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왕릉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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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 의해 새단장 된 "호태왕 비."

1 개요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는 고구려 19대 광개토대왕에 대해 다루고 있는 비문이다.

414년에 광개토대왕의 아들 장수왕이 세웠다(장수왕 3년). 중국 지린성(길림성) 퉁거우에 위치해있다. 고구려 멸망 이후 남북국시대에는 이 비석이 어떻게 여겨젔는지 알수없으며 고려,조선시대까지만 해도 금나라 황제의 비 정도로 여겨젔다. 조선 말기에 가서 봉금제도가 해제되고 이 비문이 발견되면서 고구려 왕의 비문이라는걸 알아챈다. 마침 이 비문이 발견된 시기가 일제의 침략으로 인해 민족주의가 고조되던 시기라 천년이상 듣보잡이던 광개토왕이 엄청나게 미화되기도 했다.

크기가 엄청나게 큰데, 높이가 6.39m이다.

내용은 고구려 왕실의 연원에 대한 수사, 광개토대왕의 정복활동, 이하 수묘인 규정으로 이루어져있다.

2 발견과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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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멸망 후 그 존재가 잊혀졌다.(...).이것이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 신라를 도와 왜를 격퇴한 사실이 누락된 유력한 원인으로 추정된다. 19세기 재발견 전 문헌상의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 1370년 고려의 장군이었던 이성계가 원나라 잔존 세력 북원의 동령부를 정벌하러 갈 때 집안(集安)을 통과하는데, 고려사에서는 이곳을 황성이라 하였고 조선왕조실록에는 이 황성을 여진 황제의 성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 세종27년(1445) 용비어천가에서는 '성의 북쪽 7리 떨어진 곳에 비가 있고, 또 그 북쪽에 돌로 만든 고분 2기가 있다'고 전하지만 이것을 금나라의 유적으로 오인했다.
  • 성종18년(1487) 평양감사 성현이 집안(集安)에 가서 지은 망황성교(望皇城郊, 황성 들판을 바라보며)에서 집안을 황성(皇城), 왕릉을 황제능(帝陵), 비는 천척비(千尺碑)라고 하고 주변에 강이 흘러 천연의 해자 역할을 하기에 비문을 읽을 수 없다고 하였다.
  • 중종25년(1530) 동국여지승람에서는 집안을 황성평(금나라수도), 왕릉을 금나라 황제의 묘로 설명하고 높이가 10장이나 되는 농석이 있다고 하였다.
  • 중종31년(1538) 심언광이 집안 주변에 몰래 살고 있는 여진족에게 압록강 가에서 퇴거하라고 타일렀던 때, 집안을 황성(荒城)이라 하고 황제 유적의 큰 비(皇帝遺蹟巨碣, 황제유적거갈)이 있다고 하였다.

전술한 바와 같이 본격적으로 관심의 대상이 된 계기는 일본의 연구다.

광개토왕비가 소재한 지역은 청나라 시조의 성지라는 이유로 오랫동안 봉금되었으나 1876년 봉금의 해제로 그 존재가 중국의 금석학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당시 만주로의 이주가 많았기 때문에 개간 등 과정에서 훼손이 가해졌다.

본격적인 연구의 시작은 일본이었다. 육군 참모본부의 밀정 사코 가게아키가 탁본을 확보하였고 2년만에 참모부에서 도본이 나왔다. 이 자료가 이후 일본 뿐만 아니라 한국의 학자들의 연구의 기초가 되었다. 1970년대 이후 재일 사학자 이진희에 의해 '사코가 신묘년조 기사를 변조한 탁본을 제작하였고 이를 은폐하기 위해 비석 표면에 석회를 도포하였다'라며 조작설(일명 석회도말론)을 주장하여 센세이션을 일으키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유명한 주장이나, 이에 대해서 1981년 중국 왕건군의 조사 결과는 부정한다.

3 내용

높이 6.39m의 응회암에 정방형 예서로 각자하였는데 암석에 특별히 가공을 가하지 않았다. 각면 외곽에 윤곽선을 긋고 다시 세로선을 그어 행을 구분하였으며 글자의 크기는 11~16cm로 대개는 14~15cm 정도다. 44행 1775자 중 150여자는 현재 훼멸되어 판독이 불가능하다.

