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원왕후

純元王后 金氏
(1789년 6월 8일 ~1857년 9월 21일)

조선의 역대 왕비
정조
효의왕후 
순조
순원왕후
헌종
효현왕후
조선의 역대 왕대비
순조
예경왕대비
헌종
명경왕대비
헌종
~철종
효유왕대비
조선의 역대 대왕대비
순조
예순대왕대비
헌종
~철종
명경대왕대비
철종
~고종
효유대왕대비

대한제국의 추존 황후
태조비 신의고황후태조비 신덕고황후진종비 효순소황후장조비 헌경의황후정조비 효의선황후순조비 순원숙황후
문조비 신정익황후헌종비 효현성황후헌종비 효정성황후철종비 철인장황후고종비 명성태황후순종비 순명효황후
“이렇게 망극한 일을 당한 속에서도 5백 년 종사(宗社)를 부탁할 사람을 얻게 되어 다행스럽소. 주상은 영조(英祖)의 혈손(血孫)으로서 지난날 어려움도 많았고 오랫동안 시골에서 살아왔으나, 옛날의 제왕(帝王) 중에도 민간에서 생장한 이가 있었으므로 백성들의 괴로움을 빠짐없이 알아서 정사를 하면서 매양 애민(愛民)을 위주로 하여 끝내는 명주(明主)가 되었으니, 지금 주상도 백성들의 일을 익히 알고 있을 것이오.

백성을 사랑하는 도리는 절검(節儉)보다 더한 것이 없으니, 비록 한 낱의 밥알이나 한 자의 베(布)도 모두가 백성들에게서 나온 것인 만큼, 만일 절검치 않는다면 그 피해는 즉각 백성들에게 돌아갈 것이고, 백성들이 살 수 없으면 나라가 유지될 수 없으니, 모름지기 일념(一念)으로 가다듬어 ‘애민(愛民)’ 두 글자를 잊지 마오.
지난날의 공부가 어떠한지는 비록 알 수 없지만 사람이 배우지 아니하면 옛일에 어둡고 옛일에 어두우면 나라를 다스릴 수 없는 것이니, 아무리 슬프고 경황없는 중일지라도 수시로 유신(儒臣)을 접견하고 경사(經史)를 토론하여 성현의 심법(心法)과 제왕의 치모(治謨)를 점차 익힌 연후에라야 처사(處事)가 옳바르게 되는 것이오. 위로 종사의 막중함을 생각하고 아래로 백성들의 곤고(困苦)를 보살펴 공경하고 조심하며, 검소하고 근간하여 만백성이 바라고 우러르는 뜻에 부응토록 하오. 임금이 비록 극히 존귀하다고는 하지만 본래부터 조정 신하들을 가벼이 여기는 법은 없으니, 대신들을 예로써 대하고 대신들이 아뢰는 데에는 옳치 않은 말이 없을 터이니, 정성을 기울여 잘 듣고 마음속에 새겨두기 바라오.”
조선왕조실록 철종실록 1권, 즉위년(1849 기유 / 청 도광(道光) 29년) 6월 9일(을해) 3번째기사

자긍심과 절제력은 있었으나, 좁은 안목으로 조선 최악의 민생을 야기한 대비.

1 소개

순조의 정비로, 김조순과 심건지의 맏딸인 청송 심씨 부인의 딸이다. 고종황제 때 황후로 추존되어 순원숙황후(純元肅皇后)라는 시호를 받았다.

워낙 김조순이 유명하기 때문에 그녀 자신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편이지만, 조선 역사에서 사실상 수렴청정을 2번이나 한 유일한 사람이기도 하다. 사실상 헌종, 철종 기의 20여년은 그녀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고 봐야 옳을 것이다. 정희왕후대왕대비로서 2번 수렴청정을 하긴 했는데 예종 때는 얼마 가지 않아 수렴청정을 거뒀으므로 제대로 했다고 보기 어렵다.

2 일생

2.1 순조의 즉위

재위 후기로 갈수록 건강이 나빠진 정조는 자신이 왕위에 오래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직감했고, 자신이 25년간 구상해온 사업에 큰 차질이 있음을 깨달았다. 솔직히 정조 시기의 정치는 정조 1인에게 지나치게 의존하는 체제였고, 정조가 갑자기 사라질 시에 고작 11살 밖에 되지 않은 세자(순조)가 정국을 제대로 운영할 수 있을 지는 불투명했다. 사도세자 추숭 문제와 관련하여 벽파에 대한 설득을 끝내 실패했으나 여전히 벽파는 건재하였다.

