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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 런던 올림픽에서 남편인 에드거 시어스와 함께.
1 소개
1881년 9월 16일-1917년 9월 9일
최초의 여자 피겨 스케이팅 선수.
마지 시어스는 영국의 피겨 스케이팅 선수로 결혼 이전 성은 케이브. 풀네임은 플로렌스 매들린 시어스케이브(Florence Madeline Syers-Cave)로 마지(Magde)는 애칭이다.
어렸을 적부터 피겨 스케이팅은 물론 수영과 승마에도 훌룡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1899년 만 18세에 영국의 대표적인 피겨 선수이자 그 해에 열린 세계 선수권 동메달 리스트인 에드거 시어스와 결혼하였고 그녀의 기술은 남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2 최초의 여성 피겨 스케이팅 선수
1902년 세계 피겨 스케이팅 선수권 대회에서 은메달을 땄다.
이렇게만 써놓으면 그게 뭐 별거냐 싶겠지만 홀로 여성의 몸으로 남자들하고 겨루어서 이루어낸 결과다!
지금 봐도 놀라운 일이지만 당시의 충격은 정말 어마어마했다. 전세계의 빅이슈였다. 규정 문제도 논란이 되긴 했지만 일단 그 당시에 여자가 혈혈단신으로 남자들의 영역에 뛰어들어 그들을 누르고 올라설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할 수가 없을 시기였기에 사람들은 몰라 뭐야 그거 무서워+충공깽 상태였다.
그 후에 그녀의 1903년 세계선수권 출전 허가를 두고 ISU에서는 "1. 드레스는 남자 심판이 발을 보는데 방해가 됨. 2. 여자 심판을 붙여야 됨. 3. 남자와 여자를 견주는건 어려움" 이라는 세 가지 이유를 들어 보류하고 새로운 종목인 여자 싱글 피겨 스케이팅을 창설하기로 했다.
오히려 마지는 1903년, 1904년 영국 피겨선수권에서 남자들을 상대로 연달아 금메달을 가져가며 영국 내에서는 남녀 통틀어 그녀의 상대가 될 피겨 선수가 없다는 걸 널리 알렸다. 더군다나 당시의 영국의 위상은 지금과 차원이 달랐다. 현재 미국과 같은 말 그대로 대영제국 시절이라 그녀의 영국 피겨선수권 2회 연속 우승은 더더욱 놀라운 일이었다.
1906년, 드디어 세계 피겨선수권에 여자 싱글 피겨 스케이팅 창설이 됐고 결과는 당연히 마지 시어스가 압도적인 실력으로 1906년, 1907년에 연달아 금메달을 가져갔다. 1908 런던 올림픽에서는 여자 싱글 금메달과 남편 에드거와 함께 페어 동메달을 가져간다.
그 후 기량 하락를 느낀 그녀는 정점에서 은퇴를 선언하고 1917년, 만 35세의 나이에 심장병으로 숨을 거뒀다.
3 당시의 시대상
현대사회에서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위치로 올라서게 된 역사는 생각보다 짧다.
모든 스포츠가 그러했지만 얼음 위도 여성들에게 개방되지 않은 영역인 건 마찬가지였다. 1891년 제1회 유럽피겨선수권대회가 열렸고 1892년 국제스케이팅연맹(ISU)이 결성된 뒤 1896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제1회 세계피겨선수권대회가 개최됐지만 여전히 남자들을 위한 대회였다.
페어 스케이팅? 오히려 여자 싱글보다 훨씬 늦은 1908년에야 추가됐고 아이스댄싱은 1952년에 추가됐다.
역사가 제일 오래된 유럽 피겨선수권은 더욱 보수적이어서 마지 시어스 사후에 소냐 헤니라는 초먼치킨 굇수가 등장해서 금메달 수집하고 있던 1931년에야 여자 싱글을 창설했다.
이런 보수적이었던 빙상계가 놀라울 것도 아닌게 그녀가 세계선수권에 출전한 1902년은 사실상 뉴질랜드를 제외한 거의 전 세계 모든 나라에서 여성에게 선거권도 없을 시절이다. 마지의 모국인 영국에서 여성의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주어진 건 1918년이었고 만 30세 이상의 여성들에게만 주어졌다가 1928년에 이르러서야 전 여성에게 남성과 동등한 참정권이 부여되었다.
그리고 이때의 피겨는 예술성? 그거 먹는 건가요? 수준으로 사실상 기술만 가지고 승부하는 굉장히 지루하고 재미없는 딱딱하고 엄격한 종목이었다. 여성이 육체적인 능력으로 남성을 이기기가 얼마나 힘든지는 말이 필요없다.
마지 시어스의 업적은 세계선수권 은메달 하나 금메달 둘 올림픽 금메달 하나 같은 메달의 개수 따위가 아닌 남성중심적인 시대와 사회에서 오직 실력으로 남자들과 겨루어서 인정을 받고 여성들이 빙상 위에서 설 수 있는 터를 잡은 거다.
4 그 외
전설적인 선수임에도 불구하고 어째서인지 피겨 스케이팅 명예의 전당에 실린 건 1981년에 가서야 실렸다. 그녀의 업적을 감안하면 늦게 실려도 너무 늦게 실린 셈.
이 항목을 읽다보면 눈치 챌 수 있겠지만 스포츠 페미니즘에서 두고두고 회자되는 선수이기도 하다. 일단 남자들과 홀로 맞짱떠서 여성 종목을 만든 선수가 이 사람밖에 없다.
1902년 세계선수권에 참가했던 남자 피겨 스케이팅 선수들과 당시 영국인들은 그녀가 금메달을 받아야 했다는 의견이 높았다고 한다.
T.D.리처드슨은[1] 금메달리스트인 울리히 살코는 그녀가 도전장을 던지면 받아들어 겨루어야 한다고 했다카더라 하는 얘기가 돌았지만 후에 밝힌 바로는 단지 루머일 뿐이지만 그땐 누구라도 그런 비슷한 말을 공공연히 했을 정도로 그녀의 실력이 울리히 살코와 견주어도 밀리지 않을 만큼 뛰어났기에 퍼진 루머라고 했다.
다만 리처드슨이 마지와 같은 영국인이고 그때 시절의 컬처쇼크가 더해진 걸 감안하면 객관적인 평가는 아닐 수 있다. 더군다나 살코는 자국민 버프+컬처쇼크에 과소평가 될 만한 선수도 아니다. 1908 런던 올림픽 피겨 스케이팅 남자 싱글 금메달리스트이자 세계 선수권에서 10차례나 우승한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의 선수다. 성이 낯익다고? 당연하지. 살코 점프[2]가 이 사람이 처음 선보인 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