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위항목 : NBA 관련 인물
이름 | 월터 레이 앨런(Walter Ray Allen) |
생년월일 | 1975년 6월 20일생 |
키 | 196cm (6 ft 5 in) |
몸무게 | 93kg (205 lb) |
포지션 | 슈팅가드 |
드래프트 | 1996년 드래프트 1라운드 5순위 미네소타 팀버울브스에 지명 |
등번호 | 34번(1996~2007) 20번(2007~2012) 34번(2012~2014) |
역대 소속팀 | 밀워키 벅스(1996~2003) 시애틀 슈퍼소닉스(2003~2007) 보스턴 셀틱스(2007~2012) 마이애미 히트(2012~2014) |
수상내역 | All-NBA Second Team 1회 (2005) All-NBA Third Team 1회 (2001) NBA All-Rookie Second Team(1997) NBA All-star 10회 (2000-2002,2004-2009,2011) NBA Three-Point Shootout champion (2001) NBA Sportsmanship Award(2003) UPI Player of the Year(1996) Big East Player of the Year(1996) |
1 개요
은퇴한 [1] 전 NBA 선수. 소위 만렙찍은 남자 그래서 국내에선 만렙슈가, 만렙횽 등으로 불린다.[2][3] 누구보다도 철저한 자기관리와 모범적인 몸가짐으로 인해 안티가 거의 없고, 가족사랑도 훌륭해 선수로서나 인간으로서 존경받는 남자이다. NBA 역대 3점슛 성공 개수 1위 기록의 보유자이기도 하다.[4] ~가장 정석에 가까운 슛폼을 가지고 있으며,~ [5][6]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 폼이 흔들리지 않아 그의 슛폼 사진을 모아놓고 Ctrl + C, Ctrl + V 식의 짤방(각주 참조[7])도 돌아다니는 수준.
2 NBA 입성 이전
5명의 형제중 3번째로 태어난 레이 앨런은 힐크레스트 고등학교를 주 챔피언으로 이끌면서 전국적인 관심을 받았다. 그후 농구 명문대학중 하나인 유콘, 코네티컷 허스키스로 진학, 빅 이스트 올해의 선수상을 받고, 한 시즌 총득점 대학기록인 1,922점. 3점슛 115개를 성공시키는 등의 활약을 했다. 훗날 코네티컷 대학교에서는 그의 백넘버를 영구결번으로 지정하기도 했다.
3 NBA 커리어
3.1 밀워키 벅스
파일:Attachment/Ray allen bucks.jpg
역대 최고의 드래프트 중 하나로 평가받는 1996년 드래프트에서 앨런은 전체 5순위로 미네소타에 지명되었지만 바로 밀워키가 4순위로 지명한 스테판 마버리와 트레이드 되면서 밀워키 벅스에서 루키 시즌을 보내게 된다. [8]
당시 밀워키에는 1994년 전체 드래프트 1위 출신인 득점 머신 글렌 로빈슨, 빈 베이커 등 팀내 간판스타들이 있었지만, 레이 알렌은 한경기만 빼고 81경기[9]에 주전으로 출전. 올 루키 세컨드 팀에 당당이 이름을 올리게 된다. 당시 밀워키가 워낙 하위권 팀인데다 스몰마켓팀이었기 때문에 많은 주목은 받지 못했다.
루키 시즌만 해도 이전의 간판스타였던 베이커, 빅독[10]에 밀려, 공격 3옵션으로 팀내 비중이 그리 크진 않았다. 하지만 오프시즌에 시애틀-밀워키-클리블랜드의 삼각 트레이드가 성사되며, 빈 베이커는 시애틀로 옮기고, 밀워키는 클리블랜드로부터 올스타 포인트가드 테렐 브랜든과 블루워커 타이론 힐을 받아들인다.
브랜든- 앨런- 빅독의 라인업. 밀워키 빅3의 시작은 사실 이 때부터이고, 앨런은 프로 2년차인 이 때부터 팀의 공격 1옵션을 맡게 된다. 포가-슈가-스포는 극강의 공격력을 가진 선수들이 배치되고, 인사이드엔 공격력은 떨어지지만 수비와 리바운드는 좋은 타이론 힐과 어빙 존슨이 버텨주는 라인업이었다.
