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턴 셀틱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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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 KT&G 카이츠 시절
이름 | Dontae' Antijuaine Jones |
생년월일 | 1975년 6월 2일 |
국적 | 미국 |
출신지 | Nashville, Tennessee. |
출신학교 | 미시시피 주립대학교 |
포지션 | 스몰포워드 |
신체 사이즈 | 203cm[1], 100kg |
프로입단 | 1996년 NBA 드래프트 1라운드 21번(뉴욕 닉스) |
소속팀 | 보스턴 셀틱스(1997–1998) La Crosse Bobcats(CBA) (1999–2000) Memphis Houn'Dawgs(ABA) (2000-2001) Toros de Aragua (베네수엘라)(2001) Pompea Napoli (이탈리아)(2001-2003) Vaqueros de Bayamón(푸에트리코) (2003) Apollon Patras (그리스) (2003~2004) 안양 SBS 스타즈/KT&G 카이츠(2004~2007) 베이징 덕스(중국) (2007~2009) Halcones UV Xalapa (멕시코) (2009~2013 |
1 소개
KBL 역사상 가장 뜨거웠던 흥행을 몰고왔던 외국인 선수
전 농구선수. 대학 재학시절 모교를 NCAA 파이널 4에 올려놓았던 선수이며 만년 하위팀 안양 SBS를 흥행의 주역으로 만들었던 선수로 한국에서의 별명은 '단선생' '단교수', 안양의 명예시민이기도 하다.
2 선수시절
2.1 KBL이전 시절
테네시 내슈빌 출생으로 노스이스트 미시시피 커뮤니티 칼리지에서 미시시피 주립대로 전학을 했으며, 전학후 1996년, 당대 최강인 켄터키 대학교를 꺾는 파란을 일으키며 NCAA 파이널 포에 팀을 올려놨다. 이 활약으로 1996년 NBA드래프트[2] 1라운드 21순위로 뉴욕 닉스에 선발된다. 96-97 시즌 시작이전 보스턴과의 트레이드에 포함되며 셀틱스에서 첫 프로 데뷔를 한다. 부족한 사이즈, 수비력등의 문제로 별다른 활약을 보이지 못했다. 이후 여러 해외 리그에서 활약하며, ABA와 CBA를 통해 NBA에 꾸준히 노크하고 있었다.
2.2 안양 SBS 스타즈-KT&G카이츠 시절
04-05 시즌 안양 SBS는 하위권을 전전하며 고전하던 중 주력 득점원 조 번[3]이 부상으로 시즌 아웃되며 대체 선수를 물색했다. 그 중 눈에 들어온 것은 ABA 득점왕인 단테 존스였고 계약을 추진했으나 난항을 겪는다. 이전부터 많은 팀들이 눈독을 들였으나 NBA진출, 가족등을 이유로 거절해온 것. 존스와 접촉한다는 것을 우연히 안 당시 안양의 주전센터이자 존스가 존경하는 선배인 주니어 버로의 조언으로 단테 존스는 KBL 무대에 등장한다. 그리고...안양 SBS 스타즈는 15연승[4]을 질주하며 플레이오프 진출에 성공한다. 시즌 기록은 16경기, 29.38득점 12.1리바운드 3.4어시스트. 기록도 기록이지만 이 때의 단테존스는 그야말로 언터쳐블. 문경은의 말을 빌리자면 '어린아이가 노는 곳에 어른이 왔다'. NBA에서나 보여주던 기술들을 연일 쏟아내며 최전성기의 김주성마저 어린아이 손목 비틀듯 간단히 제압하며 기량을 과시했다. 이 때 단테 존스가 불러왔던 흥행이 얼마나 뜨거웠는가 잠시 설명을 하면 팬서비스, 기량, 쇼맨쉽 모든 것을 갖춘 단테 존스의 등장에 평균 2000여 명 정도가 경기장을 찾았던 안양의 홈 경기는 존스 영입 이후 4000여 명이 몰려들어 무려 두 배 가까이 관중이 늘어났고, 주말의 경우는 입석표도 팔리는등 관중몰이를 했다. 당시안양 SBS 홈페이지는. 존스의 영입 이후 조회 수는 8만여 회에서 20만여 회로 뛰어올랐고, 회원 가입 인원도 네 배로 뛰었다. 남자 프로농구의 인기 상승에도 한몫 단단히 했다. 존스가 나타난 후 농구 시청률과 TV 중계 횟수는 두 배 가까이 늘어났고, 최종적으로 100만 관중을 처음으로 달성하며 방점을 찍는다. 이해 내심 안양은 우승까지도 생각했으나, 여러가지 존스의 버릇과 단점을 분석하며 조던룰을 연상시키는 '존스룰'까지 들고나오며 플레이오프에서 탈락한다. 이 해의 SBS와 단테의 엄청난 흥행과 성적에 타팀들도 루이스 로, 크리스 윌리엄스, 피트 마이클등 해외 상위리그에서 뛰는 괴물들을 모셔온데다 선수 본인도 약점들이 간파되고, 노쇠화를 겪으며 04-05시즌과 같은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자태는 재현하지 못했다. 팀 성적 또한 파트너 외국인 선수인 주니어 버로의 부상에 따른 급격한 기량 감소, 그에 따라 데려온 선수들이 전부 기대에 미치지 못하며 신통치 못했다. KBL에서 05-06시즌까지 3시즌을 뛰었고, 룰개정으로 재계약하지 못하며 한국에서 커리어를 마감한다.
이 시기 단선생의 명언이자 두고두고 회자되는 용어로
KBL is my NBA. 가 있다.
2.3 해외 선수 시절
중국과 멕시코리그에서 커리어를 이어갔으며, 은퇴 이후에는 개인 음반을 내고, 지역 농구 행사에 참여하며 지내는 듯하다.
추가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