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의 역대 국왕 | ||||
9대 간왕 대명충 | ← | 10대 선왕 대인수 | → | 11대 ○왕 대이진 |
시호 | 선왕(宣王) | |
연호 | 건흥(建興) | |
성 | 대(大) | |
휘 | 인수(仁秀) | |
생몰년도 | 음력 | ? ~ 830년 |
재위기간 | 음력 | 818년 ~ 830년 (12년) |
대조영의 직계가 아닌 방계 출신 왕으로 발해의 중흥을 이룬 군주
1 소개
발해의 10대왕으로, 연호는 건흥(建興). 시호의 선(宣)이 '베풀다'라는 의미라서 역사학자들이 이를 토대로 선왕이 선정을 펼첬다고 추측한다. 이때 발해가 전성기를 누렸기 때문에 그랬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지만, 시호란 게 웬만큼 막장이 아니면 좋은 거 받는지라 선 자 받은 막장임금도 널렸으니만큼 별 의미는 없다. 예를 들면 여자에게 덕을 베푼 위선공이라든지..
시호가 선왕이라 인터넷에 선왕으로 검색하면 선대 왕을 의미하는 선왕(先王)에 밀려 이 사람에 대한 자료를 찾기 힘들다. 대인수로 검색하는 것이 좋다. 그런데 대인수로 검색해도 나오는게 별로 없엉...
선왕뿐 아니라 발해 왕들 대부분이 시호로 검색하면 휘로 검색하는 것에 비해 자료를 찾기 힘들다. 1대 고왕의 경우도 고왕보단 대조영으로 훨씬 널리 알려져 있고, 2대 무왕은 백제에도 있어서 혼동되고 3대 문왕은 중국의 주나라에도 있어서... 뭐 그외 왕들은 듣보잡이라서 검색해도 나오는게 별로 없기 때문에 혼동하고 말고를 따지는 의미도 없다... 안습.
2 업적
대조영 동생 대야발의 4세손. 간왕이 병사하면서 대조영계는 단절되었고, 대인수는 대야발계로 왕위에 올라 발해의 내분을 정리했다. 그의 치세는 당으로부터 해동성국이란 칭호를 얻어내는 기틀을 마련하는 등, 중흥기였다.
문왕 이후 발해의 정국이 혼란기에 빠져있던 상황에서, 발해의 왕권을 쟁취해냈다. 애초에 왕실 계보에서 방계인 대야발의 후손이라는 것만 봐도 정상적인 즉위를 거치지 않았다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다.
2.1 정복전쟁
818년에 즉위하자마자 말갈의 여러 부락들에 대한 정복을 시작하여 820년에 마무리했다. 이때 정복한 말갈 부락은 우루, 월희, 흑수로 추정된다. 우루, 월희, 흑수의 대당조공이 이 시기에 끝나기 때문이다. 우루, 월희는 완전히 정복하여 군현을 설치했다. 이 세력들 역시 이탈 후 재확보한 것이다. 이 지역은 무왕 대에 정복사업 중에 이미 한번 지나갔던 지역이었다. 이 세력은 완전히 발해에 소화된 다른 부들과도, 끝까지 버틴 흑수부와도 다른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흑수는 복속이나 통제 정도에만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애초에 흑수부는 사람 살 수 있는 땅 전부를 말하기 때문에 전부 통합하고 다스린다는 개념 자체가 성립이 어려웠다. 때문에 발해의 국력이 약해지면 바로 이탈하고, 동시에 일부 부족에서는 중국으로 조공 사신을 보냈다. (이는 당시 국제질서에서 발해와는 별개 세력이라는 것을 주장하는 것과 같다.) 당 또한 그 사신들을 모두 받아주어서, 발해를 엿먹이는데 이용하였다. 결국 흑수부는 발해가 멸망하는 그 순간까지 소화되지 못했다. 일부 사료에 의하면 발해가 흑수까지도 정복하여 군현을 설치한 것 같기도 한데 사료의 부족이라는 근본적인 문제로 정확한 실체 규명이 어렵다.