물리적으로는 4면으로 되어 있지만 내용상 3부로 나눈다. 제1부는 시조 추모왕의 건국설화로 시작하는 고구려 왕실의 연원과 광개토왕 업적에 대한 칭송 등, 제2부는 연대순으로 기록한 광개토왕의 훈적, 제3부는 그 수나 출신 등 수묘인에 관한 사항과 수묘인 제도와 법의 공표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비문의 내용상 왕릉에 세워졌던 것으로 추정하지만 정작 아직까지 광개토왕의 능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인근에 위치한 태왕릉이나 장군총 중 한 곳으로 추측할 뿐이며 두 무덤도 피장자의 신원은 불명이다.

2부 훈적 부분은 모조리 굴복하지 않거나 쳐들어온 적을 쳐부순 무훈의 열거로 이뤄진 점에 특색이 있다. 연대순으로 나열하고 있으며 1.왕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친정한 경우와 2.군사를 파견하여 벌한 경우로 나뉘어 확실하게 명시했다. 그리고 각 기사는 모두 토벌 대상 세력이 어떠어떠한 잘못을 저질러 구실을 제공하였으니 이에 벌하였다는 구조로 되어 있다. 이러한 구성은 3부의 수묘인 부분과 결부하여 전체를 하나의 맥락으로 해석하기도 하는데, 광개토왕 이래 수묘인을 정벌한 세력에서 끌어온 속민으로 두도록 했으므로 광개토왕의 정복전쟁은 곧 수묘역 제도를 지탱하는 토대였기 때문이다.

1775자 중 이른바 신묘년(391년) 기사 32자에 지난 1세기동안 집중적으로 조명이 가해졌다.

而倭以辛卯年來 渡海破百殘□□□羅 以爲臣民

(그래서) 신묘년(391년)에 왜가 와서 바다를 건너 백잔[1],□□□라를 깨뜨리고 신민으로 삼았다.

일본은 당대부터 꾸준히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서 백제와 신라,가야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라는 해석을 밀었지만 한국이나 북한 학계는 이를 부정해왔다. 정인보의 경우는 '왕의 훈적을 나열한 비에서 유독 고구려에 불리한 기사를 실을 까닭이 없다'는 이유로 의도적인 생략이 있는 것으로 보고, 오히려 주어를 고구려에 두어 '왜가 신묘년에 침공하니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 토벌하였다'는 식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하지만 저 문장의 앞에는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라는 문장이 나온다. 즉 정인보식으로 해석하면 '백제와 신라는 원래 신민으로 조공하고 있었다.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왔기에 (고구려가) 백제를 격파하고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혹은 왜를 격파하고 백제와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라는 뜻이 된다. 즉, 신라(혹 백제도 포함해서)는 원래부터 신민이었는데 또 신민으로 삼은 것이 된다. 또한 저 문장의 뒤에는 고구려가 왜를 물리치는 내용이나, 후퇴했던 왜가 신라를 포위했는데 그것을 고구려가 물리치는 내용 등이 써있기 때문에, 일본이 바다를 건너 백제와 신라를 깨뜨렸다는 것은, 고구려가 왜를 물리치기 전의 상황에 대한 설명, 다시말해 고구려에 유리한 기사를 싣기 위함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너무나 이상하게 생각될 백제, 신라에 대한 왜의 강성은 송서, 수서 등의 기록 또는 삼국사기에 기록된 신라의 조공기사나 볼모기사 등에서 뒷받침 되곤 한다. 하지만 중국사서 쪽의 기사들은[2] 대체로 왜국에서 나온 일방적 주장인 경우가 많고 신라 조공의 경우 왜의 침공에 신라가 왜의 침공을 항시 잘 격파해왔다는 군사학적 연구도 존재하기도 하면 또한 정녕 신라가 볼모를 보낸 왜가 야마토 정권인지 아니면 일개 지방 세력인지에 대한 논란도 많은 편이다. 거기다 중요한것은 광개토왕릉비 자체가 역사서가 아닌 왕의 업적을 찬양할 목적을 지니기 때문에 고구려인들의 왜곡이 들어갔을 가능성이 적지않아 의도적으로 적대세력의 주체인 백제의 격을 의도적으로 깎을 요량으로 왜를 높였다고 보기도 한다. 한편 송서나 수서의 경우 다른 사료와의 비교검증이 필요하다.

