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리 버드

The 50 Greatest Players in National Basketball Association History
NBA 역사상 위대한 선수 50인
in 1996. ESPN / 영상
네이트 서몬드네이트 아치볼트데이브 빙데이비드 로빈슨데이브 코웬스돌프 세이즈레니 윌킨스
래리 버드로버트 패리시릭 베리마이클 조던매직 존슨모제스 말론밥 페팃
빌 러셀빌 셔먼빌 커닝햄빌 월튼샤킬 오닐샘 존스스카티 피펜
아이재아 토마스얼 먼로엘빈 헤이즈엘진 베일러오스카 로버트슨웨스 언셀드윌리스 리드
윌트 체임벌린월트 프레이저제리 루카스제리 웨스트제임스 워디조지 거빈조지 마이칸
존 스탁턴존 하블리첵줄리어스 어빙카림 압둘 자바칼 말론케빈 맥헤일클라이드 드렉슬러
폴 아리진패트릭 유잉피트 마라비치하킴 올라주원할 그리어찰스 바클리밥 쿠지



보스턴 셀틱스에서의 현역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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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동상 앞에선 50대의 버드.

인디애나 페이서스 사장
래리 버드(Larry Joe Bird)
생년월일1956년 12월 7일
출생지인디애나 주 웨스트베이든
출신학교인디애나 주립 대학교 (Indiana State University)
신장205cm
체중99.8kg
드래프트1978년 1라운드 전체 6번 보스턴 셀틱스
소속팀보스턴 셀틱스 (1979~1992)
포지션스몰 포워드
등번호33번
수상내역정규시즌 MVP 3회 (1984-1986)
NBA 파이널 MVP 2회 (1984, 1986)
All-NBA First Team 9회 (1980-1988)
All-NBA Second Team 1회 (1990)
NBA All-Defensive Second Team 3회 (1982-1984)
NBA Rookie of the Year (1980)
NBA All-Rookie First Team (1980)
감독경력인디애나 페이서스 (1997~2000)
프런트경력인디애나 페이서스 (2003~2012/2013~, 사장)
보스턴 셀틱스 영구결번
No. 33
1980년 NBA 올해의 신인상
필 포드래리 버드대럴 그리피스
1984년 ~ 1986년 NBA 정규시즌 MVP
모제스 말론래리 버드매직 존슨
1984년 NBA 파이널 MVP
모제스 말론래리 버드카림 압둘 자바
1986년 NBA 파이널 MVP
카림 압둘 자바래리 버드매직 존슨
1982년 NBA 올스타 MVP
네이트 아치볼트래리 버드줄리어스 어빙
1998년 NBA 올해의 감독상
팻 라일리래리 버드마이크 던리비 Sr.
2012년 NBA 올해의 경영자상
팻 라일리/가 포먼래리 버드마사이 유지리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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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임없이 스스로를 밀고 나가라 종료 부저가 울리기 전까지는 결코 포기하지마라"

- 래리버드

Larry Legend

역사상 최고의 백인 농구선수
NBA에서 올해의 신인, 올해의 선수, 올해의 감독, 올해의 단장 상을 전부 받아본 유일한 인물.

NBA 포워드이자 감독. 13년의 커리어 동안 보스턴 셀틱스를 대표했던 프랜차이즈 스타로, 매직 존슨과의 유명한 라이벌 구도로 80년대 NBA를 풍미했던 인물이다.[1] 2016년 이전까지 르브론 제임스와 역사상 최고의 스몰 포워드 를 다투기도 했다.

2차스텟이 보편화된 이후에는 래리 버드가 과대평가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다만 2차스탯만으로 따지면 버드와 비슷한 수치를 기록한 매직 존슨도 과대평가[2] 또한 버드가 과대평가되었다는 말은 전문가들 사이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 2차스탯만 보고 판단하는 팬들 사이에서 나오는 말인데, 그렇게 따지면 버드가 신인시절부터 9년 연속 퍼스트팀에 선정하고 3년연속 MVP에 선정한 전문가들과 그를 매직존슨과 대등한 기량의 소유자로 인정하고 있는 동시대 NBA내외의 농구인들 전부가 그에게 속아넘어간 바보들이란 얘기가 된다. 당장 "버드 과대평가론"에 불씨를 피운 아이재아 토마스도 훗날 ESPN Sports Century 방송에서의 인터뷰에서 "만약 나와, 조던, 매직 버드를 같은 방 안에 넣는다면 그 안에서 살아남는 이는 래리 버드일 것이다"라며 그의 승부근성을 인정했고[3], 제임스 워디 역시 "나는 버드를 막느니 마이클 조던을 막겠다"라고 그의 실력을 인정했는데, 버드가 과대평가된 영웅이라면 동시대 라이벌들이 버드가 뭐가 이쁘다고 그를 이렇게 높이 말한단 말인가? 애초에 2차스탯만 놓고 평가한다면 매직존슨의 커리어 하이조차 트레이시 멕그레이디, 데이빗 로빈슨, 크리스 폴에 못 미친다. 또한 98시즌 MVP 마이클 조던 역시 대표적인 2차 스탯인 PER이 25 정도로, 해당 시즌의 샤킬 오닐, 데이빗 로빈슨, 칼 말론보다 못 미친다. 2차스탯만을 놓고 특정 선수가 과대평가되었다고 친다면 놓고 따지면 매직존슨과 마이클 조던 역시 과대평가인 셈이다. 야구나 축구와 달리 농구의 2차 스텟이 문제가 있다는걸 간과한 발언인 셈.

오히려 ESPN의 스킵 베일리스 등 상당수 전문가들은 버드가 짧은 커리어에도 불구하고 르브론 제임스보다 "수치상으로 버드를 넘은" 현 시점에서도 제임스보다 그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주요 근거는 파이널과 플레이오프에서 버드가 그보다 강력한 모습을 보였다는 것. 다만 플레이오프에서 강력했다는 이미지는 어느 정도 착시효과도 있다. 래리 버드의 플레이오프 기록을 보면 알겠지만 르브론 이상으로 부진한 시즌도 분명 존재했다.사실 플레이오프에서 흑역사가 없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선수는 그분뿐이다.

2 NBA 커리어 이전

인디애나 주에서 5남 1녀 중 셋째로 태어나, 10살 때부터 형들을 따라 농구를 시작했다. 아버지는 한국전쟁 참전 용사로 PTSD와 알콜중독에 시달리다가 버드가 18세때 자살했으며, 어머니가 근근이 벌어 겨우 입에 풀칠하는 형편이었다. 이러한 불우한 성장 환경 때문에 버드는 꼭 농구로 성공해야겠다는 집념을 갖게 되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188cm의 가드였던 버드는 3학년 들어 키가 2미터로 부쩍 자라면서 포워드로 전향했고, 평균 31점, 20리바운드를 기록하며 인디애나 대학에 장학생으로 입학한다.

그러나 시골뜨기였던 버드는 낯선 환경에 적응하기 힘들어했고, 기존 농구부원들에게 무시당하는 등[4] 어려움을 겪다가 3주만에 자퇴해 버리고 쓰레기차 몰기, 눈 치우기, 잔디깎이 등 노가다를 전전한다.(...) 1년 동안 그렇게 살다가 다시 대학에 다녀보기로 결심한 버드는 1975년 인디애나 주립 대학에 입학, 은사가 된 빌 호지스 밑에서 농구를 다시 시작한다. NCAA 전학 규정 때문에 첫 1년 동안은 벤치만 지킨 버드는 2학년 때 평균 32.8점, 13.3리바운드를 기록하며 NCAA 디비전 1에 한번도 올라본 적이 없었던 인디애나 주립대를 강팀으로 끌어올린다. 4학년 때는 33승 1패라는 무시무시한 성적을 올리며 NCAA 준우승을 차지했는데, 그 1패는 바로 매직 존슨이 이끌던 미시건 주립 대학에게 당한 것이었다.

