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本/皇室. Imperial House of Japan. 일본의 황실(皇室, こうしつ)을 설명하는 항목이다. 일괄적으로 황실로 표기한다.
1 개요
세계에서 가장 역사가 긴 왕조[1]
일본의 황실은 덴노와 황족(皇族)으로 구성된다. 황족은 내정황족(內廷皇族, ないていこうぞく)과 미야케(宮家)로 구성된다.
2 설명
들어가기 앞서 친왕(親王), 내친왕(內親王), 왕, 여왕 등의 용어 설명이 필요한데, 친왕은 덴노의 남성 자손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친왕의 아내는 친왕비라고 한다. 내친왕은 여성 자손을 가리키는 말이며 평민과 결혼하면 지위를 잃는다. 현재 귀족이 사라진 관계로 내친왕은 자기 친척인 친왕이랑 결혼하지 않는 한은 결혼시 평민이다.
덴노의 증손자/증손녀부터는 왕/여왕이라고 부른다. 현재는 다이쇼 덴노의 자식들 외의 황족은 다 신적강하를 당했기 때문에 황실의 인적 풀이 줄어든 상태라 왕은 없고, 여왕은 워낙 장수한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의 손녀들만 있는 상태다.
한마디로 친왕과 내친왕은 각각 덴노의 아들과 딸, 손자와 손녀이며 왕과 여왕은 증손/증손녀 이하의 후손으로 생각하면 된다. 보통 친왕과 왕은 왕자로 내친왕과 여왕은 공주로 번역된다.
특이하게 남자들은 모두 '히토(仁)진'로 끝나는 이름을 짓는다.[2] 여자들은 '코(子)'로 끝나는 이름을 짓는다. 그리고 성씨는 없지만 미야케를 성씨처럼 쓰기도 한다. 여성의 경우 평민과 결혼하면 남편의 성씨를 따른다.
2.1 덴노
현직 |
아키히토 |
덴노는 덴노를 참고할 것.
2.2 내정황족
내정황족은 덴노의 가족 가운데서 덴노의 아내(황후)와 덴노의 할머니(태왕태후), 덴노의 어머니(황태후)와 덴노의 아들(황태자)와 그의 가족, 덴노의 미혼인 딸을 가리킨다. 구로다 사야코는 결혼하면서 내정황족에서 평민으로 강등당했다 바뀌었다. 과거에는 '신적강하'라고 표현하였으나 현재 일본에서는 중립적 의미인 '황적이탈'로 표기한다.
2.2.1 2014년 기준 내정황족
2.3 미야케
미야케는 친왕(親王)[3]과 친왕의 가족을 가리킨다. 5개의 미야케가 있다. 동양의 남성계통에 따라, 내친왕(공주)은 결혼하면 미야케를 이루지 못한다. 그래서 결혼한 공주(내친왕, 여왕)의 자녀는 기재하지 않는다.
2.3.1 아키시노노미야
秋篠宮. 아키히토의 차남인 후미히토(文仁, 1965-)가 1990년 6월 29일 가와시마 키코(川嶋紀子, 1966-)와 결혼하면서 생긴 미야케이다. 구성원은 아래와 같다.
2.3.2 히타치노미야
常陸宮. 아키히토의 남동생인 마사히토(正仁, 1935-) 친왕의 집안이다. 마사히토가 1964년 9월 30일 쓰가루 하나코(津軽華子, 1940-)와 결혼하여 생겼다. 자녀는 낳지 못했고, 구성원은 아래와 같다.
- 마사히토: 왕위계승 순위 4위.
- 하나코 친왕비
2.3.3 미카사노미야
三笠宮. 다이쇼 덴노의 4남인 다카히토(崇仁, 1915-2016) 친왕의 집안이다. 한 마디로 아키히토 덴노의 막내 숙부. 위의 미야케와는 달리, 전쟁 전에 생긴 미야케다.
4남인지라 황위 계승 가능성이 없어서 자유롭게 산 사람이다. 일본 육군 소좌로 근무하던 당시에, 동료였던 츠노다 도모시게(津野田知重, 1917-1987)[4]와 함께 도조 히데키를 실각시키고 주전파들을 대거 숙청하는 쿠데타 계획을 세웠다가 심리적인 압박(...)을 못이겨 헌병대에 자진 신고하게 되어 쿠데타에는 실패했다. 그래도 다행히 츠노다도 면직 처분에서 끝나긴 했지만. 그 이후에도 중일전쟁 중 일본군이 일으킨 전쟁 범죄를 고발하는 등 일본군 내에서 손가락 안에 꼽히는 개념인이였다. 자세한 설명은 다카히토를 참조.
전후에는 도쿄대학에서 동양사를 공부했는데, "'진무 덴노는 신화이며 역사가 아니다!!"'라고 강변패드립해 '빨갱이 왕자님(赤い宮様)'이란 별명으로 불렸다. 1941년 10월 22일 다카기 유리코(高木百合子, 1923-)[5]와 결혼하였다. 구성원은 아래와 같다.
- 유리코 친왕비: 다카히토의 아내.
- 고노에 야스코(近衞甯子, 1944-): 다카히토의 장녀. 본래 야스코 내친왕이었으나 1966년 12월 18일 결혼하여 평민이 되었다. 고노에 후미마로의 외손자 고노에 다다테루(近衛忠煇)와 결혼, 아들 고노에 다다히로(近衛忠大)를 낳았다. 다다히로는 고준황후의 큰오빠 구니 아사아키라(久邇朝融)의 손녀인 구니 게이코(久邇桂子)와 결혼, 3명의 자녀를 낳았다.
- 토모히토(寛仁, 1946-2012) 친왕: 다카히토의 장남. '수염왕자(ヒゲの殿下)'란 별명으로 유명했다. 1990년대부터 암 때문에 투병하다가 2012년 세상을 떠났다. 덴노의 여계 계승에 반대해 구황족의 복적을 주장했다. 황실에서 보기 드물게 극우 성향을 드러냈다.
