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냐 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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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nja Henie

피겨 스케이팅 역사상 유래가 없는 전설, 아니 전설이란 단어로도 수식이 힘든 그냥 .

1 소개

1912년 4월 8일-1969년 10월 12일

노르웨이의 여자 前 피겨 스케이팅 선수.

오슬로에서 태어난 그녀의 아버지 빌헬름 헤니는 젊었을 적에 사이클링 세계선수권자로 그의 아이들에게 어렸을 때부터 스포츠를 접할 수 있게 해주었다고 한다. 특히 소냐는 운동신경이 매우 좋아 손꼽힐 정도의 테니스 실력, 승마, 수영, 스키, 발레를 두로 섭렵했고 피겨를 하던 오빠에게 이끌려 피겨를 시작하게 되었다. 전설은 어렸을 적부터 남달랐다 역사의 시작

1921년에 주니어 피겨 스케이트 대회에 참가하기 시작해 1923년 노르웨이의 여자 피겨 싱글을 만 11세에 쓸어버리고 1924년 동계올림픽에 국가대표로 나가 8위에 오르는 것으로 국제 무대 데뷔를 치뤘다. 그리고 2년 뒤인 1926년 세계선수권대회 여자 싱글 2위를 시작으로 메달 적금에 가입한다(...) 아닌 게 아니라 27년 세계선수권[1]부터 36년까지 9년간 세계선수권, 유럽선수권, 올림픽에서 계속 1위했다...

올림픽 3연패, 유럽선수권 6연패, 세계선수권 10연패. 포디움에 알박기 시전한 소여사님

2 피겨 스케이팅 역사에서

이 한 마디로 모든 게 설명된다.

대격변.

소냐 헤니를 빼놓고는 피겨 스케이팅 역사가 설명이 불가능하며 여자 피겨 스케이팅으로 좁히면 아예 얘기가 안 된다. 그녀가 대단한 건 단지 올림픽 3연패나 월드 10연패 같은 결과표를 놓고만 말하는 게 아니다. 여자 피겨 스케이팅 초창기라 경쟁이 심하지 않아서 가능했다는 개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는데 일단 1891년 제1회 유럽피겨선수권대회가 열렸고 1892년 국제스케이팅연맹(ISU)이 결성된 뒤 1896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제1회 세계피겨선수권대회가 개최되고 1902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영국마지 시어스가 남자 선수들과 겨루어서 은메달을 획득한 걸로 계기로 1906년 여자 싱글 종목이 독립되어 창설됐다. 20년이 지나도 그러나 은반 위는 여전히 보수적이고 남성 중심적이었다. 소냐 헤니는 피겨 초기의 '남성 위주의 엄격하고 예의바른 스포츠' 였던 모습을 아름다움이 중심이 되는 스포츠로 바꿨다.[2]

단순히 빙판 위에서 곡예 부리는 정도였던 피겨 스케이팅발레의 유연하고 부드러운 표현을 접목시키고 극적인 손짓, 몸짓, 표정을 더해 피겨 스케이팅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으며 스키의 스피디한 움직임을 더해 피겨 선수들의 활동반경을 은반 전체로 넓혀 피겨 기술 전반의 혁신을 가져온 게 바로 그녀였다.

채점에서야 기술적인 부분이 더 높다고 한들 당장 관중들의 눈에 실감나게 와닿는 건 아름다움(예술성)이 더 클 수밖에 없고 유연하고 부드러운 예술성 높은 표현은 여성 선수들이 더 표현하기 더 유리하고 더 수려하니 남성 중심적이었던 피겨 스케이팅이 점차 여성 중심으로 변해가게 한 중심에 바로 그녀가 있었다.


다 필요없고 눈으로 보자.

1908 런던 올림픽 남자 싱글 금메달리스트이자 세계선수권 10회 우승에 살코 점프 창시자인 울리히 살코의 경기 모습. 뭔가를 표현한다기 보다 기술 하나하나를 보여준다는 느낌이 강하다면


소냐 헤니는 뭔가를 표현하려 한다는 걸 느껴진다. 물론 두 영상간 시대 차이도 있고 지금 현재 피겨 스케이팅과는 많이 차이가 있어 이게 뭔가 싶기도 하겠지만 많은 올드 피겨인들이 지금도 소냐 헤니를 말할 때 가슴 벅차하며 그녀의 연기하는 모습을 직접 혹은 TV로 본 것을 잊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에는 분명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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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여자 피겨 스케이팅 선수들의 미니스커트 경기복도 그녀가 처음으로 도입한거다. 그 이전에 다 저런 크고 펄럭이는 긴 치마였다.