정조는 세자에게 후견인이 필요함을 느꼈고 자신이 그토록 혐오해 온 세도정치에 손을 대게 되었다. 시파의 입장을 취하고 있던 노론 명가 안동 김씨 가문에게 손을 내민 것이다. 그 결과물로 김조순의 딸인 순원왕후는 정조 24년, 그러니까 1800년에 2월 26일 초간택을 통해 궁에 들어왔고 같은 해 윤 4월 9일 재간택되어 순조의 정비로 내정되었다. 이때 이미 정조는 '간택이 굳이 필요 있느냐?'라고 말할 만큼 간택을 요식행위로 생각하고 있었다.[1]

2.2 정순왕후 김씨의 섭정

그러나 정조는 순조와 순원왕후가 혼인하는 것을 보기 전인 6월 28일에 승하했고, 이 문제는 수렴청정을 하게 된 정순왕후 김씨에게 넘어갔다. 벽파 일각에서는 시파의 입장을 취한 안동 김씨의 딸이 내명부를 관리하게 된다는 것을 몹씨 불안하게 여겼고 이른바 '대혼을 훼방 놓을' 계책을 꾸미게 된다.

순조 1년 권유가 소를 올려 아직 확정되지 않은 순원왕후와 순조의 혼인에 딴지를 걸었보긴 했지만, 아무래도 선왕 정조가 사실상 확정지은 일에 대놓고 반대하긴 어려워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진 못하였다. 이 때 정순왕후 김씨는 순원왕후를 들일 것을 거의 확정지었고 김조순을 불러 "대혼이 완전히 결정되었으니 종사의 억만년 경사가 지금부터 시작될 것이오. 경사스럽고 다행스럽소. 경신년 재간택 때 선왕이 기뻐하시던 모습을 생각하니 감회를 진정시킬 수 없소." 대다수의 드라마들이 정순왕후 김씨를 정조를 증오하던 반동 대비로 묘사하는 것이 신경쓰인다면 지는 거다 라며 김조순을 사실상 국구로 대우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겨우 30대 중반인 김조순을 장용영 대장, 병판 등에 제수하면서 우대했고 이런 대비의 모습에 벽파는 대혼에 더 이상 반대를 하기 어려워졌고 순원왕후는 1802년 10월 왕비로 간택되었다. 더 이상의 자세한 정황은 정조, 정순왕후 김씨, 김조순 항목 참조.

2.3 순조의 친정

그런데 일이 다 끝난 이후 정순왕후 김씨가 순조 3년 12월에 수렴을 거두자 바로 문제가 터졌다. 순조 1년 권유가 순원왕후와 순조의 국혼에 불만을 표시한 일이 쟁점화된 것이다. 대간들이 앞장서서 권유를 탄핵하고 국문이 열리게 됐다.

권유는 역적 토벌에 대한 소를 올리면서 말미에 곡돌사신이란 용어를 인용하며 "안동 김씨 가문은 자신이 역적인 줄도 모르는 자들"이라면서 은근히 디스를 했는데, 대혼이 확정되고 정순왕후 김씨가 물러난 이후 제대로 한건이 터진 것이다. 당시에는 심환지가 '안동 김씨가 충성스러운 명문가인 걸 누가 모르나요? 저놈이 무식해서 믿을 줄 몰라서 그런가 봄.'이라고 대충 넘어갔으나 이미 그의 소에 대한 여론이 좋지 않았고, 심환지도 죽고 정순왕후 김씨도 물러나자 시파는 그를 타겟으로 삼았다.

권유는 국문을 받고 상소를 올리기 전에 '아싸! 이제 대혼을 저지할 수 있다!'하면서 좋아한 자들의 이름을 낱낱이 고변하게 되고 그 발언도 소상히 실토하게 된다. 시파는 "대혼을 저지하여 선왕의 뜻을 거스른 역적을 처벌하라"면서 강력히 요구했다. 이에 불쾌해진 정순왕후 김씨는 수렴을 거둔지 6개월만에 다시 수렴을 치고 정치에 전면적으로 나서려 했으나, 이시수와의 키배 논쟁에서 논리적으로 밀려 도리어 사과하고 물러나야 했으며, 삼간택과 가례 택일에 관련하여 자신에 관한 의혹에 대해 해명글을 내려 "내가 대혼을 저지하려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대혼 저지기도를 막았다"는 사실을 알리고 몇달 후 죽었다. 그렇게 순원왕후의 지위는 매우 굳건해졌다.

