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카츠카사 카즈코

鷹司和子, 1929년 9월 30일 ~ 1989년 5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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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와 덴노(히로히토)와 고준황후(나가코)의 2남 5녀 중 3녀. 아키히토 덴노의 셋째 누나이다. 미혼 시절의 이름은 다카노미야 카즈코(孝宮和子) 내친왕.

1 약혼

카즈코 공주는 1948년 가쿠슈인 여자 고등과를 졸업한 후 前 시종장 햐쿠타케 사부로(百武三郞)의 거처에서 1년 정도 신부수업을 받았다. 이듬해 11월 23일 이종사촌 오빠인 오오타니 고쇼(大谷光紹)[1]와의 약혼이 발표되었다. 오오타니 가문에서도 적극 환영했으나, 이 약혼은 파기되었다.

그리고 1950년 1월, 6살 연상인 다카츠카사 도시미치(鷹司平通)와의 약혼이 정해졌다. 도시미치의 아버지 다카츠카사 노부스케(鷹司信輔)는 옛 공작[2]이자 메이지신궁의 제관(祭官)이었다. 패전 후 처음인 공주의 결혼에, 신랑감이 옛 공작 가문의 아들이지만 일반 직장인이라는 것도 화제가 되었다.

약혼 기간 중에 도시미치는 카즈코 공주가 두 여동생 요리노미야 아츠코 공주, 스가노미야 타카코 공주와 함께 생활하는 구레타케(烏竹) 기숙사[3]를 자주 방문했다. 큰언니인 히가시쿠니 시게코는 결혼 전에 신랑 될 사람을 한 번 만나보지도 못하고 어른들이 정한 상대에게 시집가서 어려움을 겪은 바 있어, 여동생들은 형식적으로나마 맞선, 교제, 데이트 등을 거친 것이다. 특히 어머니 나가코 황후는 딸들의 이러한 신식 행보를 적극 지지해 주었다.[4]

2 불행한 결혼생활 및 사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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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즈코와 도시미치 부부.

1950년 5월 20일, 카즈코 공주는 도시미치와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 후 그녀는 황족의 신분을 잃고 평민이 되었다. 다카츠카사 카즈코는 5년 후인 1955년에야 임신했지만 사산(死産)되었고, 이후로 다시는 임신하지 못했다.[5]

1966년 1월에는, 사라졌던 도시미치가 이틀 만에 단골 바(bar)의 마담(당시 39세)과 함께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장소는 마담의 집이었고, 두 남녀의 사인은 일산화탄소 중독이었다. 이 사건은 세간의 큰 관심을 끌었고, 몹시 충격을 받은 카즈코와는 상관없이 언론은 정사(情死) 등의 선정적인 제목으로 신나게 보도했다. 남편의 간통에 이어 갑작스러운 사별과부가 된 카즈코는, 언론과 공공장소에 노출되는 것을 점점 피하기 시작했다.

2년 후인 1968년에는 강도까지 당했다. 카즈코가 집에 혼자 있을 때, 주방에 칼을 든 강도가 침입한 것. 입을 틀어 막힌 카즈코는 겨우 현관으로 도망쳤지만, 양손 가운데손가락에 전치 1주의 부상을 입었다.

3 친정으로

그 후로 카즈코는 친정인 황실로 돌아가서 살았다. 아버지 히로히토 덴노가 그녀의 안전을 염려하여 아카사카(赤坂) 이궁에 거처를 마련해 주었기 때문이다. 남동생 아키히토 황태자도 홀로 된 누나 카즈코를 가족 휴가 등에 초대하여 함께 어울리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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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올케 미치코 황태자비와 그녀의 아이들과 함께, 여름 휴가에서.

1974년에는 고모할머니 기타시라카와 후사코(北白川房子)[6]의 뒤를 이어 이세신궁의 제관을 맡았다. 1988년 카즈코가 퇴임한 후로는 바로 아래 여동생인 이케다 아츠코가 뒤를 이어 제관이 되었고, 2012년부터는 조카인 구로다 사야코가 임시 제관이 되었다.

4 사망

아버지 히로히토 덴노가 사망하고 약 4개월 후인 1989년 5월 26일, 카즈코도 뒤따르듯 심부전증으로 사망했다. 이듬해인 1990년에 아키히토 덴노의 차남 아야노미야 후미히토 친왕이 가와시마 키코와 결혼했고, 고모 카즈코가 살던 아카사카 이궁에 신접살림을 차려 1997년까지 거주했다.
  1. 고준황후의 여동생 오오타니 사토코(大谷智子)의 아들.
  2. 1947년의 신적강하로 인해 평민이 됨.
  3. 일본 황실의 전통에 따라, 자녀들은 부모와 떨어져 양육되었다. 그러나 훗날 평민 출신의 비(妃)로 화제를 모았던 미치코 황태자비는 이 전통을 깨고, 2남 1녀를 자신의 곁에 두고 길렀다. 이때부터 일본 황실에서도 자녀들을 친부모의 품에서 양육하기 시작했다.
  4. 그러나 1959년 큰아들 아키히토 황태자가 평민 여성 쇼다 미치코와 연애결혼을 할 때는 강하게 반대했고, 그 반대를 이기고 결혼이 이루어진 후에도 큰며느리 미치코 황태자비를 몹시 미워하여 호된 시집살이를 시켰다.
  5. 끝내 자녀를 낳지 못하여, 시누이 마츠다이라 아키코(松平章子)의 아들인 나오다케(尙武)를 양자로 들였다.
  6. 메이지 덴노와 측실 소노 사치코(園祥子)의 7녀. 후사코의 손녀 기타시라카와 하츠코(北白川肇子)는 1939년 출생한 직후부터 아키히토 황태자의 신붓감으로 거론되었으나, 평민 쇼다 미치코에게 밀려 탈락하고 나가코 황후의 외가인 시마즈 가문으로 시집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