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가미 요시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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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가타 현 야마가타 시 카죠 공원(霞城公園)에 있는 동상. 데와 합전 때 퇴각하는 우에스기군을 추격하라고 호령하는 것을 형상화했다고 한다.

最上義光(もがみ よしあき)
(1546.02.01 ~ 1614.02.26)

데와의 여우,[1] "데와의 효장"

1 개요

일본 전국시대다이묘이자, 데와 국 야마카타 번의 초대 번주.

아버지인 모가미 요시모리, 어머니인 오노 쇼쇼의 장남으로 아명은 하쿠쥬(白寿).

1560년에 성인식으로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테루로부터 이름을 받아 요시아키로 개명하였으며, 3월에 사가에 성을 공격하는 것에 처음으로 출진했지만 실패로 끝났다. 1563년에는 아버지와 함께 쇼군 요시테루를 알현했다고 하며, 1564년에 여동생 요시히메다테 테루무네에게 시집 가서 다테 마사무네를 낳았으므로 이후 마사무네의 외숙이 되었다.

1570년에 아버지인 요시모리와 다투었다가 5월에 가신인 우지에 사다나오의 중재로 화해하여 8월에 가독을 상속했다고 하며, 1574년 1월에 요시모리와 사이가 악화되면서 요시모리가 다테 테루무네에게 구원을 요청하여 텐도 요리사다, 시라토리 나가히사, 쿠라조 요리자네, 노베사와 미츠노부 등이 테루무네에게 동조하는 등 위험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들을 모두 물리치면서 9월 10일에 유리한 상황에서 강화하여 다테 가문으로부터 독립하였고, 아버지인 요시모리와는 화해하는 한편 1575년에 동생인 나카노 요시토키를 죽였다.

다테 가문으로부터 독립에 성공했지만 모가미 가문의 분가의 일원인 텐도 요리사다, 히가시네 요리카게, 카미노야마 미츠카네, 시라토리 나가히사 등은 따르지 않았으며, 1577년 텐도 요리사다를 맹주로 한 모가미 분가로 구성된 모가미 8순과의 전투 도중에 화친을 맺어 요리사다의 딸(텐도고젠)을 측실로 맞아들인다. 1578년에 카미노야마 미츠카네가 테루무네의 지원을 받아 공격하자 카시와기야마 전투를 벌였는데,(결국 대패해서 본성인 야마가타 성이 4방으로 포위되어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요시히메가 가마를 타고 전장으로 난입하여 그 싸움을 중재하면서 화의를 맺었다.

1579년에는 중병에 걸린 것 같아서 유도노 산에서 기원을 행했다고 하며, 1580년에 미츠카네의 부하인 사토미 민부에게 내통하면 카미노야마 령을 주겠다고 약속으로 꾀어내어 민부를 통해 미츠카네를 살해하도록 하면서 요시아키에게 항복하자 카미노야마 성을 점령하였으며, 1581년에 오나바자와에서 우마소로에라는 행사를 통해 그 힘을 과시하였다. 같은 해에 텐고 가문의 인척인 호소카와 나오모토를 마키가하라 전투로 격파하여 오구니 성을 점령하였으며, 여름에는 오노데라 가문의 가신인 사케노베 히데츠나를 공격했다.

1582년에 텐도고젠이 모가미 요시치카를 낳고 죽었기 때문에 분가인 텐도 가문과의 화목이 깨졌으며, 1583년에 다이호우지 요시우지가 모가미 공격을 계획하자 그 가신인 토우젠지 요시나가를 내통시키게 하여 요시우지를 급습하면서 요시우지를 자결시킨다. 1584년에 시라토리 나가히사의 딸을 장남인 모가미 요시야스의 정실로 맞아들여 회유를 시도했지만 응하지 않자 병으로 위독하다는 것으로 나가히사를 야마가타 성으로 유인하여 죽이면서 야치 성을 공략하였으며, 이어서 사가에 타카모토를 공격하여 자살시키는 것으로 사가에 가문을 멸망시킨다.