1978년 버드가 3학년을 마치고 4학년까지 대학을 다닐지, NBA에 진출할지 마음을 정하지 못한 상황에서 대부분의 구단이 내년에 뽑지 뭐...하는 생각으로 안뽑았는데 보스턴 셀틱스가 6번픽으로 지명했다.[5] 래리 버드는 78-79시즌 합류를 거부했고, 셀틱스는 이 6번픽을 날려버리고 다른 선수를 뽑을 수 있었지만 기다리기로 결정하고 지명권을 보호했으며 셀틱스 입장에서는 정말 다행히도 1년 후에 셀틱스에 입단했다. 1979년 드래프트 1번픽은 바로 매직 존슨이었는데 정상적인 상황이었다면 버드와 매직이 79년 1번픽을 놓고 경쟁했을것이다. 그리고 NBA에서 드래프트 6번픽 징크스의 시작이 이 선수부터였다. 그리고 매직 존슨은 버드 때문에 올해의 신인상을 날렸다

3 NBA 커리어

78-79시즌 셀틱스는 29승 53패를 기록한 팀이었는데 버드가 합류한 79-80시즌에는 61승 21패로 정규 시즌 1위를 찍는다.(...) 루키 버드는 평균 21.3점, 10.4 리바운드, 4.5어시스트, 1.7스틸을 기록하며 셀틱스의 득점/리바운드/스틸 1위 및 어시스트 2위를 차지했고 혼자 농구하나 경쟁자 매직 존슨을 밀어내고 올해의 신인상을 수상했으며, 올스타에 선발되었다.[6][7] 그러나 셀틱스는 동부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줄리어스 어빙이 이끄는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에게 패배하고, 이 해의 NBA 파이널 우승은 매직 존슨의 LA 레이커스가 차지한다.

그래도 될 팀은 된다고, 버드의 루키시즌이 끝난 1980년 오프시즌에서 셀틱스는 센터 로버트 패리쉬를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에서 트레이드로 받아오고 1980년 1라운드 3번 픽으로 미네소타 대학의 파워포워드 케빈 맥헤일을 뽑는 대박을 친다.[8] 이로써 셀틱스는 패리쉬 - 맥헤일 - 버드라는 NBA 역사에 남을 최강의 프론트코트를 구축하게 된다. 그리하여 플레이오프에서 필라델피아를 3-1로 꺾으며 전년도의 복수를 하고, 파이널에서 휴스턴 로케츠에게 4-2로 승리해 NBA 파이널 우승을 맛본다. 버드는 파이널에서 평균 15.3점, 15.3리바운드, 7.0어시스트의 뭔가 묘한 성적을 올렸다.[9]

루키 시즌부터 시작된 LA 레이커스 vs. 보스턴 셀틱스 / 매직 존슨 vs. 래리 버드의 라이벌 구도는 NBA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라이벌리로[10], 인기 없는 리그였던 NBA를 부흥시킨 원동력이었다. 1980년부터 1988년까지 NBA 파이널 우승팀을 살펴보면 이를 잘 알 수 있다.

1980년LA 레이커스 우승
1981년보스턴 셀틱스 우승
1982년LA 레이커스 우승
1983년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우승
1984년보스턴 셀틱스 우승
1985년LA 레이커스 우승
1986년보스턴 셀틱스 우승
1987년LA 레이커스 우승
1988년LA 레이커스 우승

1983년 'Dr.J' 줄리어스 어빙과 센터 모제스 말론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외에는 모두 레이커스와 셀틱스가 차지했다.[11][12]

버드는 1984년 평균 24.4득점, 10.1리바운드, 6.6어시스트, 1.8스틸을 기록하며 셀틱스를 정규 시즌 1위로 이끌었고, MVP로 선정된다. 동시에 파이널에서는 LA 레이커스를 4-3으로 꺾고 두번째 우승을 차지하고, 플레이오프 동안 평균 27.5득점, 11리바운드, 5.9어시스트, 2.3스틸, 1.2블럭, FG 52.4% 3P 41.2% FT 87.9%의 전방위 활약으로 파이널 MVP까지 석권한다.

1985년에는 평균 28.7득점 10.5리바운드, 6.6어시스트, 1.6스틸, 1.2블럭, FG 52.2% 3P 42.7% FT 88.2%로 한층 사기성이 짙은 스탯을 찍어주며 2연속 MVP를 차지하지만, 파이널에서 레이커스에게 2-4로 패배한다.[13]

1986년 67승 15패의 엄청난 성적을 내며 정규 시즌 1위를 차지한 셀틱스. 그리고 셀틱스의 리더 버드는 평균 25.8득점, 9.8리바운드, 6.8어시스트, 2.0스틸, 0.6블록으로 블록을 제외한 전 부문에서 팀내 1위를 기록하며혼자 농구하나(2)[14] 3연속 정규시즌 MVP를 수상한다.[15] 여세를 몰아 NBA 파이널에서 휴스턴 로케츠를 4-2로 꺾고 버드 역시 2번째 파이널 MVP를 받게 된다. [16]

1987년 셀틱스는 다시 파이널에 오르지만, 이번에는 숙적 레이커스에게 2-4로 패배한다. 사실 이때 셀틱스는 불운이 굉장히 잦은 팀이었다. 전 시즌에 오랜만에 건강하게 시즌을 소화한 인저리 프론 빌 월튼은 또 골골거리며 10게임만 출장했고, 시즌 전에는 오랜만에 얻은 상위픽(2픽) 렌 바이어스가 마약관련 사고로 사망했다. 결정적인 것은 케빈 맥헤일의 부상이었는데, 이때 그는 77경기를 소화했지만 3월에 오른 발에 심각한 부상을 안고 억지로 뛴 것이었다.[17] 어쨌거나 버드는 동부 컨퍼런스 결승에서 떠오르는 강팀이었던 피스톤즈를 7차전 만에 물리치지만, 부상으로 인한 한계는 어쩔 수 없었고 결국 우승 문턱에서 좌절하고 만다. 여담이지만 홈에서 열린 동부 컨퍼런스 5차전 당시 종료 직전에 팀이 1점차로 지고 있었는데, 이때 버드는 돌파하다가 피스톤즈의 집중 수비에 당해 공을 뺏긴다. 그런데 종료까지 5초를 남겨두고 있던 이 시점, 버드는 아이재아 토마스의 인바운드 패스를 기습적으로 스틸해 골밑으로 돌파하던 데니스 존슨에게 절묘한 패스를 찔러넣어 팀의 역전을 이끈다. 이 플레이는 버드 커리어 사상 최고의 플레이 중 하나로 꼽힌다.

