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냐민 네타냐후

역대 이스라엘 총리
1대2대3대-4대5대6대7대
벤구리온샤렛에쉬콜알론메이어라빈베긴샤미르
8대9대10대11대12대13대14대15대
페레스네타냐후바라크샤론올메르트네타냐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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בנימין נתניהו
Benjamin Netanyahu
(1949년 10월 21일 ) (68세)

1 소개

이스라엘의 정치인이다. 그리고 이상하게 총리에 오래재직하는 오뚜기, [1] 제13대 총리(1996년 6월 18일~1999년 7월 6일)를 재임했고 현재는 이스라엘의 제 16대 총리(2009년 3월 31일~)를 재임하고 있다. 이스라엘이 건국된 이후인 1949년 텔아비브에서 태어났다. 그의 형 요나단 네탄야후는 이스라엘군 정예부대인 사이렛 매트칼 중령으로 1977년 팔레스타인 테러집단에 납치된 자국민들을 구출하기 위해 우간다 엔테베 공항에 침투한 그 유명한 '엔테베 작전'을 지휘하다가 전사했다.[2] 가족으로는 첫 부인에게서 낳은 딸과 현 부인 사라 네타냐후 사이에서 낳은 두 아들을 포함해 2남 1녀가 있다. 최근에는 딸이 결혼하여 손자가 있다.

2 초기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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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슈케나짐 유대인으로 바르샤바 출신의 대학 교수인 부친[3]을 따라 1963년 미국으로 건너갔으며, 이후 6년간 군복무[4]를 한 것을 제외하고는 1980년대 후반 이스라엘 정계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거의 미국에서 활동하였다.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하버드 대학교에서 공부하였고, 보스턴 컨설팅 그룹에서 근무하였다.[5] 1982년에는 워싱턴의 주미 대사관에서 근무하였고, 1984년 ~ 1988년 주 UN 대사를 지냈다. 1988년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었고, 이츠하크 샤미르 정권에서 각료로 재직하였다.

3 1차 집권(1990년대 후반)

그 후 리쿠드당의 영수가 되어서 1996년 총선 출구조사에서 근소한 차이로 낙선할걸로 보이지만[6] 실제 선거에서 노동당의 시몬 페레스를 이기고 13대 총리가 되었고[7], 이 당시 아라파트와 많은 갈등을 빚었다. 그러나 이후로 부패혐의로 인해 지지율이 떨어졌고 1999년 총선과 총리 선거에서 대패하며 정계에서 떠나는듯 했다.

그러나 2001년 총리 선거에서 사론이 집권하면서 다시 운이 풀리기 시작했고, 2003년 총선에서 리쿠드당이 승리하자 외무장관으로 임명되어 정계복귀에 성공했다.

그러나 아리엘 샤론 총리가 온건파로 돌아서며 가자지구의 유대인 정착촌 철수 계획을 발표하자 네타냐후는 강경발언을 이어가며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이때문에 샤론 총리와 심하게 다투어서 장관직을 사퇴해야 했다. 그리고 샤론이 리쿠드를 탈당하고 중도정당인 카디마당을 새로 창당했으며 이후 네타냐후는 잔류 리쿠드당을 이끌게 되었지만 잔류 리쿠드당은 2006년 총선에서 단 12석을 확보하는데 그쳤고, 득표율도 한자릿수에 머무는 대패(8.9%)를 거두면서 자연히 네타냐후의 입지도 좁아졌다.

4 2차 집권(2009년 이후)

그러나 카디마당과 노동당간의 불협화음이 계속 이어지고, 하마스를 패퇴시키겠다며 가자지구 봉쇄정책을 시행했다가 국제사회 반응이 그리 좋지 않고, 2008년을 전후하여 불어닥친 세계금융위기의 여파로 인하여 경기침체로 지지율이 떨어지는 기미를 보이자 가자지구 공습을 감행하지만 이스라엘 외부 반응이 좋지 않은 가운데, 네타냐후는 카디마가 무르다며 강경발언을 계속 이어갔고, 카디마당에게 실망한 우파에게 지지를 받았다. 결국 2009년 총선에서 카디마에게 근소하게 뒤쳤지만(카디마 22.5% 28석, 리쿠드 21.6% 27석) 전체적으로 우파가 우세한터라 두 번째로 총리가 되는데 성공을 거두었다.

