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이 나오스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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井伊直弼
(1815-1860)

일본 에도 막부말기의 정치가. 별명은 조상인 이이 나오마사와 같은 이이의 붉은 귀신(井伊の赤鬼) 2세

1815년, 히코네(시가현) 번주의 14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위로 형들도 많은데다가 어머니가 첩실인 탓에 그에게 후계자 자리가 돌아갈 기회는 없었다. 노베오카번에서 양자로 들이려고 생각했던 적을 빼면 다른 가문에서 양자이야기도 없었을 정도. 부친의 사후 산노마루 오스에쵸의 저택으로 옮겨가 30대 초반까지 그곳에서 지냈다.

그곳에서 은둔자처럼 지내면서 여러가지 취미생활을 했는데 다도라든지 와카, 북치기, 참선같은것을 배웠으며 그외에도 창술, 거합도를 익히기도 했다. 그가 저술한 근대 다도의 명저 <茶湯一会集>의 권두에는 유명한 일기일회(一期一會)가 있다.[1]

그런데 1846년, 14대 히코네 번주이던 형 이이 나오아키의 후계자가 사망하면서 후계자가 없게되자 형의 양자로 들어가는 형식으로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1850년 이이 나오아키가 사망하자 36살의 나이로 15대 히코네 번주가 되었다.

히코네 번에서 번정개혁으로 명군소리를 들었다. 요시다 쇼인은 비할데 없는 명군이라는 평을 했다.

1853년 페리의 흑선내항때 히코네 번은 우라가의 수비를 맡고 있었다.
중앙정계에서 로주(老中) 아베 마사히로가 미국의 개항요구에 대해 자문을 구하자 본래 쇄국론자였음에도 臨機応変に対応すべきで、積極的に交易すべきである(임기응변으로 대응해야 하며, 적극적으로 교역해야 한다)라고 개국을 주장했다. 다만 이이 나오스케가 적극적인 개항론자였는지에 대해서는 이론이 있는데 일각에서는 정치적인 방편에 불과했다고 보는 이들도 있다. 즉 이이 나오스케의 반대파들이 양이론자들이라 개항론자로 변신했다라는게 이들의 견해다.

이 시기의 쇼군 도쿠가와 이에사다는 병약해서 국정을 이끌 능력이 없었고 막부의 정치는 로주 아베 마사히로의 주도로 진행되었다. 본래의 막부체제와는 달리 아베 마사히로는 세력이 큰 다이묘들을 정치에 참여시키는 방식을 취했는데 이에 따라 이이 나오스케는 외교자문역으로 국정운영에 참여했다.

그러나 아베 마사히로나 미토 번주 도쿠가와 나리아키는 양이론에 가까운 입장이었고 특히 도쿠가와 나리아키는 양이론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이로인해 도쿠가와 나리아키와 이이 나오스케는 갈등이 빚어졌다. 미국과의 통상조약 비준을 놓고 양측은 대립했으며 도쿠가와 나리아키는 아베 마사히로에게 강력하게 어필해 개항론자인 마츠다이라 노리야스와 마츠다이라 타다가타를 로주에서 해임했다. 이이 나오스케는 여기에 강력하게 반발해 개항론자이자 자신의 친구인 홋타 마사요시를 노중수좌로 밀어올리는데 성공했다.

1857년, 아베 마사히로가 사망하자 홋타 마사요시는 마츠다이라 타다가타를 다시 로주로 불러올렸다. 여기에 1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사다의 후계자 자리를 놓고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지지하던 히토츠바시파와 대립해 키이 번의 도쿠가와 이에모치를 옹립하려 했다.

1858년 4월 23일, 난키파와 홋타 마사요시, 마츠다이라 타다가타 등의 정치공작에 의해 이이 나오스케는 다이로(大老)[2]에 취임했다. 그리고 12월에는 도쿠가와 이에모치가 14대 쇼군이 되었다. 그리고 또다른 현안문제이던 미국과의 미일수호통상조약고메이 덴노의 칙허를 받지 않고 카나가와에서 조약을 체결했다.

