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드 벤구리온

역대 이스라엘 총리
1대2대3대-4대5대6대7대
벤구리온샤렛에쉬콜알론메이어라빈베긴샤미르
8대9대10대11대12대13대14대15대
페레스네타냐후바라크샤론올메르트네타냐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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דָּוִד בֶּן-גּוּרִיּוֹן‎
(1886년 10월 16일 – 1973년 12월 1일)

1 소개

이스라엘의 초대 총리이자 국부. 1948년 5월 17일 ~ 1954년 1월 26일, 1955년 11월 3일 ~ 1963년 6월 26일에 걸쳐 총리를 역임했다.

2 생애

1886년, 러시아 제국 치하에 있던 폴란드의 프원스크에서 태어났다. 원래 이름은 다비드 그루엔.

근대 시오니즘의 창시자 테오도르 헤르츨의 영향을 받았다. 1906년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여 팔레스타인 노동당의 활동분자가 되었으며, 그 기관지의 편집장이 되었다. 1912년, 법학을 공부하기 위해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로 유학했고, 거기서 성씨를 히브리어 성씨인 '벤 구리온'으로 바꾼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시점에는 팔레스타인에 있었으나, 연합군에 가담하였다는 이유로 국외로 추방되어 미국으로 건너가 시오니스트인 이크하크 벤츠비와 함께 유대 군단을 결성하여 영국군과 함께 팔레스타인 전쟁에 종군하였다. 전후에 팔레스타인에 머물면서 노동총연합을 조직하고 스스로 서기장이 되었다. 1933년 국제 시오니즘의 최고 감독기관인 시오니즘 집행위원회(Zionist Executive)에 들어가 2년 후에는 위원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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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이스라엘 건국을 선포하는 벤 구리온. 뒤쪽에 걸려있는 그림은 19세기 말 시오니즘의 주창자 테오도르 헤르츨의 초상화.

1948년 5월, 이스라엘 공화국 성립과 함께 총리가 되어 1953년까지 그 지위에 있었으며, 1955∼1963년 다시 총리가 되었다. 저서로 이츠하크 벤츠비와 함께 쓴 《투쟁》(전 5권, 1949)이 있다. 그의 이름은 현재 벤 구리온 국제공항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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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중동전쟁 당시 남부 전선을 시찰중인 벤 구리온 총리. 출처 바로 왼쪽에 서 있는 사람이 훗날 참모총장과 이스라엘 총리를 역임하는 이츠하크 라빈이다. 당시 직위는 중대장.

3 논란

3.1 아랍인들에 대한 차별

이스라엘 건국의 아버지로 여전히 칭송받지만, 이스라엘 출신 아랍인과 세파르딤을 차별했던 것으로 비판을 받는다. 가령 이스라엘 아랍인들을 가리켜 '제5열'[1] 이라 불렀다든지, "모로코리비아, 예멘에서 온 유대인들은 아랍인의 문화를 그대로 갖고 있다. 나는 아랍 문화를 싫어한다. 그들도 탐탁치 않다"고 말하는 등 공공연히 차별했다.

3.2 전쟁 범죄 논란

이스라엘 독립 전쟁 당시 벤 구리온이 팔레스타인 민간인에 대한 인종청소를 지시하였는지의 여부는 아직도 논란의 대상이다. 벤 구리온이 인종 청소를 지시했다는 심증은 있고 실제로 아랍인들은 그렇게 보지만, 정작 물증이 없는 상황. 하지만 당시 그의 비서였던 시몬 페레스 전 이스라엘 대통령은 이를 부인하고 있다.
  1. '첩자' 또는 '스파이'를 가리키는 표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