좌익인 아버지에 대한 반항덧붙여 후궁을 두어서라도 아들을 낳아야 한다고 (자긴 대 환영(…)이란다) 주장했다.일본 황실의 하렘물화덕분에당연히신나게 까였다.(…) 당시 내각총리대신이었던 고이즈미 준이치로는 여계 계승을 추진했는데, 히사히토 친왕이 태어나면서 유야무야되었다. 남동생들과 달리 장남인 관계로 당주 자리를 이어받을 것으로 예상해 미야케를 받지 않았는데, 아버지가 워낙 장수하는 바람에 먼저 세상을 떠났다.(…)
- 아키코(彬子, 1981-) 여왕: 토모히토의 장녀.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일본 미술품 및 미술사를 공부하여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일본 황실 최초의 여성 박사이다. 토모히토 친왕은 생전에 똑똑한 큰딸을 자랑스러워했다.
- 요코(瑶子, 1983-) 여왕: 토모히토의 차녀. 가쿠슈인 여대를 졸업하고 일본 적십자에서 근무했다. 특기는 검도로, 가쿠슈인 초등과 때부터 시작하여 대학 시절에는 검도부 부주장을 맡았고, 검도 관련 공무에도 참석했다. 또한 아픈 부모와 영국 유학 중이던 언니 아키코 여왕을 대신하여 여러 공무에 참석했다.
- 요시히토(宜仁, 1948-2014) 친왕: 다카히토의 차남. 2014년 그의 사망과 함께 궁가가 단절되었다. 요시히토항목을 참고.
- 센 마사코(千容子, 1951-): 다카히토의 차녀. 본래 마사코 내친왕이었으나 1983년 10월 14일, 다도(茶道)로 유명한 센 가문의 종손이자 5살 연하남인 센 소오시츠(千宗室)와 결혼하며 평민이 되었다. 2남 1녀를 낳았다.
- 노리히토(憲仁, 1954-2002) 친왕: 다카히토의 3남. 아래의 다카마도노미야 참고.
2.3.4 다카마도노미야
高円宮. 노리히토 친왕이 1984년 12월 6일에 결혼하여 생겼다. 노리히토 친왕은 일본 황족 가운데 제2차 세계대전 이후로 처음으로 한국을 공식 방문했다. 그러나 같은 해에 심장마비로 급사했다. 다만 자녀(3녀)가 있어 아직 미야케는 남아 있다. 구성원은 아래와 같다.
- 노리히토(憲仁, 1954-2002) 친왕: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개막식 참석차 패전 후 황족 중 처음으로 한국을 공식 방문했다. 방문 중 한국에 대해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으며, 개막식이 끝난 후 아내 히사코 비와 함께한국 이곳저곳을 여행하고 직접 사진을 곁들인 여행기 다카마도노미야 전하가 본 한국을 출간하였다. 그러나 귀국 후 스쿼시 운동 중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 돗도리 히사코(鳥取久子, 1953-): 결혼 후엔 다카마도노미야 히사코 친왕비. 남편인 노리히토 친왕이 2002년에 급서하면서 현 당주이다.
- 아야코(絢子, 1990-) 여왕: 노리히토의 3녀.
3 황위 계승 순위
순위 | 이름 | 덴노와의 관계 | 생년월일 |
1 | 왕세자 나루히토 친왕 | 장남 | 1960년 2월 23일 |
2 | 아키시노노미야 후미히토 친왕 | 차남 | 1965년 11월 30일 |
3 | 히사히토 친왕 | 손자 | 2006년 9월 6일 |
4 | 히타치노미야 마사히토 친왕 | 동생 | 1935년 11월 28일 |
히사히토가 태어나기 전까지 일본 황실이 계승 문제로 헬게이트가 열린 것이, 일단 아키히토의 아들인 나루히토와 후미히토가 아들을 두지 않았고, 아키히토의 동생인 마사히토의 경우 자녀 자체가 없었다. 아키히토의 작은아버지인 다카히토는 아들을 셋 두었지만, 장남 토모히토와 3남 노리히토는 딸만 남기고 죽었다. 또한 차남 요시히토는 독신이다. 2014년 6월 8일에 요시히토가 사망하여 다카히토는 아들 셋이 모두 본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그리고 다카히토 본인도 2016년 사망하였다.
4 일본 정부와 일본 황실의 대책 마련
2005년, 남성 황족이 40년 간 태어나지 않았다는 것에 일본 정부는 위기감을 느껴 여성의 황위 계승이 가능하도록 황실 전범의 개정을 추진했다. 그러나 2006년 9월 6일 히사히토 친왕이 태어나면서 흐지부지되었다.
따라서 아키히토 덴노가 세상을 떠난 후 현재의 황위 계승법이 유지되고 후미히토 친왕이 장수할 경우 1위 나루히토 황태자 → 2위 후미히토 친왕 → 3위 히사히토 친왕 순으로 즉위하게 된다. 만일 히사히토 친왕이 장래에 아들을 낳지 못하면, 아들도 없이 70세를 바라보는 후순위 계승권자들밖에 남지 않는다.
2011년 11월, 현재 황족 남성 수가 너무 적어 나중에 큰 문제가 있을 수 있다며, 황족 여성이 결혼한 뒤에도 계속 황족 지위를 유지하도록 개정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본 정부 측에서 추진될 기미가 보이고 있다.
남자가 너무 귀해지고, 최근 아키히토 덴노의 건강이 악화되자 황실 내부가 어지러운 듯하다. 마사코 황태자비의 경우 아들을 낳지 못해 9년간 반 감금상태로 우울증이 생겼다고 하며, 때문에 현재 공식 석상에 모습을 거의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6]
게다가 나루히토 황태자의 남동생인 후미히토 친왕이 적자를 얻으면서 황실 내부의 입깁이 엄청나게 강해져, 마사코 황태자비와 도시노미야 아이코 공주 모녀의 황실 내 입지가 매우 좁아졌다고 한다.[7] 후미히토 친왕은 확정적인 차세대 덴노의 아버지이자, 황태자 부부의 연령상 앞으로도 아이를 낳지 못할 것이 기정사실화 되는 현 상황에서 황태제에 책봉될 가능성이 높아진 관계로 천황 정년제인세이?를 주장하는 등, 은근히 나루히토 황태자를 몰아붙이며 입김을 높여가는 중이다.후미히토 : 형님 폐하 덴노 자리 이을 아들도 없는데 덴노 다음 자리 저한테 주시요, 나루히토 : 네 이놈! 니가 아들 낳았다고 눈에 뵈는게 없어졌나 보구나.