현대 피겨의 큰 원형은 소냐 헤니가 다 닦아놓은 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3 피겨의 대중화

그녀는 은퇴 후 아이스 쇼의 역사도 다시 썼다. 초창기의 아이스 쇼는 코믹하거나 기예단 같은 곡예적 기술에 의존했다. 한마디로 그냥 얼음 위에서 하는 서커스였던 것. 따라서 위에서 말했듯 소냐 헤니 이전의 엄격하고 예의바른 피겨 스케이팅은 대중들이 보고 즐기기에는 무리가 있었고 당연히 피겨와 아이스 쇼는 별개였다. 소냐 헤니는 본인이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피겨를 아이스 쇼와 접목해 얼음 위의 서커스였던 아이스 쇼의 위상을 한껏 끌어올렸으며 오늘날의 아이스 쇼의 원형을 만든 것도 소냐 헤니다.

거기에 위에서도 서술했지만 소냐 헤니가 없었으면 피겨 스케이팅을 보며 대중들이 아름답다며 감탄하는 거 자체가 불가능했을 일이다.

4 인기

예쁘고 귀여운 얼굴[3]에 어렸을 적부터 160cm라는 크지 않은 키지만 길고 가는 팔다리를 위시로 한 완벽한 신체비율에 운동으로 다져진 몸매며 미니스커트를 최초로 경기복에 도입한 것만 봐도 짐작할 수 있겠지만 패션 센스 또한 상당히 세련되어 노르웨이는 물론이고 전세계의 대스타였다. 거기에 선수로서 독보적인 실력까지 갖췄으니...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5 은퇴 후

1936년 동계올림픽, 세계선수권을 마지막으로 메달 적금을 해지 은퇴를 선언한다. 세상은 이 대스타를 가만두지 않았다. 은퇴하자마자 헐리우드에서 러브 콜이 쇄도를 했던 것. 각종 피겨 영화 주연으로 캐스팅되고 당시 헐리우드의 대세는 코미디 뮤지컬이었던지라 영화를 찍은 뒤 뮤지컬에도 진출해 호평을 받았다. 그 후에도 전문 기술이 필요한 피겨 스케이팅 관련 영화에 출연하면서 동시에 영화 음악, 제작 등 다방면에 걸쳐 활약과 함께 은퇴 후에도 성공적인 삶을 이어나갔다.

1938년에는 노르웨이 왕궁으로부터 26세의 나이로 최연소 기사작위를 수여받았고 2차 세계 대전 전 이미 연 수입이 200만 달러에 달했다. 위에서 말한 대로 아이스 쇼의 변혁를 비롯한 피겨의 대중화에 힘썼으며 1956년 헐리우드에서 은퇴한 뒤에는 세번째 남편 온스타와 고향인 오슬로에 돌아와 오슬로 근교에 대규모 현대 미술품을 전시하기 위한 공간으로 훌륭한 미술관인 '헤니 온스타 미술관' 을 건립하였고 말년에는 백혈병으로 투병 생활을 하면서도 현대 미술 후원 활동을 하다 1969년 파리에서 오슬로로 가는 비행 도중 57세의 일기로 사망하여 그녀의 남편과 함께 건립한 헤니 온스타 미술관을 내려보는 언덕에 남편과 같이 안장되었다. 사후 헐리우드 명예의 전당과 세계 피겨스케이팅 명예의 전당, 국제 여성 스포츠 명예의 전당에 모두 이름이 실렸다.

6 오점

도무지 결점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그녀에게도 지금까지 논란이 되는 한 가지 오점이 있다. 바로 나치와 관련한 이야기들로 1936년 독일에서 열린 동계 올림픽의 참가로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 지도층 인사들과 쌓은 친분 관계는 그녀가 종종 독일 베를린에서 공연을 하며 히틀러와 많은 독일 관객에게 강한 인상을 심으며 상당한 흥행 수입의 근원이 독일 나치 시기에 벌어들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그녀는 공연에 참석한 히틀러를 나치식 경례로 맞이한 사실과 동계올림픽이 끝난 후 베르히테스가튼에 위치한 히틀러의 별장에서 함께 점심 식사를 함께 하기도 했다.

또한 미국의 참전에 아낌없는 후원에도 불구하고 노르웨이를 점령한 나치에 대항하는 노르웨이 레지스탕스의 지원을 거절[4]하는 등 이중적인 태도가 논쟁의 중심이었으며 노르웨이를 점령한 나치가 그녀의 노르웨이 재산에 대해서는 압수나 몰수 등의 조치를 하지 않는 등 나치는 그녀에게 상당히 호의적이었다. 그래서 많은 노르웨이인들과 노르웨이계 미국인 사회에서 소외되기도 하기도 했다. 그러나 1953년과 1955년 공연을 위해 노르웨이를 방문하였을 때 많은 노르웨이인들이 그녀를 환영해주었다. 나치는 그녀를 단지 세계적인 대스타로서 존중해주고 소냐도 그에 맞는 예로 대한 것 뿐이라는 이들도 있으나 노르웨이 레지스탕스의 지원 거절은 어떻게든 변명할 도리가 없다.

