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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C 미트윌란 No. 8 | |
라파엘 페르디난트 판데르파르트 (Rafael Ferdinand van der Vaart) | |
출생 | 1983년 2월 11일 |
국적 | 네덜란드 |
신체조건 | 176cm 74kg |
출생지 | 헴스케르크 |
포지션 | 공격형 미드필더 |
등번호 | 8번 |
클럽 | AFC 아약스(2000~2005) 함부르크 SV(2005~2008) 레알 마드리드 C.F.(2008~2010) 토트넘 핫스퍼(2010~2012) 함부르크 SV(2012~2015) 레알 베티스(2015~2016) FC 미트윌란 (2016~ ) |
국가대표 | 109경기 25골 |
트위터 | [1] |
2000년대 초반 아약스 최고의 재능
함부르크 SV의 왕자
골든보이 상 수상자 | |||||||||||
라파얼 판 더르 파르트 (2003) | → | 웨인 루니 (2004) |
목차
1 개요
FC 미트윌란 소속의 네덜란드 출신 축구선수.
2 플레이 스타일
왼발을 잘 쓰는 공격형 미드필더. 세컨드 스트라이커나 왼발을 이용해 중앙으로 들어오는 식으로 오른쪽 공격수 역할도 소화할 수 있다. 왼발 킥력은 내로라할 만한 수준이고 오른발도 아주 능하지는 않지만 결코 방심해서는 안 될 수준.
이 킥력을 바탕으로 슛과 패스 양면에 걸쳐서 결정적 장면을 만들어낼 수 있고 기술도 괜찮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플레이가 좀 정적이고 게임을 천천히 풀어나가는 능력도 모자란다. 발도 조금 느린 편. 토트넘에서는 모드리치와 함께 서로가 서로의 단점을 보완해주는 좋은 모습을 보였다.
3 선수 경력
3.1 아약스 시절
99-00 시즌 단 한 경기뿐이지만 17살의 나이로 아약스에서 데뷔하게 된다. 그리고 다음 시즌 팀에 성공적으로 자리잡으며 제 2의 요한 크라이프 등장이라는 찬사까지 받게 된다. 그러나 그 다음 시즌부터 판 더르 파르트는 부상에 시달리기 시작하며 삐걱거리는 와중에도 7경기 연속골을 포함해 14골을 때려박으며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또한 그 다음해에도 판 더르 파르트는 부상에 시달리며 21경기밖에 출장하지 못하는 와중에도 18골을 박아넣는 무서운 모습을 과시한다. 급작스러운 성공의 대가인지 03-04 시즌에는 과체중 및 여자친구에 빠진 나머지 축구에 소홀했다는 추문에 시달리나 어느새 다시 추스리고는 다시 한 번 아약스에 리그 우승을 안겨주며 명실상부한 아약스와 네덜란드의 스타로 떠오른다.
시즌마다 성공이 연이어진 끝에 04-05 시즌 판 더르 파르트는 감독 쿠만에 의해 주장이라는 중책을 떠맡게 된다. 그러나 이 때부터 판 더르 파르트의 몰락이 시작되는데 이적문제로 프런트와 큰 갈등을 빚고 있던 팀 동료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가 국가대표 친선경기에서 판 더르 파르트에게 큰 부상을 입혔고 고의적인 태클이었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판 더르 파르트가 주장이자 네덜란드인인 아약스 내에서의 신경전과 파벌싸움을 극대화시켰다. 그러나 즐라탄은 이 시즌 전설로 남게 되는 그 유명한 카메라 농락 슛을 성공시키고는 훌쩍 유벤투스로 떠나고 판 더르 파르트는 하락세를 타게 된다. 여기에 자신을 왼쪽에 배치시키려는 감독 쿠만과 다투게 되면서 아약스는 때마침 떠오르는 베슬리 스네이더르를 키워보기로 하고 판 더르 파르트를 이적시킨다.
3.2 함부르크 시절
아약스를 떠나야 하는 판 더르 파르트였지만 하락세를 타고 있었기에 예전과는 달리 빅클럽에서의 영입의지가 사라진 건 아니었지만 주전보장 같은 면에서는 뜨뜻미지근한 점이 있었고 판 더르 파르트 자신으로서도 플레이메이커로서 자신이 경기를 주도할 수 있는 팀을 찾아 마침 돈을 쓰려는 함부르크로 이적하게 됐다.