또한 아버지인 요리사다의 뒤를 이은 텐도 요리즈미를 공격하였다가 모가미 팔순의 한 명인 노베사와 미츠노부의 분전으로 패하여 퇴각하자 미츠노부의 적남인 야스미츠에게 차녀인 마츠오히메를 시집보내 야스미츠를 끌어들이거나 히가시네 요리카게의 가신인 사토미 겐우에몬을 내통시켜 히가시네 성을 공략했으며, 이에 궁지에 몰린 요리즈미가 코쿠분 모리시게를 의지하면서 달아나자 코쿠분 모리시게를 의지하자 데와를 통일했다.

1586년에 오노데라 요시미치와 아리야토우게에서 싸워 승리하였으며, 1587년에는 다이호우지 요시우지의 동생인 다이호우지 요시오키우에스기 카게카츠에게 접근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내어 요시오키를 공격하여 자결시켰다. 1588년 2월에 조카인 다테 마사무네오오사키 요시타카를 공격하여 오오사키 합전을 벌이자(오오사키 가문은 요시아키 측실친정이다) 원군을 보내어 다테 군을 격파했지만 여동생인 요시히메가 가마를 타고 전장으로 난입하자 다테 군과 화목하게 된다.

8월에 우에스기 군의 공격으로 쥬고리가하라 전투로 쇼나이 지방을 빼앗기는 등 우에스기 군과의 전투가 계속되는 와중에 이전부터 친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통해 교섭했다가 나오에 카네츠구이시다 미츠나리를 통해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접근하였기 때문에 쇼나이 지방은 우에스기 령으로 공인되어 쇼나이 지방을 되찾지 못했다. 1590년에 오다와라 정벌에 참전하여 히데요시를 알현하여 영지 24만 석을 받았으며, 아버지인 요시모리의 장례로 늦게 참전했지만 사전에 이에야스와 교섭하여 문책은 없었다고 한다.

같은 해에 오슈 징벌 때 발생한 센보쿠 잇코잇큐가 일어나자 오노데라 가문의 영토로 출병하였으며, 1591년에 이에야스가 쿠노헤 마사자네 토벌을 하려고 할 때 차남인 이에치카를 도쿠가와 가문의 시동으로 출사시켰다. 딸 코마히메가 매우 아름다워서 이 해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카 겸 양자인 도요토미 히데츠구의 눈에 들어 그의 측실로 들어가게 되었으며, 삼남인 모가미 요시치카에게 히데요시를 섬기게 하였다.

1592년에는 히젠 나고야 성에서 체류하거나 야마가타 성의 개축을 시작하였으며, 1594년에 오노데라 요시미치의 신하인 야기시와 미치타메에게 가짜 서신을 보내어 요시미치가 미치타메를 참수하게 만들어 요시미치와의 싸움에서 연이어 승리했다. 1595년에 히데츠구가 모반 혐의로 할복 자살을 하자 딸인 코마히메는 연좌되어 처형당하였으며,[2] 요시아키도 이 사건에 연루되어 근신 처분을 받았다. 요시아키는 가정을 꽤나 아끼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 사건으로 히데요시를 마음속 깊이 증오하고 경멸하게 되고, 일단 본인까지 연좌되는 일을 피하자 정치적 파장을 염려한 히데요시가 벼슬을 주어 달래려고 했음에도 핑계를 대서 얼굴조차 보지 않으려고 했다고 한다.

