전환점을 맞이하며 최고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영화에 대해서는 보디가드 항목 참조. 영화는 비평적으론 처참했지만 흥행은 대성공했고 삽입된 OST는 4500만장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하며 공전의 히트 및 전세계적으로 신드롬적인 인기를 누렸다.[15] 빌보드 앨범차트에서 총 20주간 정상의 자리를 지켰으며 1곡의 1위곡과 2곡의 top5곡을 가졌고 이런 인기에 힘입어 1994년 그래미 시상식에선 그래미 최고 알짜배기인 올해의 앨범상과 올해의 레코드 그리고 최우수 여자가수상을 받으며 비평적으로 최고의 호평을 받는다. 아카데미 주제가상에는 'Run to You'와 ' I Have Nothing'이 노미네이트 되었으나[16] A Whole New World에게 지고 말았다(...)
또한 보디가드 투어를 통해서 미국 유럽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남미 아시아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돈을 쓸어담았지만 한편으로는 목상태도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17]
영화에서 휘트니 휴스턴이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가수' 역으로 등장한 데서 알 수 있듯 OST 자체가 휘트니 휴스턴의 앨범과 다름없이 만들어졌으며 특히 OST 앨범의 리드 싱글인 'I Will Always Love You' 가 엄청난 인기를 끌어서 여자 가수의 싱글 중 가장 많이 팔린 싱글이라는 기록을 세운다. 이 곡은 원래 1974년 컨트리 가수인 돌리 파튼이 작곡하고 불렀던 곡이었는데 명프로듀서 데이비드 포스터가 매끈한 알앤비 곡으로 변모시킨다. 본래 What Becomes of the Broken Hearted을 메인테마로 사용하려 했지만 다른 영화에서 이미 사용해서 케빈 코스트너의 추천으로 이곡을 사용하게 된다. 돌리 파튼이 본래 작사해 두었지만 자신이 버전에 발표하지 않았던 곡의 3절 가사를 휘트니에게 선물한 것은 유명한 일화.
이 OST 앨범에서만 네 곡의 빌보드 5위권 싱글이 나왔으며 20위권 내에 네 곡이 동시에 머무르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특히 데이비드 포스터가 작곡에 참여한 'I Have Nothing'과 'Run to You'[18], 샤카 칸의 원곡을 리메이크 한 'I'm Every Woman'[19]은 이후 휘트니 휴스턴의 대표곡이 되기도 했다. 이 OST 앨범의 빌보드 싱글 차트 기록은 다음과 같다.
- I Will Always Love You : 1위
- I Have Nothing : 3위
- I'm Every Woman : 4위
- Run to You : 31위
이 앨범에서 그녀의 보컬은 과거 전작보다 훨씬 굵어진 목소리를 사용하기 시작하고 음역은 조금 낮아진 듯 하다. 이후 마약투여와 과다한 흡연 그리고 살인적인 콘서트 투어로 성대결절을 앓게되고 1996년 브루나이 공연을 보면 그녀의 보컬 파워가 확연히 떨어졌다는 걸 느낄 수 있다.
또한 이 시기에 그녀의 하나뿐인 딸 바비 크리스티나를 얻게된다. 이후 그녀는 여러차례 임신을 하지만 모두 유산을 하게 된다.
6 이후 커리어
그 이후 정규앨범 없이 '사랑을 기다리며 (Waiting To Exhale, 1995)'와 '목사의 아내 (한국 개봉명: 프리쳐스 와이프, The Preacher's Wife, 1996)', '신데렐라 (Cinderella, 1997)' 같은 영화출연을 병행하며 OST정도만 발매하며 활동을 이어갔다. 이 시기 브로드웨이 뮤지컬 드림걸스를 영화로 옮기는 작업이 시도되기도 했다. 과도한 투어와 마약으로 목상태가 점점 안 좋아지기 시작했고 차트 성적도 과거에 비해 상대적으로 떨어진 성적을 보이게 된다. 그러다 1998년 My love is your love로 8년만에 정규앨범으로 컴백한다. 이 앨범은 비평적으론 그녀의 앨범중 최고의 찬사를 받는다. 성숙해진 목소리와 완연한 리듬감으로 알앤비가수로도 인정을 받으며 그래미 최우수 알앤비 보컬까지 수상하게된다. 또한 유럽차트에서 굉장한 성공을 거두고 미국 내에서도 싱글로 발매한 3곡이 모두 싱글차트 top5에 오르며 식지않은 인기를 증명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후 수많은 루머에 시달리며 대중들과 점점 멀어졌다. 대표적으로 레즈비언설과 남편과 불화 그리고 마약이었다. 2001년 마이클잭슨 기념공연에서 보여준 해골같이 마른 모습은 그런 논란을 더더욱 가중시켰다.