함부르크에서도 끊임없이 잔부상에 시달렸지만 최다득점자였던 시즌도 있을 정도로 꾸준히 골망을 가르는 큰 활약으로 팬들의 많은 지지를 얻었다. 함부르크에서 세 시즌을 보낸 판 더르 파르트는 발렌시아로의 이적설이 있었지만 레알이 아니라면 함부르크에서 이적하지 않겠다고 천명했던 것처럼, 마침내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하게 된다.
3.3 레알 마드리드 시절
5년 계약을 맺고 레알에 입단해서 첫 해에는 괜찮은 활약을 보여주었다. 전 시즌에 스네이더르가 먼저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하여 판 더르 파르트와 스네이더르는 네덜란드[1] 그리고 아약스 동료 둘이 레알에서 양발 중거리 슛으로 골을 넣는 괴상한 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입단 당시의 걱정 아닌 걱정을 뒤로 하고둘다 시망요 큰 활약 없이 점점 잊혀지게 된다. 이적한 이듬해 페레스가 회장으로 재취임하고 갈락티코 정책을 펼치며 카카가 영입되고 출장기회가 줄어들었다. 결국 스네이더르가 인테르로 이적, 그리고 그 이듬해 다시 외질이 영입되자 판 더르 파르트는 토트넘으로 이적했다.
경기를 뛸때마다 수준급의 경기력을 보여주었기에 토트넘에서의 활약 또한 기대가 되었고 레알의 갈락티코 정책이 과시적인 과소비에 가깝다는 비난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특히 판 더르 파르트의 경쟁자였던 카카가 기대 이하의 모습을 보여줬고, 오히려 판 더르 파르트가 더 좋은 모습을 그나마 보여줬기에 문제가 되었다.
3.4 토트넘 시절
토트넘은 이미 모드리치라는 걸출한 중앙 미드필더가 있었으나 경기를 조립하는 선수 외에도 경기를 결정지어버릴 만한 영향력을 가진 중앙 자원을 원했고 이에 판 더르 파르트를 영입했다. 되고말고 각이 열리면 슛을 쏘고 보는 성향이 있긴 했지만, 부상을 끊었다 돌아온 저메인 데포는 전시즌 18골을 넣었던 스트라이커에서 22경기에서 4골을 넣는 끔찍한 스트라이커로 전락했고 파블류첸코도 대동소이한 경기력을 과시하는 가운데 베일과 함께 토트넘을 먹여살리고 있다.청년가장 이에 힘입어 전반기 EPL 최고의 영입 1위를 차지했으며, 겨울 이적시장 토트넘이 거절의 아이콘으로 떠오르며거절햄 공격수 보강을 못하자 잔부상에 시달림에도 불구 공격진의 에이스로서 토트넘을 5위에 견인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11/12시즌은 완벽히 에이스로 떠오른 가레스 베일을 보좌하며 토트넘을 챔피언스리그 진입권인 4위로 끌어올리고 말았다. 그러나...
3.5 다시 함부르크로
2012년 시즌에는 2008년 레알 마드리드로 떠난지 4년만에 다시 친정팀 유니폼을 입게되었다. 토트넘에 잔류의사를 보이는가 했는데 주전보장을 받지 못하고 고민하다 친정팀의 구애를 못이기고 복귀, 이로써 대한민국의 손흥민과 같이 한솥밥을 먹게됐다. 한국시간 2012년 9월 17일 프랑크프루트전 손흥민의 시즌 첫 골 이자 2-3으로 추격을 하는 골에 도움을 기록하며 팀 내 최고 평점을 기록했다.
전번 시즌 팀내 득점 1위이던 아르티옴 루드네우스는 부상과 부진으로 무득점. 득점 2위 손흥민은 바이엘 레버쿠젠으로 이적하면서 13-14 시즌은 그가 12차전까지 3골을 넣으며 팀내 최다 득점을 기록 중이지만 팀은 리그 14위까지 추락했다. 이후로는 팀과 함께 부진에 빠지면서 기대치에 미치진 못했다. 시즌 막판 승강 플레이오프를 승리하면서 겨우겨우 잔류에 성공했지만 14-15 시즌 또한 지난 시즌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러면서 기량이 점점 쇠퇴하는 모습을 보였고, 판 더르 파르트는 시즌 종료 이후 함부르크를 떠날 의사를 보였다. 또 다시 승강 플레이오프를 거치면서 간신히 분데스리가 잔류에 성공한 이후 팀을 떠났다.
