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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빨리 져버린 꽃
이름 | 다비드 알폰소 아레야노 모라가 (David Alfonso Arellano Moraga) |
생년월일 | 1902년 7월 29일 |
사망년월일 | 1927년 5월 3일 |
국적 | 칠레 |
출신지 | 산티아고 |
포지션 | 아웃사이드-레프트, 스트라이커 |
신체조건 | 174cm |
등번호 | -[1] |
소속팀 | 마가야네스 (1919-1925) 콜로-콜로 (1925-1927) |
국가대표 | 6경기 / 8골 (1924-1926) |
1 생애
다비드 아레야노는 산티아고에서 태어났고, 어린 시절부터 가족들의 영향에 따라 스포츠와 친숙하게 되었다. 어린 시절에는 산티아고에서 학교에 다녔지만 아리카로 전학을 갔고, 그곳에서 본격적으로 축구를 접하게 되었다. 그곳은 사관학교, 신학교, 예술학교 등과의 교류가 있었고 아레야노는 일반 학교에서 1군팀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곳에서 학생이자, 마가얀의 소유자였던 엔리케 아베요에 의해 마가야네스 클럽에 들어가게 되었다.
1919년에 17세의 나이로 산티아고의 1부에 데뷔하였으며 동시에 학교 연합 토너먼트에서도 뛰게 되었다. 곧 그는 마가야네스에서 최다 득점자의 자리에 올랐으며 각종 대회에서 이름을 알렸다. 그리고 그는 칠레 대학교에 진학하였다. 대학 리그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대학 연합팀에도 뽑히는 등 그는 두각을 나타내었고, 1923년 무렵에는 메트로폴리타나 리그에서 활약하였다. 그를 바탕으로 칠레 대표팀에도 형 프란시스코와 함께 선발되었다.
당시 칠레는 코파 아메리카에서 아예 승점자판기 수준이었던 터라 다른 팀들에 밀려 3전 전패의 성적을 거두고 말았다. 그리고 아레야노가 파라과이를 상대로 유일한 골을 넣었다는 것에 만족해야만했다.
1925년, 새로 창설된 콜로-콜로의 창단 멤버이자 설립자로 새로운 도전을 하게 된 아레야노는 주장을 맡게 되었다. 한편, 국가대표팀에서는 칠레의 불참으로 코파 아메리카에서 한 대회를 건너뛰고 자국에서 열린 다음 대회에 참가하게 되었다. 아레야노는 여기에서 절정의 기량을 발휘했다. 여기에서 아레야노는 4경기에 출전하여 2차례의 해트 트릭을 기록하며 7골을 쓸어 담았다. 그의 활약에 힘입어 칠레는 코파 아메리카에서 역대 첫 승을 신고함과 동시에 2승으로 3위로 대회를 마쳤다. 하지만 이것이 그의 마지막 국가대표팀 경기가 될 줄 누가 알았으랴...
1927년 5월 2일, 콜로-콜로의 유럽 투어. 스페인 바야돌리드에서 레알 바야돌리드와의 시합이 있었다. 시합 도중 불행하게도 아레야노는 수비수와 충돌하면서 자신의 다리로 배를 가격하게 되었다. 이 충격으로 인해 아레야노는 복막염 증상이 나타났고 제대로 된 수술을 받지 못하였다. 그로 인해 그는 24세의 나이로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다. 비운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팀의 주장을 위해 콜로-콜로는 지금도 자신들의 홈구장에 그의 이름을 붙여[2] 기리고 있다.
2 플레이 스타일 & 평가
빠른 스텝과 발기술로 상대 수비수를 현혹시킬 수 있는 공격수였다 전해진다. 또한 바이시클 킥의 선구자 중 하나로 알려져 있을 만큼 슈팅 기술과 탄력도 좋았다 한다.
3 뒷 이야기
- 아레야노가 콜로-콜로를 세울 당시의 나이는 23세. 그는 공식적으로 기록된 최연소 축구 클럽 설립자이다.
- 아레야노는 1926년 코파 아메리카에서 4경기에 출전, 7골을 넣었다. 이는 1939년 대회에서의 테오도로 페르난데스와 더불어 역대 코파 아메리카 득점왕 중 경기당 득점비율로 따지면 가장 높은 기록이다.
- 동생 기예르모는 나중에 초대 월드컵에 칠레 대표팀에 선발되었고 조별 리그 마지막 경기인 아르헨티나 전에 출전하였다.
4 수상
4.1 클럽
- 산티아고 축구 협회 토너먼트 우승 1회: 1925(콜로-콜로)
4.2 개인
- 코파 아메리카 득점왕 1회: 19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