또한 애초에 사료가 다 맞는 것은 아니다. 신라 이상으로 볼모를 보낸 것으로 나오는 백제의 경우 그 성격이 인질이 아닌 외교관적 역할을 했다고 보는 견해가 정설이다. 애초에 왜와 백제의 관계도 백제가 왜를 식민지로 삼았다는 식의 환빠식 망상이나 왜가 백제를 식민지로 삼았다는 일본 극우식 망상과는 달리 군사, 문화적 혈맹관계로 보는게 학계의 정설이다. 어느 한쪽의 국력이 약해지고 강해지고에 따라서 서로의 발언권이 세지고 약해지고가 있었을 뿐이다. 일본쪽만 하더라도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먹었다는 식의 학설보다는 한반도 남부의 일본인 집단거주지 정도의 개념으로 가는 추세이다.[3]

한국이나 북한 학자들의 이후 해석도 조금씩 내용은 다르지만 정인보식 해석과 크게는 궤를 같이 한다.

3.1 비문 해석

옛적 시조(始祖) 추모왕(鄒牟王)이 나라를 세웠는데 (王은) 북부여(北夫餘)에서 태어났으며, 천제(天帝)의 아들이었고 어머니는 하백(河伯 : 水神)의 따님이었다. 알을 깨고 세상에 나왔는데, 태어나면서부터 성(聖)스러운 … 이 있었다(5字 不明). 길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가는데, 부여의 엄리대수(奄利大水)를 거쳐가게 되었다. 왕이 나룻가에서 “나는 천제(天帝)의 아들이며 하백(河伯)의 따님을 어머니로 한 추모왕(鄒牟王)이다. 나를 위하여 갈대를 연결하고 거북이 무리를 짓게 하여라”라고 하였다. 말이 끝나자마자 곧 갈대가 연결되고 거북떼가 물위로 떠올랐다. 그리하여 강물을 건너가서, 비류곡(沸流谷) 홀본(忽本) 서쪽 산상(山上)에 성(城)을 쌓고 도읍(都邑)을 세웠다. 왕이 왕위에 싫증을 내니, (하늘님이) 황룡(黃龍)을 보내어 내려와서 왕을 맞이하였다. (이에) 왕은 홀본(忽本) 동쪽 언덕에서 용의 머리를 디디고 서서 하늘로 올라갔다.

유명(遺命)을 이어받은 세자(世子) 유류왕(儒留王)은 도(道)로서 나라를 잘 다스렸고, 대주류왕(大朱留王)은 왕업(王業)을 계승하여 발전시키었다.

17세손(世孫)에 이르러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 18세에 왕위에 올라 칭호를 영락대왕(永樂大王)이라 하였다. (王의) 은택(恩澤)이 하늘까지 미쳤고 위무(威武)는 사해(四海)에 떨쳤다. (나쁜 무리를) 쓸어 없애니, 백성이 각기 그 생업에 힘쓰고 편안히 살게 되었다. 나라는 부강하고 백성은 유족해졌으며, 오곡이 풍성하게 익었다. (그런데) 하늘이 (이 백성을) 어여삐 여기지 아니하여 39세에 세상을 버리고 떠나시니, 갑인년(甲寅年) 9월 29일 을유(乙酉)에 산릉(山陵)으로 모시었다. 이에 비를 세워 그 공훈을 기록하여 후세에 전한다. 그 말씀[詞]은 아래와 같다.

패려(稗麗)가 고구려인에 대한 (노략질을 그치지 않으므로), 영락(永樂) 5년 을미(乙未)에 왕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가서 토벌하였다. 부산(富山), 부산(負山)을 지나 염수(鹽水)에 이르러 그 3개 부락(部洛) 600~700영(營)을 격파하니, 노획한 소·말·양의 수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다.
이에 王이 행차를 돌려 양평도(襄平道)를 지나 동으로 ▨성(▨城), 역성(力城), 북풍(北豊), 오비▨(五備▨)로 오면서 영토를 시찰하고, 수렵을 한 후에 돌아왔다. 백잔(百殘), 신라(新羅)는 옛부터 고구려 속민(屬民)으로 조공(朝貢)을 해왔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辛卯年)(391년)에 건너와 백잔(百殘)을 파(破)하고 (2字缺) 신라(新羅) … 하여 신민(臣民)으로 삼았다.

