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앤젤레스 다저스의 영구결번 | ||||
1 | 2 | 4 | 19 | 20 |
피 위 리즈 | 토미 라소다 | 듀크 스나이더 | 짐 길리엄 | 돈 서튼 |
24 | 32 | 39 | 42 | 53 |
월터 앨스턴 | 샌디 코팩스 | 로이 캄파넬라 | 재키 로빈슨 | 돈 드라이스데일 |
이름 | 도널드 하워드 서튼(Donald Howard Sutton) |
생년월일 | 1945년 4월 2일 |
국적 | 미국 |
출신지 | 앨라배마주 클리오 |
포지션 | 투수 |
투타 | 우투우타 |
프로입단 | 1964년 LA 다저스 자유 계약 입단 |
소속팀 | 로스앤젤레스 다저스(1966~1980) 휴스턴 애스트로스(1981~1982) 밀워키 브루어스 (1982~1984) 오클랜드 어슬레틱스(1985) 캘리포니아 에인절스(1985~1987)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1988) |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 | |
돈 서튼 | |
헌액 연도 | 1998년 |
헌액 방식 | 기자단(BBWAA) 투표 |
투표 결과 | 81.6% (5회) |
1977년 메이저리그 올스타전 MVP | ||||
조지 포스터 (신시내티 레즈) | → | 돈 서튼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 → | 스티브 가비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
1 개요
1970년대 LA 다저스의 에이스였고, 300승과 3000K를 모두 기록한 투수. 20승 시즌은 커리어 동안 단 한 번 밖에 기록하지 않았지만, 특유의 꾸준함으로 23년의 선수 생활동안 무려 21번의 두 자리 수 승수 시즌을 만들어 내며 정말 꾸역꾸역 300승을 달성한 우완 투수로,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선수다. 아울러 숨겨진 콩라인.
통산 성적은 5282.1이닝 324승 256패 평균자책 3.26 3,574 탈삼진.
2 선수 생활
LA 다저스가 그를 주목해서 입단시킨 후, 데뷔 시즌인 1966년 제법 인상적인 활약을 선보였다. 1966년 기준으로 신인 주제에 209 탈심진을 뽑아내면서 피트 알렉산더에 이은 역대 신인으로 두 번째로 한 시즌 많은 탈삼진을 잡아낸 선수가 된 것. 비록 신인 시즌에는 승운이 따르지 않아 준수한 성적인 12승 12패 평균자책 2.99로 만족해야 했지만, 이 때부터 돈 서튼은 꾸준한 두 자리 승수 행진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이 1966년은 샌디 쿠팩스의 은퇴 시즌이었는데, 쿠팩스가 은퇴하고 돈 드라이스데일이 몰락하면서 자연히 다저스의 에이스 자리는 서튼이 이어받게 되었다. 꾸준하게 1970년대 다저스의 에이스로 활약하면서 매년 15승 이상은 기록했다. 승운이 안 따르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래도 아주 박복하지는 않아서 승률은 나쁘지 않았다. 이 꾸준한 두 자리 승수 행진은 17년 연속 두 자리수 승수로 이어졌다.
1980년 자유계약 선수 자격을 얻어 휴스턴 애스트로스로 이적했고, 1982년 월드시리즈 우승을 노리던 밀워키 브루어스로 트레이드 되었고, 다시 1984년 시즌을 마치고 오클랜드 어슬레틱스로 트레이드 되었다가 1985년에 캘리포니아 에인절스로 트레이드되었다. 이 와중에 1983년 8승에 그치면서 연속 두 자리 승수 행진은 깨졌지만, 바로 재기에 성공해서 최종적으로 21시즌 두 자리 승수를 기록했다.
1970년대에는 에이스다운 성적도 많이 냈다. 다만 사이 영 상과는 인연을 맺지 못했는데, 승률이 나빠서 투구 내용은 좋았는데도 받지 못했다기 보다는 말 그대로 경쟁자들이 더 잘한 경우가 많았다. 유일한 20승 시즌인 1976년 사이 영 상 투표에서 3위에 오른 것이 최고 기록인데, 그 해 사이 영 상 수상자인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의 랜디 존스가 300이닝 넘게 던지면서 20승을 땄기 때문에, 밀려도 할 말 없는 성적.
참고로 숨겨진 콩라인이다. PO 운은 따랐기 때문에 통산 다섯 차례 PO를 밟았는데, 그 중 4번이나 월드시리즈에 올라갔다. 그런데 신인 시절인 1966년 월드시리즈에서는 마운드에 서지 못하고 볼티모어 오리올스에게 패배하는 장면을 봐야 했다. 1974년에 비로소 PO 마운드에 올라 월드시리즈까지 가지만, 오클랜드 어슬레틱스에게 패배. 1977년과 1978년에는 2년 연속 뉴욕 양키스에게 패배. 밀워키 브루어스 소속이던 1982년에는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게 패배. 그래서 우승 반지가 없다.