이렇게 도요토미 가문에 깊은 원한을 가진 탓에 1600년에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즉각적으로 동군에 가담하여 케이쵸 데와 합전에서 이에야스의 지시로 우에스기 카게카츠를 견제하다가 장남인 요시야스를 인질로 보내어 강화를 도모하려고 했다. 하지만 아키타 사네스에와 결탁하여 우에스기 군을 공격하려는 것이 알려져 성립되지 않았으며, 우에스기 군과 오노데라 군이 연합하여 공격하면서 케이쵸 데와 합전이 일어나자 3000여명으로 2만여명을 막아냈다. 우에스기 군이 퇴각하자 우에스기 령의 쇼나이 지방, 유리 군, 오노데라 가문의 요코테 성을 공략하였다.

이 공로로 이후 57만석을 받아 데와 야마가타 번의 번주가 되었으며, 아키타 사네스에가 동군과 내통을 한 사실을 호소하여 이봉되게 하였다. 에도 막부 성립 이후에는 번 통치에 대해서는 백성에 대해 너그러워서 그가 생존할 당시에는 잇코잇키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1603년에 장남 요시야스와 사이가 벌어져 요시야스가 암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는데, 이에 관해서는 차남인 이에치카에게 가독을 잇게 하려는 막부 또는 이를 이용하려는 가신과 관련되어 있다는 설이 있다.

  • 막부와의 문제보단 가신들과의 문제가 맞다고 한다.
모략, 암살, 외교협상 등등 정략을 피려고 하면 사탕이 필요하다. 사탕주고 다시 빼앗고 죽이는 조카같은 행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신들의 세력이 워낙 커졌다. 예를 들어보면 쇼군이었던 이에야스 가신 중 속칭 '도쿠가와 4천왕' 중 1명인 혼다 다다카쓰의 영지가 10만석 이었던데 반해 요시아키측 가신이었던 다테오카 미츠시게의 영지는 4만 5천 석(일본 전토를 주무르는 막부가 개국공신에게 10만석을 준 거고 일본 일부 57만석을 가진 다이묘가 가신에게 4만5천석을 준 것이다)이었다. 세력이 비대해진 가신들과 선대 정도의 영기와 능력이 없는 후대와의 싸움은 일본이 전제왕권이 아니었던 저 시기엔 가신들의 승리다. 저 당시 요시아키는 국정을 이복동생에게 맡기고 있었는데 그에 반발한 장남과 요시아키의 동생(가신 연대가 차남을 바지사장으로 세워 정쟁이 벌어졌다고 보는 것이 정론이다. 아직 저 시기에는 요시아키가 건재하긴 했지만 요시아키부터도 히데요시의 시동 출신인 장남보단 이에야스의 시동인 차남을 후대로 주고 싶어했기 때문에 투쟁을 묵인했던지 아니면 장남을 죽였던지?) 후에 막부 입장에선 당연히 너무 많은 영지를 가진 모가미가를 견제하기 위해서 더 없이 좋은 기회였고 요시아키 사후 다테 가문을 이용해서 바로 개역시켜 버린다.

1611년 3월에 종4위하 사코노에쇼쇼, 데와노카미에 임명되었으며, 1613년에 쇼군인 도쿠가와 히데타다를 알현하고 슨푸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알현하여 모가미 가문의 후사를 부탁했다고 한다.

'데와의 여우'라는 이명도 그렇고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의 일러스트와 능력치를 보면 음험한 책략가의 이미지로만 비춰지는데, 실제로 적의 내부 분열을 이용하는데 능하고, 자신의 즉위에 방해되는 아버지를 유폐하고 동생을 참살하는[3][4] 등의 모습도 있지만, 사실 무용이 뛰어난 무사를 흠모하고 아랫사람에게 관대하며 시문을 좋아하는 의외의 일면들이 있었다고 한다. 특히 그의 글솜씨(특히 와카)는 대단해서 일본 문단 내에서도 그를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 중요한 작가 중 한명으로 평가하는 학자도 있다.