이러한 관계로 벌써부터 일본판 왕자의 난이 일어나는 게 아니냐는 소리도 나오는 중. 이대로라면 아키히토 덴노 사망 후 일본 황실에 큰 갈등이 일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고 보니 19세기 스페인에서도 비슷한 문제가…문제는 스페인보다 이쪽이 더 심각하다.
둘 사이 관계는 날이 갈수록 험악함을 더해가고 있다. 특히 황태자 부부의 경우, 아키시노노미야 일가에 관련된 모든 행사에 참여하지 않고 있으며, 두 형제 사이에 메울 수 없을 정도로 사이가 벌어진 듯. #. 가장 큰 원인은 히사히토 탄생 이후 황실에서의 아이코 공주에 대한 대접과 히사히토에 대한 대접이 너무나도 차이가 나고, 아키시노노미야가 그 뒤를 노리는 건지 형을 계속 견제하기 때문인 듯하다.
2013년 3월에는 황실을 위해서 나루히토 황태자가 퇴위하라는 주장이 나왔다. 명목상 개인의 의견이라고는 하지만 일본에서 황실 관련해서 어떤 분위기인지 알면 이게 절대로 한 개인의 의견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다. 황태자 부부 지못미(…)
아베 신조 총리가 취임한 뒤 '황통은 남계로 잇는다'라고 단호하게 확정지었다. 아베 총리 정권에서는 황실 전범 개정을 논의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히사히토가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가까운 미래에 지금처럼 남계남자가 태어나지 않을 가능성이 있어서 여성 천황, 여계 천황 가능성에 대한 논란은 끊이지 않고 있다.
아키히토가 사실상 양위 선언 이후 덴노 양위 관련법이 이르면 내년 초 법률 정비에 나설 것으로 예상된다고 보도했다.
5 일본 황실의 후계자 대책
설령 히사히토가 제위를 잇더라도 현재같은 상황에서는 일본 황실에서 여전히 후계자 문제가 불거져나올 소지가 있다. 따라서 일본 황실은 그 대책을 여전히 논의하는데, 대체로 아이코 공주의 탄생 뒤부터 나오던 여계 황족 문제와 구황족의 왕족 복귀 2가지 대책이 대표적이다.
5.1 대책1: 여계 황족의 지위 유지
사실 여계 덴노는 고사하고 천년 동안 일본의 황가는 여계 자체를 인정하지 않아왔다. 과거에 여성 덴노가 있었는데 여계를 인정하지 않았다니 무슨 말인가 싶을 텐데, 여계 덴노와 여성 덴노는 전혀 다르다. 여계 덴노란 왕가 여자의 자손이 덴노를 하는 것으로, 예를 들면 여성 덴노가 황가 출신이 아닌 남성과 결혼해서 자손을 낳아 황위를 물려줄 때를 말한다. 그리고 여성 덴노는 여자의 몸으로 덴노가 되는 것이니 이 자체는 문제가 없다. 여성 덴노의 다음 황위는 방계의 남성이나 같은 황가의 남성 사이에서 낳은 자손에게 넘어갔기에, 과거 일본에선 여계 황족을 인정할지 말지는 논란이 되질 않았다(따라서 일종의 방계 남계로 취급할 만했다). 그러니까 여계 황족 인정이란 이러한 황가의 여계 자손들에게도 황가의 지위를 주고, 필요할 때는(예를 들면 지금!) 여계 자손이 덴노의 자리에 오를 수 있게 하자는 것이다. 그 여계 자손이 남성이냐 여성이냐는 사실, 논점과 무관하다.
근현대 일본의 황실전범은 여성의 황위 계승을 전면 부정하고 있지만[8], 과거에 여성 덴노가 있었기 때문에 만약 황실의 남자 씨가 마른다면, '만세일계'를 유지하기 위해 황실 전범을 고쳐서 나루히토 황태자 이후에 아이코 공주가 황위를 물려받는 것까지는 일본의 국민 정서상 큰 문제가 없다. 한국 언론은 이러한 사정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인지, '여성' 덴노와 '여계' 덴노를 구별해서 다루지 않아 이 둘의 차이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여계 황족 논의의 논점은 '아이코 공주의 후사는 누가 물려받는가' 이다. 아이코 공주가 여성이고 황가 안에서는 그녀와 결혼할 만한 인물이 없으니, 아이코 공주의 자손들은 덴노의 자녀이면서 황족이 아닌 황당한 상황이 나올 가능성이 높다.그리고 그 때는 정말로 뒤를 이을 황족이 없어진다.그리고 스토쿠 덴노의 저주가 실현된다
다만, 아이코 공주가 황위를 이으면서도 동시에 히사히토 친왕과 결혼하는 경우, 그 소생이 황위를 이어받는다면 이런 문제는 일단 회피된다.[9] 법률적으로는 불가능하지 않다. 일본에서는 법적으로 4촌 간 결혼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라면 얄짤없는 근친 크리 현대 일본에선 실제로 하는 경우가 드물지만, 역사적으로 '일본 황족 내의 혼인'이 흔했다. 하지만 문제는 아이코 공주의 아버지인 나루히토와 아이코 공주의 작은아버지이자 히사히토의 아버지인 후미히토의 사이가 굉장히 나쁘다는 것이다.
- 세계화 추세와 유럽 왕실에서는 이미 여계 왕위가 과거부터 있어왔으므로, 일본도 이 추세에 맞춰 여성 황족들의 지위를 보장해야 한다. 주 내용은 여성들에게도 덴노 승계권을 주는 것과 여성 황족이 황족 이외의 사람과 결혼할 경우 황적이탈 되는 것을 폐지함으로서 황족의 안정을 도모하자는 것이다.
