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예술은 망했어. 저 프로펠러보다 멋진 걸 누가 만들어 낼 수 있겠어? 말해보게, 자넨 할 수 있나?”—마르셀 뒤샹, 1912년 항공 공학 박람회를 관람한 뒤 친구에게
예술가는 영혼으로 자신을 표현해야 하며, 예술 작품은 그 영혼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마르셀 뒤샹, 자신을 소변기 샘의 영혼과 동격으로 놓으며
“그림을 그린 것, 삶을 이해하는 요인으로 삶의 방식(modus vivendi)을 창조하기 위해 예술을 한 것, 살아 있는 동안 그림이나 조각 형태의 예술작품들을 창조하는 데 시간은 보내기보다는 차라리 내 인생 자체를 예술작품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 것이 가장 만족스럽다”—마르셀 뒤샹, 예술가로서 살아오며 가장 만족스러운 것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답하며
1 개요
앙리 로베르 마르셀 뒤샹(Henri Robert Marcel Duchamp, 1887년 7월 28일 ~ 1968년 10월 2일)은 프랑스의 예술가로, 오늘날 현대예술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예술가로 항상 손꼽히는 작가이다.
1887년 7월 28일에 노르망디의 작은 마을인 블랭빌에서 태어났다. 뒤샹의 아버지는 공증인이었으며, 뒤샹은 6남매 중에서 셋째였다. 뒤샹 위로 두 형이 예술가로 먼저 데뷔를 했는데, 뒤샹이 자신도 예술을 하겠다 하자 형들이 뒤샹을 무시했다고 한다. 헌데 나중에 형들은 예술사에서 그저 아웃 오브 안중이다. 이에 열등감을 느끼고 뭔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초현실주의(파리 다다) 작가와 예술가들과 교류하며 작품을 많이 남겼다. 2차 세계대전으로 프랑스를 떠나 미국으로 망명한 뒤, 1955년에 미국 국적을 취득했다. 뒤샹의 작품과 아이디어는 1차 세계대전 이후 미술의 발전에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많은 근대 미술 수집가에게 한 조언은 수집가들이 서양 미술 세계의 취향을 형성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2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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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셀 뒤샹,<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1912.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는 뒤샹의 초기 작품중 가장 파격적인 작품이었다. 이는 당대 미래주의와 마찬가지로 신기술인 활동사진을 어떻게 회화로 풀어낼 것인가를 고민하다 만든 작품이라고 한다. 머이브릿지 등 당대에 활동사진을 연구했던 사람들은 모델에게 쫄쫄이 옷을 입힌 뒤 (오늘날 3D 모델링에서 사용하는 뼈대(bone)처럼) 그 옷에 관절을 표시하고 연속으로 사진을 찍어 신체의 움직임을 관찰했다고 한다. 형 중에 의사가 있었던 뒤샹은 이런 신기술들을 잘 알고 있었고, 이를 회화에 적용했다고 한다. 자세한 사항은 작품 설명 참고
마르셀 뒤샹, <자전거 바퀴>, 1913
뒤의 샘에서 이야기하겠지만, 이미 1913년에 뒤샹은 기성품(ready-made)을 활용하는 전략을 선보였다. 자전거 바퀴를 의자에 거꾸로 박은 이 작품은 일상의 물건을 예술작품으로 바꾸려는 시도였다. 서로 아무 관련이 없는 사물들을 엉뚱하게 결합시켜서 유용성을 제거한 대신, 새로운 예술적인 느낌을 만들어내는데 성공한 것이다.
마르셀 뒤샹, <샘>, 1917
20세기 미술사를 완전히 뒤집어놓은 희대의 문제작
1차 세계대전후인 1917년 4월 10일, 뒤샹은 미국으로 건너가 독립미술가협회[1] 전시회에 <샘 Fountain>을 출품한다. 이 독립미술가협회는 뒤샹이 알렌스버그, 월터 팩 등과 함께 설립한 협회였다. 즉, 자기가 만든 협회 전시회에 지신의 작품을 출품한 것이다. 독립미술가협회는 특이하게 심사위원도 없고, 상도 없는 미술전으로, 전시회에 참여하고 싶은 사람은 소정의 수수료만 내면 작품을 전시할 수 있었다고 한다.
골때리는 것은 뒤샹이 동네 철물점에서 그냥 남성용 변기를 하나 산 다음에 'R. Mutt' 란 가명으로 사인을 하고 출품했다는 것. 당연히 이 작품은 독립미술가협회에서 거부당했고, 전시회가 진행되는 동안 후미진 곳에 방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동안 아무도 그게 작품인줄 몰랐다. 이후 뒤샹은 한 잡지에 'R. Mutt' 라는 무명의 작가를 옹호하는 척 하며 이 작품에 대한 글을 투고했다. 아래 인용문은 이때 뒤샹이 한 말들.