그러다가 단축시즌인 98-99시즌에 샘 카셀이 합류하면서, 카셀-앨런-빅독으로 이어지는 그 유명한 밀워키의 빅3가 완성된다. 98-99시즌에는 8년만에 팀이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는 등 팀도 상승세였다. 급기야는 00-01시즌에 50승을 기록하며 지난 10년동안 가장 좋은 성적을 기록, 밀워키는 그 해 컨퍼런스 파이널까지 오른다. 상대는 앨런 아이버슨이 이끄는 필라델피아. 두 팀 다 컨퍼런스 세미파이널을 7차전까지 치르고 올라왔다. 컨퍼런스 파이널 역시 7차전까지 가는 대 접전이었고, 레이 앨런은 평균 27.1득점에 50%가 넘는 3점슛 성공률을 기록하며 그야말로 신들린 활약을 했으나, 7차전에서 44점을 퍼부은 아이버슨에게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리고 이 빅3는 02-03시즌 글렌 로빈슨이 애틀란타로 트레이드 된 걸 시발점으로 해체된다. 레이 앨런 역시 게리 페이튼과 맞바뀌어져 시애틀 슈퍼소닉스로 트레이드 된다.
3.2 시애틀 슈퍼소닉스
03-04시즌은 부상으로 인해 주춤했지만, 04-05시즌에는 78경기에 출전하고 하위권 전력으로 분류되었던 팀을 컨퍼런스 세미파이널까지 올리는 등 리더십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당시 감독이었던 네이트 맥밀런은 레이가 솔선수범 해준 덕분에 내가 감독하기 참 편했다. 라고 인정한 바 있다. 당시 팀에는 이제 유망주 티를 벗고 뛰어난 선수로 거듭난 라샤드 루이스가 있었고, 앨런 루이스와 함께 팀의 원투펀치로 활약했다.
위에도 언급했지만 이때 시애틀의 전력은 그리 좋지 않았다. 앨런-루이스 쌍포는 훌륭했지만 다른 포지션이 워낙 빈약했기 때문. 하지만 모두의 예상을 깨고 04-05시즌 시애틀은 52승을 거두면서 파란을 일으켰다. 앨런-루이스 쌍포는 경기마다 40득점+를 합작했고, 골밑은 제롬 제임스와 레지 에반스를 주전으로 쓰면서 팀의 다른 빅맨들을 돌려막는(...)전법을 썼으며, 게리 페이튼의 까마득한 대학 후배인 신인 포인트가드 루크 리드나워의 의외의 선전까지 더해졌다. 플레이오프에서도 1라운드에서 새크라멘토 킹스를 4-1로 쉽게 꺾고 올라가며 기대감을 주었으나, 2라운드인 컨퍼런스 세미파이널에서 그 시즌 정규리그 전체 2위이자 플레이오프 최종 우승팀이었던 샌안토니오 스퍼스를 만나 분전에도 불구하고 2-4로 패해 탈락했다. 이때 앨런은 브루스 보웬의 집중수비를 받았는데, 워낙 짜증이 났는지 대놓고 보웬을 비난하기도 했다.[11] 웃긴 사실은 이 두사람이 태어난 곳은 캘리포니아 메르세드로 고향이 같다.
하지만 시애틀도 04-05시즌을 끝으로 다시 몰락했다. 04-05시즌엔 52승을 했던 팀이 05-06시즌엔 35승으로 성적이 곤두박질쳤고, 그 다음 시즌엔 31승까지 추락했다. 앨런과 루이스는 계속 제몫을 다 했으나 [12] 그들만의 힘으론 역부족이었다. 특히 '농구는 센터놀음'임에도 불구하고 골밑이 너무나 무주공산이었다.
이렇게 어렵고 답이 안 보이는 팀 상황에도 불구하고, 앨런은 선수로서 또 팀의 리더로서 군소리 않고 묵묵히 자기 할 일을 했다. [13] 이러한 모습은 시애틀 팬들에게 큰 감동이 되었고, 이는 팬들이 차후 팀을 떠나는 에이스에게 분노가 아닌 축복의 감정을 보이게 된 밑거름이 됐다. 그렇게 06-07시즌까지 시애틀에서 뛴 앨런은 07년 신인드래프트가 열리던 날, 보스턴으로 트레이드 되었다. [14]
여담으로 04-05시즌에는 NBA 한시즌 3점슛 성공 개수 최다기록 (269개)를 세웠는데, 이는 스테판 커리가 12-13시즌 272개 [15] 로 갱신하기 전까지는 최고 기록이었다.
