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스코 폭파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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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sco Demolition Night

1 개요

1979년, 음악은 디스코의 광풍에 밀려 점점 그 자리를 잃어가기 시작했다. 197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디스코 붐은 펑크 록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1970년대 내내 한번도 왕좌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이는 단순하고 춤추기 좋은 음악으로서의 디스코가 파티 음악으로서 충실했기 때문에, 주류 대중문화에서 향락과 소비의 상징으로 자리잡은 데에 있다. 또한 단순한 만큼 편곡이 엄청나게 쉬웠고, 일정한 포메이션에 따라 대량 생산이 가능했고, 그런고로 이를 대체할 다른 댄스뮤직이 나타나지 않았다.[1]

1979년 7월 12일,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홈구장인 코미스키 파크(Comiskey Park I)[2]는 그날 더블헤더 일정으로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대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두 경기가 예고되어 있었다. 이 날은 특별히 안 듣는 디스코 음반을 가지고 오면 98센트를 할인해준다는 이벤트가 있었다. 그리고 많은 관객들이 손에손에 디스코 음반을 매표소에 내고 입장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 레코드가 어떻게 쓰일지 꿈에도 생각을 하지 못했다.

잠시 후, 첫번째 경기가 끝나고 두번째 경기가 벌어지기 전의 막간에 스티브 달은 군복방탄모를 착용하고 그라운드에 들어섰다. 그리고는 관중들로부터 받은 디스코 레코드들을 외야에 쌓아놓고 폭약을 설치한 뒤 폭파했다. 그들은 군중들의 가슴에 불을 당겼고, 각성한 군중들은 일제히 봉기하여 코미스키 구장을 디스코로부터 해방시켰다.

2 진상

시카고의 디제이 스티브 달의 계략과 화이트삭스 구단 측의 쿵짝이 맞아 벌어진 이벤트성 사건이었다. 마침 스티브 달이 일하던 지역 라디오 방송국이 록음악 방송국에서 디스코 방송으로 전환되었고, 자연스럽게 록음악 디제이였던 스티브 달도 짤리게 되었다. 평소에도 디스코에 대한 감정이 안 좋았던 스티브 달은 어떻게 하면 디스코라는 음악에 엿을 좀 먹일수 있을까를 궁리하고 있었다고 한다.

1979년은 분명 디스코의 황금기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디스코의 몰락이 다가오는 시기이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디스코라는 음악이 음악 차트를 지나치게 오래 점령하고 있었고,[3] 같은 음악을 3~4년씩 듣다 보니 대중들은 점점 디스코에 질려가고 있었다. 그래서 1970년대 후반에 들어서 "디스코는 구려!"(Disco Sucks!)라는 티셔츠가 유행할 정도였다. 다시말해 대중들은 시도때도 없이 나오는 디스코에 짜증이 날대로 나 있던 시점이었다.

이 시점과 맞물려 스티브 달은 디스코 반대 운동 비슷한 이벤트를 구단측과 이야기 했고 구단측도 "이거 장사 되겠다" 싶어서 허용하기에 이르른다. 이렇게 역사적인 가장 희귀한 야구경기 구장난동의 무대가 마련된 것이다.

그러나 사건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으로 흘러가고 만다.

3 사건의 전개와 종결

일단 스티브 달이 관객들로부터 받은 레코드들을 그라운드에서 폭파하고 사람들의 환호를 받으며 퇴장한 것은 사전에 협의된 것이었다.

하지만 스티브 달이 퇴장하고 나서, 갑자기 수천 명의 관중들이 그라운드로 돌진하기 시작했다. 그라운드에는 이미 화이트삭스 선수들이 몸을 풀고 있었다. 당황한 선수들은 벤치로 도망갔고, 관중들은 아직 타다 남은 레코드들을 주워서 다시 불을 붙이기 시작했다. 관객석 난간 쪽에는 이날의 이벤트를 고취시키기 위해 "Disco Sucks!!"등의 현수막이 걸려있었는데, 관중들은 이를 떼어내서 현수막처럼 흔들며 그라운드에 난입했다. 결국 수천 명의 관중들이 그라운드를 점거한 채 사태는 폭동으로 치닫게 되었다.