1988년 셀틱스는 5년만에 파이널 진출에 실패한다. 그들을 가로막은 것은 배드보이즈로 불리는 디트로이트 피스톤즈. 그러나 이 해 버드는 평균 29.9득점 9.3리바운드 6.1어시스트 1.6스틸, FG 52.7%, 3P 41.4%, FT 91.6%라는 남들이 몇 경기만 이렇게 해도 극찬받을 스탯을 시즌 평균으로 찍는 위엄을 보여주었다. 2016년 스테판 커리가 180클럽을 달성하기 전까지 30점에 가까운 평균 득점으로 180클럽[18]을 달성했던 건 버드뿐이었다. 이때 플레이오프에서 보스턴은 애틀란타 호크스와 만났는데, 7차전까지 간 이 혈투에서 버드와 득점기계 도미닉 윌킨스는 지금도 회자되는 쇼다운을 펼친다. 이때 윌킨스는 무려 47점을 맹폭하며 34점을 넣은 버드를 능가하는 대활약을 펼쳤지만, 결정적인 4쿼터에 버드가 20점을 몰아넣으며(윌킨스는 16점) 경기를 접수해버린다. 동부 결승에서 셀틱스는 피스톤스와 재대결을 펼치지만, 부상과 나이로 점점 하락세에 있던 셀틱스는 최전성기를 달리던 아이재아 토마스, 터프하고 실력도 있던 빌 레임비어-릭 마혼의 골밑, 득점기계 에이드리언 댄틀리와 스타로 떠오르던 슈팅가드 조 듀마스, 야생마처럼 날뛰며 스타들을 몸을 던져 수비하던 데니스 로드먼 등이 이끄는 피스톤즈를 당해내지 못하고 6차전 만에 석패한다. 이후 셀틱스는 2002년까지 14년간 동부 결승에 오르지 못하게 된다.

1989년부터 버드의 커리어는 끝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한다. 1989년에는 뼛조각 제거 수술로 6경기밖에 출장하지 못했고, 코트에 복귀한 후에도 고질적이었던 등 부상이 점점 악화되기 시작하며 결장 경기가 점점 늘어갔다.[19] 선수생활 중반부터는 계속 등에 부상을 달고 살았으며, 이때부터는 전성기의 운동 능력도 많이 잃고 만다. 결국 후에 그를 은퇴하게 만든 것도 이 부상이고, 심지어 지금까지도 그를 괴롭히고 있는 오래 서있기도 힘들 정도의 부상이다.[20]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의 드림팀에 참가한 버드는[21] 올림픽이 끝난 후 은퇴를 발표한다.

그의 통산 성적은 24.3득점, 10.0리바운드, 6.3어시스트, 1.7스틸, 0.8블럭, FG 49.6%, 3P% 37.6%, FT% 88.6

링크

위 링크의 글을 참조하면 좋다.

4 은퇴 후 커리어

1992년부터 1997년까지 셀틱스의 프론트 오피스로 일하며 이런저런 조언을 했다. 1997년 그는 고향팀인 인디애나 페이서스의 감독직을 수락했고, 초짜 감독임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유능함을 보여주었다. 레지 밀러의 전성기 후반을 함께 하며 인디애나를 동부 컨퍼런스의 솔리드한 강팀으로 만들고 98년 플레이오프에서 마이클 조던시카고 불스를 7차전까지 몰아붙이기도 했다. 3년이 채 안되는 짧은 감독 생활 동안 올해의 코치상을 수상했는데, 버드는 NBA 역사상 MVP와 올해의 코치상을 모두 받은 유일한 인물이다. 그러나 등부상과 개인 사정으로 감독을 그만두고, 2003년 페이서스의 사장에 취임하여 2012년까지 일하며 올해의 경영진상까지 수상한다.뭔가 했다 하면 상을 타는 위엄 2012년 6월, 건강상의 문제로 사임한 후에는 NBA 관련 일에서 손을 뗐으나, 2013년부터 복귀했다.

래리 버드의 감독 시절 일화로, 레지 밀러가 97-98시즌 동부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시카고 불스를 상대로 끝내기 3점슛을 성공 시킨 후 버드의 표정이 카메라에 잡혔는데... 조용히 남은 시간을 확인한 것 외에는 미동도 없었다. 소름끼치도록 냉정할 정도. 아니면 선수시절 수억번은 게임위닝 슛을 성공시킨 자신감의 표출이었는지도 모르겠지만.. 이때 버드의 불안은 괜한 것이 아니었는데, 실제로 0.4초를 남기고 불스의 마이클 조던이 던진 3점슛은 거의 림안으로 들어가다가 나왔다.

5 플레이 스타일

"버드는 그다지 스피드도 없었고 덩크슛 같은 화려한 플레이를 하는 선수도 아니었다. 하지만 버드는 백인들이 "블랙 게임"이라고 부르는 플레이를 할 줄 아는 극소수의 선수였다. 그를 막는 것은 컴퓨터 게임과 비슷했다. 그의 마음을 읽고 다음에 무엇을 하려는지 예측해야만 했다. 그 점이 가장 어려웠다. 왜냐하면 그는 늘 누구보다 앞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 데니스 로드맨

"래리 버드를 막는것보다는 마이클 조던을 막는게 훨씬 낫다. 버드를 막으려면 그의 수준에서 생각을 해야하기 때문이다. 그는 마치 체스 게임처럼 농구를 한다."

- 제임스 워디

아저씨틱한 얼굴처럼 발이 느렸고 점프력도 그저 그랬다. 그런데도 완벽한 선수.

우선 강골이고 힘이 좋았으며 발이 느려서 그렇지 순간적인 퀵니스만 놓고 보면 수준급이었다.[22] 슈팅, 포스트업, 페이스업 모두 능했는데 특히 슈팅에 있어서는 말할 필요없는 역대 최고의 샤프슈터 중 하나. 그런데 그의 최대 강점은 이런 스킬이 아니라 게임을 읽는 능력이었다. 부럽.. 일명 역대 최고의 BQ를 가진 남자. 가상의 최고 농구 선수로 "흑인의 신체를 가진 버드"라는 말이 나온 게 바로 이점 때문이다. 다른 선수들이 다음 플레이를 예측할 때 버드는 2수, 3수 앞을 내다보고 있었으며 이러한 예측력으로 상대를 농락하고 게임을 자신이 원하는대로 끌고 갈 수 있었다. 느린 선수들이 보통 수비가 안좋은 편이지만 버드는 예외적으로 수비수로서도 일류였다.[23] 상대의 동선을 미리 읽고 패스경로를 차단하는 식으로 신체적 단점을 커버했기 때문.

NBA 3점슛 컨테스트에서 1986년부터 88년까지 모두 우승, 3연패를 이루어냈다. 86년 대회 때는 옆에 있던 참가자들에게 "이번 2등은 누가 할래 ㅎㅎㅎ"라며 콩라인 드립을 쳤다;;[24] 더 대단한 사실은 버드는 3점슛을 프로에 와서 익혔다는 점. 80년대 초중반까지 NBA와 NCAA 규칙에 3점슛은 없었고, 도입 직후에도 작달막한 슈터들의 활용가능성을 높여주는 정도로만 여겨졌었는데 버드는 이걸 프로에 와서 마스터해버렸다.(...)[25]
삼점슛 콘테스트에서도 특유의 클러치 능력을 선보였는데, 88년 대회 결승에서 버드는 명성에 맞지 않게 첫 15개(2점짜리 공까지 다 성공시켰을시 18점)를 던지는 동안 겨우 7점만 넣은 상태였다. 그러나 막판에 불이 붙어 획득가능한 12점 중 10점을 얻었으며, 마지막 공을 남겨둔 상태에서 동점이었는데 극적으로 이 슛을 적중시키고 우승했다. 이 때 마지막 슛을 던지자마자 들어가는지 확인도 안하고 당연히 들어간다는 듯이 당당히 한 손가락을 치켜들고 자리를 떴는데, 이 슛이 림으로 그대로 빨려들어간다. 버드의 실력과 자신감을 엿볼 수 있으며, 커리어 하일라이트에서 빠지지 않는 명장면.

뛰어난 리바운더에 라이벌 매직 존슨 못지 않은 감각적 패싱 능력의 소유자였다. 손목만 가지고 탁탁 치는 거 같은데 어느 순간 수비진의 틈을 파고들어가는 패스는 경이적이다. 더블더블은 기본에 트리플 더블도 자주 했고, 통산 트리플 더블 횟수는 정규 시즌 59회(역대 5위), 플레이오프 10회(역대 3위)이다.

