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블로 피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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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blo Ruiz Picasso

스페인화가.

천재 화가의 대명사

입체주의의 거장[1]

1 이름

사실 정식 풀네임은 파블로 디에고 호세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 후안 네포무세노 마리아 데 로스 레메디오스 크리스피니아노 데 라 산티시마 트리니다드 루이스 이 피카소(Pablo Diego José Francisco de Paula Juan Nepomuceno María de los Remedios Crispiniano de la Santísima Trinidad Ruiz y Picasso).[2] 짧게 줄이면 파블로 루이스 피카소(Pablo Ruiz Picasso)가 되며 Ruiz가 본래 성씨이다. 피카소는 그의 어머니의 성씨. 본래 파블로 루이스로 불리는 것이 맞으나 그가 19세 때 루이스 대신 피카소를 선택하면서 파블로 피카소로 알려진다.

2 생애와 화풍

천재란 단어가 그를 위한 것이란 이야기가 딱일 정도로 그림에 있어서는 못할 것이 없었다. 말을 배우기 보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게 먼저라고 하며, 처음 입 밖으로 내뱉은 단어가 연필이었다고 한다. 흠좀무.

게다가 화가 지망생이었던 아버지 호세 루이스(호세 루이스 이 블라스코, 1838-1913)의 조수 노릇을 했는데, 호세는 피카소가 자신이 시킨 것(새에 다리 그려넣기)을 해온 것을 보고 말하기를... "네가 내 꿈을 이루어 다오."

회화 뿐만 아니라 조각도 했다. 이미 20세가 되기 전에 그의 회화실력은 고전주의를 마스터한 수준이었다. 바르셀로나 예술학교 시절에 남들이 한달 정도 준비하는 과제를 단 하루만에 완성하고 1등을 차지했다. 입학시험을 봤을때도 남들이 일주일 걸리는 과제를 몇시간만에 완수했고 이걸 본 교사가 큰 충격을 받아 바로 월반시켰다는 일화도 있다. 아래 그림을 보듯이 15살쯤에 이미 대가의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피카소(15세)의 그림

그의 그림 실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로는 그가 10살 즈음에 그렸던 소묘를 보면 알 수 있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더니 요즘 초등학생 곱하기 나누기 할 때 저 정도였다. 본인 스스로 "12살 때 라파엘로만큼 그렸음"이라고 말했는데 그 반동으로 평생 어린아이들의 천진난만한 그림을 부러워했다고 한다.

훗날 그려진 입체파 그림들에 대해서 대중의 반응은 이해하기 힘들다는 평이 많았다. 특히 아들의 재능을 알아보고 기대했던 그의 아버지는 죽을 때까지 그의 그림을 이해하지 못하고 반목하다가 죽었다고 한다. 바르셀로나 예술학교와 마드리드 예술학교에 보내서 미술을 배우게 했는데, 피카소는 그냥 돌아다니면서 그림연습을 하는 게 더 나았다고 생각했다. 아버지 호세 입장에서는 고생고생해서 좋은 데 보내줬더니 겉도니까 빡치실 수밖에...결국 이 때문에 피카소는 집을 나오고 말았다.

세잔 이후로 나온 미술이라는 것은 더 이상 이미지를 사실적으로 그리는 것을 추구하지 않았다. 미술의 역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똑같지 않았다. 사람 비슷한 게 나오다가 별안간 도형과 선으로 이루어진 그림이 나오고, 그러다 괴상망측한 게 나오고... 이에 관해서는 사진의 발명이 막대한 영향력을 끼쳤다. 이에 대해서는 항목을 참조.

관객의 기대와 작가의 의도가 잘 맞지 않아서 벌어지는 현상인데, 피카소의 그림을 "어떻게 하면 평면에서 입체의 여러 면(특성)을 한 번에 나타낼 것인가"라는 개념을 표현한 것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바라본다면 명쾌하게 느껴질 것이다. 피카소의 입체파(큐비즘) 그림은 아름다워서 훌륭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개념과 장르를 개척했다는 것에 의의가 있으며, 또한 구성의 미도 있다.