"분명히 어느 예술가라도 6달러를 내면 전람회에 참여할 수 있다. 머트 씨는 <샘>을 출품했다. 그런데 아무런 의논도 없이 그의 작품이 사라졌다. 머트 씨의 <샘>이 배척당한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변기가 부도덕하지 않듯이 머트 씨의 작품 <샘>은 부도덕하지 않다. 배관수리 상점의 진열장에서 우리가 매일 보는 제품일 뿐이다. 머트 씨가 그것을 직접 만들었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는 그것을 선택했다. 일상의 평범한 사물이 실용적인 특성을 버리고 새로운 목적과 시각에 의해 오브제에 대한 새로운 생각으로 창조된 것이다."
하지만 처음 전시를 기획했을 때부터 이와 같이 명확한 컨셉을 염두에 두고 있진 않았다. 뒤샹이 <샘> 전시 당시 그가 여동생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변기의 곡선과 형태 등 시각적으로 보이는 부분에서 미적인 것을 찾아 감상하는 것을 권유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후에 논란이 진행되면서 뒤샹 스스로가 작품의 가치와 장소성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개념이 정리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이 작품은 예술과 예술가는 뭔지에 대해 커다란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글 참고. 이 논쟁은 지금도 충분히 효력을 가지는 논쟁이다. 이 논쟁과 관련된 질문들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예술가(Artist)는 꼭 장인(Artisan)처럼 손수 작품을 만들어야 하는가? 아니면 그냥 자기 발상(idea)에 맞는 사물을 선택하기만 해도 되는가?
예술가에겐 손재주가 중요한가? 아니면 창의적인 발상이나 계획(idea)을 수립하는 것이 중요한가?
예술가가 자기 예술작업을 위해 선택한 기성품(ready-made)과 사용하지 않은 다른 일상 기성품은 무슨 차이가 있는가?
예술작품을 예술로 인증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예술가인가? 관객인가? 미술관같은 예술기관인가?
산업사회 이전이었다면 이건 물을 필요도 없는 질문이었을지 모른다. 당연히 장인의 손재주가 더 중요하니까. 보다 정확히 말하면, 이전까지는 장인의 손재주와 계획 능력을 굳이 구분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산업사회가 된 오늘날, 이제 굳이 작가가 손수 작품을 만들지 않아도 재료로 삼을 기성품, 상품들은 넘친다. 게다가 이미 사진과 영화등이 개발된 상황에, 굳이 애써서 회화를, 초상화를, 구상화를 그려야 하는 이유가 뭔가? 뒤샹은 당대 예술가라면 한번쯤은 해봤을 질문에 대한 대답을 저런 파격적인 작품으로 내놓은 것이다. 그의 작품을 보고 충격을 받은 후대 예술가들은 이렇게 생각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예술가는 계획이나 발상을 세우는게 중요하다. 예술가는 자기 발상에 맞는 물건(오브제)을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 기교나 기술적 요소는 단지 작가의 발상을 전달할 때 필요한 요소일 뿐, 중요한 것은 작가의 생각이나 사상을 전달하는 것이 된 것이다.
마르셀 뒤샹, <L.H.O.O.Q>, 1919
1919년에는 <L.H.O.O.Q>라는 작품을 제작했다. 이 작품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에 콧수염을 그린 것이다. 그리고 밑의 L.H.O.O.Q 라는 제목은 프랑스어로 읽으면 "엘르(L) 아쉬(H) 오(O) 오(O) 뀌(Q)"가 되는데, 이것을 연음시켜 "엘라쇼오뀌"라고 읽으면 "그녀는 뜨거운 엉덩이를 가졌다(Elle a chaud au cul)"라는 문장과 같은 발음이 된다고 한다. 동음이의를 이용한 말장난. 앞서 <샘>이 산업사회의 기성물품들을 전혀 다른 예술적 맥락 안으로 끌어들이는 전략이었다면, <L.H.O.O.Q>는 이전 시대 예술작품들을 현대예술의 전혀 다른 맥락 안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이전 세대의 예술 전통을 모독하는건 덤이고 말이다. 신세대가 구세대와 세대차를 느끼는건 어느 세대에나 있던 일이지만, '옛날 세대보다 우리 세대가 더 우월하다' 라고 주장하는건 그야말로 모더니즘 시대의 대표적인 특징이다. 그런 면에서 뒤샹의 <L.H.O.O.Q>야말로 모더니즘적인 셈. 어쩌면 그 모더니즘을 또 까는 것의 효시일 수도 있고 말이다.
