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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루돌프 "루디" 톰자노비치 주니어 Rudolph "Rudy" Tomjanovich, Jr. |
생년월일 | 1948년 11월 24일 |
출신지 | 미시건주 햄트래믹(Hamtramck) |
포지션 | 포워드 |
출신학교 | 미시건 대학교 |
드래프트 | 1970년 드래프트 1라운드 (전체 2번, 샌디에이고 로켓츠) |
선수경력 | 샌디에이고/휴스턴 로켓츠(1970~1981) |
지도자 경력 | 휴스턴 로키츠(1983~1992, 어시스턴트 코치) 휴스턴 로키츠(1992~2003, 감독) LA 레이커스 (2004~2005, 감독) |
국가대표 경력 | 그리스 FIBA 세계 선수권 대회 미국 대표팀 감독(1998)[1] 시드니 올림픽 미국 국가대표팀 감독 (2000) |
등번호 | 45번 |
휴스턴 로키츠 영구결번 | |
No. 45 |
1 개요
전 NBA의 농구선수이자 감독, 래리 버드와 더불어 명선수=명감독이라는 공식을 성립시킨 몇 안되는 명장. 별명은 Rudy-T.
2 일생
2.1 선수시절
미시간 대학에서 선수생활하며 실력을 쌓은 뒤 1970년 1라운드 2번으로 샌디에이고 로켓츠에 지명, 1981년 은퇴 때까지 샌디에이고-휴스턴 시절을 거치고도 꾸준히 선수로써 활동, 1974~77, 79년에 통산 5번 올스타 선출, 1981년 NBA 파이널 진출 공헌등으로 팀의 심장 노릇을 하였다.
허나 현역당시 그의 이름을 가장 널리 알린 건 그의 수준급 실력이 아니라 그가 1977년 12월에 LA 레이커스의 선수인 커미트 워싱턴에게 맞은 강펀치였다. 당시 두 팀간의 패싸움이 벌어졌고, 감독시절에도 그렇지만 선수시절에도 인격자로 유명한 루디는 싸움을 말리러 코트 중앙으로 서둘러 달려갔다. 그러나 한창 싸우고 있던 워싱턴은 그가 싸우러 오고 있다고 착각해 펀치를 날렸다. 무방비상태+달려오던 관성까지 더해 펀치를 맞은 루디는 피를 흘리며 기절했고[2] 두개골과 얼굴의 골격 부분이 분리되어서 코에서 척수액이 흘러나와 입으로 들어가는(!!!) 죽을수도 있는 부상을 입게 된다.[3] 훗날 이 사건은 단순히 "The Punch"로 알려졌다. 시즌 초에 입은 이 부상으로 인해 그는 잔여시즌을 전부 결장했으며 다음 시즌이 되어서야 복귀를 했다. 그러나 워낙 후유증이 심해 기량이 점점 쇠퇴하다가 1981년, 33세라는 이른 나이에 선수생활을 마감한다. 1985년 LA 타임즈 기사에 따르면[4] 거의 10년이 지난 당시에도 두통에 시달렸다고.
사건 당시의 영상. (1분 47초경에 나옴.)
이 펀치로 워싱턴은 당시 NBA역사상 가장 중징계인 26경기 출장정지를 받았고, 이후 NBA는 코트 위에서 일어나는 싸움에 대해 징계를 강화하게 된다. [5]
2.2 감독 시절
2.2.1 휴스턴 로켓츠
은퇴 뒤에는 친정팀인 휴스턴 로켓츠로 돌아와 2년동안 스카우트 업무에 종사하다가, 1983년에 어시스턴트 코치로 부임, 이곳에서 빌 피치 감독과 돈 체이니 감독을 보좌하면서 1986년 NBA 파이널 진출에 기여하기도 했다.
1991~92 시즌 도중에 성적 부진의 책임을 지고 사임한 돈 체이니 감독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부임, 부임 첫 시즌에는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하였지만, 그는 올라주원의 활용도를 더 끌어올리는 방법을 구상했다. 올라주원의 넓은 시야와 패싱능력을 더욱 극대화 시켜서 외곽슈터들을 활용했는데, 하킴 올라주원의 숨은 보디가드인 파워포워드 오티스 도프, 정규시즌엔 그냥 괜찮은 롤플레이어였지만[6] 플레이오프에서만큼은 미칠듯한 클러치샷으로 상대팀 팬들에게 깡소주를 먹인(...) 미스터 빅샷 로버트 오리 등이 버티는 포워드진에, 게임리딩능력은 평범했지만 삼점슛은 일품이었던 주전포인트가드 케니 스미스, 비록 후보에다 루키였지만 강심장으로 큰 경기에서 대박활약을 해준 샘 카셀, 클러치 슈팅력과 집요하기까지 한 수비력에 이를 능가하는 성깔로 유명했던 슈팅가드 "매드 맥스" 버논 맥스웰 등 외곽슛이 뛰어난 벌떼 가드진으로 팀을 정비했고 팀 전력은 상승일로를 탔다.