그 이후에 팔레스타인을 힘들게 만드는 대 팔레스타인 강경대책을 내세워서 팔레스타인이 더 힘들어지고 이스라엘을 하루도 조용할날 없는 국가로 만들었다. 2011년에 경제불안과 취업난, 고물가, 급속한 부동산값 상승에 시달린 나머지 분노한 시민들을 중심으로 전쟁 신경쓰지말고 민생대책 세우라며 대대적으로 시위가 일어나며 수습한다고 위기를 맞기도 했다. 2013년에 이스라엘 베이테누와 선거연합을 하고, 가자지구 공습을 감행했다가 본래 목적을 이루지 못하는 바람에 총선에서 패배했지만(43석->31석 23.3%) 좌파가 의회에서 의석을 많이 확보하지 못했고, 네타냐후는 중도파에게 손을 내밀어서 세번째 집권에 성공했다.

그러나 이후에 경제불안과 부동산값의 상승은 지속되었고 네타냐후는 이를 만회하기 위해 다시 가자지구 공습을 강행하다가 결과도 안좋고 국제적으로 욕만 먹었다. 그런 가운데서 2014년 말에 팔레스타인 장관이 정착촌 건설에 항의하던 도중에 이스라엘 군인들에게 멱살을 잡히고 나서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진데다가 유대민족법 통과를 하겠다고 밝혀서 팔레스타인과의 갈등이 고조된 가운데서 중도파와의 연정을 깨고 의회해산을 감행하며 2015년 3월 17일에 총선이 치러지게 되었다.


선거 초반에 네타냐후가 이끄는 리쿠드당이 승리할걸로 예측되었지만 선거 중반들어 경제문제가 쟁점이 되자, 네타냐후는 4번째 집권을 위해 미국방문을 추진하였고 2015년 3월 3일에는 미국상원에서 연설을 했는데 주 내용은 북한의 핵을 비교하며 니들도 핵무기 가지고 있잖아[8][9] 이란의 핵개발에 대한 미국의 대처와 이에 따른 버락 오바마 대통령을 비판하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연설 내용은 둘째치고, 공화당 소속 존 베이너 하원의장 초청으로 이루어진 이 연설을 민주당백악관 동의 없이 공화당이 독단적으로 밀어붙인 탓에, 연설 당시 민주당은 불참했고 공화당만 참가했다. #

그러나 이러한 행보는 오랜 고물가와 경제 위기, 전쟁, 테러에 시달린 이스라엘인에게 별다른 호소력을 가지지 못했고 네타냐후 부인 사라의 비리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미국, 팔레스타인과의 관계 개선과 민생 대책, 평화주의 정책을 천명한 좌파정당연합 시오니스타연합의 지지율이 오르면서 재집권에 빨간불이 켜진 상태. 이 때문에 선거 유세 마지막날 재선되면 팔레스타인 국가의 건설을 막을 것이다라는 발언으로 보수층 결집을 시도했다. 그 호소가 약빨이 먹힌 모양인지 출구조사에서 극우정파(유대인가정당)에 투표할 유권자가 대거 리쿠드를 뽑는것으로 나타나서 시오니스트연합과 접전을 벌이는것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최종 개표결과에서 보수,우파 성향의 유권자들이 대거 리쿠드를 뽑는 바람에 원내 1당 자리를 유지하고 불리한 판세였지만 오히려 이전보다 의석수를 늘렸다.(이전에는 이스라엘 베이테누와 합치면 31석이었는데 이번에는 합해서 35석) 역시 이스라엘 정계의 좀비 물론 우파가 획득한 의석이 2013년 총선에 비해서 감소되었지만 그럼에도 예상외로 우파가 선전했다. 국내 안보에 대해서 높은 능력을 보이고 있고 국제 여론이 그리 좋지 않음에도 외교적으로 노력하며 평화주의자들을 반역자라고 매도하는 것을 네타냐후 본인은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다양성을 존중해주어야 한다며 반대하고 있기 때문에 그와 관련해서 이스라엘 국내에서 지지를 받고 있다. 본인은 강경파라서 갖은 수단을 동원해서 팔레스타인 무장단체들을 멸망시키려 하지만 현실은 시궁창. 무장단체들은 멸망하기는 커녕 강인하게 살아남고 있으며 하는것마다 삽질만 연속하는지라 골머리를 않고 있다. 그래서 강경책만 쓰는 과거의 노선을 포기하고 회유책도 같이 쓰고는 있다. 하지만 이 양반도 극우 정치인이다보니 회유책은 잠깐이고 그저 강경책밖에 안쓴다. 그러다보니 팔레스타인과 아랍권에서는 천하의 개쌍놈으로 증오받는다.