- 만혼이 대세인 현 상황에서 많은 아이를 얻기란 힘들고, 남아의 탄생도 기대하기 힘든 현실에 따라, 여성 황족들의 지위를 보장해야 한다.
- 방계 남성보다는 직계 여성이 잇는 것이 국민의 감정상에도 더 부응한다[10].
- 이미 고교쿠 덴노, 메이쇼 덴노 등 여성 덴노가 즉위한 전례가 있다.
그러나 일부 상당수의 일본인들이 반대하는데,
- 만세일계[11]의 일본 황계에서 전통을 무시하고 여성 황족에게 황위를 줄 수는 없다.
- 성이 이미 있는 남성의 혈통에게서 태어나는 아들이 황위를 계승하니 이는 역성혁명이다.[12]
현재 일본 정부에서 정식으로 이쪽을 검토하지만, 반대도 만만치 않기 때문에 논란이다. 참고로 현 일본 황족은 이상할 만큼 여성 황족의 비율이 높아서 이런 주장이 나올 수 밖에 없다. 히사히토 친왕 말고 다른 황족이 하나도 안 남는 상황보다야 낫다는 것. 때문에 여성 황족이 결혼 뒤에도 지위를 지키고 살 수 있는 대신 계승권은 인정하지 않는 식으로 이야기가 나오는 듯하다.
5.2 대책2: 구황족 복귀
주장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 1947년 신적강하는 일본 정부와 일본인들의 동의 없이, 미군정이 강압적으로 한 조치이다. 세습친왕가 제도는 1947년 미군정이 폐기하기 전까지 540년 가량 일본 황실의 전통이었다.
- 구황족들은 여전히 국영친목회 등의 활동 및 인척관계로 직황족들과 긴밀한 관계가 있다.
- 일본의 평균출산율를 고려하면 히사히토 친왕 단일 직황족 유지보다는 4궁가 이상의 친왕가를 지킬 때 지금과 같은 남계 단절의 걱정을 덜 수 있다. 또한 황족의 단절에 이미 신적강하한 구황가가 복권해 대를 잇는 것은 이미 과거부터 있던 일이다.
즉, 주로 전통적으로 이미 있어왔던 일이기에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특히 이러한 주장은 국영친목회에서도 내는 의견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주장에도 역시 반론은 있는데,
- 직계 여성을 제치고 방계가 남성이라는 이유로 제위를 계승하는 것은 명백히 가부장적이며 일본 헌법과 국민 감정상 부합하지 않는다.
- 구황족이 복권한 전례는 분명히 있지만, 그것은 당시 황실전범상으로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현 구황족들이 신적강하할 당시의 메이지황실전범(明治皇室典範)에는 신적강하한 궁가의 복귀를 금지하는 규정을 담았다. 따라서 전범을 뜯어고쳐야 이들의 복권이 가능하다.
- 평민으로 살아온 사람들이 과연 황족의 품위를 지킬지 의문이다.
- 과거 황적에서 이탈했다가 복권한 뒤 즉위한 덴노들은 최고 먼 항렬이 덴노의 5세손이었던 반면, 현 구황족은 모두 20세손을 넘어가는 궁가들이다[17]
참고로 구황족 본인들은 여성 천황에 노골적으로 반대하며, 다케다 궁가의 주장도 사실상 현 구황족들 의견의 대변이었다고 한다. 특히 논란이 불거지던 2000년대 초반, 구황족들이 당시 여성덴노 허락을 주장하던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에게 "만세일계의 전통을 단절시키려는, 암살당해 마땅한 정치가!!"라고 날린 독설도 이들의 생각을 보여준다. 즉 구황족들은 여전히 자신들을 황족으로 여기고, 언제든지 황족의 위치에 복귀할 준비를 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앞에 적었듯 일본 내부에서도 찬성과 반론이 팽팽한 상황이라 현실은 뭐라고 쉽게 말하기가 힘들다. 그렇다고 해서 이대로 가도 좋다는 것은 아니다. 여성 황족에게도 계승권을 인정해 여성 덴노를 승인하든 구황족을 복귀시키든 대책이 있어야 한다.
5.3 대책3: 후궁 하렘 제도의 부활 및 이혼 인정
매우 구시대적인 정신나간 발상이지만 일본에는 이걸 진지하게 주장하는 이들도 아주 약간 있다. 그들의 논리에 따르면 일부일처제로는 후계자 걱정이 없을 만큼의 자녀 출산을 기대하기 힘드니 후궁 제도를 부활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부일처제를 오래 전부터 고수한 유럽 왕가가 후계자 부족으로 단절한 경우가 부지기수라는 사실도 이런 주장의 근거로 든다.
물론 현대 일본에서도 이런 주장은 대책없는(…) 것으로 여기기에 심각하게 논의하지는 않으나, 현 황족으로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의 장남인 토모히토 친왕이 이런 주장을 대놓고 했으니 문제다. 심지어 잡지에도 이런 내용의 주장을 기고했다. 이에 대해서 일본 언론은 측실제도 부활주장은 빼놓고 다른 부분만 발췌하여 보도했으나, 그딴거 신경안쓰는 외국에서는 "'일본 황족이 후궁 제도 부활을 주장했다!!"'고 보도했다. 일본 내 황실전범 개정과 관련된 인사들도 구시대적인 발상이라며 비판했다.