3.3 보스턴 셀틱스
파일:Rayallenceltics.jpg
[16]
당시 많은 팬들은 폴 피어스와 레이 앨런의 콤비의 탄생에 급 흥분한 상태였다. 그런데 여기서 끝난게 아니라 무려 03-04시즌 MVP 케빈 가넷까지 합류하면서 보스턴 셀틱스는 본격적으로 NBA 라이브에서나 볼 법한 사기 라인업을 탄생시켰다. (앨런 커리어 두번째 빅3! [17])
물론 당시에 전혀 불안함이 없던 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각자의 팀에서 독고다이 해오던 슈퍼스타 3명이 과연 조화롭게 어울릴 수 있을지의 문제가 가장 컸고, 특히 앨런의 경우 빅3 중 나이가 가장 많고[18] 양쪽 발목 모두를 수술한 경력이 있었기 때문에 우려하는 시각이 많았다. (위에 언급한 브루스 보웬의 소행이었다.) 이는 민첩성이 생명인 가드 포지션의 선수에게는 치명적인 이력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앨런은 투철한 노력과 자기관리로 이러한 우려를 씻고, 여러 번의 결정적인 클러치샷들을 성공시키며 팀을 구하는 모습을 매우 자주 보였고, 보스턴 시절 동안 40.9%라는 높은 3점슛 성공률을 기록하는 등 준수한 활약을 했다.
이전까지 앨런은 자신이 뛰었던 모든 팀에서 공격 1옵션으로 뛰었던 뛰어난 스코어러였다.하지만 앨런-피어스-가넷 모두 슈퍼스타들이었고 공은 1개였기 때문에 누군가는 공격주도권을 양보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여기서 기꺼이 자신의 역할 감소를 받아들인 선수가 앨런이었다. 그전까지 자신과 비슷한 스타일로 뛰어오던 피어스가 팀의 확고한 프렌차이즈 스타로서 건재했기에, 그간 자신이 해오던 역할을 피어스에게 양보하고 자신은 자기 최고의 리쎌 웨폰이었던 슈터로서의 역할에 집중한 것이었다. 즉 공격에선 공을 쥐고 플레이 하는 것보다 오프더볼 플레이에 더욱 주력하기 시작했고,[19] 또한 아직 어리고 부족했던 라존 론도를 대신하여 볼운반에 실질적인 게임 리딩 역할까지 도맡기까지 했다.[20] 보스턴에서의 앨런부터 본 사람들이 착각하기 쉬운 것이, 앨런이 원래부터 캐치앤 슛만 하는 슈터로 생각하는 점인데 절대 그렇지 않다. 어느 팀에 가든 공격 1옵션에 에이스 역할을 맡으며, 내외곽을 가리지 않고 평균 25점 근방을 올릴 수 있는 전천후 스코어러였는데 팀 사정상 양보한 것 뿐이었다.
이적 첫 시즌인 07-08시즌에 바뀐 롤과 줄어든 공격 기회에도 불구하고 평균 17.4점에 3점 성공률 39.8%를 기록하는 등 훌륭한 활약을 하여 팀의 66승을 이끈다.[21] 플레이오프에서는 2라운드에서 좀 부진한 모습을 보였지만, 컨퍼런스 파이널과 파이널에서 좋은 활약을 펼치며, 생애 첫 우승을 경험하기도 했다.[22]
11-12 시즌 라존 론도와의 불화설이 계속되다 결국 시즌 종료 후 마이애미 히트로 이적한다.[23][24] 리그 라이벌팀으로 이적한 덕분에 일부 보스턴 팬들에게 비난을 받기도 했다.[25]
3.4 마이애미 히트
마이애미 히트로 유니폼을 갈아입은 후 2012-13 개막전 상대로 친정팀인 보스턴 샐틱스를 상대하게 되었다. 30분 출장에 19득점 2리바운드 2어시스트의 준수한 기록으로 팀의 첫 승리에 공헌했다. 히트에서는 나이가 나이다보니 이전의 슈퍼스타스러운 모습은 보여주지 못하지만 벤치멤버로 출장하면서 평균 25.8분을 뛰면서 10.9 득점을 올렸으며 히트의 연승행진과 파이널 진출에 공헌한다.
샌안토니오 스퍼스와의 파이널 6차전에서는 마지막 5초를 남겨놓고 오펜스 리바운드에 성공한 크리스 보쉬의 패스를 받은 다음 팀의 전체 시즌과 르브론을 구원하는 결정적인 동점 3점 슛을 성공시켜 마이애미의 2013년 우승의 큰 요인이 되면서 클래스는 영원하다라는 말을 증명했다.