NBA에서 단순히 슈퍼스타를 넘어 정점을 찍는 선수에게 요구되는 자질인 격렬한 투쟁심이 엄청난 선수였고, 트래쉬 토커로도 유명했다. 파이널 3경기에서 레이커스에게 지고 "우리 팀메이트들은 계집애들(Sissies)처럼 뛴다"라고 대놓고 비난, 자극받은 팀메이트들이 거친 수비를 바탕으로 결국 우승한 것이 좋은 예. 마이클 조던은 버드를 최고의 트래쉬 토커로 뽑았는데 그 이유는 더티한 말이나 욕을 쓰지도 않았고 오로지 언변과 그에 맞는 플레이로 상대에게 위압감을 주었기 때문이라고.

그의 트래쉬 토킹 사례:

  • 필라델피아와의 경기에서 버드는 줄리어스 어빙에게 "42-6"이라는 말만 끊임없이 반복했고 마침내 빡돈 어빙이 버드에게 덤벼들어 난투가 벌어졌다. 42-6은 이전 경기에서 버드와 어빙이 각각 기록한 점수였다. 비밀번호 426
  • 호레이스 그랜트의 회상: "버드에게 '못넣을 걸, 이건 못넣을 걸.'하는 식으로 트래쉬 토킹을 좀 했던 적이 있었죠. 버드가 이러더군요. '이번에 내가 왼쪽으로 페이크 넣고 오른손으로 훅슛을 쏠 거야.' 그러더니 그대로 슛을 넣더군요."
  • 데니스 로드맨의 회상: "나는 버드에게 오는 패스를 차단하려고 죽을 힘을 다하곤 했죠. 그러면 버드는 자기 팀원들한테 소리치는 거에요. '나 오픈이야! 누가 나한테 수비 안붙은 거 눈치채기 전에 패스해!' 그리고나서 패스를 받고, 내 턱에 팔꿈치로 한방 먹이고, 면전에 대고 점퍼를 넣는 거에요. 그러면 또 우리팀 코치한테 이러죠, '감독님 수비 좀 되는 애로 바꾸셔야겠는데요. 계속 와이드 오픈이니 쉬워서 원.'"
  • 클라이드 드렉슬러의 회상: "내가 루키시즌에 버드를 막게됐는데 그가 나에게 '넌 날 막을수 없어'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자신감 쩌시네요'라고 하니까 '자신감? 넌 루키잖아. 넌 개뿔도 몰라'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곤 10점을 연속으로 넣고, 전 교체됐습니다. 벤치에 앉아있는데 지나가던 버드가 절 보고 웃더군요."
  • 1986년 댈러스 원정경기에서: 작전 타임 중에 버드는 댈러스 매버릭스 벤치 앞에 서서 이렇게 말했다. "그냥 계속 여기 서있다가 패스 받고 클린슛으로 넣어주지." 그 말대로 한 후, 버드는 댈러스 벤치에 윙크를 하고 뛰어갔다.
  • 레지 밀러의 자서전에서: 밀러는 자유투를 쏘는 버드의 집중력을 흐트러지게 하려고 옆에서 떠들고 있었다. 버드는 밀러를 보고 첫 자유투를 넣은 후 "난 리그 No.1 슈터라고. 뭐하는 짓이냐?" 그리고 두번째 자유투를 넣었다.ㅋㅋ (그리고 나중에 이 양반이 레지 밀러 의 감독이 된다.)
  • 2011 시즌 기자가 버드와 덕 노비츠키를 비교하자 '영광이다. 은퇴한지 20년이 넘은 나와 비교를 하다니.'라고 대답했다. 한마디로 '내가 현역이였으면 깝 ㄴㄴ'라는 얘기...[26]
  • 코비 브라이언트의 2012 대표팀이 92년 드림팀을 이길 수 있다는 말에 버드가 한 말은 "그래, 걔네가 이길 거야, 우린 은퇴한 지 20년이 지났고 늙었으니까." 한 마디로 깝치지 말란 말이다.(...) 비단 버드 뿐만 아니라 찰스 바클리가 이 발언에 첫번째 반박을 날렸고 마이클 조던, 스카티 피펜 등 당시 드림팀 멤버들이 차례로 코비의 주장에 반격하는 등, 코비의 이 발언은 아무리 봐도 무리수였다는 평이 대부분.
  • 래리 버드르브론 제임스 중 누가 역대 최고의 SF인가에 대해 수많은 농구팬들의 논쟁이 있었으나 2016 NBA 파이널이후 르브론의 승리로 사실상 끝이 났다. 2012년 마이애미 히트 우승 시기부터 르브론이 래리버드의 우승횟수와 누적 스탯을 따라잡기 시작하더니 먼저 득점, 윈셰어 등의 누적 기록을 따라잡았고, 2016 NBA 파이널을 통해 르브론 제임스가 역대 우승 횟수과 파이널 MVP 횟수까지 따라잡아 리바운드를 제외한 1, 2차스텟을 추월했다. 물론 래리 버드도 여러 면에서 탁월한 선수지만 대부분의 스텟에서 르브론이 앞서는 만큼 르브론의 우위를 부정하긴 어렵다. 다만 짧은 커리어에도 불구하고 보여준 퍼포먼스가 워낙 대단하기 때문이 커리어 상으로 격차가 꽤 나고 있는 지금도 스킵 베일리스처럼 버드를 선호하는 전문가들도 있다.

2015-16 시즌 마감 시점 기준,

  • 래리 버드 : NBA 파이널 우승 3회, 시즌 MVP 3회, 파이널 MVP 2회, 윈쉐어 역대 23위, PER 역대 17위.[27]
  • 르브론 제임스 : NBA 파이널 우승 3회, 시즌 MVP 4회, 파이널 MVP 3회, 윈쉐어 역대 8위, PER 역대 2위.[28]