나름대로 호걸스러운 면모가 있는 인물임에도 음험하고 간교한 이미지만 남게 된 것은 사이가 나빴던 외조카 다테 마사무네가 워낙 대중적 인기가 많고, 요시아키의 손자 대에 이르러 모가미 가문이 야마가타 번의 지배권을 상실하면서 덩달아 요시아키까지 폄하된 면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간계에 능한 것은 맞지만 음험한 인물은 아니었다. 사후가 문제였지만, 살아생전엔 전국시대 그 흔한 골육상잔의 역사도 없었고(요시토키라는 동생 자체가 개역 후 다테 측에서 만들어낸 인물이란 것이 거의 정설이다) 그와 적대하고 있던 세력이라도 한번 굴복시킨후엔 함부로 토사구팽하거나 하지 않았고 후대해주었다. 당장 모가미 8순의 중요한 위치였던 노베사와 미츠노부는 요시아키와 사돈이 되었고(상대방의 딸을 인질로 받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딸을 인질로 준 것이다. 보통 저 시대에는 승자측이나 유리한 측이 상대방 여자를 인질로 받는데 요시아키는 자신의 딸을 시집보내면서 인질이 아니라 진짜 사돈관계를 맺은 것이다) 다이호우지 가문 같은 경우 낭인이 되어 우에스기 가문에 식객으로 있던 자손을 자신의 영지를 떼어주며 가문을 재건시켜줬다(물론 다이호우지 가문 자체가 요시아키의 계략에 의해 무너지긴 했다). 저런 인품이 널리 퍼져 요시아키 휘하로 들어가려는 세력이 많았다.(오히려 비슷한 과정으로 세력을 확대한 다테는 매번 반란, 배반, 학살의 악순환을 반복했다)

일본에서 대히트한 NHK 대하드라마 독안룡 마사무네에서도 음험하고 간교한 모습이 강조되어 나왔지만 지역의 역사적 인물을 너무 폄하한다는 야마가타 현의 항의가 잇따라 극 중반부터 음험하고 간교하지만 영지 내 백성들을 생각하여 좋은 정치를 하는 모습이나, 딸의 죽음으로 슬퍼하는 모습이 나오는 등, 인간적인 면모가 부각되어 이후 모가미 요시아키를 재평가하는 사람도 많아졌다.

1.1 일화들과 재평가(연어님)

암살과 모략을 즐겨 구사하는 음험한 장수로서의 이미지가 무척이나 강했지만, 근래의 재평가와 사료 연구에 의하면 가족들과 부하 장수들, 영민들에게 매우 따뜻한 지,인,용을 겸비한 명장으로, 특히 사람 좋은 영주로서의 면이 강했다고 한다.

군기물에서 일컬어지는 모가미 요시아키의 평가는

  • 요시아키 공은 지·인·용을 겸비하였으며, 그 명성은 매우 높아 복종하지 않는 자가 없다.
  • 성격이 온유하여 무도하지 않으며, 용맹하며 간사하지 않다.
  • 무용은 남을 뛰어넘고, 자비가 깊으며 제장을 잘 보살피기를 부모와 같이 한다.

등등등. 요시아키의 기존 이미지와는 상당히 다르다.

요시아키가 분명 암살이나 배반같은 모략을 잘 구사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모가미 가문 자체가 명문이기는 하나 이미 쇠락하여 조부 때 이미 다테 가문에게 항복하여 종속된 상태였고, 주변 호족들은 텐도 요리사다를 대표로 하여 '모가미를 따를 이유가 없다!'며 적대하고 있었으며 영지와 병력조차 거의 없었던 상황이었다. 따라서 가문의 부흥을 위해서는 이러한 모략을 쓰는 것은 비난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특히나 젊었을 때는 본인의 성격이 무용을 좋아하는 성격이었던 것도 있고 병력이 크게 부족했었는지 직접 전열에 서서 돌격해 싸운 적도 많다고 한다. 적군의 대규모 습격에 곤란해진 요시아키는 직접 철포를 들고 혼자 뛰쳐나가서 몰래 적장을 저격해서 적을 물리쳤으며, 적이 전열을 정비하고 다시 오자 가신들이 말리는데도 불구하고 직접 선두에 서서 돌격하여 간신히 적을 물리쳤다! 이렇게 간신히 적을 물리치고 적장의 목을 들고 돌아오자 모가미 가문의 중신인 우지이에 사다나오는 요시아키에게 "다이묘가 그런 추레한 모가지를 얻는들 어디다 쓰겠는가"하면서 격하게 간언했고 그 말을 들은 요시아키가 목을 내팽개치는 사건도 있었다고 한다.[5]