초창기에는 친구이자 시인인 막스 자콥과 함께 지내면서 "청색 시대"를 그리며 가난하고 아픈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파리의 발전상을 고향 스페인에 알리는 등의 노력을 했다. 그리고 이 때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예술가들의 후원가로 널리 알려진 거트루드 스타인&레오 스타인이 후원자가 되어 줬고, 이들의 소개로 앙리 마티스(야수파그분창시자)를 만나게 되었다.

피카소가 큐비즘을 창시했을 때 초창기 사람들의 반응은 이러했다.

  • 기욤 아폴리네르(친구 겸 시인), 앙리 마티스 : 이해할 수가 없다. 대체 뭘 그린 거야? 가난했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나?
("청색 시대(그림의 테마가 우중충함, 슬픔, 고난이었다)"에서 "장밋빛 시대"로 넘어가며 그림이 화사해진 덕분에 수입을 많이 벌었는데, 미치지 않고서야 뜬금없는 시도를 했으니 (부인을 포함하여)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 우데(비평가), 칸바일러(화상) : 그림에 낭비가 없다. 장식과 기교(멋)가 배제되어 있다. 호소력이 짙다.

훗날 칸바일러는 그의 그림을 전문적으로 사들여서 전시해 줬다. 이 때 피카소의 동료"였던"(나중에 의견 차이로 돌아섰다) 조르주 브라크도 소개해 줬다. 그리고 아폴리네르를 비롯한 친구들 역시 그를 이해해주고 응원해줬으니 잘 된 셈이다.

피카소의 그림을 현실로 보면 대충 이런 느낌이다. 자세히 보면 옆얼굴이라 코가 절반만 나왔지만, 코의 모습이 온전히 드러난 것을 볼 수 있다. 즉 코의 특징을 전부 담아낸 셈. 그래서 피카소의 큐비즘 그림들을 보면 눈의 모양이 짝짝이인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건 의도적인 게 아니라 측면의 눈과 정면의 눈을 동시에 그려서 그런 거다.

피카소가 이런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은 당시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당시 급격한 산업화로 인한 환경 변화와 마르크스의 혁명적 사관 등 영향받았던 유럽은 과거와의 단절을 꾀하고 새 시대에 맞는 새로운 문화를 추구하였고다. 프랑스 혁명 당시 과거로 회귀하는 신고전주의와 작가의 개성을 드러내는 낭만주의가 등장한 것과 비슷하다. 피카소 당시에는 모더니즘이라는 이름 하에 건축, 과학 등 모든 분야에서 이러한 운동이 전개되었다. 모더니즘 미술 역시 그러한 방향으로 과거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미술을 찾았다.

이런 상황에서 피카소는 과거의 영광을 잘 재현하는 유물이 되느냐, 아니면 새로운 정신과 새로운 개념을 창조해서 신세계의 신 미술계의 혁명가가 되느냐는 길에서 후자를 선택한 것이다. 물론 결과는 잘 아는대로 대 성공이었다.

생전부터 그림이 잘 팔렸던 화가로도 유명한데, 피카소 본인도 자신의 그림이 얼마에 팔리는지 확인했다고 한다. 돈의 액수보다 자신의 그림의 가치가 얼마나 되는가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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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내전 당시 나치 독일공군 원수 헤르만 괴링의 무차별 폭격으로 황폐화가 된 게르니카의 참극을 듣고 그린 명작 중 하나인 게르니카다.

이 사건은 보통 민간인 약 2500명이 죽은 참극으로 알려졌는데 전후 재조사 결과 200~300명 선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애시당초 공습 자체도 마을에 주둔한 공화국군의 퇴로 차단 목적으로 교량 파괴를 목표로 이루어졌으나 1차 폭격으로 일어난 먼지구름 탓에 정확한 목표 식별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어림짐작으로 후속제대가 폭탄을 투하했던 것이고 보면 흔히 알려진 '평화로운 마을에 갑자기 나치가 날아와 폭탄의 비를 내리고 갔다'식의 사건은 아니었던 것. 그렇다고 나치가 잘한 행동을 한 것은 절대 아니다!