이러한 비판을 빼고 진지하게 검토하여도 측실제도가 부활하면, 과연 어떤 여성이 후궁을 자원할 것이고, 후궁을 둘 것이라 예상되는 황족 남성에게 누가 시집오겠느냐는 반론이 있다. 국민은 일부일처제를 지켜야 하는데 황실만 예외로 못한다는 의견도 있고 결과적으로 채택할 가능성은 아주 낮다. 그러나 이런 어이없는 주장이 나올 만큼 후계자 부족이 심각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19]
이혼 또한 황실전범이 금지한 사항인데 이것을 인정하여 후계자가 없을 경우, 이혼하고 새로운 아내를 얻어서 자녀를 출산하자는 것이 골자이다. 측실제도보다는 덜 구시대적이나, 자녀를 못 얻는다는 까닭에 아내를 내치고 또 아내를 얻으면 부부 당사자에게 심각한 인권침해니 마찬가지로 비판의 대상이다. 게다가 아들 못 낳았다는 이유로 소박당하는 여자가 21세기에, 그것도 일본 정도의 선진국 황실에서 공식적으로 나왔다간, 자국은 물론이고 전세계적으로도 '여성 인권 침해국가'라는 개망신을 당할 것이 명백하다. 이미 개망신은 당한것 같지만
5.4 구황족의 갈래와 현재 상황
이른바 요즘 논란인 구황족들은 1947년 미국에 의한 신적강하로 떨어져 나간 11궁가를 가리킨다. 본디 일본의 현 황족은 13세기 남북조시대 북조계열로 현 후시미계 직통이 기반인 3대 세습친왕가에 있었다. 각각 후시미노미야, 가츠라노미야, 아리스가와노미야의 3가로 이 가운데 후시미 궁가가 적통으로 덴노를 계속 내고 가츠라노미야와 아리스가와노미야는 15세기에 생긴 후시미계 방계 세습친왕가였다.
이렇게 500년 가까이 3가문의 세습친왕가를 유지했지만, 아리스가와노미야와 가츠라노미야가 200년의 시간 사이 이미 너무나도 황통과 먼 가문으로 바뀌고 후시미노미야 하나만으로는 후손이 모자랐다. 그래서 17세기의 히가시야마 덴노가 황통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새로운 세습친왕가를 만들었는데, 이 때 현 직황족의 혈통인 간인노미야가 탄생했다. 이것이 메이지 덴노 이전의 4대 세습친왕가이다.
그리고 혹시나가 역시나로, 히가시야마 덴노가 죽은지 4대 70년 만에 후시미계 직계 황통은 고모모조노 덴노를 마지막으로 단절한다. 이때 간인계에서 고카쿠 덴노를 내면서, 덴노 황통은 간인계로 넘어갔다. 후시미노미야에서 간인노미야로 주도권이 넘어간 뒤 후시미노미야에서는 수많은 분가들이 나오는데, 이 가문들이 이른바 지금 구황족으로 부르는 가문 가운데 후시미계의 방계 9궁가이다. 이들은 모두 후시미궁가의 19대 당주 후시미노미야 사다유키(伏見宮貞敬親王)의 아들과 손자들이 개창한 가문이었다.
1945년 패전 이전에 이미 세습친왕가 가운데 아리스가와노미야와 가츠라노미야 궁가는 단절했다. 1947년 미군정이 황실의 예산감축을 이유로 황실을 축소시킬 때 세습친왕가인 후시미 직계와 간인 직계 및 후시미 방계 9궁가를 모두 강등시키고, 끝내 다이쇼 덴노의 후손들인 직황족만 남았다.
5.5 1947년 신적강하로 강등한 구황가 목록 및 구황족 현황
보기 쉽게 후손이 남은 구황족을 이 색상으로 강조했다.
- > 후시미노미야(伏見宮): 북조 3대 스코 덴노의 적장남 요시히토(栄仁)가 개창한 세습친왕가의 하나였다. 이후 쇼코 덴노가 딸 하나만 남기고 죽자 3대 당주 사다후사(貞成)의 아들 중 적장자인 히코히토(彦仁)는 고하나조노 덴노가 되었고, 차남인 사다츠네(貞常)는 후시노미야의 4대 당주가 되었다. 후시미계 궁가 10가문 가운데 종가(宗家)로 신적강하 당시 당주 히로아키(博明)와 그의 모친[20], 누이 2명이 강하했다. 현재는 당주인 히로아키가 딸만 3명을 두어 장차 단절할 예정이다.
- > 간인노미야(閑院宮): 113대 히가시야마(東山) 덴노의 차남, 나오히토(直仁)가 개창한 세습친왕가 가운데 하나였다. 이후 후시미계 마지막 직계 황통인 118대 고모모조노 덴노가 붕어하자, 2대 당주 스케히토(典仁)는 장남 하루히토(美仁)에게 친왕가를 잇게 하고, 6남 토모히토(兼仁)에게 황통을 계승시켰다. 이 토모히토(兼仁)가 바로 119대 고카쿠 덴노로 현 직황족의 직계선조다. 신적강하 당시에는 직황족을 뺀 간인가의 유일한 계승자였던 당주 하루히토(春仁) 부부가 강하했다.[21] 전후 하루히토는 이혼했으며, 이후 독신으로 살았기 때문에 그가 죽은 1988년 단절했다.
- > 나시모토노미야(梨本宮): 후시미노미야 19대 당주 사다유키(貞敬)의 9남 모리오사(守脩)가 개창한 궁가. 이방자 비의 친정이다. 이미 개창 시기부터 아들이 없어서 양자를 들여 대를 이었다. 2대 당주는 야마시나노미야 가문에서, 3대 당주와 4대 당주 는 구니노미야 가문에서 양자로 데려왔고[22], 5대 당주는 친척이 되는 한 귀족 가문에서 양자로 데려왔다.[23] 그러니까 2014년 시점에서 가문은 있지만 사실상 5대 당주 이후로는 황족이 아니다.[24]
- > 야마시나노미야(山階宮): 후시미노미야 구니이에의 장남[25], 아키라(晃)가 개창한 가문. 일본판 양녕대군이라 불릴 만한 인물로, 장자였음에도 개차반짓을 하다가 황족에서 제명당했다.(...) 그 뒤 고메이 덴노에게 빌어 황족으로 복귀하고, 야마시나의 궁호를 얻어 궁가를 개창했다. 신적강하 당시에는 3대 당주인 타케히코(武彦) 혼자 강등되었다. 다케히코는 이후 독신으로 살았기 때문에 그가 죽은 1987년 단절했다.[26]
- >구니노미야(久邇宮): 후시미노미야 구니이에의 4남 아사히코(朝彦)가 개창한 궁가로, 현 아키히토 덴노의 친모인 고준황후의 친정이기도 하다.[27] 가문이 매우 번창한 관계로 신적강하 당시 3대 당주 부부와 3명의 아들, 6명의 딸이 함께 강등했다. 2대 당주는 차남이 물려받았고 가문을 유지하며 적장자가 있다.