영락(永樂) 6년(396년) 병신(丙申)에 왕이 친히 군을 이끌고 백잔국(百殘國)을 토벌하였다. 고구려군이 (3字 不明)하여 영팔성, 구모로성, 각모로성, 간저리성, ▨▨성, 각미성, 모로성, 미사성, ▨사조성, 아단성, 고리성, ▨리성, 잡진성, 오리성, 구모성, 고모야라성, 혈▨▨▨▨성, ▨이야라성, 전성, 어리성, ▨▨성, 두노성, 비▨▨리성, 미추성, 야리성, 태산한성, 소가성, 돈발성, ▨▨▨성, 루매성, 산나성, 나단성, 세성, 모루성, 우루성, 소회성, 연루성, 석지리성, 암문▨성, 임성, ▨▨▨▨▨▨▨리성, 취추성, ▨발성, 고모루성, 윤노성, 관노성, 삼양성, 증▨성, ▨▨노성, 구천성 … 등을 공취(攻取)하고, 그 수도(首都)를 … 하였다. 백잔(百殘)이 의(義)에 복종치 않고 감히 나와 싸우니 왕이 크게 노하여 아리수를 건너 정병(精兵)을 보내어 그 수도(首都)에 육박하였다. (百殘軍이 퇴각하니 … ) 곧 그 성을 포위하였다. 이에 백잔주((百)殘主)가 곤핍(困逼)해져, 남녀(男女) 생구(生口) 1천 명과 세포(細布) 천 필을 바치면서 왕에게 항복하고, 이제부터 영구히 고구려왕의 노객(奴客)이 되겠다고 맹세하였다. 태왕은 (百殘主가 저지른) 앞의 잘못을 은혜로서 용서하고 뒤에 순종해 온 그 정성을 기특히 여겼다. 이에 58성 700촌을 획득하고 백잔주(百殘主)의 아우와 대신 10인을 데리고 수도로 개선하였다.

영락 8년(398년) 무술(戊戌)에 한 부대의 군사를 파견하여 백신(帛愼 :息愼, 肅愼) 토곡(土谷)을 관찰(觀察), 순시(巡視)하였으며 그 때에 (이 지역에 살던 저항적인) 모▨라성(莫▨羅城) 가태라곡(加太羅谷)의 남녀 삼백여 인을 잡아왔다. 이 이후로 (帛愼은 고구려 조정에) 조공(朝貢)을 하고 (그 내부의 일을) 보고하며 (고구려의) 명(命)을 받았다.

영락(永樂) 9年(399년) 기해(己亥)에 백잔(百殘)이 맹서를 어기고 왜(倭)와 화통하였다. (이에) 왕이 평양으로 행차하여 내려갔다. 그때 신라왕이 사신을 보내어 아뢰기를, “왜인(倭人)이 그 국경(國境)에 가득 차 성지(城池)를 부수고 노객(奴客)으로 하여금 왜(倭)의 민(民)으로 삼으려 하니 이에 왕께 귀의(歸依)하여 구원을 요청합니다”라고 하였다. 태왕(太王)이 은혜롭고 자애로워 신라왕의 충성을 갸륵히 여겨, 신라 사신을 보내면서 (고구려측의) 계책을 (알려주어) 돌아가서 고하게 하였다.

10년(400년) 경자(庚子)에 왕이 보병과 기병 도합 5만 명을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고구려군이) 남거성(男居城)을 거쳐 신라성(新羅城 : 國都)에 이르니, 그곳에 왜군이 가득하였다. 관군(官軍)이 막 도착하니 왜적이 퇴각하였다. (고구려군이) 그 뒤를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任那加羅)의 종발성(從拔城)에 이르니 성(城)이 곧 항복하였다. 안라인 수병(安羅人戍兵) … 신라성(新羅城) ▨성(▨城) … 하였고, 왜구가 크게 무너졌다. (이하 77자 중 거의 대부분이 불명. 대체로 고구려군의 원정에 따른 임나가라지역에서의 전투와 정세변동을 서술하였을 것이다). 옛적에는 신라 매금(寐錦)이 몸소 고구려에 와서 보고를 하며 청명(聽命)을 한 일이 없었는데,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대(國岡上廣開土境好太王代)에 이르러 (이번의 원정으로 신라를 도와 왜구를 격퇴하니) 신라 매금이 … 하여 (스스로 와서) 조공(朝貢)하였다.

14년(404년) 갑진(甲辰)에 왜(倭)가 법도(法度)를 지키지 않고 대방(帶方) 지역에 침입하였다. … 석성(石城) (을 공격하고 … ), 연선(連船 : 水軍을 동원하였다는 뜻인 듯) … (이에 왕이 군대를 끌고) 평양을 거쳐 ( … 로 나아가) 서로 맞부딪치게 되었다. 왕의 군대가 적의 길을 끊고 막아 좌우로 공격하니, 왜구가 궤멸하였다. (왜구를) 참살한 것이 무수히 많았다.

