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산선과 백무선은 무산역을 중심으로 기점역이 반대 방향에 위치해 있다. 다만 무산선은 표준궤로, 백무선은 협궤로 건설되어 있어서 직결 운행이 되지 않을 뿐이다. |
무산선 | |||||
고무산 방면 무산철산 | ← 3.6 km | 무 산 | 시종착 | ||
백무선 | |||||
백암청년 방면 독 소 | ← 5.7 km | 무 산 | 시종착 |
무산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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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국어 표기 | |
영어 | Musan |
한자 | 茂山 |
중국어 | 茂山 |
일본어 | 茂山 |
주소 | |
함경북도 무산군 무산읍 | |
운행계통 | |
운영기관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철도성 소속 : 청진철도총국 |
무산선 개업일 | 1929년 11월 15일 |
백무선 개업일 | 1944년 12월 1일 |
茂山驛 / Musan Station
1 개요
무산선 및 백무선의 철도역. 함경북도 무산군 무산읍 소재.
2 역명 유래
무산선에는 무산이라는 지명이 여러 곳에 붙는데, 무산으로 끝나는 곳만 3곳이다. 이중 무산이라는 지명의 유래는 무산의 위치가 2번이나 이동하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세종 때 육진을 개척할 당시까지도 이곳에는 여전히 여진족이 살고 있어 조선의 행정력이 완전히 미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1438년(세종 20) 인접지인 부령군 관내 지금의 고무산에 만호진을 두었으며, 1509년(중종 4) 그 서쪽 지금의 폐무산으로 진을 옮겨 첨사진(僉使鎭)으로 승격시켰다가, 1674년(현종 15)에 이르러 다시 지금의 군청 소재지인 삼봉평(三峯坪)에 진을 옮겨, 비로소 무산이라 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무산 지역은 두만강에 인접하여 가장 여진족 깊숙히 들어간 곳이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무산진이 정착했어도 인구가 가장 적고 살기 척박했다. 덕분에 6진인 부령에 가장 가깝기 때문에 진의 이동과는 관계없이 거주민이 가장 많았으므로 고(古)자를 추가해서 고무산이라고 지정된 옛무산이 조선이 끝날 때까지 사실상 무산군의 중심이었다.
하지만 다른 곳과 달리 두만강을 끼고 있는 국경지대며, 철광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일제강점기시절부터 본격적인 발전을 하기 시작하여 광복 이전에는 무산군의 중심지로 확실하게 정착했다. 일제강점기에도 이 곳은 행정구역상 함경북도 무산군 무산읍이었으며, 1952년 군면리 대폐합을 거치면서 중심부의 성천리, 남산리, 칠성리 등을 병합해서 무산읍을 신설한 것이다.
3 역 주변 정보
읍의 크기는 대략 2㎢ 정도로 여의도의 절반 수준. 상당히 큰 크기이다. 특히나 한반도 최북단 중 한 곳임을 감안하면 말이다. 그 읍의 크기에 걸맞게 승강장의 크기는 4면 12선. 선로가 나눠지는 것도 상당히 복잡할뿐더러 승강장도 큰 승강장 두 개와 (아마도 화물전용으로 사용할) 작은 승강장 두 개로 나뉘어져 있다. 물론 승강장 하나는 청진 방면, 나머지 하나는 백암 방면. 또한 차량기지로 빠지는 인입선도 있다. 여러 모로 큰 역인 셈.
새별역처럼 역 광장에는 탑이 하나 서 있으며, 길은 상당히 잘 정돈되어 있는 편. 시설도 많아서 이 무산에서는 별의별 게 다 생산된다고 한다. 1차 산업인 임업부터 시작해서 광업, 직물, 피복, 모피, 기계, 버섯, 농기구, 제재, 화학, 식료품, 악기, 제약, 닭(...진짜다. 닭공장이라고 한다), 맥주(...) 등등. 거 사람들에게 먹일 보리는 확보해 놓고 술을 만드는 거요?
아, 참고로 이 무산역에서 내려서 길 따라 쭉 걷다가(어느 길이던 상관없다) 방향 틀지 않고 그대로 직진하다 보면 강이 하나 보인다. 그 강의 정체는 두만강. 당연히 탈북 등의 가능성이 있으므로 보안부대원이 보초를 서는 곳 중 하나다. 여담으로, 이 곳이 바로 신동혁 씨가 거쳐 갔던 곳 중 한 곳이다. 고무산역에서 이쪽으로 가는 열차를 타기로 결정했다고. 다만, 탈북은 대홍단군에서 했다.
고무산역 기점 57.9km, 백암청년역 기점 191.7km. 다만 백무선이 협궤이기 때문에 위 행선판에는 아래쪽에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