6 기타

  • 위에 서술했듯 매직 존슨과의 라이벌 관계가 아주 유명하다. 실제로 매직 존슨과 래리 버드가 NBA에 입단하기 전, 결승전이 녹화중계될 정도로 인기가 바닥을 기던 NBA는 이들 둘간의 라이벌 관계를 기점으로 다시 뜨거운 인기를 누리게 된다. 서로간에 라이벌 의식도 굉장했다. 매직은 "1년 스케줄 표를 받으면 먼저 셀틱스전 2경기만 크게 표시했다. 나에게는 1년이 2경기의 셀틱스전과 나머지 80경기였다."고 말했고, 버드는 한술 더떠 "나는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매직의 기록부터 확인했다."라고까지 하기도. 하지만 버드의 은퇴식에서 매직은 레이커스 츄리닝 안에 셀틱스 유니폼을 받쳐입고 등장해 그의 새출발을 진심으로 축하해주었고, 둘은 뜨거운 포옹을 나누었다. 승부욕은 둘 다 뛰어났지만 인간으로서는 서로 좋아한 그런 관계.[29]
  • 90년대 시카고 불스가 잘 나가고 있을 때 한국 NBA팬들은 피펜을 최고의 SF로 생각했으며 버드는 듣보잡(...)으로 여겨졌다. 심지어 데니스 로드맨은 "버드는 백인이라서 스타 대접 받는 거다"는 투로 말해서 80년대 NBA를 모르는 팬들은 그렇게 여기기도 했었다.[30] 그러나 로드맨은 훗날 본인의 자서전에서 버드가 위대한 선수였다고 칭찬하며 자신의 버드 폄하 발언은 그를 이기기 위해 일부러 했었던 것이라고 털어놓았다.[31] 사실 로드맨이 그런 발언을 한 것도 운동 실력으로 거의 모든 에이스들을 꽉꽉 틀어막았던 로드맨이 그정도로 농락당한 적은 사실상 없었기 때문이다.[32][33]
  • 86년 시카고 불스와의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마이클 조던에게 63점을 허용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경기에서는 승리하는 등, 버드가 이끌던 셀틱스는 초창기 조던의 시카고 불스를 가로막던 큰 장벽이었다.[34][35] 이외에도 버드의 셀틱스는 당시까지만 해도 원맨팀이었던 불스를 플레이오프에서 여러번 탈락시킨 전적이 있다.(그리고 이 장벽의 역할은 아이재아 토마스가 이끄는 디트로이트 피스톤스가 이어받게 된다.)
  • 조던을 수차례 좌절시킨 아이재아 토마스 역시 버드 때문에 고배를 마신 적이 있다. 1987년 동부 컨퍼런스 파이널 5차전에서, 경기종료까지 5초를 남기고 107 - 106으로 디트로이트가 앞서있던 상황에서 토마스가 던진 패스를 버드가 그대로 스틸, 공을 받은 데니스 존슨이 레이업으로 역전에 성공하면서 토마스와 디트로이트는 쓰라린 패배를 맛보아야 했다.[36]실제로 그리고 하킴 올라주원도 버드에게 당한 적이 있다. 랄프 샘슨과 트윈타워를 이루던 시절, 플레이오프에서 버드는 올라주원의 블럭을 피해 3점 버저비터를 성공시킨 적이 있다. 결국 휴스턴은 패배. 이 때 일이 한이 되었는지 올라주원은 몇 년 후 뉴욕과의 결승 6차전 종료 직전 비슷한 상황에서 존 스탁스의 3점을 블럭해 버린다. 종로에서 뺨맞고, 한강에서 화푼 격..
  • 노력과 정신력의 화신으로 <마시멜로 이야기> 같은 "미국산" 자기 개발서들을 보면 버드의 이야기가 많이 등장한다.
  • 찰스 바클리와 더불어 다시 나오기 어려운 유형의 선수라 하겠다. 특히 버드의 천재적인 농구 센스는 따라잡을 수가 없을 정도.
  • 앞서 나온대로 성격도 장난아니게 괄괄한 탓에 줄리어스 어빙과 코트에서 난투극을 벌이기도 했는데, 어빙과의 난투극 당시에는 줄리어스 어빙의 팀 동료가 뒤에서 래리 버드가 못 움직이게 껴안는 바람에 날린 주먹보다 맞은 주먹이 더 많다. 당시 어빙의 팀 동료는 다름 아닌 루키였던 찰스 바클리. 그가 말하길 보통 싸움이 나면 누군지 볼 거 없이 주변 선수를 말리기 위해 일단 붙잡고 보는데 그게 하필 버드였고, 그 틈 사이 래리 버드가 흠씬 맞았다고 한다.(...) 나름대로 좋은 의도였는데 출장정지에 벌금까지 물어서 억울했다고.
  • 이 선수 때문에 NBA 연봉 체계가 엄청 복잡해졌다. 지금 NBA 연봉에 대해 쓸러면 A4용지 50페이지는 넘게 써야 된다.(...) 자세한 건 샐러리 캡 항목 참조.
  • 웨슬리 스나이프스, 우디 해럴슨 주연의 농구 코미디 영화 덩크 슛(원제: White Men Can't Jump)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단 본 영화에 나오는 백인 & 흑인 콤비는 그냥 길거리 농구다.
  • 마이클 조던과 같이 "nothing but net" 맥도널드 광고를 찍기도 했다.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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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궐련을 좋아했던 애연가 이기도 하다.
  • 과대평가 논란이 있다지만 그와 동시에 뛰어본 선수들은 절대 그가 과대평가가 된 선수가 아니라고들 평을 한다. 위에 언급된 데니스 로드맨도 그 점을 인정했고, 그 승부욕 강한 아이재아 토마스 역시 자기 자신을 항상 매직 존슨마이클 조던 그리고 래리 버드 아래 두기도 한다. 그와 동시에에 플레이한 선수들은 다들 그를 역대 최고의 선수중 하나로 뽑고는 한다. 2차 스탯이나 비교적 짧았던 커리어 등에서 나오는 스택 누적 등으로 인해 과대평가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그가 게임에서 보여준 임팩트와 실력은 단순히 "백인이라 과장 되었다" 이상의 수준이다. 대체 논란은 누가 만드는거야 [37]
  • 2017 수능특강 영어영역에 그와 관련된 지문이 나오기도 했다.
  1. 마이클 조던과는 세대가 좀 다르다. 조던이 전성기에 접어들었을 시점에 버드는 이미 커리어의 막바지였다.
  2. 재미있게도 라이벌 매직 존슨이 과대평가라는 주장은 찾아볼 수 없다. 10위 안에 드는게 맞냐는 갑론을박이 나오는 버드와 달리 존슨은 어떤 평가든 역대 5위 내에 들어가는 선수다.
  3. 자존심 높기로 소문난 토마스이지만, 그 자신은 항상 본인을 매직, 조던 그리고 버드 밑에다 두었다. 한 방송에서는 피펜을 깠었는데, 그 순간조차도 버드를 치켜세웠다.
  4. 이 때 그를 특히 괴롭혔던 켄트 벤슨은 NBA에서 버드를 다시 만나 처절하게 복수당했다고 한다.
  5. 참고로 NBA드래프트에 참가 신청을 안 했더라고 해도 일정 자격을 갖는 선수들은 자동으로 드래프트 대상이되어 선수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지명될 수 있다. 그 자격요건은 (미국인 선수의 경우) 1. 4년간 대학에서 뛰었을 것. 2.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했지만 미국 대학에 입학하지 않았을 경우, 고교 졸업 이후 4년이 지났을 것. 3. NBA 외의 프로리그 팀과 계약을 해서 뛴 경험이 있을 것. (외국인 선수의 경우) 1. 드래프트가 열리는 해 기준으로 만 22세 이상일 것 (즉, 드래프트가 2015년 6월 25일에 열린다면, 2015년 마지막 날인 12월 31일에 만 22세가 되는 1993년 12월 31일생까지 자동 참가대상이 되는 것이다) 2. NBA 외의 미국 리그의 프로팀과 계약해서 뛴 경험이 있을 것. 당연하지만 뽑혔다고 해서 강제로 NBA끌려와 뛰어야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 선수가 훗날 NBA에서 뛰기로 마음을 먹었을 경우에는, 그를 지명한 팀이 그를 트레이드하지 않을 경우 무조건 이 팀과 계약을 해야한다. 추가로 NBA팀 입장에서는 "데뷔 안한 선수에 대한 권한" 역시 자산으로 취급되어 트레이드할 수 있다.