특히 뉴 에디션 출신인 바비 브라운과 1992년에 결혼한 이후 휘트니의 이미지는 완전히 달라졌다.[20] 본래 백인 흉내내는 흑인 신데렐라 같던[21] 휘트니의 이미지는 악동 남편을 만나면서 대중의 인식이 변하였고 흑인계의 지지도도 엄청 올라갔다. 하지만 남편 바비가 막장인 건지 끊임없이 뉴스에 오르내렸다. 왼쪽 뺨이 멍든 상태로 법원에 나타난적도 있다.# 여기서 '여전히 우리는 함께한다.' 라고 바비와 함께 껴안으며 인터뷰 해 본인이 바비를 거부하지 않는다는 점을 내비치기도 했지만. 이후 술, 마약에 빠지면서 엉망진창이 돼버렸다.
2002년 정규 5집 앨범인 Just whitney를 발매하고 이런 루머를 해명하겠다고 abc방송을 통해 다이안 소어와 인터뷰 했지만 오히려 역효과만 불러일으키고 그나마 남아있던 긍정적인 이미지도 망치게된다. 이 인터뷰로 휘트니는 마약 사용을 간접적으로 시인하고 희대의 명언인 Crack is cheap. Crack is wack을 남긴다.[22] 번역하면 '(마약의 일종인) 크랙은 싸구려야. 최악이라고.' 이후 자신은 크랙을 쓰기엔 너무 부자라는 터무니없는 해명이 이어졌다. 틀린 말은 아닌 것이, 크랙 항목에서 볼 수 있듯 크랙은 하류 계급이 사용하는 싸구려 마약이 맞다. 그리고 휘트니 휴스턴과 바비 브라운은 코카인을 사용했다. 하지만 2009 오프라 윈프리 인터뷰 내용을 토대로 보면 크랙 역시 복용했다고 한다. 이 인터뷰 말미를 보면 휘트니는 더이상 가수로서 욕심이 전혀 없음을 나타낸다. 나름대로 진솔한 인터뷰였고 그녀에 대한 동정여론도 있었지만 방송에서 가장 주목 받은건 crack is wack이라는 발언과 인터뷰 내내 시종일관 이어진 그녀의 뻔뻔한 태도 였다. 그 결과 그녀의 5집 앨범은 첫 주 판매량에서는 그녀의 모든 앨범 중 가장 높은 판매량을 기록하며 데뷔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상업적 실패를 기록했다.
명콤비였던 클라이브 데이비스와 결별하고 발매한 첫 앨범이라는 상징성이 있는 앨범이었다. (마이클잭슨과 퀸시존스와의 결별 이후와는 대비되는...)그러나 싱글 발매된 곡들 모두 빌보드 top50 진입에 실패했고, Hot Dance Club Play 차트에서의 소소한 성공만이 위안이 되었다. 특히 첫 타이틀이었던 whatchulookinat은 자신을 공격하는 타블로이드 및 가십언론계 전반을 비판하는 곡이었는데 이 곡 이후 휘트니의 라디오 방송이 어려워졌다고 한다. 이는 에어플레이의 저조를 의미한다. 더구나 그녀는 이 앨범 프로모션을 거의 하지 않았고, 진행했던 프로모션조차 곡에 대한 홍보 효과보다 그녀의 목상태가 완전히 가버린 사실을 대중에게 각인시킬 뿐이었다.[23] 그이후 2004년 러시아나 일부 아시아 지역 투어도 돌고[24] 세계 여성의 날 시상과 월드 뮤직 어워드에서 보여준 공연을 보면 어느 정도 목상태가 회복하는 듯 했지만 이후 토리노올림픽 축하공연등을 보면 목상태가 회복불능까지 가버린 사실을 알 수 있다. 이후 사실상 활동을 중단하게 된다. 앞서 언급한 오프라 윈프리와의 인터뷰 내용 중, 휘트니는 이미 'I Will Always Love You'를 부르던 시절부터 마약에 중독되어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 강한 중독으로 치닫았음은 물론이다.