2013-14 시즌을 마치고 FA가 되었다. 14년 12월 현재 휴가를 즐기고 있고 아직 NBA로 돌아갈 생각은 없다고 한다. 은퇴 선언만 안했을 뿐 사실상 은퇴한 것으로 보인다.
뜬금포로 16-17시즌을 앞두고 갑자기 지금 레이 알렌의 복귀가 점쳐지며 그의 행선지는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하는 루머가 돌고있다. 일단 골든스테이트 입장에서는 벤치멤버로 간다하더라도 굉장히 좋은 옵션이 될 것 이다.
3.5 기타
슈팅가드로써 정석적인 플레이를 펼치는 선수이며 슛,패스,드리블 모두가 다재다능한 만능 플레이어. 슛 폼이 대단히 부드럽고 릴리즈도 빨라, 본래 슛만 치면 '6성슈가'중에서도 최고로 꼽히던 선수. 주로 45도 지역에 자리를 잡고 공을 받아 미드레인지 게임을 중심으로 공격을 전개하며, 돌파는 근본적으로 슛을 자유롭게 하기 위한 선택지 정도였지만, 수비가 슛을 막기 위해 달라붙으면 스리슬쩍 제끼고 돌파하여 뜬금없는 덩크를 간간이 보여주었다. 운동능력이 떨어진 이후 덩크는 보기 힘들어졌지만,지금도 간간이 시도되는 돌파에서의 마무리는 매우 출중하다.
또한 과소평가받는 선수중에 하나이다. 그가 전성기였을때는 비인기팀에 있었고 두세 번은 더 받아야 정상일 올 NBA팀 수상이 단 두번밖에 있지 않았다. 그는 말년에서야 보스턴 마이애미 같은 명문팀에 들어가서 더 주목받을 기회가 생겼다. 다수의 전문가들은 레이 앨런을 수상실적 때문에 과소평가받는 선수중 한명이라고들 말한다.
보스턴 셀틱스 시절 앨런의 활약만 본 사람은 그를 오픈 찬스에서 3점 넣는게 임무인 단순한 캐치앤 슈터로만 생각하겠지만 젊은 시절에는 뛰어난 운동능력을 바탕으로 슬램덩크를 꽂아넣기도 하기도 했다. 또한 그냥 슈터가 아니라 일정시간 보조리딩이 가능할 정도로 뛰어난 패싱능력도 갖추었다. 괜히 나이키 에어 조던의 프로젝트에 선택받은게 아니다.
마이클 조던을 존경했던 선수이며, 에어 조던의 스타 육성 프로젝트인 팀 조던의 멤버여서인지, 코트 위에서는 늘 깔끔한 모습을 유지했다. 늘 시합전에 면도를 했다고. 팬들에게 깔끔하게 보여야 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리고 늘 체육관에 일찍나와서 연습하고 가장 늦게 집에 들어가는 선수였다. 대학시절 때부터 이런 부지런함이 몸에 베었다고 한다. 이러한 레이 앨런의 성실함과 부지런함을 전수(??)받은 것이 라샤드 루이스. 루이스가 올랜도로 이적한 때. 앨런이 올랜도 시즌 첫 원정을 온 때였다. 앨런은 자기가 먼저 왔다고 생각했는데 체육관에 자신보다 먼저온 사람이 있어서 깜짝 놀랐는데 가보니 루이스가 있었다고, 루이스는 앨런이 나를 올스타로 만들어 준 것이나 다름없다. 라고 했다. 물론 현재 루이스는 연봉 조던이라고 조롱받는 처지...망했어요
지금은 팀 선수단만 이전해 오클라호마시티 썬더가 된 옛 시애틀 슈퍼소닉스에 대한 애정도 상당해서, 시애틀에서 뛰는 동안 지역 사회 공헌도 많이 했고 2007년 소닉스의 연고 이전 계획이 발표되자 이를 반대하는 성명서를 내기도 했다. 그리고 이틀 뒤 보스턴 셀틱스 행. 그래서 2013년에 추진중인 시애틀 슈퍼소닉스 재창단(새크라멘토 킹스의 매입후 연고 이전을 골자로 진행중이다.)시 가장 먼저 시애틀 시민들이 계약하여 은퇴식을 해줄 선수로 레이 앨런을 꼽고 있다.