전쟁에서는 특히 철포의 사용에 능통하여, 2천 정 이상의 다수의 철포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장수들도 철포 전술에 능한 장수들이 많았다고 한다. 특히나 하세도우 전투에서 우에스기 가문을 물리칠 때 철포가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또한 라이벌 다테 마사무네처럼 내정, 특히 치수에 뛰어났으며. 백성들에게도 매우 잘해주어서 요시아키 생전에 단 한번의 잇키도 없었다고 한다.

눈물이 많았다는 말도 많고, 성격적으로도 상당히 온유하고 허례허식을 싫어하는 스타일이었는지 가문의 맹장들과 몸소 씨름을 하는게 취미였다는 이야기도 있으며 손수 일하는 것도 꺼리지 않았다고 한다. 어느 날 모가미 요시아키의 집 앞에 외국에서 온 사신이 와서 요시아키에게 편지를 가져왔다고 했고, 집 앞에서 일하던 큰 키의 인부 하나가 편지를 가져가려 하자 사신이 "중요한 편지라 직접 만나 전해드려야 한다"고 거절하였는데, 인부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집안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그리고 잠시 뒤에 모가미 요사아키가 직접 나오는데 아까 그 인부여서 사신이 당황했다는 일화도 있다.

특히 2ch에서 가장 유명한 별명은 '연어님'. 연어를 아주 좋아하고 사랑하여, 가신들에게 보낸 편지들 중에 연어에 대한 언급이 많다. 쇼나이 해안지방을 정복하고 가신에게 보냈던 편지에는 "이제 연어를 마음껏 먹을 수 있다!"고 기뻐했다는 내용이 남아 있으며, 그 외에도 가신들에게 "연어를 보내줘서 고맙다", "연어 맛있었다"고 보낸 편지도 많이 남아 있다고 한다. 특히 쌀 이외의 세금으로 연어도 받았다고 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다테 마사무네에게도 공물이나 답례품으로서 자주 연어를 보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가족들, 특히 여동생인 요시히메를 매우 사랑하여 2ch로부터는 시스콘이라고도 불리운다. 특히나 여동생에 대한 애정을 짐작케 하는 수많은 달달한 편지들이 다수 발견되었고, 심지어 다테 마사무네가 오사키 가문에게 패배한 후 벌어진 모가미와 다테와의 전쟁 때는 싸움을 말리기 위해 요시히메가 직접 가마를 타고 전쟁터에 당도하자. 그 모습을 보고 통곡하며 마사무네와 화의하고 물러간다. 그리고 이후에 보낸 편지에서는 "그대를 생각해서 화의한 것은 아니었다."(츤데레)라고 쓰여있었다고 한다....

다만 이 가족 사랑은 큰 비극으로 결말이 나는데.. 모가미 요시아키가 사랑하는 막내딸이자 절세의 미녀로서 동국 제일의 미녀라고 불리었던 코마히메가 도요토미 히데츠구의 처형 때 연루되어 연좌되어 15살의 나이로 시내에서 조리돌림 후 자갈밭에서 처형당한다. 당시 처첩들은 연좌하지 않는것이 관행이었고 심지어 코마히메는 아직 히데츠구와 첫날밤조차 보내기 전이었는데, 모가미 요시아키가 히데요시에게 필사적으로 구명을 요청했는데도 불구하고 처형되었다. 이에 요시아키는 충격을 받아 식음을 전폐하고 쓰러졌다고 하는데 히데요시는 이런 모가미 요시아키를 코마히메의 아버지라는 이유만으로 근신처분시키기까지 했다. 또한 사랑하는 외동딸이 사망하자 모가미 요시아키의 정실 부인이자 코마히메의 어머니었던 오사키히메도 자결. 이후 사랑하는 딸과 아내를 잃은 모가미 요시아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연합하며 반 히데요시파의 선두가 된다.