- >가야노미야(賀陽宮): 구니노미야 아사히코의 장남 구니노리(邦憲)가 개창한 궁가. 2대 당주였던, 츠네노리(恒憲)가 무려 6명의 적자를 남겨 후세가 번창했다. 그러나 적장남이 자식없이 4대 당주를 이어받기 전에 자손이 없이 죽고, 차남인 하루노리(治憲)가 당주를 물려 받았으나 4대 당주 하루노리는 당주 없이 죽었다. 이후 당주 자리는 조카인 가야 타다노리(賀陽正憲)에게 넘어갔다. 5대 당주인 타다노리에겐 2명의 적남이 있다. 아버지가 왕이었기 때문에 당주 승계에는 문제가 없지만, 적장남이 대를 잇는 아사카·히가시구니에 비하면 좀 꿀린다고 한다. [28]
- > 아사카노미야(朝香宮): 구니노미야 아사히코의 8남으로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가 개창한 궁가. 신적강하 때는 적자인 다케히코(孚彦)와 적손인 도모히코(誠彦)[29]가 살아있었다. 대가 번창하지는 못했지만 독자로 여전히 이어가는데 현재 적장자가 있다. 현재 적장손인 아사카 아키히코(朝香明彦)도 또 독자다. 무려 4대 독자!! 정말 은근은근히 끊어지지만 않고 이어간다.[30]
- >기타시라카와노미야(北白川宮): 후시미노미야 구니이에의 13남 사토나리(智成)가 개창한 궁가. 2대 당주는 사토나리의 형인 요시히사(能久)가 당주 자리를 받았다. 3대 당주 나루히사(成久)는 메이지 덴노의 7녀 카네노미야 후사코(周宮房子) 내친왕과 결혼했다.[31] 현재는 5대 당주 미치히사(道久)[32]가 살아있으나, 모두 딸로 후사가 없어 단절할 예정.
- > 히가시쿠니노미야(東久邇宮): 구니노미야 아사히코의 9남인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가 개창한 궁가. 현 구황족 가운데 가장 번영한다. 적장자도 많고, 이 집안의 직계 후손은 아키히토 덴노의 첫째 누나인 히가시쿠니 시게코의 후손이기도 해서, 직계 황족들과 가까운 친척이기도 하다. 덕분에 구황족 복귀관련 매스컴이 나올 때면 끊임없이 주목을 받는 궁가이기도 하다. 초대 당주인 나루히코가 수상을 역임했던 연유로 정치에도 꽤 관심을 둔다. 모순적이게도 구 황족을 죄다 신적강하시키는데 가장 큰 역할을 했던 사람 가운데 하나가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33]였다(…)
노렸구나!해당 항목 참조.
- > 다케다노미야(竹田宮): 기타시라카와노미야 요시히사의 서장자인 츠네히사(恒久)가 개창한 궁가. 현재 3대 당주는 다케다 츠네타다(竹田恒正)다[34] 구황가와 관련해 매스컴에 가장 자주 의견을 내는 궁가로, 방계인 다케다 츠네야스(竹田恒泰)가 국영친목회의 대변인에 가까운 역할을 한다.[35] 이 가문에는 현재 적손이 있다.
- >히가시후시미노미야(東伏見宮): 후시미노미야 구니이에의 17남 요리히토(依仁)가 개창한 궁가. 궁가의 당주였던 요리히토가 1922년, 아내인 가네코(周子)가 1955년에 죽어 단절했다.
현재 가야·구니·아사카·히가시쿠니·다케다에게 후계자가 있지만, 이들도 히가시쿠니를 빼면 대부분 간신히 혈통을 유지하는 상황이다. 4대 독자인 아사카는 물론이고, 구니도 젊은 구황족이 1명. 가야에 후계자가 2명. 다케다에 3명. 히가시쿠니에 후손들이 많지만 성을 바꿨거나 일본 국적을 포기하고 떠난 사람이 많아, 실제로는 히가시쿠니 유키히코(東久邇征彦)의 자제들만 가문을 이을 만하다. 만약 구황족 복귀가 본격화한다면 이들에게 세습친왕가의 지위를 내릴 가능성이 높다.[36]
참고로 영어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1947년 당시 미야케들의 계승순위는 직궁가(현 천황가)>야마시나>가야>구니>나시모토>아사카>히가시쿠니>다케다>기타시라카와>후시미>간인이었다. 구 황실전범에는 적장자우선 조항이 있어서 직궁가 다음으로 종가인 후시미노미야에 우선권이 있었으나 1947년에 제정된 현행 황실전범은 서자를 황족으로 인정하지 않는 대신, 제정 당시의 황족 모두를 적자로 간주한다고 부칙에 명시했다. 따라서 위와 같은 순위가 되는 것.
6 여담
신적강하 이전까지 일본 황족들은 일본육군사관학교나 일본해군병학교에 들어가 일본군 육군이나 일본군 해군에서 근무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경우엔 진급도 굉장히 빠른 편으로 왕공족이었던 영친왕이나 이우, 이건 등도 일본군에서 근무했다. 일제 패망 당시에 영친왕은 만 47세로 중장이었고 이우는 만 32세에 중령[37]이었고 이건 역시 36세에 중령이었다.
자위대가 생긴 뒤에 일본 황족이 방위대학교에 들어가거나 다른 과정 등을 통해 자위대에 입대하여 근무하는 일은 없다. 영국의 윈저 왕조와는 비교되는 점인데, 히로히토가 일본군 대원수로 복무했다는 점에 대한 반성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일제강점기 당시에는 전주 이씨 옛 조선 왕가도 이왕으로 격하되어 일본황실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다.
7 한국인들의 일본 황실에 대한 시선
일본 황실에 대한 한국인들의 인식은 당연한 말이지만, 영 좋지 않다. 이런저런 역사적인 이유로 일본 황실이라고 하면 대체로 일제강점기 최고 정점의 대마왕 일족으로 인식되어 있다.