피카소는 그 후 이런 식의 행보로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미움을 사 미국으로 망명을 갔고, 이후 전쟁이 끝나자 남유럽으로 돌아왔다가 그 곳에서 사망했다. 피카소는 "스페인이 민주화 되기 전에는 게르니카를 스페인에 걸 수 없다"고 했으며, 프랑코가 죽고 1981년이 되어서야 이 걸작은 스페인으로 반환되었다. 현재 마드리드 소피아 여왕 박물관(Museo Reina Sofia)에 소장 중이다.

일화에 따르면, 나치의 파리 점령 직후 한 게슈타포 장교가 피카소에게 "당신이 <게르니카>를 그렸나?"라고 물었다고 한다. 이에 대한 피카소의 답은 "아니, 당신들이 그렸지"였다고...

이 그림은 349×775cm... 즉 3.5m X 7.8m라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작품이다. 그래서 피카소는 붓이 아니라 롤러로 그림을 그렸다.


그림이 크고 아름답기 때문에 소피아 여왕 박물관에 아예 게르니카 전시를 위한 방이 따로 있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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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1951년 한국전쟁 당시의 신천군 사건을 모티브로 한 <한국에서의 학살>이라는 그림도 그렸다. 한국전의 참상을 고발하기 위해 그린, 게르니카와 함께 그의 대표적인 반전 작품 하나. 근데 무고한 시민의 죽음에 초점을 맞추고 학살의 주체가 누구인지 애매해서 정치적으로 부적절한 그림이라는 평을 받았다. 당시 미군이 개입했다는 주장도 생기는 바람에 한국에선 80년대까지 금지 예술품 목록 중 하나이기도 했다. 브루스 커밍스의 저서 <한국전쟁의 기원>은 표지에 이 그림을 쓰고 있다. 고야의 <마드리드, 1808년 5월 3일>, 마네의 <막시밀리안의 처형>의 구도를 참고해서 그렸다고.

3 피카소와 마티스의 라이벌 관계

미술사의 비화로 잘 알려진 이야기중 하나는 피카소와 마티스가 라이벌 관계였다는 것이다.

거트루트 스타인이 1913년경 찍은 사진

피카소와 마티스는 거트루트 스타인을 사이에 두고 서로 경쟁의식을 불태웠다. 거트루트 스타인을 놓고 서로 사랑싸움을 한건 아니고, 거트루트 스타인이 미국의 잘 사는집 딸이라 잘보이려 했기 때문이었다. 거트루트 스타인은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고, 스스로 작가 활동을 할 정도로 예술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스타인은 파리로 유학와서 화실을 열고 파리의 예술가들과 어울렸는데, 돈이 많아서 예술가들의 작품을 사주기도 했다고 한다.

파블로 피카소, <거트루트 스타인의 초상>, 1906

이것이 피카소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결과를 낳았다. 피카소는 거트루트 스타인의 집 벽난로 위에 마티스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것을 보고 자존심이 상해서 마티스 그림보다 더 멋진 그림을 그려 스타인에게 바쳤다고 하는 일화가 있다. 위의 그림은 그런 작품들중 하나.

단순히 재미거리로 들어도 될 이야기기도 하지만, 사실 여기에는 당시 예술가들이 어떻게 생존했는지가 드러난다. 한마디로 자기들을 이해해주는 좋은 물주를 만나 빌붙는 것이다.유감스럽게도 이는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으니, 지금도 갑부집 자식내미들이 예술대학에 가서 공부하다가 졸업하고 부모 도움 받아서 갤러리나 미술관을 여는 경우가 흔하다. 물론 엄밀히 말하면 이런 현상은 예술계뿐 아니라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다.

그 밖에도 두 천재의 일화는 꽤 많이 있는데 라이벌인것 치고는 서로간의 관계가 나쁘지 않았다. 흔히 말하는 서로를 고양시키는 라이벌 관계였던 모양이다. 피카소가 마티스의 화실에 종종 놀러오고 할 정도였다고. 흔히 마티스는 미술에서 색을 해방시키고 피카소는 형태를 해방시켰다는 말이 있는데 그만큼 서로의 스타일이 극명하게 다르기도 했고 서로에게서 자신에게 없는 부분을 보고 있었다는 듯 하다. 실제로 피카소는 마티스의 작풍 일부를 차용해서 쓰기도 했는데 그 때문에 피카소가 화실에 놀러왔다 가면 마티스는 저 인간 또 아이디어 훔치러 왔다며 투덜거리고는 했다는 일화가 있다(...). 참고로 마티스 쪽이 12살 연상.