  6. 이때부터 버드는 부상으로 6경기 밖에 못나온 1989년을 제외한 커리어 12년 내내 올스타에 선발된다.
  7. 사실 이때 매직과 버드의 위상은 좀 차이가 있었다. 버드는 리그 베스트5에 해당하는 올NBA 1st 팀에 오르고 MVP투표 4위에 올랐지만, 매직은 올스타에만 선발되었을 뿐 올NBA 2nd 팀에도 못 올랐다. 여담이지만 매직과 버드는 80년대를 양분한 라이벌이지만 굳이 기량이나 리그 내 위상으로 비교하자면 버드가 3연속 MVP를 차지한 86시즌까지는 버드의 우세, 이후부터는 매직의 우세라고 볼 수 있다.
  8. 참고로 이 과정이 결과적으로 보면 어이가 없는데 당시 셀틱스는 자기가 가진 1픽을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로 트레이드하면서 "당신들이 가진 평범한 센터인 패리쉬와 3번 픽을 달라"고 한다. 당시 패리쉬는 부상경력 때문에 오래 못 뛸 것이라는 예상이 있었고 워리어스에서 뛰는 동안 별다른 임팩트도 없었다. 물론 결과는 패리쉬와 맥헤일 모두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반면 (심지어 패리쉬는 20년 넘게 뛰었다!) 워리어즈가 1픽으로 뽑은 조 베리 캐롤은 꼴랑 1회 올스타에 그친다.
  9. 이때 파이널 MVP는 동료 세드릭 맥스웰이었다. 그가 당시 팀내 최다인 17.7점을 올리긴 했지만 나머지 스탯(9.5리바운드, 2.8어시스트)에서 버드보다 크게 밀렸다는 것, 그가 그렇다고 기록되지 않은 공헌도가 큰 것도 아니란 것, 그리고 그가 올스타 경력도 없는 평범한 선수란 것이란 걸 생각하면 그가 버드를 제치고 파이널 MVP에 선정된 것은 좀 의아하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의아한 정도가 아니라 2015년에 우승팀 골든 스테이트의 에이스 스테픈 커리가 파이널 MVP투표에서 단 한 표도 얻지 못한 것 이상으로 당시에는 논란이 되었다. 실력으로 보나, 공헌도로 보나, 스탯으로 보나 도저히 버드가 놓칠게 아니었기에...맥스웰이 앞선건 슛성공률과 득점 뿐이었는데, 이조차도 버드가 훨씬 더 심한 수비를 받는다는 걸 생각하면 그리 엄청난 차이는 아니었다. 당시 셀틱스의 빌 피치 감독은 버드가 정규시즌 MVP를 줄리어스 어빙에게 뺏기고(투표에서 2위), 파이널 MVP를 맥스웰에 뺏긴 것에 대해 불평을 하며 "둘 다 버드가 탔어야 했다"라고 한 적이 있다. 다른 팀 선수인 어빙까지는 그렇다고 쳐도, 자기 팀 선수인 맥스웰을 사실상 디스하면서 버드가 받았다고 한 걸로 봐서 그가 진심이었다는 걸 알 수 있다.http://www.celticsblog.com/2015/11/27/9806146/how-larry-bird-was-gypped-out-of-the-1981-nba-playoff-and-1981-82
  10. 각본을 짠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이 둘의 라이벌 관계는 대비를 이루면서도 절묘하게 맞물린다. 흑인이고 도시 출신에 항상 웃고 다니고 업템포 농구를 추구하는 서부의 매직과 반대로 버드는 백인이고 시골 출신에 표정변화도 많이 없고 팀도 느린 페이스의 하프코트 농구를 동부에서 했다. 이런 대비와 반대로 둘은 NBA에 데뷔할 때부터 팀이 우승을 노릴 정도로 강해서(물론 압둘자바를 이미 보유하고 있던 레이커스와 달리 셀틱스는 꼴찌팀이다가 오직 버드 때문에 강해진 케이스) 각각 동서부 패권을 잡고 파이널에서도 여러번 마주쳤다. 심지어 둘은 같은 해 데뷔한데다가 대학 마지막 해에 결승에서 서로와 부딫혔다! 심지어 이 둘의 소속팀은 60년대에 이미 치열한 라이벌 관계(라기보단 매번 레이커스가 발리긴 했지만...)를 형성하기도 했다! 게다가 두 선수 모두 팀플레이어로 유명했으며 누가 실력적으로 앞선다고 하기 힘들 정도로 대등했다. 이쯤되면 둘은 거의 신이 점지해준 라이벌로 보일 정도...
  11. 서부 컨퍼런스라 1년에 정규시즌에는 단 2번, 그리고 파이널에서나 만나는 LA 레이커스와는 달리 같은 동부 컨퍼런스인 보스턴과 필라델피아는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항상 만나서 불꽃튀는 배틀을 벌이는 라이벌이었고. 1982년 보스턴이 필라델피아한테 시리즈를 내주었을떄 보스턴 관중들이 "우리한테 이긴거 축하한다 젠장, 대신 파이널에서 반드시 레이커스를 꺾어다오" 라는 의미를 담아 외치던 구호가 유명한 "BEAT LA!" 이 Beat LA가 이들의 라이벌리를 대표하는 챈트이며 식서스는 분전했으나, 골밑에서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시리즈 스코어 4-2로 패배한다.
  12. 더불어 2000년대 NBA의 경우 강팀들이 서부에 몰려있는 이른바 "서고동저" 현상으로 유명한데 80년대의 경우 정반대였다. 동부의 경우 셀틱스가 버티고 있는 최강의 자리를 위협한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외에도 밀워키 벅스도 1983년 보스턴을 스윕(!) 해버릴 정도로 만만치 않은 전력을 자랑했고(참고로 이 팀은 80년대 쇼타임 레이커스를 상대로 14승 14패로 상대전적에서 밀리지 않은 유일한 팀이다,) 식서스가 쇠퇴하기 시작한 80년대 중반 이후엔 디트로이트 피스톤즈가 강자로 떠올랐다. 반면 서부를 제패한 레이커스의 경우 81년, 86년 파이널에 진출한 로켓츠를 제외하고는 별다른 위협이 없었다. 로켓츠의 경우에도 79-80시즌까지 동부 컨퍼런스 소속, 파이널에 진출한 81시즌에도 정규시즌 성적이 5할이 안되었으며 82시즌이 끝나고 에이스 모제스 말론이 필라델피아로 이적하면서 안 그래도 강팀이던 (1980년 준우승팀인) 식서스를 더 강하게 만들었다. 이후 약팀으로 전락한 로켓츠는 84년 하킴 올라주원 영입 이후 성적이 급등, 86년 파이널에 재진출하지만 그 다음시즌, 트윈 타워의 일원이던 랄프 샘슨이 부상에 이어 트레이드되면서 90년대 초반까지 1라운드 탈락 혹은 플옵 탈락을 거듭하는 등 그저그런 팀으로 전락한다. 결국 로켓츠가 우승을 노려볼만했던 강팀이었던 시즌은 후하게 봐줘봐야 세 시즌정도였던 셈. 또한 클라이드 드렉슬러가 이끄는 포틀랜드는 80년대 후반에 와서야 우승후보로 꼽힐만한 전력이 되었다. 반면 동부는 식서스가 1980년대 중반까지는 우승을 노릴만한 전력이었고 80년대 중후반부터는 피스톤즈가 떠올랐으니 종합적으로 보면 80년대엔 동부가 서부보다 훨씬 빡셌다고 할 수 있다.
  13. 레이커스가 셀틱스를 파이널에서 꺾은 건 이때가 사상 처음이었다.
