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브 윈필드

이름Dave Mark Winfield
생년월일1951년 10월 9일
국적미국
출신지미네소타주 세인트폴
포지션우익수
투타우투우타
프로입단1973년 드래프트 1라운드(전체 4번, SD)
소속팀샌디에이고 파드리스(1973~1980)
뉴욕 양키스(1981~1990)
캘리포니아 에인절스(1990~1991)
토론토 블루제이스(1992)
미네소타 트윈스(1993~1994)
클리블랜드 인디언스(1995)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의 영구결번
61931354251
스티브 가비토니 그윈데이브 윈필드랜디 존스재키 로빈슨트레버 호프먼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
데이브 윈필드
헌액 연도2001년
헌액 방식기자단(BBWAA) 투표
투표 결과84.5% (1회)

1 개요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MLB의 전 외야수이자, 3000안타를 돌파한 타자 중 한 명. 12번의 올스타와 7번의 골드글러브, 6번의 실버슬러거를 수상한, 역대 최고의 만능 스포츠맨 중 한 명.

통산 성적은 23시즌 동안 타율 .283, 출루율 .353, 장타율 .475, OPS .827, 순장타율 .192, 3110안타, 465홈런, BB/K 0.72, wRC+ 128, 1833타점, 223도루를 기록했다.

2 선수 생활

2.1 만능 스포츠맨

어린 시절 부모가 이혼한 후,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그래도 외가가 대가족이라서 그렇게 외롭게 지내지는 않았던 듯. 스포츠에 대한 재능이 어렸을 때부터 있었는지 대학 시절 말 그대로 흠좀무한 성적을 낸다. 고향인 미네소타에 있는 미네소타 대학(University of Minnesota)에 진학했는데, 농구부 소속으로 대학 팀이 53년만의 컨퍼런스 우승을 차지하는데 기여했고, 대학 야구부 투수로 등판해 칼리지 베이스볼 월드시리즈에서 우승을 이끌면서 MVP에 오르기도 했다. 농구와 야구에서 양 쪽 모두 두각을 나타냈던 것.

대학을 졸업할 무렵 그는 무려 4개 팀에서 지명을 받았다. 농구 실력을 인정해 NBA애틀랜타 호크스ABA의 유타 스타즈가 그를 지명했다. 그리고 야구 실력을 인정해서 샌디에이고 파드리스가 1라운드 4번으로 그를 지명했다. 놀라운 것은 대학 시절 단 한 번도 미식축구를 한 적이 없는데도 그의 고향팀인 미네소타 바이킹스가 그를 지명한 것.

대학 농구 선수로 뛸 때 최악의 난투극에 휘말린 적도 있었는데, 이 기억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는 야구를 선택했다. 또 본인이 야구를 좋아하기도 했다. 어쨌든 학창시절 이러한 경력 덕분에 윈필드는 가장 뛰어난 올라운드 스포츠맨 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

2.2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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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난 재능을 인정받아 마이너리그 생활을 단 한 번도 경험하지 않고 바로 메이저리그로 직행했다. 데뷔 첫 해는 평범했지만, 이듬해부터 20홈런을 치면서 본격적으로 재능을 보이기 시작해 마침내 1977년과 1978년부터 드디어 자신의 재능을 완전히 꽃피우기 시작했다. 500홈런을 넘긴 윌리 멕코비의 조언 아래 자신의 재능을 완전히 만개한 것. 뛰어난 성적 덕분에 윈필드는 자연스럽게 신생팀이었던 샌디에이고의 프랜차이즈 스타로 급부상하기에 이른다. 이 때부터 올스타에도 선발되고, 무엇보다 20개 이상의 홈런을 꾸준히 쳐주는 최고의 라인드라이브 히터로 각광받았다.

이 때 만개한 재능은 1979년에 완전히 폭발해 34홈런 118타점으로 그 위력을 드러냈다. 커리어 첫 골드글러브 수상은 덤. 초창기 어려웠던 파드리스의 최고 스타로서 샌디에이고에 야구가 자리 잡는데 큰 기여를 했다. 1980년 20홈런 87타점의 준수한 기록을 세운 후, FA 자격을 획득한다. 샌디에이고에서의 8시즌 동안 그가 거둔 성적은 154홈런 626타점 1134안타.

2.3 뉴욕 양키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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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키스 시절의 윈필드,맷 켐프? 옆에 있는 선수는 타격왕 경쟁자이자 팀 동료인 돈 매팅리.

FA 자격을 획득한 그에게 찾아온 이가 팀 전력 강화를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던 뉴욕 양키스의 구단주 조지 스타인브레너. 양키스는 그에게 평균 140만불의 당시로서는 최고액의 연봉을 제시했고, 여기에 다른 선수가 데이브 윈필드의 연봉을 뛰어넘으면 그 차액을 보전하겠다는 제안을 한다. 그리고 계약 기간은 무려 10년. 당연히 데이브 윈필드는 이를 수락했고, 결과적으로 그의 연봉은 10년간 2300만 달러가 되었다.

하지만 이 양키스 시절은 비록 성적은 괜찮았지만, 윈필드에게는 악몽 같은 기간이었다.

첫째, 연봉 차액을 보전해주겠다는 계약에 대해서 조지 스타인브레너는 그 계약에 대해서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생각보다 돈을 더 지불하게 되자, 데이브 윈필드에 대한 악감정을 가지게 되었고, 급기야 데이브 윈필드와 조지 스타인브레너는 법정 싸움을 벌이게 되었다. 그 이유는 계약서상 데이브 윈필드의 재단에 양키스가 돈을 지급해야 했는데, 양키스가 윈필드 재단의 돈이 실제로 재단에만 쓰이지 않는다면서 거부한 것. 결국 조정으로 끝나기는 했지만, 감정은 상할대로 상한 뒤였다.