결론적으로 일화들을 살펴보면 알 수 있듯이 매우 뛰어난 명군이자 인간적인 다이묘였으나 악당으로서 이미지가 강한 이유는 무엇보다 가문이 망해버리면서 모가미 요시아키에 대한 대부분의 역사적 기록을 적측인 우에스기+다테 가문의 역사기록에 의존하기 때문... 적국의 인물인데 당연히 좋은 사람으로 묘사할 이유가 없다.. 또한 두 번째 문제는 드라마의 주인공 등 인기가 좋은 인물인 다테 마사무네와 나오에 가네츠구의 공통적인 적이라는 거.. 당연히 악당 역할로 나오다보니 좋게 그려질 리가 없다.

예나 지금이나 촌구석으로 대접받거나 지역감정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도호쿠 출신 다이묘인 만큼, 요시아키도 향토애가 깊은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나이가 들자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죽기 전에 고향의 물을 마시고 싶다'라면서 귀향을 허가해 줄 것을 호소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덤으로 현대의 야마가타 현에서도 고향을 사랑한 이 인물의 인기는 매우 높은데, 이런 멋진 동상이 헌정되어 지방의 관광명소가 될 정도다.[6]

2 대중매체에서

2.1 영상물

NHK 드라마인 《독안룡 마사무네》에서는 故 하라다 요시오가 담당했다. 초반에는 마사무네의 건방진 행동으로 인해 도요토미 가문에게 다테 가문이 멸망당할까봐 정서불안에 빠진 동생 요시히메를 은연중에 부추겨서 마사무네 독살 소동을 벌이거나 '와하하하하!'하고 웃어대면서 사람을 칼로 찔러죽이는 등, 실로 피도 눈물도 없는 악당으로만 묘사되었다. 하지만 야마가타 현의 인기 역사인물을 너무 형편없이 폄하했다는 항의로 인해[7] 후반에는 가족애를 보이거나 불쌍하게 묘사되는 등 다소나마 방향이 전환되었다.

도요토미 정권 성립 이후 로리콘 도요토미 히데츠구에게 코마히메를 억지로 빼앗기고 부들거리며 굴욕을 참는데[8] 이후 히데츠구의 모반 의혹으로 코마히메가 억울하게 죽임을 당할 위기에 처하자 명예도 체면도 잊어버리고 딸을 살리기 위하여 원수인 마사무네의 정실 메고히메를 찾아가 고개를 숙이고 애걸한다. 헌데 마사무네의 목숨도 위험한 판국이어서 별 도움이 되지 못했고 결국 코마히메는 참살당하게 된다. 머리를 풀어헤치고 '내가 권력에 굴하지만 않았어도...'하면서 분노에 몸을 떠는 요시아키의 모습에 시청자들의 평가가 많이 바뀌었다고.

이외에도 가문을 위해 눈물을 머금고 장남인 마사무네를 죽이려다가 실패해서 차남이 장남 손에 살해당하는 끔찍한 사건을 겪고 머리가 하얗게 세어 버린데다가 정신착란에 빠진 요시히메를 끌어안고 '요시, 이제 괜찮다. 내가 보호해주마...'라면서 껴안는 장면이 명장면으로 꼽힌다. 다테 가문이야 어차피 귀한 여동생을 빼앗아 간 적의 가문이었으니까 걱정할 이유가 없지만 자식을 죽이려 했다는 죄책감에 빠져 있는 동생 요시히메를 걱정한 나머지, 후일 마사무네를 만나서 '네 어머니도 다 가문을 위한 마음에 그런 선택을 한 것이다. 너무 미워하지 마라'(유체이탈화법)라고 설득해서 극적인 화해를 주선하는 등, 나름 자신이 개입했던 비극을 수습하는 모습도 보인다.