여하튼간에 종교정당및 국가,보수주의 자들에게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있기 때문에 연정구성에서 중도정당 한곳 정도 끌여와서 4선에 성공했다. 한편 미국 백악관은 네탸냐후에게 축하 대신 독설로 축복해줬고(...), 네타냐후도 선거운동에서 재선하겠다고 똥싼걸 수습하겠다십고 2국가 논의는 철회 안하기로 했다고 발언했다.

2015년 10월 20일에는 홀로코스트의 책임을 팔레스타인인에게 뒤집어 씌우려고 하여 또 논란이 되고 있다. 이스라엘에서 열린 세계시오니스트총회에서 그는 히틀러는 유대인들을 유럽에서 내쫓으려고만 했는데, 당시 팔레스타인의 무프티였던 아민 알 후세이니가 유대인들을 태워죽여야 한다고 선동했다고 주장하였다는 것.

영국 가디언에서는 유럽에서 불고 있는 이슬람 혐오 정서에 편승하여 지지를 얻으려는 수작일 수도 있다고 비판했으며, 심지어 독일의 보수언론인 디 벨트(Die Welt)의 논설위원 알란 포세너(Alan Posener)는 이스라엘의 정치지도자가 홀로코스트에서 히틀러의 역할을 축소하려는 듯한 발언을 한 것은 대단히 충격적이라며 에둘러 비판했다. 팔레스타인 당국의 협상 대표인 사에브 에레카트는 “네타냐후가 팔레스타인인들을 너무 싫어해 600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한 히틀러에게 면죄부를 주려고 한다고 비난했다.###

2016년 1월 27일에도 테러엔 타협은 절대 없고 강경대응만이 우선이라며 답이 없는 극우 정치인의 면모를 그대로 보여주었다. 이때문에 반기문 사무총장이 이스라엘의 탄압과 차별 때문에 테러가 계속 발생하는 것이며 원인제공을 한다고 비난했다. 이에 대응한 답변이 가관인데 반기문 총장의 발언은 테러를 조장한다며 유엔이야말로 오래 전부터 중립성과 도덕적 힘을 잃어버렸다는 역비난을 했다.[10]

3월에는 미국과 유럽에게 이란 핵협상을 반대하며 이란에 대한 제재는 계속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이란 핵협상이 타결되자 역사적 실수, 나쁜 거래라고 비난하며 백악관 방문을 취소했다.

같은해 5월달에도 서방세계에서 번지고 있는 반이스라엘 감정과 반유대주의에 대하여 적반하장식의 비난을 했다.그걸 초래한게 누군데 저런식으로 말해

최근에는 이스라엘의 골칫거리인 재정 적자를[11] 해소하기 위해 세금을 올리고 공공 서비스를 축소하겠다고 밝혀 반발을 사고 있다. 무엇보다 네타냐후 본인과 부인 사라가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여 이스라엘 내에서 심한 비난을 받고 있다. 특히 부인 사라가 관사 직원들한테 심한 갑질을 2번씩이나 하는 바람에 빡친 관사직원 2명이 그만두고 손해배상을 요구하여 물의를 일으켜서 곤혹을 겪기도 했다.[12]

이러다보니 청렴한 편이 아닌데 6월에는 사기 혐의로 파리에서 기소된 프랑스 사업가 아르노 맹랑에게서 17만 유로의 자금을 받았다고 본인 스스로 시인하면서 이스라엘 내에서 뇌물수수 물의를 일으켰다.

7월에는 군부와 의견차이로 심한 갈등을 겪고 있다. 선배인 에후드 바라크 전 총리는 네타냐후 정부가 파시즘을 표방한다며 네타냐후 총리의 사임을 요구했다. 모사드와 신베트 등 정보기관 전직 수장들과 유명 군 인사들, 최측근이던 타미르 파르도 전 모사드 국장까지 네타냐후한테 맞서고 있어 정치적으로 골머리를 않고 있다. 이러다보니 네타냐후 정부에서 일한 군사·보안 인사 17명 중 13명이 갈리는 등 비판적인 인사를 싫어하여 일방적으로 숙청하는 양상이다. 특히 측근 아비그도르 리에베르만을 국방장관에 임명한것 때문에 반대파들로부터 심한 비난과 반발을 샀다.[13]

개인적으로 열혈 대처리스트이기도 한데, 그래서 이스라엘 내에서도 노조와 관계가 극히 안 좋으며 파업에 대해서도 강경대처로 일관하고 있었으며 이스라엘 내의 주요 재벌들과 친한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래서 2010년경을 전후하여 이스라엘 경제가 지표상으로 회복되기 시작한 이래로 임대료가 폭등하자 중산층들에게도 욕을 무진장 퍼먹으며 2011년에 대규모 시위를 겪은 이후로는 재벌해체를 단행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는 하면서 어느정도 노선전환을 했기는 했는데 재벌해체를 단행하지 않으면 지지를 상실하기 때문에 어쩔수 없이 단행한것이다. 이스라엘 내에서도 주요 신문사와 방송사들에게 엄청나게 욕을 듣기도 하는데 네타냐후와 친한 미국 부자인 애덜슨이 친네타냐후의 성향의 이스라엘 하욤 지를 창간하면서 무료로 보급했기 때문이며 이 때문에 주요 신문사들의 돈줄이 말라버렸기 때문이다. 덕택에 기자들이 대거 실업자로 전락하는 사태도 벌어졌다고...