4 정치적 성향

공산주의자였다. 자수성가한 유일한 공산주의자(…)이며 프랑스 공산당에 입당한 전력도 있다. 하지만 뚜렷한 정치적인 활동을 한 것은 아닌지라 의미는 없다. 게다가 스탈린을 싫어해서 다른 공산당원들과도 상당한 충돌이 있었다고 한다. 초기에는 스탈린을 지지했는데, 공산당에서 선전을 위한 그림을 요구했다. 하지만 그 사람들 역시 이해를 하지 못해서 불화가 생겼다고 한다. 이후 피카소가 스탈린의 초상화를 그려서 주자 "우리 대장님 얼굴은 이렇지 않다!"는 반응을 보여서 더욱 사이가 멀어졌다.

피카소의 사상과 표현을 보았을 때 공산주의자 혹은 사회주의자라고 할 수 있음은 분명하다. 스스로 명확히 공산주의자라고 규정하지만 않았을 뿐이지 실제 사상은 거의 공산주의자였던 유명인들은 엄청나게 많다. 아인슈타인도 "왜 사회주의여야 하는가"(Why Socialism)라는 글을 썼다. 신천 양민 학살을 주제로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당연히 반전주의자이기도 했다.

5 여자관계

이 사람도 여성편력이 상당했다. 나이 6,70이 넘어서도 20살 갓 넘은 지금으로 보면 손녀뻘 되는 여자들과 살림을 차려 자식을 낳기도 했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피카소는 심각한 나쁜남자인 듯 싶다. 여자 꼬실 때 "당신을 어제보다 더 내일보다 많이 사랑한다"라는 말을 했단다. 이 말에 신세 망친 사람 여럿이다. 피카소 사후에 걱정된다며 따라 죽은 부인도 있었다.

아무튼 부인 및 사귀었던 사람들 목록을 보자면...

  • 페르낭드 올리비에 - 프랑스계 예술가 겸 모델. 초기 피카소의 그림 모델이 되었으며 그의 친구인 아폴리네르의 시에서도 등장한다. 이혼.
  • 에바 구엘 - 무용수. 병사.
  • 올가 코글로바 - 발레극단 소속 무용수. 이혼.
  • 마리 테리즈 발터
  • 도라 마르 - 사진작가(게르니카의 제작 과정을 사진으로 남겼다). 병사.
  • 프랑스와즈 질로 - 전쟁사진으로 유명한 로버트 카파의 '피카소와 질로'라는 사진이 유명하다. 그 위대한 피카소(!)가 시종처럼 파라솔을 받쳐들고 질로의 뒤를 따라 걷는다. 그리고 질로는 피카소에게 먼저 이별을 통보한 유일한 여자이기도 했다.
  • 자크린느 로크

이상 7명. 그녀들의 소개와 영향은 여기를 참고.

위에 언급된 7명의 여인말고도 피카소는 수많은 여인들과 염문을 뿌렸었다. 그리고 그 모든 여인들을 다 찼다! 하지만 딱 한 번, 프랑스와즈 질로에게만 먼저 이별통보를 받았다고 한다. 대다수 여자들에게 늘 숭배를 받으며 먼저 찼으면 찼지 차인적이 없는 피카소는 질로의 이별통보에 큰 충격을 먹고 질로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서 달래기도 하고 애원도 하고 심지어 자살하겠다고 협박까지 했지만 질로의 마음을 돌릴 수가 없었다고 한다... 라고 왠지 많은 한국인들이 알고 있지만 올가 코글로바 역시 남편이 마리 테레즈와 바람핀것을 친구로부터 알자마자 아들과 함께 집을 나가서 이혼 소송을 했다. 근데 피카소가 재산분할 하기 싫어서 이혼을 안해준덕에 올가가 사망할때까지 결혼상태였고 죽을때까지 따로 살았다고 한다. 질로가 유일하게 피카소를 찼다는 이야기가 유난히 한국에 많은데 출처가 어디인지 궁금하다.