2004년 바비 브라운과 함께 출연한 리얼리티 쇼 'Being Bobby Brown'에서 보여준 충격적인 모습은 그녀의 팬들에겐 더욱 실망감을 안겨주었다. 당시 유행이던 셀러브리티들의 막장 생활을 보여주는 붐에 편승한 형식으로 쇼의 시청률만 놓고보면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 자신에게는 더 이상 떨어질 나락이 없는 현실을 방증했다. 이후 그녀가 유일하게 잘한 일은 시즌 2의 거절이었다. 클라이맥스로 2006년 충격과 공포의 주유소 파파라치로 완전히 망가져 버린 모습으로 모두를 충격에 빠트리기도 했다.
2007년 남편 바비 브라운과 이혼하고,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파산에 이르는 등 어려움을 겪어왔다. 재기를 위한 심기일전해서 2009년 여섯 번째 정규 음반 'I Look to You' 를 발표했으며 오프라 윈프리 쇼 Season Premier, 굿모닝 아메리카 Summer Concert Series의 참여 등 미디어를 통한 대중과의 재회는 그녀를 기다리던 수 많은 팬들은 여전히 휘트니 휴스턴을 기억하고 사랑한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드러냈다. 이런 지지에 기반하여 빌보드 앨범차트 1위로 데뷔했다. 그 후 Nothing But Love World Tour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녀의 목상태는 도저히 장기간의 투어를 소화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녀의 컴백에 팬들은 환호했지만, 동시에 전성기와는 비교도 안 되는 가창력은 많은 팬들에게 실망도 안겼다. 유명 팝스타의 내한 공연에 항상 칭찬일색이던 배철수조차 음악캠프 라디오에서 '대단히 실망스러웠다' 라고 공개적으로 언급할 정도. 한술 더떠 호주에서는 티켓 환불 소동까지 일어났다.
7 디바의 죽음과 그 후
2012년 2월 11일(현지시각), 우리 나이로 49세에 세상을 떠났으며 사망 장소는 캘리포니아 베벌리힐스에 있는 베벌리 힐튼 호텔. 이 날은 그래미 시상식 전날 축하파티가 있던 날로 파티 도중 발견되었으며 그래미 시상식 바로 전에 세상을 떠난 데다 시대를 풍미했던 디바의 씁쓸한 최후에 동료들은 물론 팬들도 큰 충격에 빠졌다. 흑인 최초의 '아메리칸 스윗하트'였던 그녀의 죽음에 미국을 포함한 전 세계는 슬픔으로 가득찼고, 그 해 구글 검색어 1위는 그녀의 이름이었다. 마이클 잭슨의 사망 때와 비슷하게, 인종주의의 혐의가 느껴질 정도로 휘트니 휴스턴을 잔인하게 발가벗기고 비난하던 대중과 타블로이드는 일제히 그녀에 대한 추모 물결에 휩싸였다.
2012년 2월 22일에는 미국의 National Enquirer지에서 그녀의 시체 사진을 공개해서 논란이 되었다. 제목이 'Whitney : The Last Photo'.