이런 행동에 외국인을 싫어했던 고메이 덴노는 크게 분노했고 히토츠바시파도 누가 니 맘대로 조약 체결하래???라고 이이 나오스케에게 따졌다. 이이 나오스케는 이를 홋타 마사요시와 마츠다이라 타다가타의 책임으로 돌려 그들을 해임시켰다. 그들의 후임으로 오타 스케모토, 카나베 아키가츠, 마츠다이라 노리야스를 임명했다.

이이 나오스케는 자신의 정책에 반대하는 양이론자들을 막부에서 축출시켰는데 자신과 대립하던 미토 번의 도쿠가와 나리아키와 마츠다이라 슌가쿠에게 칩거형을 내렸고 여러 관리들을 파면시켰다. 그러나 1859년, 오타 스케모토와 카나베 아키가츠가 해임되면서 점점 고립되는 형국에 몰리게 된다.

이런 조치에 미토 번의 가신들은 분노하여 코우메이 덴노에게 하소연했고 이에 코우메이 덴노는 무오의 비밀칙서를 내려 전례없는 파란을 일으켰다. 덴노가 직접 다이묘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일은 전례가 없었던 일로, 이이 나오스케는 이 사태에 크게 분노했다. 그리하여 히토츠바시파와 존왕양이파를 쥐잡듯 때려잡는걸로 결론을 내리기에 이른다. 이로인해 일어난 사건이 바로 안세이의 대옥사다.

결국 미토 번의 가신들은 이이 나오스케를 죽여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해 1860년 3월 24일 에도 성의 사쿠라다문 밖에서 입성하던 이이 나오스케의 가마 행렬을 기습해 그를 암살한다.(사쿠라다문밖의 변) 그가 암살 된 후 히코네 번은 안세이의 대옥사등의 실정을 이유로 감봉조치를 받으면서 히코네 번은 막부와는 거리가 멀어지게 되었다.

이이 나오스케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엇갈리는데 여러 반대에도 불구하고 개항을 결정해 일본의 역사를 바꾼 뛰어난 정치가라는 평과 반대파를 무자비하게 숙청하는 잔인한 권력자라는 평이 엇갈리고 있다. 또한 과연 이이 나오스케가 진정한 개항론자였는가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는 시각도 있는데 일각에서는 정치적인 방편으로 개항론을 선택했고 막부의 실권을 회복한뒤에는 다시 양이를 실행하려고 한게 아니냐는 지적이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그의 사후 자택의 서재에서 다량의 세계지도와 서양서적이 발견된것을 들어서 이이 나오스케가 부국강병이란 입장에서 서양과의 통상교류를 선택했다는 지적도 있긴 하다.

히코네 번에서는 번정개혁으로 백성들의 지지를 받았던 만큼 능력만큼은 있었던 인물이라고 볼수 있지만 중앙의 국정운영에 있어서는 반대파를 포용하지 못하고 대립갈등을 빚었던 것이 결국 그의 발목을 잡는 화근이 되었다고 볼수 있을것이다.

번주의 후계자로 지명되기 전까진 여러가지 취미생활로 풍류를 즐겼고 무예에도 수준급 실력을 길렀다고 한다. 검술, 거합도, 창술, 포술, 유술(유도)등에 능했다고 하며 거합도는 신심류를 배워서 자신만의 새로운 유파인 신심 신류를 열었다고 한다. 사쿠라다문 밖의 변에서도 미토 번 가신들이 쏜 총에 맞지만 않았다면 거합도로 위기를 벗어났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

사쿠라다문 밖의 변이 나기 그날 아침 '미코 번에서 수상한 움직임이 있다. 부디 주의하라'는 투서를 받았지만, 경호를 강화하지 않았다. 이전에도 이런 암살 경고 투서를 받은 적이 있었고, 암살 시도를 당한 적이 있었다. 이런 일로 경호 인원을 늘리는 것은 전례가 없었기에 바람직하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1. 원래 센노 리큐가 남긴 말을 제자 야마노우에 소우지가 적어둔 것을, 간결하게 사자성어로 정리한 것이 이이 나오스케다.
  2. 도쿠가와 정권에서 쇼군의 보좌역으로 임시적으로 로주들의 위에 위치하는 최고직. 토요토미 히데요시오대로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