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戊辰被禍
1388년 정월에 우왕의 명을 받은 최영, 이성계 등이 임견미, 염흥방 등을 숙청한 사건으로 무진년에 일어났다고 해서 무진피화라 불리며, 정월(正月)에 처벌했다고 해서 정월지주(正月之誅)라고도 불린다.
2 발단
당시 이인임, 임견미, 염흥방은 종들을 풀어 좋은 토지를 가진 사람들을 물푸레나무(수정목)로 마구 때려서 그 토지들을 탈취했으며, 그 주인은 관청에서 발행한 증서가 있더라도 함부로 항의하지 못했다. 우왕은 이 이야기를 듣고 못마땅하게 여겼고 염흥방의 종인 이광이 조반이 가지고 있던 백주의 토지를 빼앗다가 조반이 염흥방에게 사정해 되찾았는데, 이광은 다시 조반의 토지를 빼앗고 조반이 이광을 찾아가 사정했지만 업신여겼다.
이에 분노한 조반이 수십 기를 이끌고 이광을 포위해 그의 목을 벤 뒤에 집을 불태웠으며, 염흥방에게 알리려고 개경으로 달려갔다. 이를 들은 염흥방은 조반을 반역 혐의를 씌우고 조반의 모친, 처 등을 체포하고 백주에 4백 여기를 보내 조반을 체포하게 했다가 염흥방이 보낸 기병이 벽란도에서 고을 사람에게 조반이 5기를 거느리고 개경으로 간 사실을 알려주자 염흥방이 우왕을 설득해 현상금을 걸고 체포하게 하면서 조반은 체포된다.
염흥방은 고문을 하면서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는 거짓 자복을 받아내려 했지만 조반은 고문을 받으면서도 굴하지 않았다.
3 과정
며칠 후에 우왕이 최영의 집에서 조반의 옥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고 염흥방은 조반을 심문하기 위해 감옥의 관리들과 대간을 불렀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으며, 우왕은 의원을 보내 조반에게 약을 하사하면서 조반, 조반의 모친, 처 등을 석방하고 의약품, 가죽옷을 보냈다.
우왕은 재상들에게 녹봉을 줄 때가 되자 그들이 부유하다면서 주지 않는 대신에 먹을 것이 없는 군졸들에게 주게 했으며, 염흥방을 하옥시켰다. 우왕은 최영, 이성계에게 명해 군사를 배치해 궁중에 머물러 호위하게 하면서 임견미, 도길부 등을 가두게 했는데, 임견미의 집에 보낸 사자가 파견되었지만 임견미는 이를 항거하면서 사람을 시켜 자신들의 일당에게 알리려고 했지만 기병에게 길이 막혀 나가지 못하고 돌아왔다.
임견미는 남산을 올려다보아 기병들을 확인하자 저항을 포기하고 체포되었으며, 우왕이 순군을 통해 임견미, 염흥방 등을 심문했지만 철저히 추궁하지 않은 채로 보고를 올리자 다른 사람들로 교체해 국문하게 했다.
4 결과
정월에 임견미, 이성림, 왕복해, 염흥방, 도길부, 염정수, 김영진, 임치 등 권문세족들이 사형되었고 이들과 가족, 친척 또는 빌붙던 자들에 해당하는 김용휘, 이존성, 서신, 임제미, 홍징, 임헌, 이송, 임공위, 임공약, 임공진, 왕덕해, 정각, 박인귀, 이희번, 왕익순, 신권, 신봉생, 이미생, 민중달, 홍상연, 홍상빈, 홍상보, 김만흥, 염국보, 염치중, 안조동, 윤전, 최지, 김함, 김을정, 김조, 임맹양, 도희경, 도간, 도운달, 전빈, 안사조, 박중용, 신정, 감성단, 조원길 등 50여 명이 참수되었다.
이들 일당 중에 이안생이 도망친 서규를 체포해 죽였는데, 체포 과정에서 이안생이 서규의 처를 탐한 일이 드러나자 이안생도 처형되었고 서규의 처는 빈객을 대접하는 관부인 전객시의 종이 되었다. 이인임은 경산부, 이인민은 계림 등으로 유배를 보냈으며, 이인임의 가족 또는 친척에 해당하는 이환, 박형은 곤장을 맞은 후에 변지로 유배를 보냈고 권집경은 안동, 이직은 전주로 유배를 보냈다.