하지만 일본 황실에 대해 알만큼 아는 한국인들 중에는, 존재 자체를 부정적으로 생각해도 아키히토 덴노와 황태자 부부에 대해서는 어느정도 호의적으로 보는 경우도 없잖아 있다. 일단 아키히토 덴노는 일본의 우경화를 반대하는 입장인 데다, 지금까지 한국이나 역사와 관련해 발언한 내용들을 미루어 보면 적어도 역대 덴노 가운데 어느 정도 개념인인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루히토 황태자는 생긴 것도 호감형이지만 황실 내의 거의 유일한 진보주의자로서 일본의 극우들과 충돌하는 사이고 그런 탓에 지금까지 고생한 것도 있다. 게다가 아내인 마사코 황태자비의 비운의 삶에 대해 동정적인 시선을 갖는 한국인들이 많아, 일본 황실에 대해 알 만큼 아는 한국인들은 황태자 부부에 대해서는 좋불쌍하게 보기도 한다.
8 관련항목
- ↑ 덴노는 '신의 후손'임을 자처해왔고 이것이 민중들 사이에 받아들여졌기에 다른 '인간'들이 덴노에 오름으로써 얻을 수 있는 실익이 없으며 '신을 참칭하는 것'으로 비칠 수 있었고, 그리하여 막부와 쇼군이 실권자가 되어 덴노의 권한이 거의 없는 상황이 되더라도 계속 덴노가 유지되며 그 자손들에게 세습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 진무 덴노~아키히토 덴노까지 (명목상으로는) 왕통이 끊이지 않고 이어져 왔다.
- ↑ 현역 덴노의 경우 101대 덴노부터 현재(차기 덴노도 유력)까지였으며 그 이전엔 '히토'외의 다른 이름도 사용했다.
- ↑ 덴노의 아들과 손자. 증손자부터는 왕이라고 한다.
- ↑ 우리가 잘 아는 용자 방송국 TV 도쿄 창업주 되시겠다.
- ↑ 친정은 옛 화족으로 자작이었다. 전후에는 신적강하로 다 강등됐지만. 친정아버지 다카기 마사나리(高木正得)은 패전 후 자살했다. 유리코 비의 외삼촌 이리에 스게마사(入江相政)는 쇼와 덴노의 시종장을 지냈는데, 이때 그가 궁중에서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한 일기가 유명하다. 또한 스게마사의 이모 야나기하라 뱌쿠렌은 다이쇼 덴노의 외사촌 여동생이며, 미모와 문학적 재능과 파란만장한 사생활로 당대의 유명인이었다.
- ↑ 공식석상에 모습을 보이지 않은 것은 사실 오래되었다. 또한 본인이 더 이상 황실의 답답함을 견디지 못하고 도피하고 있는 듯. 일본 내에서도 마사코 황태자비에 대해 황실 내부와 궁내청 인사들의 구박과 박대가 심하다는 보도가 몇 번 나온 적이 있다. 2011년 하반기에는 황실 전범을 고쳐서라도 아예 황태자 부부를 이혼시켜야 한다는 궁내청 인사들의 주장까지 나오고 있는 중이다.
- ↑ 아이코 공주의 경우, 사촌 남동생 히사히토 친왕의 탄생 이후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는 등 간접적인 피해를 입기도 했다.
- ↑ 1889년 제정된 황실전범의 초안에서는 한때 여계 계승이 고려되기도 했다. 궁내성이 입안한 "황실제규" 1조는 "황족 중 남계가 끊어졌을 때 황족 중 여계로 계승한다"는 규정이었고, 7조에 "황녀 또는 황통의 여계가 황위를 계승할 때는 그 황자에게 물려주며, 만약 황자가 없을 때에는 그 황녀에게 물려준다"고 못박고 있었다. 그러나 여러 가지 부정적 비판이 제기된 뒤로는 없던 일이 되었다#.
- ↑ 둘 사이의 자식은 '아이코 덴노의 자식'이 아니라 '헤이세이 덴노의 증손자'라서 후사 자격을 얻는다.
- ↑ 2010년 NHK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중 77%가 여성 덴노에 긍정적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 ↑ 진무 덴노부터 아키히토 덴노까지 황통이 끊이지 않고 이어져 왔다는 논리.
- ↑ 그러나 네덜란드 같은 경우 베아트릭스 전 여왕의 뒤를 이어 베아트릭스의 아들인 빌럼 알렉산더르 현 국왕이 왕위를 계승받고 영국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아들인 찰스 황태자가 왕위 계승권을 유지하고 있는 등 여왕이 낳은 왕자가 왕위를 이어받거나 후계자 지위를 가지고 있는 사례도 있다. 하지만 서양은 여계 계승이 가능하지만 일본은 동양의 계승법상 남계만 계승이 가능하는게 문제
그놈의 만세일계 - ↑ 과거 여성 덴노가 탄생한 전례는 있지만, 그녀들은 대부분 구황가(1947년 신적강하 이전에 있던)의 아들과 결혼하거나 독신으로 죽었다. 하지만 결혼한 내친왕이 황적을 유지할 경우, 메이지 유신 이전에는 하가한 내친왕이 황적을 유지했기 때문에 전례가 있다.
- ↑ 태자 이외의 황자들 가운데 불교에 귀의한 이에게 주는 칭호.
- ↑ 각각 59대 우다 덴노의 예와 88대 고사가 덴노의 예.
- ↑ 전술한 다케다 일가는 신적강하 이후 일부 후예들이 캬바레나 매춘 시설을 이용하다가 발각되어 비판을 받은 적이 있으며, 2015년에는 그 후예의 하나인 다케다 츠네아키(竹田恒昭)가 대마소지죄로 체포된 일도 있어서 평판이 그리 영 좋지않다.
- ↑ 이는 현 덴노가 간인 방계인 반면 구황족들은 세습친왕가인 후시미계라서 그렇다. 조선은 왕실의 대가 끊기자 인조의 10세손이 왕위를 계승한 사례가 있었다. 프랑스도 앙리 4세는 루이 9세의 10세손이었다. 살리카법을 채택한 왕가에서는 이렇게 대가 끊겨서 먼 친척이 계승할 때가 종종 있다.