늘 정해진 식단으로만 식사를 한다고 한다. 그것도 유기농. 이것은 앨런 본인의 의지이기도 하지만 아들인 워커 앨런이 소아당뇨병에 걸렸던 것도 컸다. 하필이면 그때가 08년 파이널에 열리던 한창때였다고. 그리고 무엇보다 워커 앨런은 생후 22개월밖에 안된 아기였다. 그래서 경기하랴 아들 병간호하랴..5차전에서는 13개의 슛을 던져 9개를 놓치는 부진을 보였다. 앞뒤사정을 모르는 팬들은 앨런이 왜 저러냐? 면서 앨런을 비판(??)했으나 나중에 전후사정을 듣고는 데꿀멍 할수밖에...하지만 이 부분은 프로 의식이 부족하다고 볼 수도 있는 게 예를 들어 데릭 피셔의 경우에는 희귀병을 앓고 있는 딸의 간호를 위해 병원에 갔다가 게임 도중 복귀해서 활약을 펼치는 등 이런 전례가 없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레이 알렌은 또 2010 파이널 때 아들이 아파서인지 2차전을 제외하고 나머지 6경기를 모두 처참한 성적을 내면서 패배의 주역이 되였다.
아들의 일 이후로 레이 앨런은 당분을 줄이고, 식단에 올라오는 재료는 모두 유기농만 고집했다. 담배? 술? 그런건 당연히 하지 않았다. 몸관리가 철저하다는 폴 피어스 마저도 나는 저렇게 정해신 식단으로 살 자신이 없다. 그래서 앨런은 정말 대단한 사람 이라고 칭찬했다.[26]
실제로 커리어 내내 좀 험한일도 겪었다. 양아버지가 전처의 아들에게 청부살인을 당하는 일까지 있었다. 그래서 어머니에게도 그들이 해를 입히지 않을까 걱정했다고. 그럼에도 정작 경기때는 아무렇지도 않게 뛰고 있다. 정말 뛰어난 평정심.
영화에도 출연한 적이 있다. 밀워키 벅스 시절. 스파이크 리 감독. 덴절 워싱턴 주연의 히 갓 게임이라는 영화에서 극중 워싱턴의 아들인 지저스 셔틀스워스 역으로 분했다. 영화자체도 수작이고 레이 앨런도 정식 연기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좋은 연기력으로 호평받았다. 사실 앨런이 맡은 역할이 전미고교 최고의 선수라는 설정도 있지만, 출세밖에 모르고 자신을 발판으로 신분상승을 꿈꾸며 아들을 혹독하게 대하는 아버지에 대한 분노와 애증을 잘 표현했다는 평.
위에 역할 이름 때문에 한때 팀메이트와 팬들에게 지저스 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후에는 2001년 하버드 맨이라는 영화에도 출연했다. 주조연은 아니고 단역.
한국에서 취재차 월간 해외농구잡지 루키의 조현일 편집장이 찾아간적이 있었는데 단순히 비즈니스적으로 대하던 다른 선수들과는달리 굉장히 매너있고 젠틀하게 대해주었다고한다. 루키(잡지)를 들고 기념사진을 찍어달라는 요구에 책을 잠깐 살펴보고 좋은 코멘트와함께 사인도 해주었다고.- ↑ 정확한 은퇴 발표를 한 적이 없이 리그를 떠나 있었어서 초반엔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갖게도 했었다. 하지만 현재는 40이 넘은 나이와 농구를 쉰 기간 등을 고려했을 때 은퇴한 것으로 봐도 문제 없다.
- ↑ 당시 인기 있었던 온라인 농구게임 프리스타일의 영향. 프리스타일 내에서 만렙을 찍은 슈팅가드는 3점슛이 사기적으로 잘 들어갔는데, 이를 3점 장인이었던 레이 앨런에 빗댄 것이다.
- ↑ 외국에서는 Sugar Ray 혹은 Jesus Shuttlesworth(그가 출연한 'He Got Game' 영화에서의 배역 이름)이라 불린다.
