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츠다이라 카타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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松平容保
1836.2.15 ~ 1893.12.5

일본 에도시대 말기의 다이묘. 오슈 아이즈 번 9대 당주. 교토 슈고직을 역임하였다. 다카츠 4형제의 1인.[1]

1846년 아이즈 번 8대 당주인 마츠다이라 가타타카의 양자가 되어, 1852년 번주를 승계하였다. 1860년 에도막부의 가로 이이 나오스케사쿠라다몬 사건으로 살해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에 막부는 나오스케의 살해범들이 주로 미토 번 출신[2]의 무사들이란 이유로 미토 번을 토벌하려 하였고, 가타모리는 이에 반대한다. 1862년 쇼군의 후견인인 하토츠바시 요시노부, 후쿠이 번주 마츠다이라 요시나가의 추천으로 교토 슈고직에 임명된다. 본래 병약했던 가타모리는 가신들의 반대를 이유로 거절하였으나, 요시나가의 강권에 결국 받아들인다.

처음 교토 슈고직에 임명되었을 때 존왕양이 파와의 대화로 조정을 시도하여 도쿠가와 요시노부등의 불만을 샀다. 하지만 무로마치 막부쇼군아시카가 다카우지, 아시카가 요시아키라, 아시카가 요시미츠의 목상을 훼손하고 목을 강에 버린 아시카가 목상효수 사건이 일어나자 공무합체파와 존왕양이파에 적대하게 된다. 이후 신선조의 전신인 로시구미를 조직하여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의 경호와 교토의 치안유지를 맡긴다. 금문의 변 사건이 일어나자 조슈 번과 아이즈 번은 각각 좌막/토막의 선봉에 서고, 신센구미와 사쓰마[3]은 수도 부족하고 훈련과 장비도 부실했던 조슈 군을 격퇴하나 교토는 불바다가 된다. 1866년 고메이 덴노[4]가 사망하자 교토 슈고쇼쿠를 몇차례나 사퇴하였으나, 막부와 조정의 반대로 계속 교토에 남게 된다. 이후 대정봉환으로 에도 막부가 무너지자 교토 슈고쇼쿠도 폐지되게 된다.

도바 후시미 전쟁에 참가하였으나 메이지 정부군에 패배하였고 그대로 아이즈 번으로 퇴각한다. 오슈 센다이 번 번주 다테 요시구니와 오슈 요네자와번 번주 우에스기 나리노리가 결성한 오우레츠 열번동맹과 협력하여 오슈, 무츠, 에치고의 대다수 번들을 끌여들여 신정부군을 상대로 보신 전쟁을 벌인다. 하지만 시라카와구치 전투를 시작으로 니혼마츠 전투, 보나리토우게 전투에서 연전연패를 거듭한다. 마침내 와카마츠 성이 함락되자 1868년 11월 6일 항복한다. 보나리토우게 전투에서 성이 함락됐다고 착각한 11세~ 16세의 소년들로 구성된 백호대가 이이모리산에서 집단 자살하였는데 이를 가미카제의 원형으로 보기도 한다.[5]

항복 이후 돗토리 번의 감시 아래 도쿄에서 칩거하지만, 장남 가타하루의 가독 승계를 인정받아 화족이 된다. 이후에는 구 막부 측에 선 죄로 탄압받는 아이즈 번을 쓸쓸히 바라보며, 자신도 힘든 처지에 빠진 옛 가신들을 걱정하며 여생을 보낸다. 1880년 닛코 동조궁의 궁사가 되었으며 1893년 12월 5일 자택에서 사망. 사인은 폐렴으로 향년 59세. 가신들을 잊지 않았고, 신센구미곤도 이사미같은 인물들을 안쓰럽게 추억하는 발언을 남기기도 했다.

은혼마츠다이라 가타쿠리코는 이 인물을 모티브로 하여 만들어졌다.

훗날 그의 손녀 세츠코(勢津子)는 다이쇼 덴노의 차남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친왕과 결혼했다.
  1. 도쿠가와 요시카츠, 도쿠가와 모치노리, 마츠다이라 카타모리, 마츠다이라 사다아키
  2. 존황양이의 선두격 존재로, 존황사상에 기울어진 번사들이 많았다.
  3. 원래 사츠마 번은 조슈와 적대하는 입장이었다. 양자를 극적으로 동맹시킨 것이 사카모토 료마.
  4. 메이지 덴노의 아버지
  5. 안타깝고 어리석은 이야기이지만, 후쿠시마 근방 지역에서는 미담으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충격과 공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