2.2 전국 바사라 시리즈

모가미 요시아키(전국 바사라) 항목 참조.

2.3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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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만인의 노부나가의 야망의 요시아키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에서도 대체로 모략 쪽을 강조한 능력치로 나온다. 창천록의 경우 통솔은 70대로 평범하지만, 정치가 80대에 지략이 90대 중후반을 찍어 모략에 특화된 게임 시스템과 상성도 좋다. 천하창세에서는 전쟁을 전혀 하지 않아도 정략,모략만으로도 천하통일이 가능한 시스템이다 보니 초반 소다이묘 때를 잘버틴다면 op급 성능을 낸다(조카가 나오기 전까진 도호쿠 넘버1능력이고 조카가 나온 이후에도 지모,정치가 더 높기 때문에 더 쓸만하다) 천도에서는 통솔 82 무력 77 지력 96 정치 88로 쓸만하지만 의리가 무려 2... 특기는 모살로 일정확률로 상대 장수를 빈사에 빠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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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부나가의 야망 창조의 요시아키

노부나가의 야망 창조에서도 등장한다 능력치는 무용이 절륜하고 철봉의 달인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에 걸맞게 통솔과 무용이 상승하여 86, 85가 되었다. 특히 요시아키로 플레이하건, 마사무네로 플레이하건 조건을 만족시킨다면 오오사키 합전 이벤트를 볼수 있다. 내용은 상기된대로 패배한 마사무네군과 화룡점정하려는 요시아키군이 요시히메의 중재로 둘다 군사를 빼는건데 요시히메의 대사내용이 재미있다.

(과거 세력이 약한 모가미가가 다테 측에 인질을 주면서 시작했다. 다행히 계속 싸우면서도 인질은 안 건드렸다. 요시히메의 결혼 이후로도 다테 가문과의 싸움은 지속되었고 본거지였던 야마가타성이 다테 데루무네에게 포위되어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상황도 있었다. 저 당시 요시히메는 아직 돌이 채 안된 마사무네를 전쟁터에 끌고나와 모가미-다테 가문의 화친을 끌어냈다)
"과거 내 남편이 오빠 잡으려고 했을 때 마사무네로 살려줬다. 근데 지금 와서 잡으려고 하냐, 내 배에서 나온 놈인데 못 건드린다!"(잡아도 내가 잡는다?)

저러면서 다시 동맹상태로 간다. 창조에서 저런 이벤트가 중요한것이 저런 이벤트 발생 여부에 따라 가문스킬이나 무장스킬 획득여부가 갈린다. 실제 저 이벤트를 거치고 나면 마사무네는 오니(鬼)란 스킬을 얻을수 있다 물론 요시아키도 얻을수 있는 스킬이 있다.(요시아키로 저 이벤트를 봤다면 다테가 아니라 우에스기와 싸우게 된다)

세키가하라 전투 무렵 우에스기군과 싸우는 이벤트 무비에서 항목 상단에 있는 요시아키 동상과 똑같은 자세로 말을 타고 명령을 내리는 일러스트를 볼 수 있는데, 이 장면 직후 마에다 케이지가 쏜 총에 투구뿔이 부러진다. 안습.

