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막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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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지도의 측정 값은 전라남도에서 두막루까지의 거리는
약 1,290.89 km(3천리,3284里)[1]가 나온다.
국호두막루(豆莫婁)
위치만주 북부
수도알수 없음
정치체제군주정으로 추정
국가원수왕(王)
존속기간5세기 말엽? ~ 8세기 초엽?

1 개요

달말루(達末婁), 대막루(大莫婁), 대막로(大莫盧)라고도 한다. 과거 만주 북단에 위치했던, (북)부여의 후계 국가로 알려져 있는 국가이다.

지명이나 인명 뒤가 ~루자로 끝나는 것은 부여와 고구려, 백제만주한반도에 퍼져 있던 부여계 국가들의 언어적 특징 중 하나이다. 중국 학계에서는 고구려 관직명인 대막로와 발음이 연관성이 보인다며 여기서 국호가 나온 게 아니냐는 추측이 있다.

기록 상으로는 송화강 이북의 소흥안령 지방에 위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두막루가 사료의 기록대로 정말 부여의 후계 국가가 맞다면 한국사상 가장 최북단에 위치한 나라 중 하나이다.[2] 만주 서북단의 대흥안령에 위치한 것으로 보이는 고리국(탁리국)도 엄청나게 북쪽에 있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고리국은 신화 속의 국가라 실체가 불분명하고 위치비정도 애매하다.

몽골계와 언어가 같다는 기록이 있고, 멸망 이후 몽골로 이주된 흔적이 있는 등 몽골과도 어느정도 연관성이 있다.

2 역사

위서 두막루전[3][4]에 의하면 5세기경 북부여가 물길 또는 고구려에게 쫓겨가 성립된 나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동이의 땅 중 가장 평평한 곳에 위치하여 오곡에 적합한 땅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군장은 모두 여섯 가축의 이름으로 관직을 하고 형벌은 엄했다고 한다. 풍속은 음란하지만, 특히 투기하는 부인은 미워하여, 투기하는 자는 죽이는데, 시체를 그 나라 남쪽 산 위에 버리는데, 여자 집에서 이를 얻을 수가 없다. 을 바치면, 이를 얻을 수가 있다. 혹은 말하길 본래 근본은 '예맥'의 땅이라 한다.

開元十一年, 又有達末婁․達姤二部首領朝貢. 達末婁自言北扶餘之裔, 高麗滅其國, 遺人度那河, 因居之, 或曰他漏河, 東北流入黑水. 達姤, 室韋種也, 在那河陰, 涷末河之東, 西接黃頭室韋, 東北距達末婁云.

개원(713~741) 11년에 또 달말루와 달구 등 두 부락의 수령들이 조공하였다. 달말루는 스스로 말하기를 북부여의 후예로서 고(구)려가 그 나라를 멸하자 유민들이 나하를 건너 그곳에 거처하게 되었는데 혹은 타루하라고 하는 물줄기가 동북쪽으로 흘러 흑수에 유입된다 하였다. 달구는 실위의 종족으로 나하의 남쪽, 동말하의 동쪽에 있으며, 서쪽으로 황두실위와 접하며 동북쪽으로는 달말루에 이른다고 하였다.


신당서 권 220[5]

이들은 당나라에도 조공했기 때문에 당나라 시기의 열전에도 남아있다. 헌데 무슨 이유인지 수·당이 만주를 엄청 갈궈대던 6세기 말부터 7세기까지는 이들의 조공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6] 조공 기록이 8세기 초반까지 지속되다 사라지기 때문에 이쯤에 멸망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7] 멸망 이후 실위와 함께 몽골 지방으로 이동하면서 그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실위, 고막해, 거란과 같은 말을 썼다는 기록으로 봐선 몽골 지방으로 이동 후 몽골계 민족들에게 동화된 것 같다.

영토는 사방 이천리로 서쪽에 실위, 남쪽에 말갈이 있고 동쪽으로는 바다에 접한다는데, 바다라는 게 아무르강인지 오호츠크해인지 동해인지 며느리도 아무도 모른다. 책부원귀 외신부 조공조에 의하면 당나라 현종 개원 12년(724년)에 달말루의 대수령 낙개제(諾皆諸)가 와서 조공했다고 한다. 아마 낙개제는 기적적으로 전해지는 두막루의 유일한 인명인 것 같다.