17년(407년) 정미(丁未)에 왕의 명령으로 보군과 마군 도합 5만 명을 파견하여 … 합전(合戰)하여 모조리 살상하여 분쇄하였다. 노획한 (적병의) 갑옷이 만여 벌이며, 그 밖에 군수물자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또 사구성(沙溝城) 루성(婁城) ▨주성(▨住城) ▨城▨▨▨▨▨▨城을 파하였다.
20년(410년) 경술(庚戌), 동부여는 옛적에 추모왕의 속민(屬民)이었는데, 중간에 배반하여 (고구려에) 조공을 하지 않게 되었다. 왕이 친히 군대를 끌고가 토벌하였다. 고구려군이 여성(餘城 : 동부여의 왕성)에 도달하자, 동부여의 온나라가 놀라 두려워하여 (투항하였다). 왕의 은덕이 동부여의 모든 곳에 두루 미치게 되었다. 이에 개선을 하였다. 이때에 왕의 교화를 사모하여 개선군(凱旋軍)을 따라 함께 온 자는 미구루압로(味仇婁鴨盧), 비사마압로(卑斯麻鴨盧), 타사루압로(椯社婁鴨盧), 숙사사압로(肅斯舍鴨盧), ▨▨▨압로(▨▨▨鴨盧)였다. 무릇 공파(攻破)한 성(城)이 64개, 촌(村)이 1,400이었다.

(왕릉을 지키는) 수묘인(守墓人) 연호(烟戶)(의 그 出身地와 戶數는 다음과 같이 한다.) 매구여(賣句余) 민은 국연(國烟)이 2가(家), 간연(看烟)이 3가(家). 동해고(東海賈)는 국연이 3가, 간연이 5가. 돈성(敦城)의 民은 4가(家)가 다 간연. 우성(于城)의 1가는 간연으로, 비리성(碑利城)의 2가는 국연. 평양성민(平穰城民)은 국연 1가, 간연 10가(家). 자련(訾連)의 2가(家)는 간연. 배루인(俳婁人)은 국연 1가, 간연 43가. 양곡(梁谷) 2가는 간연. 양성(梁城) 2가는 간연. 안부련(安夫連)의 22가는 간연. 개곡(改谷)의 3가는 간연. 신성(新城)의 3가는 간연. 남소성(南蘇城)의 1가는 국연. 새로 약취(略取)해온 한(韓)과 예(穢)(의 烟戶는 다음과 같다.) 사수성(沙水城)은 국연 1가, 간연 1가. 모루성(牟婁城)의 2가는 간연. 두비압잠(豆比鴨岑) 한(韓)의 5가는 간연. 구모객두(勾牟客頭)의 2가는 간연. 구저한(求底韓)의 1가는 간연. 사조성(舍蔦城)의 한예(韓穢)는 국연 3가, 간연 21가. 고모야라성(古模耶羅城)의 1가는 간연. 경고성(炅古城)은 국연 1가, 간연 3가. 객현한(客賢韓)의 1가는 간연. 아단성(阿旦城)과 잡진성(雜珍城)은 합하여 10가가 간연. 파노성(巴奴城) 한(韓)은 9가가 간연. 구모로성(臼模盧城)의 4가는 간연. 각모로성(各模盧城)의 2가는 간연. 모수성(牟水城)의 3가는 간연. 간저리성(幹氐利城)은 국연 1가, 간연 3가. 미추성(彌鄒城)은 국연 1가, 간연이 7가. 야리성(也利城)은 3가가 간연. 두노성(豆奴城)은 국연이 1가, 간연이 2가. 오리성(奧利城)은 국연이 1가, 간연이 8가. 수추성(須鄒城)은 국연이 2가, 간연이 5가. 백잔남거한(百殘南居韓)은 국연이 1가, 간연이 5가. 태산한성(太山韓城)의 6가는 간연. 풍매성(農賣城)은 국연이 1가, 간연이 7가. 윤노성(閏奴城)은 국연이 2가, 간연이 22가. 고무루성(古牟婁城)은 국연이 2가, 간연이 8가. 전성(瑑城)은 국연이 1가, 간연이 8가. 미성(味城)은 6가가 간연. 취자성(就咨城)은 5가가 간연. 삼양성(彡穰城)은 24가가 간연. 산나성(散那城)은 1가가 국연. 나단성(那旦城)은 1가가 간연(看烟). 구모성(勾牟城)은 1가가 간연. 어리성(於利城)의 8가는 간연. 비리성(比利城)의 3가는 간연. 세성(細城)의 3가는 간연.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好太王)이 살아 계실 때에 교(敎)를 내려 말하기를, ‘선조(先祖) 왕들이 다만 원근(遠近)에 사는 구민(舊民)들만을 데려다가 무덤을 지키며 소제를 맡게 하였는데, 나는 이들 구민들이 점점 몰락하게 될 것이 염려된다. 만일 내가 죽은 뒤 나의 무덤을 편안히 수묘하는 일에는, 내가 몸소 다니며 약취(略取)해 온 한인(韓人)과 예인(穢人)들만을 데려다가 무덤을 수호·소제하게 하라’고 하였다. 왕의 말씀이 이와 같았으므로 그에 따라 한(韓)과 예(穢)의 220가(家)를 데려다가 수묘케 하였다. 그런데 그들 한인과 예인들이 수묘의 예법(禮法)을 잘 모를 것이 염려되어, 다시 구민(舊民) 110가(家)를 더 데려왔다. 신(新)·구(舊) 수묘호를 합쳐, 국연(國烟)이 30가(家)이고 간연(看烟)이 300가(家)로서, 도합(都合) 330가(家)이다.