순조가 병이 들자 효명세자와 정사를 논의하는 등 정치적 감각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3 2번의 수렴청정

순원왕후가 다시 역사에 중요한 자리에 서게 된 것은 1834년 11월 순조가 죽고 고작 8살인 세손 헌종이 즉위해 수렴청정을 맡게 되면서였다. 세손의 친모인 신정왕후도 있었지만 왕실의 큰어른이 수렴첨정을 하는 것이 관례이고 신정왕후는 이 당시엔 명목상 왕비가 아닌 '세자빈'이었으므로 당연히 순원왕후가 수렴첨정을 맡았다. 순원왕후는 친정 안동 김씨 가문의 오라비들을 정치적 파트너로 삼고 정국 운영에 나섰다.

헌종이 이후 친정을 할 때 친위군을 강화하고 안동 김씨를 내치자 대단히 부정적으로 보며 헌종과 갈등 관계가 심했다. 순원왕후 언문 어찰에서는 그가 헌종이 죽기 며칠 전엔 손자를 폐위하기를(!) 바랐고, 그가 죽자 '거릴 낄 것이 없어서 속 시원하다'(!!)고 여겼다는 대목도 있다. 실제로 실록에서만 해도 '남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고, 의심이 많으며, 시기심이 강하다'고 죽은 헌종에 대해 언급한 대목이 있다. 처음엔 헌종을 아꼈지만, 이후로는 평지풍파를 일으키는 어린 손자로 밖에 생각하지 못한 모양. 이 정도면 정조정순왕후 김씨의 그것보다도 더 심한 정도인데, 헌종 독살설이 불거지는 이유이다.[2] 안동 김문을 '우리 가문, 왕가를 내 가문으로 표현한 것이 순원왕후 어찰의 특징이다. 자세한 내용은 헌종 항목 참조.

1849년 23세의 젊은 나이로 헌종이 승하하자, 당시 대왕대비였던 그녀는 전계군의 아들 |이원범을 차기 국왕으로 지명하고 순조의 아들, 즉 양자로 삼았다. 그녀는 3년 동안 수렴청정을 했고, 수렴청정을 끝난지 5년 뒤인 1857년 사망하였다. 왕통을 이을 때 며느리인 신정왕후와의 암투에서 이겨서 일부러 일자무식 농민인 이원범을 지목해서 친정인 안동 김씨 가문의 마음대로 국정을 농단하려 했다는 인식이 있는데 이는 오해이다. 당시엔 이원범 말고는 정말로 왕통을 이을만한 후계자가 없었다. 게다가 조선 시대의 왕실에서,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상대로 뭘 어쩌려 했다는 것 부터가 허무맹랑한 일이다.

4 가족

순원왕후는 효명세자, 요절한 왕자 1명, 명온공주, 복온공주, 덕온공주를 낳았다. 현종 이후 왕실에 대군과 공주가 없었다는 것을 생각하면[3] 당시로서는 큰 경사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자녀들은 모두 20대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떴다. 그리고 그 후로 왕의 적녀는 태어나지 않거나 태어나도 공주로 봉해지기 전에 사망해, 결국 그녀가 낳은 딸들이 조선의 마지막 공주가 되었다.

헌종은 즉위하자마자 아버지 효명세자를 추존했고, 이 때문에 순원왕후는 대비가 된지 얼마 되지 않아 대왕대비가 되었다. 참고로 정순왕후 김씨도 상황이 비슷했으나 대왕대비가 되지 않았는데, 정조가 양부 효장세자를 추존했을 때 효장세자의 아내는 고인이었기에 당시 왕궁에 있는 대비는 정순왕후 김씨 1명뿐이었다. 혜경궁 홍씨가 궁 안에 있긴 했지만 그건 정조의 친어머니로서의 예우 차원에 더 가까웠다. 그래서인지 조정에서 정순왕후 김씨를 대왕대비로 올려야 한다는 의견을 냈으나 정조가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5 평가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를 확립시킨 장본인이지만, 본인은 왕실의 권위를 세우고 민생을 걱정하며 친정의 지나친 권세를 꺼리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당시 여성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것이기도 하였겠지만, 그를 위해 친정에 의지했다는 것이 그녀의 한계였다. 그래서 그녀의 친정이 바로 세도 정치의 주역이었기 때문에 근본적인 문제 해결은 될 수 없었다. 예컨대 철종의 왕비를 간택할 때도 그녀는 친정에 '노론과 소론을 가리지 말고 간택을 하면 어떨까'하고 편지를 보냈고 "우리 가문에서 이번엔 왕비를 내지 말자"는 의견을 냈지만 김좌근의 싸바싸바로 의견을 굽혀야 했고 결국 왕비로 간택된 것은 안동 김씨인 철인왕후였다.