  14. 루키시즌과는 달리 이때 셀틱스에는 명예의 전당급 파워 포워드-센터라인인 케빈 맥헤일로버트 패리시, 역시 명예의 전당에 오른 데니스 존슨이 있었다는 점에서 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참고로 이때 셀틱스는 72승을 차지한 96시즌 불스, 87시즌 레이커스, 33연승을 차지한 72레이커스 등과 함께 역대 최고의 팀 중 하나로 꼽힌다.
  15. 여담이지만 버드는 81~83년까지 3년 연속으로 MVP 2위에 올랐다.콩라인? 의미없는 가정이지만 정말 어쩌면 6연속 MVP가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또 MVP행진이 끊긴 87, 88시즌에도 괴물스탯을 찍은 걸 보면 부상당하기 전의 버드가 얼마나 무서웠는지 알수 있다. 스탯만 보면 88시즌이 사실상 커리어하이인데, 이때는 무서운 신예 마이클 조던이 괴물같은 기세로 치고 올라오던 때라 MVP를 뺏긴다. 참고로 NBA 역사상 3년 연속으로 MVP를 수상한 선수는 빌 러셀, 윌트 체임벌린, 래리 버드 뿐이다.
  16. 버드 본인도 이 팀에 대해 자부심과 애착이 있는지 드림팀 소속으로 패트릭 유잉과 공동인터뷰할 때 "이 팀(드림팀)이 우리 86셀틱스를 이길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아요. 왜냐면 패트릭 유잉은 진짜 센터가 아니거든요"라고 장난삼아 말한 적이 있다. 물론 버드가 유잉을 극딜한 건 아니고 당시 버드와 유잉은 드림팀에서 굉장히 친해졌는데, 친해진 후배를 장난스럽게 디스한 것이다.
  17. 맥헤일은 당시 생애 최초로 NBA퍼스트팀에 오르는 등 최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는데, 우승할 적기라는 생각에 "선수생활이 위험할 수도 있다"는 의사들의 충고를 무시하고 억지로 뛴 것. 결국 맥헤일은 이후 이때 기량을 다시는 회복하지 못한다.
  18. FG 50+%, 3P 40+%, FT 90+%를 기록하는 선수를 일컫는 표현. S급 슈터의 지표라고도 하지만, 실제로 이 기록을 1시즌이라도 달성한 선수는 래리 버드, 마크 프라이스, 레지 밀러, 스티브 내쉬, 더크 노비츠키, 케빈 듀란트, 스테판 커리 밖에 없긴 하다.
  19. 이후 망가진 몸으로도 올 NBA 2nd 팀에 오르면서 클래스를 입증하기도 했지만, 이전의 기량을 다시는 회복하지 못했다.
  20. 버드가 감독으로써 97~98시즌 최우수감독상을 수상하고 인디애나 페이서스를 3시즌만에 파이널에 올릴만큼 뛰어난 성적(3시즌 통산 147승 67패)을 냈음에도 감독직을 그만 둔 가장 큰 이유가 코트에서 서서 작전지시를 내리기도 어려울 정도로 심각한 등부상 때문이었다.
  21. 버드는 이때 이미 정상적인 컨디션이 아니었기 때문에, 상징적인 의미로 참가했고 실제 경기는 별로 뛰지 않았다. 실제 드림팀 비디오를 보면 틈만 나면 누워있는(...) 그를 목격할 수 있다.
  22. 생각보다 빠르다는 거지 특급은 아니다. 버드에 대해 설명하는 전문가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He wasn't fast, he wasn't quick and couldn't jump."였다. 다만 버드의 경우 슛이 워낙 좋고 시야가 넓어서 상대가 기습적인 슈팅과 패스를 견제하다가 돌파를 허용하는 경우가 잦았다.
  23. All-Defensive 2nd 팀에 3회 선정되었다.
  24. 그리고 당연히 1등. 심지어 이 때 겉에 입은 점퍼도 벗지 않은 채로 던졌다.(...)
  25. 삼점슛 도입 이전의 농구 철칙은 "무조건 가까운데서 쏘라"는 것이었고, 실제로 버드나 당시 스몰포워드들(예를 들어 줄리어스 어빙 등)의 경기를 보면 90년대 이후 스몰포워드들보다 훨씬 더 골밑슛 빈도수가 높고 골밑플레이에도 능하다. 당연히 버드의 득점도 대학에서건 프로에서건 중거리가 가장 비중이 높고 그 다음이 골밑, 장거리 슛은 비중이 적었다. 그런데 크렉 하지스같은 전문 슈터를 제치고 삼점슛 콘테스트를 연속으로 우승했다는 건 그의 슈팅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보여준다. 참고로 하지스는 버드가 콘테스트에 안 나오기 시작한 다음 해부터 3연속 우승을 차지했으며, 대회에서 삼점슛 19개 연속 성공이라는 기록을 아직도 보유하고 있다. 위에 언급된 86대회에서 버드에 밀려 준우승을 차지한 선수가 바로 하지스인데, 버드의 심리전에 밀려 결승을 완전히 망쳤으나 정작 버드는 22점이라는 높은 점수로 우승을 차지했다. 이때 버드가 정확히 뭐라고 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재밌는 후일담이 있는데 훗날 버드가 참가하지 않은 대회에서 하지스가 연전연승을 하자 기자들이 "버드가 참가하지 않았기 때문에 *표를 붙혀야 되는 거 아니냐?"(특수한 상황이나 페널티가 있는 기록이 아닌 기록에 *표가 붙는다. 레전드급 기록을 남겼으나 영구제명된 야구계의 피트 로즈의 기록이 대표적)라고 묻자 하지스는 "그가 날 어디서 찾을지 알고 있을 겁니다. (꼬우면 찾아와서 한번 붙자는 말)"라고 패기 넘치게 말했다. 그러자 버드는 이에 대해 "잘 알죠. 불스 벤치 끄트머리에 앉아있을 겁니다"라고 답했다.
  26. 시대가 다른 선수라 1대1 비교가 어렵고 노비츠키 역시 명예의 전당행이 예약된 레전드지만, 버드와 비교하면 까놓고 말해 모든 항목에서 떨어진다. 노비츠키는 올디펜스 팀에 오른 적도 없으니 수비에서는 당연히 뒤지고 리바운드에서도 노비츠키는 시즌 평균 10리바운드를 넘긴 적도 없지만 버드는 커리어 평균이 10개다. (플옵에서는 노비츠키도 10개 넘긴 적이 있지만 어차피 플옵 평균도 버드가 앞선다) 노비츠키도 한 클러치능력 하지만 버드는 조던과 비교되는 역대 최고의 강심장이다. 심지어 노비츠키의 최고 장점인 득점에서도 커리어 하이 26.6점대 29.9점으로 버드가 우세하다. 참고로 노비츠키가 26.6점을 기록할 때는 리그 7위였고, 버드는 리그 3위였다. 리더쉽은 참 애매한 분야고 둘 다 뛰어나긴 하지만 버드는 루키 시즌부터 팀의 리더로서 활약했고 (물론 버드는 만 23세에 데뷔했고 노비츠키는 19세에 데뷔한 걸 고려해야 할 것이다) 그의 리더쉽에 대해 의문이 붙은 적도 없다.
  27. 버드는 선수 생활을 오래 하지 못했기 때문에 누적스탯인 윈쉐어가 부족한 것은 사실이다. 겨우 13시즌밖에 뛰지 못했다.
  28. 르브론은 아직 전성기인 선수라 은퇴한 다른 선수보다 비율 스탯이 좋게 나온다는 점을 감안해도, 르브론의 PER는 대단하다. 참고로 역대 1위는 누구나 짐작할만한 그분이다. 이분은 르브론과 달리 말년에 많이 깎아먹었는데도 이 정도...
  29. 사실 이 둘은 1984년 결승까지는 둘이 진심으로 서로를 싫어했다. 그러나 1984년 시즌이 끝난 후 컨버스 농구화 광고를 찍으며 둘은 버드의 고향인 인디애나에서 온종일 함께 촬영을 하게 되면서 서로에 대해 잘 알고 친해지게 되었다. 당시 버드의 고향집에서 매직을 초청해 식사를 같이 할 정도였는데, 이때에 대해 버드는 "나는 그때 '매직 존슨'이 아닌 '어빙 존슨(매직의 본명)'을 만났다"라고 설명했다.