질로는 피카소와 이별 후 <피카소와의 삶(Life with Picasso)> 책을 발표해 피카소와 함께한 10년간의 생활을 솔직히 고백했다. 피카소의 마초적인 성격과 여성편력까지도..하지만 그런 질로조차도 이런 고백을 했다고 한다. "저는 저희 아버지나 남자친구와는 대화가 되지 않는데 저보다 3곱절 연상인 당신과 말이 통하는 것이 믿어지지 않아요." 라고.

애정 관계는 아니지만 포니테일 소녀 실베트 데이빗(Lydia Sylvette David)(결혼 후 Lydia Corbett)을 모델로 수십 점의 '실베트 연작'을 만들고 격려와 금전적 지원(자기 그림(...))으로 예술가의 꿈을 키워준 이야기가 아동도서로 출간되어 잘 알려져 있다. 훗날 Lydia Corbett은 영국에서의 활발한 창작 활동으로 성공한 화가가 되었다. 참고로 당시 피카소는 70대였고 실베트는 방년 19세였다.

6 미술만 있나?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시 쓰는 재능도 상당하여 시집도 냈다. 또한 "꼬리 잡힌 욕망"이란 희곡을 쓰기도 했는데, 저항적인 내용이라 몰래 상연되었다. 여기에 출연한 사람들은 장 폴 사르트르, 시몬 드 보부아르, 알베르 카뮈 등등 당대의 지식인들이었다. 그리고 그동안 쓴 시는 30여개 정도라고 한다.

패션감각도 특이해서 상의를 흰 바탕에 파란색 가로줄무늬가 있는 옷을 즐겨 입었다. 맨 위의 사진이 바로 그것.

참고로 이 사람의 절친 중 하나가 바로 찰리 채플린. 채플린도 엄청난 로리콘이였다(항목 참고).

7 어록

한때 회화는 발전적인 단계를 거쳐 완성에 다가갔었다. 매일 새로운 것이 생겼다. 회화는 추가의 결합이다. (그러나) 나에게 회화는 파괴의 결합이다. 나는 그림을 그리고, 그것을 파괴한다. 하지만 오랫동안 봤을 때 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한 곳에서 빼낸 빨간색이 다른 곳에서 나타날 뿐이다.

Formerly pictures used to move towards completion in progressive stages. Each day would bring something new. A picture was a sum of additions. With me, picture is a sum of destructions. I do a picture, then I destroy it. But in the long run nothing is lost; the red that I took away from one place turns up somewhere else.
-1934년 겨울, 리처드 프리덴탈의 "위대한 예술가들의 편지들 - 블레이크에서 폴록까지" 중에서

예술은 공간을 장식하기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닙니다. 적들을 막아내는 공격적인 무기입니다.

Art is not made to decorate rooms. It is an offensive weapon in the defense against the enemy.
-1943년 3월 24일, Les lettres françaises

회화는 미학적인 작업이 아니다. 이 이상하며 적대적인 세계와 우리를 중재하도록 설계된 마법의 형태이다.

Painting isn't an aesthetic operation; it's a form of magic designed as mediator between this strange hostile world and us.
-2002년 출간된 마리오 리비오의 "황금률(The Golden Ratio)"에서

8 일화

피카소 그림의 값
아름다운 한 여인이 파리의 카페에 앉아 있는 파블로 피카소에게 다가와 자신을 그려 달라고 부탁했다. 물론 적절한 대가를 치르겠다고 말했다. 피카소는 몇 분 만에 여인의 모습을 스케치해 주었다. 그리고 50만 프랑(약 8천만 원)을 요구했다. 여자가 놀라서 항의했다.
"아니, 선생님은 그림을 그리는 데 불과 몇 분밖에 걸리지 않았잖아요?"
피카소가 대답했다.
"천만에요. 나는 당신을 그리는 데 40년이 걸렸습니다."
바닷가
피카소가 바닷가에 놀러갔는데 어떤 아이가 종이와 펜을 들고 나타나 그림을 그려달라고 했다. 물론 아이의 부모가 피카소를 알아보고 아이에게 시킨 것. 피카소는 종이 대신 아이의 등에다 그림을 그려서 돌려보내고는 "저 애 부모는 저 그림 지우지 못할걸." 이라고 말하며 낄낄거렸다고 한다.
고양이 그림
피카소가 큐비즘 작품으로 화제가 되고 있을 때, 어느 한 화가가 실사로 데셍한 고양이 그림을 들고 와 피카소 앞에서 피카소의 그림을 비판했다. "그런 아이같은 그림을 그리다니 부끄럽지도 않습니까? 전 이만큼 그릴 수 있습니다." 피카소는 몇 분간 화가의 말을 들으면서 스케치를 했는 데, 잠시 후 "이런 그림 말입니까?" 라며 화가가 들고 온 고양이 그림을 똑같이 그려냈다.

