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온공주(德溫公主, 1822년 음력 6월 10일 ~ 1844년 음력 5월 24일)
1 생애
순조와 순원왕후의 3녀로 태어났다. 문조(효명세자)와 명온공주, 복온공주 등의 친동생이다.
8살 때인 1829년(순조 29년) 음력 3월 6일 정식으로 덕온공주(德溫公主)의 작위를 받았다. 이후 13살 때인 1834년(순조 34년) 음력 11월 13일 부왕 순조가 사망하였는데, 순조 사망 당시 남아있던 순조의 자식은 적자와 서자를 포함하여 덕온공주가 유일하였다.
조카 헌종 때인 1837년(헌종 3년) 음력 8월 13일 판관을 지낸 윤치승의 아들 윤의선(또는 윤인갑)에게 하가하였다. 이때 윤의선은 남녕위에 봉해졌다.
2 사망
덕온공주는 결혼한 지 7년 후인 1844년(헌종 10년) 음력 5월 24일 23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 이 날은 헌종의 계비[2]를 간택하는 날로, 당시 둘째 아이를 임신 중이던 덕온공주가 경사를 치르기 위해 창경궁 통명전에 들어갔다가 점심으로 비빔밥을 먹고 급체[3]했던 것이다. 사망하기 직전 아이를 낳았는데 이 아이는 곧바로 사망하였고, 공주 역시 아이를 매장한 지 약 2시간 정도 있다가 사망하였다.
한편 덕온공주의 남편 윤의선은 1887년(고종 24년) 음력 12월 29일 사망하였다. 윤의선에게는 사후 3년간 녹봉이 지급되었다.
3 유품
덕온공주가 입었던 의복 중 원삼, 당의, 장옷, 삼회장저고리, 누비저고리 등이 남아 있다. 이것들은 남편 윤의선의 일가 친척인 윤용구가 윤의선과 덕온공주의 양자가 되어 들어갔다가 그 딸인 윤백영이 물려받아 보관하고 있던 것들이다. 덕온공주의 자적당의는 대한민국의 중요민속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었으며, 다른 의복들은 1987년 2월 12일 서울특별시의 중요민속자료 제211호로 지정되었다.
또 덕온공주가 어린 시절에 착용한 노리개와 화장 도구, 보자기, 필기구 등이 남아 있는데, 이것들 역시 서울특별시의 중요민속자료 제212호로 지정되었다. 이러한 덕온공주의 유물들은 전통 의복 연구자인 석주선이 윤백영을 통해 수집하였다가 모두 단국대학교에 기증하였다. 한편 단국대학교의 석주선기념박물관은 2012년 5월 11일부터 6월 30일까지 덕온공주와 그 후손들의 유물 228점을 '조선의 마지막 공주, 덕온가(家)의 유물전'이라는 이름으로 전시하였다.
덕온공주당의(중요민속문화재 제1호)(일명 덕온공주 자적당의)
덕온공주의복(중요민속자료 제211호)
- ↑ 덕혜옹주가 조선의 최후의 공주라고 아는 사람이 많지만, 덕혜옹주는 후궁의 딸(서녀)이기 때문에 공주가 아니고 옹주이다. 공주는 왕비의 딸(적녀)을 가리킨다. 다만 '공주'라는 단어엔 '조선시대 왕의 적녀에게 내리는 작위'라는 뜻 외에도 통상적으로는 '왕의 딸'이란 뜻도 있으며, Princess로서의 공주의 의미로 태어난 날짜나 작위 받은 날짜 기준이 아니라 사망한 날짜 기준으로 마지막을 정한다면 덕혜옹주가 조선 최후의 공주라 해도 결코 틀린 표현은 아니다.
- ↑ 효정왕후를 간택하는 날이었다.
- ↑ 현재는 급체가 심각한 질병이 아니나, 당시엔 급체로 죽는 사람이 허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