2.4 태합입지전 시리즈

여기서는 무력이 조금 낮은 걸 제외하면 만능형. 무력을 제외하고 모든 능력치가 80이상에 지모는 91이며, 그 낮은 무력도 69면 심하게 낮은 것도 아니다. 능력치에 비해 기능이 조금 딸린게 아쉬운데 군자금 앵벌이를 제외한 내정쪽은 기대하기 힘들며, 전투에서도 족경이 3인 걸 제외하면 3 이상이 없다. 그나마 기마, 철포도 모두 2니 어떤 부대를 운용해도 평타는 쳐주긴 하지만. 특이점으론 인술이 3에 닌자들이 주로 쓰는 암토같은 기술들을 들고 있다. 물론 같은 코에이사 게임 답게 노부나가의 야망과 동일하게 의리 없고, 야심은 최고수준인 93. 그래도 거의 다이묘로 나오기 때문에 망하고 할복하거나 종속되거나 하는 게 보통이라 의외로 배반하는 모습은 별로 안 보여준다. 다이묘로 등장하지 않는 1560년 일륜의 장이라고 해봤자 아버지인 모가미 요시모리의 가로로 나오고.

2.5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

어쌔신 크리드: 메모리즈에서 등장하는데, 암살단원으로 등장한다.
  1. 여우처럼 교활하고 영민하여 모략과 암살을 즐겨 썼으며 세키가하라 전투 때 동군에 가담하여 가문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2. 원래 여성은 살려두는 것이 관례인데도 이를 무시한데다, 아직 정식 측실도 아닌 코마히메를 살해하고 시체를 가지고 돌아가지도 못하게 하고 묻었는데, 이 사건으로 아내도 뒤를 따라 사망했다고 한다.
  3. 다테 마사무네도 어머니와 사이가 매우 험악했고 요시아키와 같은 이유로 동생을 죽였다. 이외에 둘다 야전의 무용보다는 모략과 사전 공작에 능했고, 도쿠가와 막부 집권 이후에는 농업에 힘을 기울여 각자의 영지의 석고를 크게 늘리는 업적을 남긴 것도 닮았다. 둘의 사이가 나빴던건 일종의 동족혐오일지도?
  4. 다만 아버지와는 사이가 좋았다는 기록도 있고 동생인 나카노 요시토키는 실존인물인지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5. 당연한 얘기지만 다이묘가 다치거나 죽기라도 하면 그것만한 손실은 없기 때문에 전선에 다이묘가 나서는 건 부하에게 경솔하다고 욕을 먹어도 할말이 없다. 불리한 상황을 전장을 누비며 극복해낸 호조 우지야스는 자신의 얼굴에 난 여러 칼자국들을 용맹하다고 칭송하는 사람들을 '대장 얼굴에 칼빵이 있는 건 자랑거리가 아니다'라며 물리쳤을 정도이고, 코바야카와 히데아키는 대장의 신분으로 돌격전을 벌였다는 잘못으로 문책을 당한 적이 있다.
  6. 역동감 넘치는 포즈도 그렇지만 두 다리로 서 있는 것이 매우 비범한 기마상인데, 모가미 요시아키를 존경하고 있던 지방의 유지가 이 포즈를 구현하기 위해 엄청난 돈과 노고를 들여서 만든 것이라고. 덕분에 전국무장 중에서도 손에 꼽힐만한 박력있는 동상을 가진 다이묘가 되었다.
  7. 항목 내에도 언급되는 얘기지만, 특히 이 드라마는 적극적으로 조상의 상업화에 나서고 있던 당시 다테 가문의 당주 다테 야스무네가 자료와 고증에 참여한 탓에 전적으로 다테 가문의 자료만을 참고하고 마사무네의 입장에서만 진행되는 편향된 이야기가 되었다.
  8. 원래대로 따지면 도요토미 집안 사람들은 가문이랄 것도 없는 평민 나부랭이지만, 모가미씨는 아시카가 쇼군 가문의 일문으로 우슈(데와) 탄다이를 역임한 명문 중의 명문이다. 그런데다가 교양도 능력도 없는 히데츠구가 술김에 부린 억지로 귀한 딸을 뺏기게 생겼으니 이만한 굴욕이 없다. 물론 이건 드라마상의 연출이고, 실제로 히데츠구가 그런 횡포를 부리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