선조(先祖) 왕들 이래로 능묘에 석비(石碑)를 세우지 않았기 떄문에 수묘인 연호(烟戶)들이 섞갈리게 되었다. 오직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好太王)께서 선조(先祖) 왕들을 위해 묘상(墓上)에 비(碑)를 세우고 그 연호(烟戶)를 새겨 기록하여 착오가 없게 하라고 명하였다. 또한 왕께서 규정을 제정하시어, ‘수묘인을 이제부터 다시 서로 팔아넘기지 못하며, 비록 부유한 자가 있을 지라도 또한 함부로 사들이지 못할 것이니, 만약 이 법령을 위반하는 자가 있으면, 판 자는 형벌을 받을 것이고, 산 자는 자신이 수묘(守墓)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3.2 일본의 접근

제국주의 일본은 이 비문을 크게 두가지 방향에서 써먹었는데 첫째는 신묘년 기록을 자기들 입맛대로 해석해서 임나일본부설을 지지하는 근거로 써먹었으며 둘째는 광개토왕비문의 내용중 고구려와 의 대립에서 왜가 패한 점을 부각시켜 과거에는 북방세력에게 패배했으니 이번 러일전쟁에는 북방세력을 이겨야 한다고 강조하는데 이 비문을 활용하였다.

당시 역사학자들은 이 1500여년 전의 고구려-왜 관계에 19세기말 러시아-일본의 긴장상태를 투영하여 '옛날 왜가 고구려에 패해 한반도 경영이 좌절되었듯 지금 전 국민이 합심하여 러시아를 물리치지 못하면 제국의 대륙진출도 어려워질 것이라는 경각심을 고취시킬 수 있을 것'이라며 노골적이고 공공연하게 목적의식을 드러냈다. 심지어 공식적으로 비석을 구입해서 일본 내로 반입하려는 기획까지 있었다.

임나일본부설 자체는 1960년대 이후 일본 학계에서조차 주류에서 밀려난 폐기되다시피 한 논의지만, 어쨌든 한반도 남부에 군사를 진출시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해석은 일본 입장에서는 중대한 의미를 가진 것으로 평가된다. 야마토 정권이 체제를 굳히고 외부로 군사력을 투사할 정도의 기반을 마련했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결과적으로 왜가 패했으니 일본에 불리한 기사가 되는 셈이지만.
  1. 백제의 비하적 표현이다.
  2. 특히 송서 왜 5왕 기사 같은
  3. 사실 요서경략설만 하더라도 의외로 뒷받침하는 사서도 꽤 있고 학계에서도 꽤 진지하게 연구하는 중이다. 하지만 사료의 비교검증 등을 통해서 점점 힘을 잃었고 한국학계의 정설은 '잘해봐야 백제인 집단 거주지 정도'로 굳어졌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한국인들이 그것을 사실이라고 믿고 있고 국정 국사교과서에서도 '백제가 요서에 진출했다'는 식의 애매한 표현으로 이 설을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가슴으로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식의 마인드를 보여준다. 고대 일본의 한반도 남부 경영설도 이런식으로 이해하면 편하다. 즉 뒷받침 하는 사서는 있는데 비교검증 상 근거가 희박하고 일본학계에서도 인정 안하는 분위기인데, 학계가 아직 미련을 버리지는 못했고 대중들 중 의외로 믿는 사람이 많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