둘째, 양키스 이적 첫 해인 1981년 뉴욕 양키스는 월드시리즈에 진출하지만 2연승 후, 내리 4연패하며 LA 다저스에게 우승을 내준다. 문제는 이 때 윈필드가 기록한 성적이 22타수 1안타에 불과한 것. 실제로 그는 통산 PO에 두 번 진출했지만 성적은 겨우 0.208에 불과하다. 어쨌든 이 부진으로 인해 실망한 조지 스타인브레너는 그를 Mr. May라 부르며 비꼬았다. 즉 PO에서는 부진하고 정규시즌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을 때는 잘 한다는 의미.

셋째, 1983년 8월 4일 토론토 블루제이스와의 원정 경기에서 몸을 풀기 위해 캐치볼을 하다가 실수로 새를 맞춰서 죽인 적이 있었다. 문제는 그 다음 행동으로 모자를 벗고 조문을 하는 행동을 취한 것. 이 때문에 토론토 팬들의 분노를 사서 실수치고는 큰 대가인 500달러의 벌금을 동물 학대죄로 내야 했고, 양키스 팬들에게는 양키스의 명예를 더럽힌 선수로 낙인찍혔다. 심지어 감독인 빌리 마틴 마저 "It's the first time he's hit the cutoff man all season."(시즌 내내 처음으로 컷오프맨[1]에게 공을 제대로 줬네)이라고 빈정댈 정도였으니.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1984년 생애 최고의 타율을 기록하면서 타격왕에 도전했는데, 공교롭게도 그의 경쟁자는 돈 매팅리였다. 하지만 양키스의 팬들은 프랜차이즈 스타였던 매팅리에게는 기립박수로 환호했지만, 윈필드에게는 어떤 응원도 보내지 않았다. 이로서 양키스에서 윈필드의 입지는 사라졌다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다섯째, 1989년 시즌을 등부상으로 인해 완전히 날리자 구단주 조지 스타인브레너는 어떻게든 그를 트레이드시키려고 안달이 나 있었다. 사실 1984년에 한 번 트레이드가 텍사스 레인저스와 합의되었지만, 이 당시에는 윈필드 본인이 거부했었다. 그리고 매년 나가는 돈이 아깝자, 어떻게든 그의 비위를 찾아내서 계약을 파기시키려고 한 도박사에게 뒷조사를 의뢰했었다. 이게 1990년 시즌 개막 전에 걸리면서, 스타인브레너는 3년동안 구단주 자격정지를 당했다.[2]

결국 정나미가 떨어질대로 떨어진 양키스를 1990년 트레이드를 통해 떠나게 되었다. 이 기간동안 별별 일이 있었지만, 그래도 성적 자체는 나쁜 편은 아니었다. 양키스에서의 9시즌 동안 그가 거둔 기록은 205홈런 818타점 1300안타.

2.4 말년

쫓겨나듯이 떠난 캘리포니아 에인절스에서 윈필드는 부활했다. 두 시즌 동안 20개 가까운 홈런을 친 후, 1992년 토론토 블루제이스로 이적했다. 그리고 선수 생활 내내 인연이 없던 PO와 월드시리즈를 다시 밟았다. 1981년처럼 부진했지만, 그래도 6차전 결승타를 작렬하면서 체면은 살렸고 결국 월드 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이 해 얻은 반지가 그의 커리어에서 유일한 우승 반지.

1993년부터 2년 동안은 미네소타 트윈스에서 선수 생활을 했는데 윈필드 본인은 고향팀에서 커리어를 마무리하고자 했다. 통산 3000번째 안타도 트윈스에서 달성했다.[3] 하지만 고향에서의 은퇴는 결국 무산되었는데, 미네소타와 클리블랜드의 단장이 저녁 식사를 하는 도중에 그의 웨이버 트레이드에 합의한 것. 정작 트레이드 된 1994년은 파업으로 시즌이 끝나버렸고, 1995년에 잠깐 뛴 후 은퇴하게 되었다.

3 명예의 전당 입성

3,000안타 달성자로서 명예의 전당에 첫 해인 2001년 84.5%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입성하기에 이른다. 명예의 전당에 어떤 구단의 유니폼을 입고가는가가 관건이었는데, 사실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양키스 시절이 더 오래 뛰었고, 성적도 더 좋았다. 하지만 워낙 정나미가 떨어졌던 양키스 시절에 대한 안 좋은 기억 때문인지 결국 그는 가장 즐거웠던 시절인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의 모자를 쓰고 명예의 전당에 갔다. 그의 입성이 샌디에이고 역사상 첫 번째 명예의 전당 입성이다.

당연히 등번호 31번은 이 과정에서 샌디에이고의 영구결번이 되었다.[4] 2011년 현재 샌디에이고의 고문 겸, ESPN의 객원 해설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1. 외야에서 홈 또는 다른 루로 송구가 갈때 내야에서 공을 한번 더 받아 송구하는 선수
  2. 구단주 지위는 유지되지만 팀 운영에 간섭하는 것을 금지하는 자격정지였다. 이 호재(?)를 맞고나서 뉴욕 양키스는 GM 진 미첼과 감독 벅 쇼월터의 지휘 아래 팀의 체질개선에 나섰고, 이때부터 버니 윌리엄스, 데릭 지터, 마리아노 리베라, 앤디 페티트, 호르헤 포사다 등 양키스 왕조의 핵심 선수들을 이 시기에 모두 찾아낸다.
  3. 윈필드에게 3000안타를 허용한 투수는 데니스 에커슬리였다.
  4. 이로 인해 루키시즌을 제외하면 커리어 내내 31번을 달았던 마이크 피아자가 파드리스에선 33번을 달고 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