9 토막상식

  • 본인이 유명해지고 난 뒤, 젊은 시절 자신이 도움을 받았던 사람이 파산하여 노숙자 생활을 하고 있자 그를 찾아가 땅바닥에 뒹굴던 골판지에 그림을 그린 뒤 이걸로 집을 사세요(!!!)라며 건네주었다는 일화가 있다.
  • 딸 팔로마 피카소는 보석 디자이너로 유명하다.
  • 대한민국에서는 한때 피카소를 찬양하면 코렁탕을 먹던 시절이 있었다. 농담이 아니다. 1969년에는 피카소를 상품명으로 사용한 크레파스 회사 사장이 반공법 위반으로 적발되어 처벌받았던 사례가 있고(결국 '피닉스'로 상표를 변경했다고 한다) 코미디언 '후라이보이' 곽규석(1928~1999)은 TV쇼에서 '피카소 그림처럼 훌륭하다'는 발언을 한 의도가 뭐냐며 조사를 받기도 했다고 한다. #
  • 그의 증손자인 플로리안 피카소는 유명세를 타고 있는 DJ이다.

10 대중매체에서의 피카소

  • 핑크레이디 클래식에서는 한겨울윤현석이 장년의 피카소와 만나 앙리 마티스에 대한 질투심을 유발시켜 작품을 완성하게 만든다. 그의 천재성을 높게 평가했기 때문인지 겨울과 현석이 다음 작품으로 넘어가는 과정이 모두 피카소의 작품으로 가득 차 있었고, 반 메헤렌은 그의 작품세계는 한 사람이 해낼 수 있는 게 아니라며 작품 하나하나를 만들 때마다 다른 사람이라고 봐도 된다고 평할 정도.
하지만 반 메헤렌은 겨울과 현석이 만난 청년 피카소를 살해하고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지옥으로 보내 역사를 바꾸려 한다. 보스의 지옥에서 피카소를 발견한 현석은 역사를 원래대로 돌려놓기 위해 '보스가 보지 못한 지옥을 피카소가 그릴 것'이라고 제안해 기회를 얻었고, 청년 피카소는 '게르니카'를 묘사한 현석의 말만 듣고 '납골당'을 그려내 자기 자신을 능가했다 (게르니카는 1937년에, 납골당은 1944년에 그림).
  • 스타워즈 클론워즈 3D에 그의 그림이 사용되었다. 다스 몰과 다스 시디어스의 라이트세이버 대결과정에서 게르니카 폭격과 한국에서의 학살 그림을 제다이와 만달로리안으로 리믹스한 그림이 나온다. 물론 만달로리안의 선전 기념화 인지라 학살당하는 게르니카 주민은 제다이로 총을 쏘는 군인들은 만달로리안 병사들로 바뀌어서 나온다.
  • 영화 타이타닉(영화)에서 간접적으로 언급된다. 로즈가 타이타닉을 탈 때 가지고 간 그림 중에 피카소의 그림들이 있고, 이를 본 칼이 '그 피카소인가 하는 친구, 성공하지 못할걸.'이라고 비하한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로즈가 들어 본 그림은 피카소의 걸작 중 하나인 '아비뇽의 처녀들'이다. 물론 피카소의 작품이 타이타닉에 있었다는 이야기는 픽션.
  1. 입체주의로 유명할 뿐, 피카소가 늘 입체주의 예술만 한 것은 아니다.
  2. El Mund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