그리고 대망의 93-94시즌, 하킴 올라주원은 리그를 씹어먹으며 MVP에 올랐고 휴스턴은 58승 24패의 7할이 넘는 성적을 거두고 포틀랜드-피닉스-유타를 차례로 격파하며 다시 파이널에 진출,상대는 당연히 마이클 조던의 시카고 불스!가 아니고....[7] 그동안 번번히 조던의 벽에 막혀 절치부심하고 있던 패트릭 유잉의 뉴욕 닉스.시리즈는 치열하게 진행되어 7차전까지 가는 대접전이었고[8] 마침내 휴스턴은 대망의 첫 우승을 거머쥐었다.
94-95시즌엔 올라주원 등 주축 선수들의 부상 등의 악재[9] 가 퍼져 47승 35패밖에 못 거두며 정규시즌은 6위를 기록했다. 하지만 트레이드 데드라인을 통해 얻은 클라이드 드렉슬러 덕에 상위시드를 연이어 업셋하면서 혈투끝에 [10] 파이널에는 진출했다. 이 때 파이널에서 만난 팀은 샤킬 오닐의 올랜도 매직이었는데 이번에는 4-0으로 개발살내며 대망의 2연패를 이뤄내게 된다. 우승트로피을 받은 후 그가 남긴 코멘트가 간지폭풍인데,
"We had nonbelievers all along the way, and I have one thing to say to those nonbelievers: Don't ever underestimate the heart of a champion!" - (챔피언에 이르는) 길을 걸어오는 동안 우리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에게 한마디 하고 싶군요: 절대 챔피언의 열정을 과소평가하지 마세요!"
두 차례의 연속 우승 이후, 찰스 바클리, 스카티 피펜등의 대형스타를 영입하여 우승에 다시 한 번 도전해보고자 했으나, 피펜이 오기 전에는 신흥 강호인 유타 재즈에게 밀렸고, 1998-99시즌에 피펜이 가세한 뒤에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고, 오히려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코비-샼 콤비를 주축으로 한 LA 레이커스에게 광탈당하고 말았고, 팀의 심장인 올라주원이 심장병 등을 앓는 등 악재가 겹치게 되었다.
결국 휴스턴은 1999~2000시즌부터 3시즌간 플레이오프도 못 나가는 굴욕을 맛보게 되었고, 결국 루디는 2003년 3월 27일, 방광암 치료를 위해 11년만에 지휘봉을 내려놓게 되었다.
더불어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걸로 유명한 루디는 당시 루키였던 야오밍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는데, 2002/03 시즌 막판에 그가 사임하자 상심한 야오와 로켓츠는 한동안 부진하면서 승률을 까먹어 결국 플레이오프에 간발의 차이로 탈락하고 만다.
2.3 LA 레이커스
당시 LA 레이커스는 샤킬 오닐의 이적, 필 잭슨 감독의 사임 등으로 어수선했는데, 이를 타개하기 위해 레이커스의 감독으로 부임했지만, 결국 성적은 기대에 못 미치며 곤두박질쳤고, 지병인 심장병이 더욱 악화되면서 결국 더는 안 되겠다 싶어서 시즌 중반에 물러나고 말았다.
2.4 이후
은퇴 이후 레이커스에서 구단 컨설턴트로 재직한 바 있다.
3 감독 스타일
추가바람.- ↑ 이때는 대학 선수로만 구성했다.
- ↑ 훗날 회상에 따르면 천장에 달려있던 점수판이 떨어져서 맞은줄 알았다고 한다.
- ↑ 루디의 수술을 집도한 의사는 이를 두고 "훨씬 덜 심각한 부상을 입고도 죽은 사람들도 여럿 봤다"면서 수술을 "깨진 달걀 껍질을 스카치 테이프로 붙히는 것"에 비유했다.
- ↑ 참고
- ↑ 워싱턴 개인도 전국적인 증오를 받았는데, 인종차별적인 멘트부터 자식들과 부인까지 욕을 먹었다. 심지어 그의 부인인 임신한 상태였는데, 산부인과 의사가 단지 워싱턴의 부인이란 이유로 봐주길 거부했다고.
- ↑ 그래도 선수생활 초창기엔 큰 키와 다재다능함으로 기대를 받는 유망주였다.
- ↑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얘기지만 조던은 이때 잠깐 야구하러 나가있었다.
- ↑ 실제로 5차전까지 뉴욕이 3승2패로 앞서고 있었고, 6차전 막판에 존 스탁스가 역전 슛을 시도하지만 이게 올라주원의 손에 걸리고 만다. 그리고 스탁스는 최종전에서 슛 18개를 던져 2개 성공, 특히 삼점슛은 11개 모두 놓치면서 시원하게 경기를 말아먹는다. 최종 스코어는 90대84
- ↑ 이때 상황이 얼마나 심각했냐면 급한대로 NBA레벨이 아닌 무명선수들까지 단기계약을 했을정도였다.
- ↑ 1라운드 3승2패, 2라운드 4승3패, 3라운드 4승2패로 두번이나 최종전까지 갔고 마지막 3라운드에서도 4승2패로 결코 쉽게 승리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