3 인지도

대중적인 인지도는 그야말로 처참하다. 대체로 대중적인 인지도라는 게 국사교육 즉, 국사교과서 또는 국사 관련 시험에 등장하느냐 마느냐로 좌우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 나무위키에서도 틀:한국의 역사에 두막루가 있었으나 저명성 부족과 한국사 여부 불분명으로 틀에서도 제외당했다. 아주 예외적으로 화랑세기의 미실[8]같이 국사교과서에 등장하지 않아도 대중매체의 상업적 흥행 덕에 인지도를 확보하기도 하지만 극히 예외적인 경우이다.[9] 어차피 대중 매체에서 다루어지는 역사물은 그 역사적 소재가 어느 정도 대중적 인지도를 확보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역사 애호가들 사이에선 부여를 계승한 만주의 정체불명의 신비한 나라 정도의 이미지로 알려져 있...을까?

참고로 한국어 위키백과에서는 두막루의 틀/한국사 잔존 여부와 두막루가 부여계 국가인가 아닌가로 엄청난 키배 토론이 벌어진 적이 있다.

4 관련 연구

워낙 알려지지 않은 나라여서 연구가 겨우 이것밖에 안 된다. 안습

4.1 한국

  • 노태돈, 〈부여국의 강역과 그 변천〉, 《국사관논총》 제4집, 국사편찬위원회, 1989년
  • 김정배, 〈두막루국 연구: 부여사의 연결과 관련하여〉, 《국사관논총》 제29집, 국사편찬위원회, 1991년 12월
  • 박경철, 〈부여사 전개에 관한 재인식 시론〉, 《백산학보》 제40호, 백산학회, 1992년
  • 干志耿, 김영수(번역) , 〈고대 탁리 연구〉, 《백산학보》 제44호, 백산학회, 1994년
  • 유태용, 〈두막루국 흥망사 연구 시론〉, 《백산학보》 제70호, 백산학회, 2004년 12월
  • 강인욱, 〈삼강평원 곤토령⋅봉림문화의 형성과 물길⋅두막루⋅말갈의 출현〉, 《고구려발해연구》 제52집, 고구려발해학회, 2015년

4.2 중국

  • 溤家昇, 〈豆莫婁國考〉, 《禹貢》半月刊 7卷 1,2,3 合刊, 1937
  1. 제주도를 제외한 경우임
  2. 다르게 말하면 두막루가 있던 시절은 두막루 외 기타 한국의 역사적 국가들을 포함해서 한민족의 최대 영토 시절이다. 다만 두막루는 커녕 당시 남쪽에 있던 고구려, 백제, 신라, 발해 등은 서로 동족 의식이 없진 않았지만 거의 없었고 애초에 두막루부터가 북쪽에 영토 자리 잡았을 뿐 별로 눈에 띄는 나라도 아니었기에 거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
  3. 그런데 두막루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담고 있는 위서 두막루전의 내용은 삼국지 동이전의 기록을 거의 복붙하다시피 한 것이라 사료의 신뢰성이 의심되기도 한다. 기존 학계에서는 두막루가 부여계가 아니라 단지 부여계를 자칭했을 뿐이라는 주장이 있었으나 최근 일부 학자들은 부여계가 맞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는 상황이다.
  4. 그렇긴 한데, 실제로는 아래 써 있다시피 학계에서도 인지도가 듣보잡인지라 논쟁은 그냥 정체 상태... 기록이나 유물이 많이 있어야 논쟁을 하든 말든 하지
  5. 관련 주소 클릭 후 高麗滅其國 를 검색하면 된다.
  6. 이때문에 이시기에 고구려에 복속되어 있던 것으로 보기도 한다.
  7. 8세기 초반, 때마침 발해 무왕과 흑수말갈이 충돌하던 시기이다. 두막루의 정확한 위치는 고고학적으로 발견된 바가 없지만 발해와 흑수말갈 사이에 끼어 있다고 추정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것보다 두막루를 연구한 내용 자체가 손가락으로 셀 정도지만...
  8. 최근 화랑세기가 위서라는 견해가 많으니 유의하자.
  9. 미실같은 경우는 그나마 선덕여왕이라는 이름 하에 나와서 그만큼 알려진 것이지 아예 주인공을 미실로 놓고 '미실'이란 사극을 만들었다면 결과는 미지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