그라운드는 불에 타고, 구장 시설들은 박살이 나기 시작했으며, 술취한 관객들이 레코드를 주워서 프리스비 처럼 던지고 놀다가 사람을 맞춰서 싸움이 일어나는 등, 코미스키 구장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고 만다.

결국 헬멧과 곤봉으로 무장한 경찰들이 그라운드에 진입하고 나서야 사태는 진정되었다. 사무국 측에서는 이 상태로는 경기를 치를 수 없다고 판단하고 더블헤더 2차전 경기를 화이트삭스의 몰수패로 처리하여 원정팀인 디트로이트 타이거즈가 1승을 가져갔다.

당시 사건을 다룬 뉴스영상.

4 여담

후에 분석한 바에 따르면 이러한 이벤트를 벌이자 야구와 상관없는 관중들까지 모여들면서 이미 사고가 예고되었다고 한다. 원래 당시에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야구장에 모이지 않았고, 구장 관계자들은 12,000명 정도가 모일 것으로 예상했다. 그런데 52,000명 정원의 구장에 무려 9만명(!)의 사람들이 모여든 것이다. 게다가 이벤트가 이벤트인 만큼 야구와 상관없이 그냥 디스코를 공격하러 온 사람들도 부지기수였고, 외야석에서 이상한 풀이 타는 냄새를 맡았다는 증언도 있었다(…).

당시 이러한 광경은 정작 초기 디스코 음악을 주도했던 뮤지션들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는지, 밴드 시크(Chic)의 기타리스트 나일 로저스는 "이건 마치 나치의 서적 소각같다. 분서갱유? 이제 재즈의 고향 미국에서 디스코라는 단어도 말하기 뭐하게 됐군."이라고 이야기 했다고 한다.[4]

1979년쯤 되면 디스코도 이제 슬슬 끝물이라는 느낌이 있었는데, 이 "디스코 폭파의 밤"은 디스코의 종말을 확실히 앞당긴 사건이 되었다고 한다. 이 사건 이후로 디스코에도 영국식 뉴웨이브와 덥 음악의 요소가 결합하게 되었고, 이를 포스트 디스코라고 한다.

이후 화이트삭스 구단주 빌 빅의 아들이자 이 사건을 주도한 인물 중 한 명이었던 마이크 빅은 2001년에 디스코 밴드인 KC 앤 더 선샤인 밴드의 해리 웨인 케이시에게 이 일에 대해 사과했다고 한다.
  1. 이러한 움직임은 1980년대 초반 주류로 올라온 뉴웨이브의 등장과 그 이후 일렉트로니카 붐이 일어나기 전까지 계속된다. 엄밀히 말하면 뉴웨이브도 디스코와 신시사이저를 받아들인 펑크록이니 디스코의 명맥은 계속 이어진 셈이다.
  2. 화이트삭스의 현 홈구장인 US 셀룰러 필드 이전에 사용했던 홈구장. 사실 지금 경기장도 원래 이름은 (New)Comiskey Park였다.
  3. 디스코는 원래 흑인들의 펑키 음악에서 파생됐고, 1970년대 초반 흑인들 사이에서 유행하다가 미국 대도시의 디스코텍(디스코가 디스코텍에서 파생된 명사이다. 디스코텍은 원래 "생음악이 아닌, 레코드를 틀고 춤을 출 수 있는 야간 클럽"을 뜻한다)과 게이 클럽을 중심으로 유행하게 되었고, 이게 1970년대 중반 주류 문화에 편입된다.
  4. 그럴만도 한 것이, 사실상 특정 장르가 싫다고 대규모 군중 앞에서 이런 식으로 공개 화형식을 한 적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