  1. 틀린거 아닌게 네탸냐후 총리는 무려 4번이나 총리에 당선되어 10년 넘게 장기집권하고 있다. 그래서 네타냐후 총리는 권력욕이 굉장한 것으로 유명하다.
  2. 이스라엘 군 특수부대에서 복무한 영향인지 네탄야후 총리도 굉장히 강경한 노선을취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물론 이스라엘 정계가 하나같이 강경파다 보니 네타냐후만 그런게 아니라 다른 총리들도 똑같이 강경 노선을 고집한다.
  3. 아버지의 원래 성은 밀레이코프스키(Mileikowsky)였으나, 이후 네타냐후로 성을 바꿨다. 네타냐후는 히브리어로 '주님께서 주신'이라는 뜻이다.
  4. 형과 같은 부대인 사이렛 매트칼 출신이다.
  5. 이때문에 영어를 프리토킹할 정도로 굉장히 잘한다.
  6. 1996년부터 2001년까지는 국회의원 선거와 별개로 총리 직선제를 시행했지만 문제점이 발생하면서 2003년 이후로 폐지했다.
  7. 이 시기는 야세르 아라파트 PLO 의장 등 팔레스타인과의 평화 협상을 추진했던 이츠하크 라빈(1967년 6일전쟁 당시 총참모장) 총리가 극우 유태인에 의해 피살당한 직후였다.
  8. 다만 유의할 점은 현재 국제사회가 기정사실로 다루는 이스라엘의 핵무장은 모두 적지 않은 수의 정황증거들(예: NPT 가입 거부, 디모나 원자로를 비롯한 핵시설 존재, 1986년 모르데카이 바누누의 관련 정보 폭로)에 따른 것들이다. 이스라엘은 공식적으로 핵무장을 인정하거나 핵보유국 지위를 선언 및 요구한 적이 없으며, 핵실험 역시 적어도 공개적인 기준으로는 실시한 바 없다. '확인도 부인도 거부한다'(NCND: Neither Confirm Nor Deny)는 핵모호성의 전형적 사례.
  9. 이스라엘이 핵무장 여부에 관해 밝히고 있는 공식적인 입장은 1960년대 미국측에 보낸 외교전문에 포함된 "중동에서 핵무기를 '도입'(introduce)하는 첫 국가가 되지 않겠다"가 전부다. 이는 매우 중의적인 내용으로 핵무장을 정책적인 선택에서 완전히 배제하지 않는 가운데, 공개적인 활동 이외의 비밀 개발, 비축 등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여지를 남긴 것이다.
  10. 진짜 말도 안되는 자기합리화인데 반총장은 팔레스타인들의 테러도 비난해서 테러를 정당화하지 않는다. 특히 원인제공을 누가하는지를 제대로 말해주었는데 저런식으로 말하는 것이다.
  11. 주요 원인은 군사비다. 미국의 지원 받는다 해도 무장단체들의 공격과 팔레스타인인들의 테러로 인해 국방비가 갈수록 늘어나기만 하니 뭐...
  12. 사라 네타냐후 여사는 이스라엘 내에서 가장 사치스러운 퍼스트 레이디로 악명높다. 게다가 이 갑질을 2015년과 2016년에 2번씩이나 했다. 참고로 사라는 3번째 부인이다.
  13. 측근이라서 성향이야 네탸나후와 똑같은 극우지만 문제가 아비그도르는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군사적 경험이 없는 장관이라서 그렇다. 그러다보니 최악의 낙하산 인사라고 비난받는다. 특히 아비그도르는 팔레스타인인들을 테러범으로 취급하고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임시 행정수도인 요르단 강 서안 지구 라말라와 이집트 아스완 댐에 폭탄을 투척해야 하며 팔레스타인 수감자를 모두 사해에 던져 익사시켜야 한다고 주장할 정도로 악랄한 극우 정치인이다. 특히 이 양반은 국방장관 되자마자 그저 극단적인 정책만 하라고 군에 지시하니 상황만 더 악화시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