요사에 의하면 소고구려를 병탐하여 요동반도까지 진출하여 군현을 설치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요사에 발해가 이 시기에 요동에 군현을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다. 사실 문왕 시기까지 이미 요동 지역은 발해의 영역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므로 역시 혼란기에 영향력에서 벗어난 것을 다시 확보했다고 보면 된다. 때문에 무왕이나 문왕 시기에 이미 정복한 지역에 대해서 다시 정벌하는 기록이 선왕 시기에 자주 보인다. 우루, 월희, 흑수 모두 무왕이나 문왕 시기에 정복한 전력이 있던 지역들이다. 그런데 요동을 정복한 것이 곧 소고구려를 멸망시킨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고구려가 선왕에 의해 멸망된 것이 정설처럼 여겨지고 있다.
또한 요사에서는 신라를 정토했다는 기록이 확인되나 삼국사기나 여타 다른 기록에는 발해의 신라 침공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신라 북변의 대동강 이북까지 진출한걸 과장하여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역시 일부 이탈한 반란 세력들을 다시 귀부시킨 것일 가능성이 높다. 신라와 발해의 국경경계 역시 이르면 고왕 시기, 늦어도 무왕 대에는 확정되기 때문이다. 어쨌든 신라가 이 시기에 대동강변에 장성을 축조한 것으로 보아 발해로부터 어떤 위협이 있었음은 확실하다.
멸망한 시기를 알수없는 두막루가 이때 선왕에 의해 발해에 병합된 것이 아니냐고 추측하기도 한다. 하지만 두막루가 발해에 병합되었다는 근거는 이러한 정황적 추측 외에는 딱히 없다. 오히려 물길때문에 세력이 약화되었다는 것이 더욱 타당하다. 어차피 발해의 기원은 물길7부의 속말부이지만...;
반면에 대당외교는 화친기조를 띄었고, 당헌종의 번진토벌이 평로치청에 이르렀을때 평로치청번진의 구원요청을 무시했다. 이에 당은 820년에 금자광록대부, 겸고사공직을 더하여 줌으로써 화답했고, 이후 당과의 교역은 더욱 활성화되었다.
2.2 내정
2년만에 아무르강 유역에서 요동반도, 대동강에 이르는 지역으로의 정복활동을 마무리하고 남은 재위기간동안은 내정에만 집중했다. 이 짧은 정복 기간 또한 맨 땅에 헤딩한 것이 아니란 것을 증명한다. 내정 활동으론, 5경 15부 62주를 완전히 정비하고 학문을 진흥하였으며 당나라의 선진 문물을 수입하기도 하였다. 정복활동은 2년만에 끝났으나 내정에 무려 10년을 투자한 것으로 보아 현재 알려진 것들 외에도 많은 내정활동이 있었을 것이며 개중엔 내분으로 인해 악화된 발해 내부의 정치사정을 안정시키는게 주된 활동이였을 것이다.
3 《신당서》 기록
삼종숙(三從叔)인 대인수(大仁秀)가 즉위하여 연호를 건흥(建興)으로 고쳤으니, 그의 증조부 대야발(大野勃)은 대조영의 아우이다. 대인수가 자못 바다 북쪽의 여러 부족을 토벌하여 크게 영역을 개척하였다. 공적이 있어 검교사공(檢校司空)을 제수받고 왕위를 계승하였다. 원화(元和) 연간(806년 ~ 820년)에 모두 16번, 장경(長慶) 연간(821년 ~ 824년)에 4번, 보력(寶曆) 연간(825년 ~ 826년)에 2번씩 각각 조공하였다. 태화(太和) 4년(830)에 대인수가 죽으니, 시호는 선왕(宣王)이다.
4 기타
대중적인 인지도는 지못미 수준. 역사에 관심있는 사람과 수험생들이나 조금 알 듯 싶다. 수능이나 공무원 수험서에 등장하는 발해 4왕 중 한명인지라.. 뭐 애초에 남은 기록자체가 희박하다. 삼국처럼 자체 기록이 있는게 아니라 당이나 거란(요), 신라, 일본 같은 주변국이 남긴 기록을 바탕으로 추측하는 것이라서... 안습. 발해가 해동성국이라는 칭호를 얻게 된것이 바로 이 시기. 그만큼 국력이 크게 신장된 시기였다는 것을 알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