지속적으로 탐관오리의 횡포와 부정부패를 염려하고 지속적으로 '너희들 부패하면 안된다, 내가 다 보고 있다!'라고 경고하면서 국가의 기강을 잡으려고 노력은 열심히 했는데 효과는 미미했고 '이상하다, 그렇게 열심히 했는데 왜 효과가 없지?' 하고 어리둥절하거나 '내가 그렇게 탐관오리 잡으랬는데 수렴을 3년이나 해도 수령이나 감사를 논핵했다는 소리가 왜 없냐?'라고 문제삼기도 했지만 애초에 그 탐관오리들이 누구에게 줄을 대고 있었는지를 생각하면 쓴 웃음밖에 지을 수 없는 대목이다.

또한 여러 차례 민생을 걱정하는 표현을 하고 있으나 실제 행동은 이와 달랐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순조 치세와 헌종 치세는 자연재해와 기상이변으로 농생산량이 급감하였으며 각지에서 굶주림을 이기지 못해 아사자가 속출하고 폭동이 끊이질 않았던 시기이다. 그러나 순조와 효명세자 통치 기간동안 다른 것은 몰라도 왕실의 수입과 지출은 법으로 정해진 것보다 훨씬 많이 깨알같이 챙겼다고 전해진다. 일례로 공주에게 법으로 허락된 궁방전의 상한선이 250결인데 순조와 순원왕후의 강변으로 결국 850결이라는 어마어마한 궁방전을 하사하고 모든 왕실의 지출을 이와 같이 했다. 이는 순조의 어명일뿐 순원왕후와는 무관하다고 할 수 있으나 순조 승하 후 순원왕후의 수렴청정 시기에 이와 같은 지출은 더욱 극심했으며 순원왕후가 직접 호조에 명하여 20만량을 추가로 가져가 왕실의 의례와 잔치에 사용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왕실의 사치는 당대에도 거센 비판에 직면했다고 한다. 이를 볼때 순원왕후는 기본적으로 명분은 민생을 위한다고 하되 실제 행동과 정책의지는 이에 미치지 못했단 것을 알 수 있다.

여러모로 한 나라의 (임시긴 해도) 국가원수로써의 명분상이든 실제로든 책임감을 가지고 열심히 일한 여인이었으나 일가 친척들의 싸바싸바에 넘어가는 모습등을 보면 너무 순진했고, 자신의 가문에 대한 자부심이 너무 커서 조선을 그르쳤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자신의 가문을 위해서라면 친손자이자 국왕이었던 헌종까지도 경계했던 모습은 진정으로 지나친 모습이었다.

6 순원왕후를 연기한 배우

7 기타

한글 서예에 있어서 괄목할만한 연구 자료를 남긴 분으로 유명하다. 바로 친정과 교류할 때 부쳤던 서간 때문으로, 본래 태워지거나 궁중으로 돌려보내져야 하는 서간들이 사가에 보전되어 있다가 발굴된 케이스. 궁체 흘림, 진흘림을 뛰어나게 구사하여 미적으로도 유려하다는 평을 많이 받고 있다. 현재는 원본 복사 출판되어 한글 서예 교본으로도 많이 활용되고 있다.
  1. 야사에 따르면 순조가 김조순의 집에 갔다가 본 딸을 보고 1살 연상인 순원왕후에게 첫눈에 반해서 '김조순의 딸이 아니면 장가를 가지 않겠다'(...)고 정조에게 조르자, 정조가 옳다꾸나 하고는 그걸 받아들였다고도 한다. 소설 영원한 제국도 이 야사를 따르고 있다.
  2. 순원왕후가 살아생전에 남편 순조가 안동 김씨와 손을 잡고 경주 김씨 일가를 박살낸 과정을 두 눈으로 보았다는 점을 생각하자.
  3. 숙종의 첫 정비 인경왕후가 딸을 둘 낳기는 했으나 모두 공주로 봉해지기도 전에 죽었다.
  4. 효명세자의 생모라는 점은 중전 윤씨(서정연) 캐릭터가, 김씨라는 점은 중전 김씨(한수연) 캐릭터가 순원왕후와 부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