마르셀 뒤샹, <회전원판 Rotary Glass Plates (Precision Optics)>, 1920
마르셀 뒤샹, <현기증 영화(Anemic Cinema)>, 1926
1920년에는 만 레이를 만나 같이 작업했고, 이후 광학적오브제와 영화 실험 작업을 했다. <회전원판 Rotary Glass Plates (Precision Optics)>의 경우 되게 단순해 보여도 초기 키네틱 아트 작품중 하나이다. 1926년 만든 <현기증 영화(Anemic Cinema)>의 경우 일부러 보는 사람이 현기증을 느끼도록 만들었다. 이는 오늘날 인지과학에서 따지는 시각적 경험 연구를 앞선 것. 옵아트의 맥락에서 이해되기도 한다.
마르셀 뒤샹, <에로즈 셀라비>, 1921
1921년 뒤샹은 여장하고 사진을 찍었다. 앞서 <L.H.O.O.Q>도 그랬지만, 이는 성역할(gender)의 문제에 대한 물음 제기로도 읽을 수 있다. 과연 사회적 성은 생물학적 성을 따라가는가? 뒤샹은 사진을 찍어 이 물음에 대해 반론을 제기한 셈이다.
마르셀 뒤샹, <그녀의 독신자들에 의해서조차 벌거벗겨지는 신부, 조차도 The Bride Stripped Bare by Her Bachelors, Even>, 1915-1923
뒤샹은 연금술에도 관심이 있었다고 한다. <그녀의 독신자들에 의해서조차 벌거벗겨지는 신부, 조차도>, 줄여서 속칭 <큰 유리>로 불리는 이 작품에서, 뒤샹은 온갖 연금술 지식을 동원해 작품을 제작했다. 이 작품은 유리에 수년동안 먼지가 쌓이게 만든 뒤, 특정 부분을 지우고 그림들을 붙이고 하는 식으로 만든 작품이다. 작품에서 밑쪽은 남자 구혼자들, 윗쪽은 신부라고 하는데, 딱 꼴이 결혼대란이다.
마르셀 뒤샹, <에땅 돈네 (1. 폭포수 2. 점등용 가스 : 가 주어졌다고 할 때) Étant donnés (Given: 1 The Waterfall, 2. The Illuminating Gas)>, 1946–1966
1923년부터 뒤샹은 프로체스선수로 전향했다. 이후 뒤샹은 생의 대부분을 주위와 단절한 채 작품 활동도 완전히 그만둔 것으로 알려져있다. 그런데 사후에 그의 집에서 <에땅 돈네 (1. 폭포수 2. 점등용 가스 : 가 주어졌다고 할 때) Étant donnés (Given: 1 The Waterfall, 2. The Illuminating Gas)>라는 작품이 발견되어 많은 사람들이 황당해했다.
3 평가
현대예술에서는 피카소보다 더 중요한 예술가다. 뒤샹에 대한 평가는 이 한마디로 요약된다.
그가 한 각종 기괴한 예술들은 오늘날 아방가르드 예술, 개념미술, 키네틱 아트, 젠더이론, 제도비판 등 굉장히 많은 분야에 영향을 주었다. 심지어 새로운 예술이 나오면 뒤샹과 연관관계를 찾는 일이 나올 정도. 물론 미디어아트 등장 이후 이를 '만물뒤샹설'이냐고 까는 사람도 생겼지만 말이다.
현대예술가들은 뒤샹이 현대 산업사회의 산물들에 종속된 호구가 되지 말고 자기만의 예술을 해라라고 말한것으로 받아들였다. 그 결과가 바로 오늘날의 현대예술 신세계다. 말 그대로 아주 미세하고 소소한 차이라도 발상으로 끌어들여 개념화하는 것이 오늘날의 예술 추세이다. 뒤샹은 본격적으로 그 시작을 연 셈. 이는 오늘날의 예술 관람자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과연 기업이 만들고 마구 유포하는 상품이, 혹은 대중문화가 진짜 나의 것인지는 곰곰히 따져봐야 할 일이다.
그리고 뒤샹이 했던 짓들을 보면, 오늘날 인터넷에서 온갖 잉여들이 벌이는 병X짓을 이미 수십년전에 한번씩 다 해봤다. 장난질, 섹드립, 여장질 등등... 물론, 그 이후 예술계에서는 이보다 더한 병X짓을 하는 예술가들이 넘쳐나게 된다.
4 외부고리
마르셀 뒤샹 정보(위키피디아)
마르셀 뒤샹 정보(미디어아트)
마르셀 뒤샹 정보(mapa 블로그)
마르셀 뒤샹 정보(한경닷컴)
마르셀 뒤샹 정보(아크로폴리스타임즈)
- ↑ 앙데팡당(independent)이라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