3.6 레알 베티스 이적
2015년 6월 9일 승격팀 레알 베티스가 자유계약으로 판 더르 파르트를 영입했다고 발표했다. 이로써 정확히 5년 만에 프리메라리가로 복귀하게 되었다.
3.7 FC 미트윌란
2016년 8월 10일 덴마크리그 소속의 FC 미트윌란맨유 잡아본 그 팀으로 이적하였다. 계약기간은 2년간으로 알려졌다.
3.8 국가대표
2001년 FIFA U-20 월드컵에 선발된 판 더르 파르트는 같은해 10월 안도라와의 A매치에서 성인 국가대표에 첫 데뷔하였고, 이후 유로 2004, 2006 월드컵, 유로 2008, 2010 월드컵, 유로 2012에 출전하면서 국가대표로의 활약을 이어갔다. 2014년 월드컵은 네덜란드 국가대표 30인 예비 명단에는 뽑혔지만, 부상으로 인해 최종 명단에는 탈락하였다.
4 기타
한 때 같은 팀에서 뛰었었던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와는 원수 사이가 되었는데 유로2004 이후 네덜란드와 스웨덴의 친선전에서 판 더르 파르트는 즐라탄의 태클에 부상때문은 아니다. 이 전부터 곪아있던 갈등이 최대치로 폭발한 것. 즐라탄이 판 더르 파르트의 사과요구에 고의성을 계속 부인하고 있다. 판 더르 파르트는 '즐라탄의 태클은 고의적이었다'고 언론에 고발했으며 이에 분노한 즐라탄이 아약스에서 떠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즐라탄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자신은 고의로 태클을 한게 아님에도 판 더르 파르트가 언론 플레이로 자신을 음해하였다고 주장하였으나 고의가 맞다. 하지만 그 고의로 의심되는 태클은 판 더르 파르트에게 부상을 입히겠다는 의도보다는 강력한 투쟁심의 발로라고 보는게 적절하다. 아약스에서 최고의 폼을 보여주는 즐라탄보다 자국 유망주라는 이유만으로 편애받았던 판 더르 파르트에 대해 자존심이 강한 즐라탄이 팀 차원에서 감독과 단장에 문제를 제기했었지만 전혀 해결 되지 않은 채로 유지되었고 결국 국가대항전에서 저런 심각한 일이 발생하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판 더르 파르트가 즐라탄을 얼마나 싫어하는지는 이 영상을 참조.....
풋볼 매니저를 플레이 하는 사람들에게 흔히 국민강캐 또는 국민 플메라는 별명이 유명하다.
FM의 전신인 CM부터 포텐 180에 기본어빌도 출중한 유망주, 이후 FM2007에서 현 FM2011까지 꾸준한 능력치와, 적절한 나이, 미칠듯한 스탯, 저렴한 이적료[2], 판 더르 파르트가 곧 전술이다! 라고 할 정도로 공미면 공미, 플메면 플메, 중미면 중미, 훈련시키면 윙에서도 날아다니는 모습을 보인다. 단 재계약 할때 미칠것 같은 주급인상 요구 빼고 실축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만 FM시리즈에서 이렇게 시리즈마다 좋게나온 선수도 찾기 힘들다.
일반적인 선수에 비해 훨씬 낫지만 나름 운이 없는 것도 특이점. 실제로 2000년대 초반에는 크라이프의 재림수준으로 네덜란드 언론의 칭송을 받았고 젊은 나이에 자국 최고 명문 아약스에서 주장완장을 차면서 잘 나갔다. 당시 링크가 난 클럽이 유럽 최고 명문들 한다발이었을 정도. 허나 같은 팀 후배인 베슬리 스네이더르가 등장한 2004년 이후에 국대/클럽 양쪽에서 자리를 위협받았고 부상 몇 번 입은 후엔 다른 클럽에서의 입질도 거진 사라져 버렸다. 2005년 함부르크로의 이적이 실현되었을때 유럽언론의 대부분 반응은 대략 '천재의 몰락' 수준이었을 정도.