- ↑
2016년 현재 스테판 커리(3회), 클레이 탐슨(1회) 에게 따라잡혀 역대 5위이다.이는 한 시즌 3점슛 성공 개수 순위이다. 역대 3점슛 성공 개수는 여전히 레이 앨런이 2,973개로 1위. 참고로 2위는 2,560개의 레지 밀러이고 스테판 커리는 1,593개로 19위. - ↑ 이는 사실이 아니다. 그는 팔을 다 피는 것이 아니라 중간에 멈춰서 릴리즈 하는 슛폼으로서 정석과는 먼 특이한 슛폼이다. 다만 워낙에 뛰어난 성공률로 인해 '레이 앨런의 슛폼은 정석이다.'라는 인식이 잘못 퍼진 것일 뿐이다.
- ↑ 정확히 말하면 슛을 릴리스하기 직전의 슛폼 자체는 정석이 맞다. 왼팔을 적절한 각도로 조여서 힘이 분산되지 않게 하며 (너무 벌리면 힘이 위로 전달안되고 너무 좁히면 시야가 가려진다) 케빈 가넷처럼 공을 머리 뒤에서 쏘거나 김승현처럼 너무 앞에서 타점이 있지도 않고 타점도 딱 알맞다. 그러나 슛을 쏘는 메커니즘 자체는 정석이 아닌데, 원래 점프슛은 점프 이후 최고점에 도달하기 직전에 쏴야 하체에서 올라온 힘이 위까지 부드럽게 전달이 된다. 그러나 레이 알렌은 정점에 도달한 뒤에 정지상태에서 쏘기 때문에 (마이클 조던도 마찬가지다) 손목감각에 크게 의지한다. 이때문에 알렌이나 조던의 슛은 포물선이 상당히 낮고 회전을 비교적 적게 먹는다. 사실 이런 슛은 조던처럼 중거리슛을 주로 쏘는 선수들에게서 많이 발견되는데 (하체에 크게 의존하지 않기 때문에 페이더웨이같은 터프샷을 보다 안정적으로 쏠 수 있다) 알렌같은 3점슈터가 이런 슈팅 메커니즘을 갖는 건 특이한 케이스다. 이 때문에 알렌이 슛을 쏘면 부드럽다기보다는 좀 딱딱한 느낌을 준다. 진짜 정석적인 슈터는 과거 뉴욕 닉스에서 활약한 알렌 휴스턴이다. 슛폼부터 부드러운 릴리스, 훌륭한 follow-through(슛을 쏘고 그 자세를 유지하는 것. 이걸 신경쓰지 않으면 슛이 불안정하게 날아가는 경우가 많다)까지 나무랄 데가 없다. 또한 중국의 이지엔리엔도 휴스턴만큼은 아니지만 슛 메커니즘이 상당히 깔끔하며 슈팅 터치 하나는 휴스턴 못지 않게 부드럽다. 어찌됐건 알렌은 정석 슈터는 아니지만 슛을 쏘기 직전 정지상태에서 본 슛폼 하나는 정석에 가까운게 맞다.
- ↑ 파일:Rayallensameform.jpg
- ↑ 훗날 이 트레이드에 대해서는 아쉬워 하는 분위기가 많은 편. 당시 미네소타에는 케빈 가넷이라는 걸출한 선수가 있었는데, (아직은 유망주일 뿐이었지만..) 미래에 가넷과 앨런이 보스턴 빅3로 만나 보여준 꿀 호흡을 고려했을 때 그 둘이 커리어 초반부터 함께 뛰었으면 더욱 멋진 업적을 이루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인 것이다. 특히 이는 마버리가 지나치게 에고가 강해 얼마 못 가 팀과 결별을 하게 되었으며 또한 기량 유지도 얼마 못한 데 비해, 앨런은 말년까지도 꾸준한 기량을 선보였으며 마인드적인 측면에서도 마버리보다 훨씬 성숙한 모습을 보였준 점에서 기반한다. 하지만 트레이드 당시를 기준으로 보면, 마버리는 전도 유망한 포인트가드이자 차세대 플로어리더로 평가받던 선수였기 때문에 미네소타나 밀워키나 비합리적인 선택을 한 것은 아니었다.
- ↑ 한경기는 쥐가 나서...
- ↑ 글렌 로빈슨의 별명
- ↑ 단순히 보웬이 수비를 잘해서 그런 건 아니었다. (애초에 앨런은 그렇게 징징대는 허접멘탈이 아니다.) 보웬은 (해당 항목을 참고해도 알 수 있지만,) 점프슛한 상대방의 발밑에 발을 집어넣어 발목 부상을 유도하는 등 워낙에 더티 플레이로 악명이 높은 선수였다. 앨런과 상대한 시리즈에서도 역시나 그런 모습들을 보이자 앨런은 이에 대해 비난한 것이었다.