- ↑ 사실 전례가 있는 황족들도 대부분 이런 식으로 다시 대가 끊겨 다른 궁가로 넘어간 때가 많다.
- ↑ 다만, 황실전범상 인정되지 않도록 되어 있는 '비적출자의 계승권을 인정'하는 방법으로 교묘하게 회피해갈 가능성은 있다. 적출자와 비적출자에 차별을 두는 것은 인권 침해라는 주장도 가능해지기 때문.(…)
- ↑ 쇼와 덴노의 황태자비 간택시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이방자 여사)와 함께 탈락한 이치죠 도키코(一条朝子). 후에 히로아키의 부친 히로요시(博義)의 비가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어릴때부터 단짝이었던 히로아키와 이구는 전후 동반 미국 유학을 떠났고, 도키코와 이방자 여사, 영친왕은 항구에서 함께 배웅했다.
- ↑ 적손은 아니며 원래는 구니이에의 16남이었으나, 간인 궁가가 단절하자 하루히토의 아버지 고토히토(載仁)가 봉사손으로 입적했다. 하루히토는 신적강하한 뒤 스미히토(純仁)로 개명했다.
- ↑ 3대 당주가 다름아닌 이방자 여사의 아버지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梨本宮 守正) 왕이었다. 모리마사 왕은 이방자 여사와 히로하시 노리코(廣橋規子)라는 두 딸만 낳았다. 그래서 구니노미야에서 조카 손자인 노리히코(德彦)를 데려다 양자로 삼았고 - 원래 일본 황족은 양자를 들일 수 없지만, 신적강하 이후에는 황족이 아니니 아무래도 상관이 없게 되었다. 모리마사 왕의 부인 이츠코 비가 처음에는 외손자(노리코의 막내 아들)을 양자로 들였지만 관계가 악화되어 파양했고(일본어 위키백과 등 참고) 이후 1966년에 다시 양자로 들인게 바로 노리히코 -, 이 사람이 4대 당주다.
- ↑ 4대 당주였던 노리히코가 2002년에 선택. 노리히코는 1980년 경에 이혼했는데, 자녀들은 어머니를 따라갔다고 한다.
- ↑ 5대 당주가 신적강하한 집안 출신인데, 웬만한 일본 귀족 집안은 다 신적강하한 황족이 시조라서 이 정도만으로는 황통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러니까, 가문이 있지만 황가로 복권될 가능성은 낮다.
- ↑ 서자였다. 적자는 6남 사다노리(貞教)와 14남 사다나루(貞愛). 사다노리가 요절하는 바람에 둘 다 나중에 본가인 후시미 궁가를 계승하게 된다.
- ↑ 패전 이전에 이미 후작의 지위를 받고 신적강하한 차남 쪽으로 후사가 있지만(여동생의 아들을 양자로 입양함) 복권 대상이 아니다.
- ↑ 고준황후의 아버지인 구니노미야의 2대 당주 구니요시(邦彦) 왕은 육군 대장으로, 1928년 대만총독부 시찰 도중 조선 독립운동가 조명하 의사가 휘두른 칼에 찔린 부상이 악화해 다음해 죽었다. 조선 독립운동가의 손에 죽은 일본인 가운데 최고위 인물.
- ↑ 그래서 그런지 일본어 위키백과에는 츠네노리의 장남 가야 구니나가(邦寿)가 죽은 1986년에 단절되었다고 적어놨다 흠...
- ↑ 1943년생. 무령왕릉 참배했다는 일본 '황족'이 이사람. 당시 우리나라 언론에서는 아키히토의 당숙으로 표현했는데, 실제로는 친/외가 6촌이다.
- ↑ 근데 이 집안의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가 중국에서 한 짓이 넘사벽급이고 현재 중국과 일본의 관계를 고려하면 이 집안이 천황가가 될 가능성은 영 좋지 않다......요즘도 걍 얼굴마담이라는 알량한 문제 때문라면 걍 다른 가문을 세우고 말지.
- ↑ 나루히사와 후사코의 손녀 하츠코(肇子)는 1939년 출생한 직후부터 장래의 황태자비로 거론되었으나, 평민 쇼다 미치코에 밀려 탈락하고 나가코 황후의 외가인 시마즈 가문으로 시집갔다.
- ↑ 부친인 4대 당주 나가히사(永久)가 요절하는 바람에 10살 어린 나이에 당주가 되었다. 따라서 패전 당시 존재하던 14개 궁가의 당주들 가운데서 유일하게 군인이 아니었다. 일본을 점령한 미국이 황실에다 전범재판의 칼날을 들이댈 것을 우려한 인사들이 그를 숨겨뒀다가 유사시 '미치히사 덴노'로 옹립하려던 계획도 있었다고. 그런데 모두 알다시피 미국이 히로히토에게 아량을 베풀어서 그냥 얘깃거리로만 남았다.
- ↑ 아키히토 덴노의 첫째 누나인 히가시쿠니 시게코의 시아버지.
- ↑ 참고로 2대 당주가 츠네요시(恒德)다. 731 부대 생체실험의 관여자로 이에 대해서 "그 정도 생체실험에 대해서는 양심의 가책을 못 느낀다."고 망언한 천하의 개쌍놈.
- ↑ 웃기게도 대변인 역할인 츠네야스는 신적강하 뒤 태어난 3남의 장남이라 구황족이 아니니, 복권 대상이 아닐 뿐더러 계승권 따위도 없다.(...)
꼭 뭔가 모자란 것들이 더 설친다.게다가 이 입만 산 가문은 신적강하 뒤의 행적 탓에 일본인들에게도 인식이 나쁜 편이다. - ↑ 사실 덴노 집안이 대가 끊어질 위기에 놓인 결정적 이유는 신적강하를 한 이나 그런 이의 후손에게 계승권을 부정해서다. 일본엔 대한민국 민법에 규정된 성씨불변의 원칙이 없고 세습친왕가가 아니면 자동 신적강하라서 선제의 칠종질(七從姪 - 17촌 조카)이 뒤를 잇는 일은 없다.
- ↑ 사후 대령으로 추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