함부르크 이적 후 중위권을 전전하던 팀을 홀로 먹여살려가며 챔스존으로 이끌고 그 활약을 통해 2000년대 중반 전성기를 달리던 바르셀로나를 견제하려던 당시 오렌지 커넥션이 많은 레알 마드리드로 2008년 입단했지만 초반 반짝 활약 후 이렇다할 모습은 없었고, 2009년 갈락티코 2기의 시작을 알린 카카의 이적 이후 또 벤치를 달구게 된다. 부인의 암치료를 위해 함부로 다른 클럽으로 이적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2년을 후보 신세로 지낸 다음 토트넘으로 가서 나름 또 알찬 활약을 보였지만 안드레 빌라쉬-보아쉬 감독의 취임 이후 팀 내 미래에 대한 확답을 듣지 못한 채 다시 친정팀인 함부르크로 복귀했다. 상술했다시피 거쳐간 클럽들이 녹록한 클럽들도 아니고 레알에서의 생활을 제외하면 팀 내 에이스 자리를 거의 놓지 않았다 할 정도이지만 2000년대 초반 네덜란드산 최고 유망주였던 그의 위상을 기억하는 팬들에게는 판 더르 파르트의 지금까지의 발자취는 무언가 아쉬움을 남긴다.
스네이더르와는 아약스때 부터 친했고, 사실 스네이더르와 판 더르 파르트같은 비슷한 스타일의 공격형 미드필더가 공존하기는 힘들다.[3] 그러나 네덜란드는 니헐 더 용을 수비형 미드필더로 놓고 그 위에 스네이더르와 판 더르 파르트를 올렸고 판 바스턴감독 시절 이러한 조합이 가동되었지만 두 선수 모두 수비에 그리 적극적이지 않아 밸런스에 문제가 생기면서 이 조합은 결국 실패로 돌아가면서 그리 오래 가진 못했고, 이후로는 인테르에서 공격을 진두지휘하며 팀의 에이스로 발돋움한 스네이더르에게 대표팀 주전 공격형 미드필더 자리를 내주면서 후보로 내려갔다.
여담으로 생긴것과 다르게 목소리가 엄청 허스키하다.
다른 네덜란드 선수들[4]과도 친하지만 특히 스네이더르와는 아약스시절 부터 절친으로 둘이 서로 까는게 일상화 되있는듯 하다.
이혼남이다. 아내가 무려 14살 연상이다. 레알 마드리드 시절, 아내가 유방암 진단을 받자 당시 레알에서 입지가 좁아졌으나 레알 구단측에서 아내의 암 완치를 위해 한 시즌 더 머무를 수 있도록 해주었다.- ↑ 당시 레알 마드리드에는 두 사람 말고도 아르연 로번, 뤼트 판 니스텔로이, 로이스톤 드렌터, 클라스 얀 훈텔라르도 있어 오렌지 커넥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09-10 페레스가 돌아오고 갈락티코 정책이 재시작되면서 이들은 점차 팀에서 비중이 떨어지게 되고 훈텔라르는 AC 밀란, 로번은 바이에른 뮌헨으로 이적한다. 남아 있던 판 니스텔로이도 겨울 이적 시장에 함부르크 SV로 이적했다.
그리고 손흥민의 튜터링을 해주었다. 판 더르 파르트도 후에 손흥민과 같이 뛰게 된다.이 중에 로번은 마누엘 페예그리니가 기용할 마음이 있었으나 스네이더르와 훈텔라르가 이적하면서 로번도 자신의 입지에 대해 크게 불안함을 느껴 에이전트인 아버지에게 이적할 팀을 찾으라고 했고, 감독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뮌헨으로 이적했다. - ↑ 레알 이적전 함부르크 시절에는 적당히 100-150억 정도만 찌르고 함부르크가 거절 3번하면 알아서 불만떠서 헐값에 나오며, 레알 마드리드 시절에는 카카에게 밀려 언제나 주전 자리 찾고 싶다며 징징대며 이적요청을 한다.
- ↑ 램파드와 제라드를 보면 알수 있다.
- ↑ 니헐 더 용, 아르연 로번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