2012년 3월 22일에 정확한 사인이 밝혀졌다. 코카인 흡입 후 익사라고.#
2015년 2월 5일 휘트니 휴스턴의 딸인 바비 크리스티나 브라운(22)이 마약을 과다복용으로 인해 욕조에서 의식을 잃은 채 발견되고 병원에서 뇌사상태에 빠져 있다가 3월 20일 퇴원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러나 이 퇴원이 사실상의 '포기'로서 치료의 거부인지 '호전'으로 인한 이송이나 자택복귀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상태. 더군다나 뇌사상태 이후 친부인 바비 브라운과 바비 크리스티나 브라운의 남편[25]인 닉 고든이 진흙탕 싸움을 한데다 이 와중에 휘트니 휴스턴의 유품으로 딸이 갖고 있던 2억 원 상당의 반지가 도난당하는 등의 악재가 겹쳐 있다. 결국 바비 크리스티나 브라운은 22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관련기사
8 디스코그래피
8.1 앨범
- Whitney Houston (1985)
- Whitney (1987)
- I'm Your Baby Tonight (1990)
- The Bodyguard OST (1992)
- Waiting To Exhale OST (1995)
- The Preacher's Wife OST (1996)
- My Love Is Your Love (1998)
- Just Whitney (2002)
- I Look to You (2009)
8.2 싱글
8.2.1 빌보드 1위
- Saving All My Love for You (1985)
Whitney Houston - Saving All My Love for You |
- How Will I Know (1985)
- Greatest Love of All (1986)
Whitney Houston - Greatest Love of All |
- I Wanna Dance with Somebody (Who Loves Me) (1987)
- Didn't We Almost Have It All (1987)
- So Emotional (1987)
- Where Do Broken Hearts Go (1988)
- I'm Your Baby Tonight (1990)
- All the Man That I Need (1990)
- I Will Always Love You (1992)
Whitney Houston - I Will Always Love You |
- Exhale (Shoop Shoop) (1995)
8.2.2 빌보드 2위
- Heartbreak Hotel (Feat. Faith Evans & Kelly Price) (1998)
8.2.3 빌보드 3위~10위
- You Give Good Love (1985)
- Love Will Save the Day (1988)
- One Moment in Time (1988)
- The Star-Spangled Banner[26] (1991)
- Miracle (1991)
- I'm Every Woman (1993)
- I Have Nothing (1993)
- Queen of the Night (1993)
- Count on Me (Duet with CeCe Winans) (1996)
- I Believe in You and Me (1996)
- It's Not Right but It's Okay (1999)
- My Love Is Your Love (1999)
8.2.4 빌보드 11위~20위
- My Name Is Not Susan (1991)
- Step by Step (1997)
- When You Believe (Duet with Mariah Carey) (1998)
Whitney Houston - When You Believe (Duet with Mariah Carey) |
※여타 곡들의 M/V는 유튜브에 개설된 'Whitney Houston VEVO'에서 시청하자. Whitney Houston VEVO
9 필모그래피
- The Bodyguard (1992)
- Waiting To Exhale (1995)
- The Preacher's Wife (1996)
- Sparkle (2012)
- ↑ 오리지널이 아니며, 돌리 파튼의 컨트리 곡을 리메이크 한 것이다.
- ↑ 뱃심으로 부르는 가창력으로는 누구도 감히 따라올수 없는 창법으로 원탑으로 불릴만큼 굉장한 가창력을 대표하는 호칭이다.
- ↑ 물론 보디가드 사운드트랙으로 90년대 초중반을 씹어먹었으니 그래도 데뷔후 10년가량은 정상에 있었다는 말은 된다.
- ↑ 그가 'Beat It'에서 하드락을 시도했을 때 흑백 양자에서 거센 논란이 있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하드락은 '백인 음악'으로 인식되었기 때문.
- ↑ 머라이어 캐리의 데뷔는 휘트니 뿐만 아니라 소니 뮤직에 소속되어있던 많은 아티스트들에게 피해를 주었는데 조지 마이클, 마이클 잭슨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 ↑ 저러한 평가는 헛소리일 뿐이다. 모든 흑인이 노래를 잘하는 것은 아니며 백인이라고 해서 무조건 선천적 조건이 뒤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머라이어 캐리 역시 아버지가 흑인인 다인종 혼혈이다.
- ↑ 빌보드 1위를 기록한 싱글은 머라이어 캐리가 18곡, 휘트니 휴스턴이 11곡으로 머라이어가 더 많기는 하다. 그러나 1위를 기록한 곡의 갯수만으로 아티스트들의 우열을 가리기는 매우어렵다. 그렇게 치면 머라이어 캐리는 마이클 잭슨보다도 뛰어난 아티스트가 된다.
- ↑ 사실 셀린 디옹의 세계 데뷔는 90년이고 유럽에는 이보다 몇 년 전에 데뷔했으나, 본격적으로 인기를 얻은 것은 두 디바보다 늦은 90년대 중반이다. 셀린의 초기작은 휘트니의 흥행공식을 답습한 아류에 불과했다. 보컬 레인지나 특색도 나머지 두 디바에 비해서는 다소 평범한 하다는것이 중론.