이 사람의 콩라인 속성을 더욱 빛내주는 장면이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1986년 캘리포니아 에인절스 소속으로 3승 1패로 앞서다가 5차전 마무리 투수의 블론 세이브를 시작으로 내리 3연패 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여기에 더해 커리어의 대부분을 보낸 LA 다저스는 공교롭게도 그가 처음 팀을 떠난 시즌인 1981년에 뉴욕 양키스를 격파하고 우승했다.
다른 하나는 1988년의 일이다. 1988년 친정인 LA 다저스로 돌아왔지만, 세월을 속일 수 없는지 8월에 방출되고 은퇴했다. 그런데 여기서도 콩라인의 속성이 제대로 드러나는데, 그가 방출된 후, LA 다저스는 PO에서 승승장구하며 오클랜드 어슬레틱스를 누르고 우승해 버렸다(...) 최후의 우승 반지 기회도 그렇게 날아갔다.
한편으로 300승을 거둔 1986년과 1987년 에인절스 시절에는 300승 투수들과 4차례나 대결하기도 했다.[1] 그리고 그 4경기에서 모두 퀄리티 스타트를 거뒀다. 뉴욕전, 보스턴전, 클리블랜드전, 미네소타전.
3 특징
커리어 내내 수상 경력이라고는 1980년 평균 자책 1위가 딱 한 번 있다. 커리어를 이어나가다 보니 3,000탈삼진도 넘겼지만, 정작 탈삼진 왕을 차지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하지만 정말 "300승 그까이꺼 15승을 20번 하면 됨.ㅋ" 의 마인드로 꾸역꾸역 승수를 챙겨가면서 은퇴 시점에는 324승이라는 기록을 남겼고, 탈삼진도 3,500 탈삼진을 넘겼다. 리그를 지배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23년의 경력에서 사이영상 투표에서 표를 받은 시즌 자체가 5시즌에 불과하다.
서튼의 장점은 무시무시한 내구력과 꾸준함에 있다. 5282이닝을 던지는 동안 단 한 번도 부상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 동 시대를 풍미한 투수들이 결국 부상으로 인해 시들거나, 아니면 고생을 많이 했던 것과 달리 서튼은 자기 관리에 철저했고, 내구력을 바탕으로 꾸준한 피칭을 과시했다. 그의 커리어에서 가장 빛나는 대목은 그래서 15년 연속 200이닝 이상 투구와 20번의 200이닝 이상 투구다. 만일 1981년 시즌이 파업으로 인해 단축되지 않았다면, 서튼은 그야말로 라이브볼 시대 이후에는 전무후무한 21년 연속 200이닝의 대기록을 남겼을지 모른다.
다만 커리어에서 가장 저평가받는 요소는 바로 압도적이지 않았던 부분 때문이 아니라 부정투구 때문이다. 동 시대 투수들이 은근 슬쩍 부정투구를 많이 구사했기 때문에 특별히 서튼만 가지고 뭐라 할 수는 없지만, 서튼도 부정투구로 정평이 난 투수였다. 물론 동시대에 이 분야의 대가인 게일로드 페리가 있어서 이 부분으로 이름이 높지는 않지만, 그의 별명인 블랙 앤 데커(Black & Decker)(...)[2]는 야구공을 공구로 수선한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다.[3]
여담으로 페리와 같은 팀에 뛸 때 농담조로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내가 페리를 만났을 때, 그는 나에게 바셀린을 건내주었고, 나는 그에게 사포를 건내주었다(...)"
4 은퇴 이후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은 5수 끝에 1998년 입성했다. 324승 투수 치고는 늦은 입성일 수도 있는데, 앞에서 언급한 임팩트 따위는 하나도 없음 + 부정 투구에 대한 이미지가 겹쳤고, 여기에 월드시리즈에서 그리 강한 투수가 아니었기 때문에 빅 게임 피처로서의 이미지도 없어서 5수나 걸렸다.[4]
은퇴 후에는 고향 근처인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중계를 담당하는 라디오 캐스터로 활동하고 있다. 이전엔 워싱턴 내셔널스 중계를 하기도 했다. 한 때, 신장암에 걸렸지만, 이를 극복하고 복귀했다. 그의 아들인 대런 서튼도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중계 캐스터를 맡기도 했지만 지금은 활동하지 않는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