결혼 생활도 순탄하지는 못했다. 2번의 결혼 실패 후 노르웨이의 선박업자이며 예술 후원자로 유명한 닐스 온스타(Niels Onstad)와 3번째 결혼이 그나마 안정된 결혼 생활이었다.

7 여담

아무리 뛰어난 피겨 선수도 이분과 비교는 하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 거의 신성불가침의 위치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5] 그 선수가 단순히 소냐 헤니보다 뛰어나냐 떨어지냐를 떠나서 피겨 역사에서 둘도 없을 전설이기에 그 예를 갖추는 것이라 생각하면 된다. 소냐 헤니와 함께 언급된다는 거 자체가 이미 그 선수가 세계 최정상급이지 않고서야 나올 수 없는 얘기다[6]. 심지어 비교한다고 쳐도 다 하나같이 '○○○와 소냐 헤니를 비교할 수는 없지만 그녀는 지금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위치에 있다' 라는 뉘앙스.

자신의 본업인 스포츠는 물론 영화, 음악, 미술까지 거의 예체능 전 분야에서 다양하게 활동하고 활동한 모든 분야에서 그 공로를 인정받은 전무후무한 인물이다. 나치에 관련된 오점이 너무나도 아쉬울 수밖에 없는 부분. 살아오며 오점 하나 안 남긴 사람이 어디 있겠냐만은 나치에 관련된 부분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신음한 유럽인들, 특히 그녀의 모국인 노르웨이인들 관점에서는 오점 하나 수준으로 치부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여성 최초 러츠, 악셀 점프 성공자로 피겨 관련 역사책들에 기록돼있는데 그녀의 아이스 쇼에 3년간 참가했던 미국에 거주하는 노장 스케이터에 의하면 소냐의 악셀 점프는 프리 로테이션[7]이 심한 살코에 가깝다고 한다(2000년 증언). 하지만 프리 로테이션은 구 체점제 시절 여자 피겨에선 관행적인 것이었고[8] 소냐 헤니가 활동한 당시는 적어도 여성 피겨에 있어선 프리 로테이션이라는 개념 조차 희소했을 때라 저 노장 스케이터의 말은 시대착오적이라는 비판과 함께 묻혔다. 더군다나 그녀가 아이스 쇼의 개념과 위상을 홀로 뒤바꾸던 때는 은퇴 후라는 걸 감안하면...
  1. 세계선수권 5연패 기록을 하였던 헤르마 자보를 꺾었는데 당시 5명의 심판 중 노르웨이인이 3명, 독일인 1명, 오스트리아인 1명 중 노르웨이인 3명은 소냐 헤니, 독일인과 오스트리아인은 자보의 손을 들어주어 논란이 있었다. 어쩌면 피겨판은 초창기부터 썩었음을 보여주는 대목. 헤니는 다음 시즌에 다시 대결을 하자고 제안했지만 이미 올림픽 금메달, 여자 싱글 세계챔피언 금메달 5개와 페어 세계챔피언 메달 2개를 갖고 있던 자보는 그 대회를 끝으로 은퇴해버렸다.
  2. 당시 빙상계가 얼마나 남성중심적이었냐면 세계선수권이나 동계올림픽보다 오래 된 유럽선수권이 1931년에야 여자 피겨 스케이팅 싱글을 창설했다.
  3. 심지어 엄청난 동안으로 본 항목 맨 위의 사진은 30대 중반의 모습이다.
  4. 이게 가장 치명적이다. 그동안 나치에게 받아온 환대가 신경쓰였다 할지라도 차라리 노 코멘트로 일관하거나 침묵했었으면 좋았을 것을...
  5. 개인사를 제외하고 순수하게 피겨 스케이터로서는 그렇다는 말이다. 나치 관련해서는 얄쨜없이 까인다.
  6. 카타리나 비트, 페기 플레밍, 미셸 콴, 김연아 정도
  7. 점프가 시작되기 전에 미리 몸이나 발을 틀어서 반 바퀴 이상 회전을 넣고 점프하는 것.
  8. 사실 이토 미도리 이전의 여자 피겨 선수들한테 프리 로테이션 가지고 딴지 걸면 해당 안 될 선수들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