- ↑ 전설적인 재즈 기타/보컬리스트이자 팝으로도 성공한 조지 벤슨이 77년에 먼저 발매했다. 원곡에서는 'The' 가 앞에 들어간다. The Greatest Love of All
- ↑ 1995년 발매된 앨라니스 모리셋의 데뷔 앨범 'Jagged Little Pill' 이 3200만장이 판매되면서 기록 갱신. 사실 앨라니스 모리셋의 jagged little pill은 데뷔음반이 아닌 세번째 앨범이지만, 1,2집은 캐나다 한정으로 발표한 앨범이고 세계무대에 들고나온 앨범은 3집이기 때문에 Jagged Little Pill을 1집 취급하기도 한다. 비요크의 데뷔앨범을 1977년에 내놓은 Bjork가 아닌 1993년에 내놓은 Debut로 여기는 것과 비슷한 케이스.
- ↑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 것이 1988년 그래미 어워즈인데 당시 마이클 잭슨은 Bad 앨범에서 빌보드 1위곡을 5곡이나 배출하고 Bad World Tour를 대성공으로 마무리했지만 6개 부문에 지명되기만하고 단 하나의 상도 받지 못했다.
- ↑ 2010년대에도 그래미는 흑인에게 박하긴 하다. Album of the Year 등 주요 부문은 백인 아티스트 중에 진짜 줄 사람이 없으면 그제서야 흑인에게 돌아간다. 그나마도 알리샤 키스, 비욘세 등 고전적인 음악을 기반으로 깔고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상업적 성공을 거둔 경우에만. 그러니 80년대에는 어땠겠는가.
- ↑ 그러나 1980년대 마이클 잭슨은 Thriller를 통하여 그래미상 최다부문 수상인 8개를 받아갔다.
- ↑ 소위 말하는 2년차 징크스이다. 예를 들어서 1집은 엄청나게 흥했는데 2집은 폭망하는 그런 경우. 음악계의 대표적 예시는 머라이어 캐리의 1집과 2집.
- ↑ 현재까지 가장 많이 팔린 여가수 앨범으로 올타임 1위
- ↑ 왜 I Will Always Love You가 아닌가 싶지만 아카데미에서는 원래 리메이크 곡에는 상을 주지 않는다. 시상식에서 휘트니는 건강문제로 참여 못하고 이 두 곡을 나탈리콜이 부른다. (굉장히 안 어울린다, 나탈리 콜은 재즈보컬에 더욱 적합...)이로써 휘트니의 Run to you 라이브는 영영 볼 수 없게 됐다
- ↑ 하지만 서울은 안옴, 당시 공연이 성사직전까지 갔지만 마지막 계약금 문제로 취소됐다고 한다
- ↑ 고음덕후 답게 3옥 파샾을 넘는 고음역 곡으로 휘트니 자신도 버거워 하는지 I have nothing은 라이브에서 항상 키를 낮춰 불렀고 Run to you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라이브를 한 적이 없다.
- ↑ 원곡인 샤카 칸의 곡은 휘트니가 백업보컬로 참여한 곡이다.
- ↑ 뉴 에디션은 잭슨 파이브를 모델로 기획사에서 오디션을 통해서 외모와 춤, 노래 실력이 갖춰진 멤버들을 모아서 만든 팀. 데뷔 당시 평균 16세로 현재 K-POP의 주류인 기획형 댄스 아이돌의 시초로 평가된다. 이 팀의 백인 버전이 1990년 초반을 강타한 뉴 키즈 온 더 블락, 한국 버전이 H.O.T. 정도로 볼 수 있다.
- ↑ 아예 영화 신데렐라에 출연하기도 했다.
- ↑ 사실 이것은 앤디 워홀이 말이다.
- ↑ 가장 유명한 공연이 2003 VH1의 On My Own공연이다
- ↑ 트랙리스트를 보면 5집 곡은 빠졌다. 상업적인 성패와 별개로 휘트니 자신 조차 5집을 맘에 안들어 하는 듯 하다
- ↑ 바비 브라운의 주장에 의하면 법적인 남편이 아니며, 뇌사상태가 된 원인도 닉 고든이 욕조에서 밀쳤기 때문이라고. 바비 크리스티나 브라운이 사고 전 sns에 닉 고든과 결혼했다고 올린 적은 있다.
- ↑ 미국 국가. 위에 말했듯 휘트니가 부른 버전은 레전설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