  30. 물론 로드맨의 이 말은 사실이 아니다. 버드가 당시 백인선수들의 구세주로까지 여겨진 것에는 70년대를 거쳐 80년대로 오면서 NBA에 스타급 백인 농구선수들이 거의다 사라졌던 게 어느정도 원인이 되기는 했다.(당시 닉스가 최초로 팀전원을 흑인선수로 구성하는 등 흑인의 비중이 커지자 "Is NBA too black" 이란 컬럼이 나올 정도였다.) 그럼에도 백인을 그럴듯하게 포장해서 스타로 만드는게 가능했으면 굳이 그 대상이 버드가 아니더라도 진작에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리고 위에 언급된 기록을 보자. 거의 평균 30점을 넣으면서 180클럽, 거기다가 리바운드 10개에 어시스트도 5개씩 하는 괴랄한 기록은 조던이나 매직도 못했던 것이다. 버드가 백인이라 스타 대접받는 거였으면 저런 무지막지한 경기력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정리하자면 버드가 백인이었지만 그만큼 엄청난 실력을 갖춘 선수였기 때문에 그런 대접을 받은 것이다.
  31. 당시 사태에 대해 설명하자면, 87년 플레이오프에서 접전끝에 셀틱스에 피스톤즈가 패배한 직후 로드맨은 라커룸에서 기자들에게 "버드는 매우 과대평가되었다. 그가 백인이기 때문에 3연속 MVP를 탄 것."이라고 말했다. 이후 아이재아 토마스가 기자들과의 자리에서 이에 동의한다면서 "버드는 매우 뛰어난 농구선수지만, 만약 그가 흑인이었으면 리그 최고의 선수가 아니라 그냥 잘하는 선수 정도로 비춰졌을 것."이라고 하면서 불에 기름을 부어버렸다. 사실 로드맨이 한 말이었으면, 듣보잡 루키가 한 철없는 소리 정도로 넘어갈 수 있었는데 슈퍼스타 토마스가 이에 한 술 더 뜨면서 "인종차별" 논란이 일어난 것이다. 실제로 이후 언론의 포격 대상이 된 건 로드맨이 아니라 토마스였다. 토마스는 이후 이에 "농담이었다"며 수습을 시도했으며, 로드맨 역시 "패배 직후 감정적이 되어서 한 말"이라며 버드에게 사과했다. 정작 버드는 사건 직후, "신경쓰지 않는다"면서 그렇게 극적으로 패한 경기 이후엔 그럴 수도 있다고 쿨하게 넘겼다. 버드는 이후에도 이에 대해 별 다른 코멘트를 하지 않았다. 버드가 이런 숱한 폄훼 발언에 시달렸음에도 별 대응을 한 적이 없다는 점, 버드의 위상이나 실력이 로드맨은 물론 토마스보다도 훨씬 위로 인정받는 점을 생각하면 정말 신경 안 썼을 가능성이 높다. #
  32. 그당시 리그 최고의 공격수였던 마이클 조던을 전담하는 피스톤즈 선수는 조 듀마스였지만, 경기 막판에는 조던과 비슷한 체격에 그에 뒤지지 않는 엄청난 운동능력을 지닌 로드맨이 그를 1대1로 마크했다. 물론 조던은 그를 기가 막히게 따돌리고 결승점을 올린 적도 많았지만 천하의 조던도 로드맨의 찰거머리 수비는 버거워했다.
  33. 실제 Bad Boys 비디오에서 로드맨의 회상에 따르면 그 당시 루키였던 로드맨은 "내가 한 발언이 얼마나 위험한 발언인지 조차 알지도 못했다." 라고 하였으며, 그 비디오 안에서 여러 기자들도 아마 로드맨이 저리 철저히 농락당한 건 그가 농구를 시작한 이후로 처음이었을 것이라고 한 것을 보면 로드맨이 악의적으로 폄하했다기보다는 자기가 이길 수 없는 벽에 한계를 느끼고 (위에서 언급된 것처럼) 자신에게 걸었던 일종의 정신적인 최면술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34. 물론 이 경기에서 조던의 퍼포먼스는 역대 플레이오프 최고의 퍼포먼스를 꼽을 때 빼놓지 않고 등장하고, 버드 역시 이 경기가 끝난 후 "신이 마이클 조던으로 변장한 것 같다(I think it's God disguised as Michael Jordan)."라고 말할 정도로 극찬했다. 국내 웹에서만 '그런데 우리가 이겼네? ㅋ' 라는 뉘앙스로 비꼰 거라는 해석이 퍼져 있는데 지나치게 버드의 발언을 꼬아서 듣는 셈이다. 앞뒤 문장을 살펴봐도 비꼬는 발언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이 때 인터뷰는: "마이클이 우리한테 한 걸 할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을 겁니다. 그는 오늘 경기에서 가장 흥미진진하고, 기가 막힌 선수였습니다. 그냥 신이 마이클 조던으로 변장한 것 같았습니다." 원문 이런 활약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이겼으니 결과적으로 자기 팀을 띄우는 발언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 버드의 발언은 순수하게 조던의 엄청난 기량에 감탄하는 뉘앙스에 가까웠다. 또한 이 당시 버드는 조던의 활약에 대해 얘기하면서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1년후 파이널에서 레이커스에 패하고 "매직은 내가 본 최고의 선수였다"고 할 때도 이렇게 고개를 흔들면서 인터뷰했다.)
  35. 사실 그럴 수 밖에 없던게 80년대 셀틱스(특히 86년 팀)는 리그 역사를 통틀어도 몇 손가락 안에 들 라인업이었으니 초창기 조던의 원맨팀에 가까웠던 불스가 힘겨워했던 것도 당연하다.
  36. 토마스는 자기의 역사중 가장 창피했던 순간을 뽑으라고 하면 이 순간을 뽑는다. 경기후 굉장히 실망한 토마스의 얼굴을 볼 수 있다.
  37. 사실 버드를 직접 본 세대나 전문가들이야 당연히 그의 실력을 알지만, 과대평가라고 주장하는 이들의 대부분은 그를 직접 못 본 세대들이다. 한국에서 특히 버드에 대한 과소평가가 심한데, 한국에서 NBA의 황금기는 90년대였고 이때 가장 인기팀이었던 스카티 피펜에 대한 평가가 대단히 높아서 그 이전 세대인 버드가 무시당하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버드는 겉모습이나 신체스펙만 보면 도저히 농구를 잘할 거라고 상상하기 어려운 스타일이기 때문에 직접 많은 경기를 보지 않으면 그의 실력을 짐작하기 힘들다. 또한 버드의 가장 무서운 점은 엄청나게 높은 농구에 대한 이해도와 여기서 나오는 감각적인 플레이인데, 이 점은 농구에 대해 많이 알지 않으면 보기 힘들다. 특히 초심자들은 겉보기에 화려한 플레이를 펼치는 선수들에게 현혹되기 쉽다. 이 점은 미국에서 버드를 못 본 세대, 특히 흑인들 사이에서 두드러지는데 매직 존슨은 이를 두고 "많은 흑인 친구들이 저한테 '진짜 래리 버드가 그렇게 잘했어요?'라고 묻더군요"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그리고 이에 대한 매직의 대답은 "래리 버드는 너무 잘해서, 두려울 정도였어"였다. 위에 언급됐듯이 버드에게 극적인 역전패로 이어지는 실책을 당하고, 셀틱스와 거의 전쟁처럼 싸웠던 아이재아 토마스조차도 은퇴 후에 버드의 실력을 인정해 자기나 매직, 조던보다 위에 둘 정도였다. 이런 마당에 과대평가 운운은 그의 농구를 본 적이 없는 이들의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 농구인들의 버드에 대한 실력 평가는 매직과 정확히 동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