- ↑ 앨런은 23.9점 -> 25.1점 -> 26.4점으로 매년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줬고, (마지막 06-07시즌엔 부상으로 시즌의 1/3 정도를 결장하긴 했다.) 루이스도 20.5점 -> 20.1점 -> 22.4점으로 꾸준히 활약을 했다.
- ↑ 그 와중에 출전시간 문제로 징징대는 블라디미르 라드바노비치를 달래주기도 했다.
- ↑ 한편 이 드래프트에서 시애틀은 미래의 MVP 케빈 듀란트를 뽑으나 정확히 9년후 컨퍼런스 3-1리드 상황에서 역전한 팀으로 들어간다....
르브론과 더불어 손꼽히는 희대의 병크 - ↑ 이 기록은 바로 그 다음 시즌 본인에 의해 286개로 갱신. 그리고 이는 15-16시즌에 다시 한 번 무려 402개로 갱신되었다. (...커친놈...)
- ↑ 앨런이 레지 밀러의 2,560개를 깨고 NBA 역대 최다 3점슛 기록자가 되던 순간이다. 즉 커리어 2,561개째 3점슛을 넣은 후의 세레머니. 때는 2011년 2월 10일 레이커스 상대 홈경기.
- ↑ 물론 이 빅3에 비하면 이전의 밀워키 빅3는 무게감이 많이 떨어지긴 한다. 이는 무엇보다도 케빈 가넷의 존재감 때문. 여담으로 이 이후 '빅3'라는 수식어의 기준점이 많이 상향되었다.
- ↑ 앨런 75년생, 가넷 76년생, 피어스 77년생
- ↑ 이때부터 '동네 한바퀴'가 앨런의 플레이의 대표주자가 되기 시작했다. '동네 한바퀴'란 슈터가 노마크 찬스를 맞기 위해 공이 없는 상태에서 코트 구석구석을 뛰어다니며 수비를 제끼려는 플레이를 말하는데, 앨런 훨씬 이전부터 존재하던 전술이었고 레지 밀러도 이에 뛰어나긴 했으나, 실제 '동네 한바퀴'라는 명칭으로 불린 것은 이때의 앨런이 사실상 처음이었다.
- ↑ 말 그대로 팀에 대한 헌신이었다.
- ↑ 이는 앨런 커리어 사상 정규시즌 최다승이었으며 해당 시즌 리그 1위의 기록이었다. 앨런은 그 후 마이애미에서 12-13시즌 다시 한 번 66승을 경험한다.
- ↑ 우승 또한 12-13시즌 마이애미에서 다시 한 번 경험한다.
- ↑ 하지만 이후 폴 피어스 등의 인터뷰에 따르면 론도와의 불화는 그리 심각한 수준이 아니었다고 하며, 이적의 주된 이유 또한 이것이 아닐 거라는 추측이 대세적이다.
- ↑ 보스턴에서의 앨런은 플레이 스타일 상으로의 양보는 물론이요, 연봉상으로도 재계약 당시 다른 빅2에 비해 상당히 적은 금액으로 계약하는 등 팀을 위해 헌신하는 모습을 많이 보였는데, 이에 비해 구단은(특히 단장인 데니 에인지) 그를 계속 트레이드 대상으로 올리는 등 충분히 대우해주지 않았다. 특히 11-12시즌 뒷꿈치 부상으로 인해 잠시 결장한 후에 돌아왔을 때, 팀은 앨런을 새파란 애송이었던 에이브리 브래들리의 백업으로 써먹으려고 함으로써 베테랑 슈퍼스타의 자존심을 많이 긁어놓았다. 이러한 이유들이 이적의 주된 이유가 되었으리라는 것이 중론이다.
- ↑ 그러나 대다수의 팬들은 아쉽기는 하지만 이해한다는 반응이었다. 실제로 마이애미 이적 후 첫 보스턴 홈구장 방문 경기 때, 경기 시작 전 앨런에 대한 헌정 영상을 틀어주고 모든 관중이 한동안 기립박수를 보내는 등 훈훈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 ↑ 폴 피어스도 몸관리와 식단관리에 깐깐한편이다 펩시콜라를 언제먹어봤는지 기억이 안난단 말을 할정도. 하지만 그런 피어스도 레이 앨런한텐 혀를 내두를수준이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