최영, 이성계, 이색 등은 각각 문하시중, 수문하시중, 판삼사사에 임명되어 집정대신이 되었으며, 우현보, 윤진, 안종원 등은 문하찬성사, 문달한, 송광미, 안소 등은 문하평리, 성석린은 정당문학, 왕흥은 지문하사, 인원보는 판밀직사사에 임명되었다.
2월에는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해 임견미 등이 탈취한 땅의 현황을 조사하면서 1천 명에 이르는 임견미 등의 가신과 종들을 체포해 처형하고 재산을 몰수했는데, 임견미, 반익순, 염흥방, 도길부의 재산을 조사하면서 그 처들은 고문을 당해 옥중에서 사망했다. 사형된 자들의 자손도 몰살했기에 숨어서 죽음을 면한 자가 거의 없을 정도였으며, 이성림, 왕복해, 이존성, 김영진, 신권, 손중흥 등의 아내, 임치의 6살 짜리 아들을 임진강에 던져 익사시키고 사형당한 자의 처, 딸 등 30여 명을 관노로 삼았다.
3월에는 하륜, 이숭인, 박가흥 등이 이인임의 인척이라는 이유로 곤장으로 때린 후에 각각 양주, 통주, 순천으로 유배를 보냈다.
5 창작물의 묘사
5.1 정도전(드라마)
5.1.1 토지 탈취로 시작된 문제
염흥방의 지시로 노비인 이광이 백주에 소유하고 있는 조반의 농장을 허위 사패문서를 내민 뒤에 항의하는 조반에게 폭력을 휘둘러 빼앗는데, 이후에도 이광이 다른 노비들과 함께 어떤 자의 집에 가서 사람들을 마구 때리면서 집을 부수자 남은이 이를 막으려다가 도리어 이들에게 맞는다.
조반은 염흥방에게 토지를 되돌려달라고 호소했지만 무시당하고 염흥방은 최영에게 토지를 빼앗는 일에 대해 추궁받지만 시치미를 떼고 이인임도 염흥방에게 땅을 돌려주라고 하자 염흥방은 자기가 알아서 하겠다고 한다. 이 때 우왕이 왕실에서 놀기 위해 왕실 재산을 메꾸려고 하면서 권문세족의 재산을 바치게 하자 염흥방이 다시 메꾸기 위해 가렴주구를 하던 도중에 또다시 조반의 땅을 빼앗으며, 이로 인해 조반이 분노해 이광 등을 죽인다.
5.1.2 거사 직전
이인임은 염흥방에게 지시해 조반을 최영과 엮어서 역모로 몰아서 숙청을 시도하는데, 최영은 우왕을 찾아가 군사를 일으켜 이인임 일당을 처단할 것을 주장하지만 우왕은 최영이 이길 것을 확신하지 못해 최영이 이인임 등을 공격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나 이성계가 우왕을 찾아가 자신이 이인임 일당을 치는 것에 가담하겠다고 하자 이를 허락하며, 최영은 임견미, 염흥방, 이성계는 이인임을 공격하기로 한다.
이인임은 최영이 우왕을 찾아갔다는 사실을 알고 임견미에게 왕실로 가서 우왕에게 알현하도록 하는데, 임견미는 왕실로 들어가서 내관으로부터 최영 뿐만 아니라 이성계까지 왕실로 들어간 사실을 알아낸다. 임견미로부터 이 사실을 들은 이인임은 임견미에게는 사병들로 최영의 집을 공격하도록 지시하며, 염흥방에게는 순군부의 군사들로 도성에 있는 최영의 당여들을 잡아들이도록 지시한다.
5.1.3 이인임 일당의 패배
염흥방은 순군부의 군사들을 불러냈지만 소수의 군사들 밖에 나오지 않자 일부에게는 나오지 않는 군사들을 부르도록 하고 일부에게는 조반에게서 오늘 안에 자복을 받아내도록 지시하는데, 최영 휘하의 변안열, 배극렴 등이 이끄는 군사들의 공격을 받아 패하면서 붙잡힌다. 임견미는 최영의 집을 공격하려고 했지만 그 전에 최영이 이끄는 군사들의 공격을 받아서 수하들이 모두 항복했음에도 끝내 저항하면서 이방과와 싸우는데, 최영의 공격을 받아 패해 붙잡힌다.
이성계가 이인임의 집으로 군사들을 이끌고 간 후에 이인임의 군사들을 협박해 저항하지 못하게 하고 이인임을 잡아들이며, 이성계, 최영은 이인임과 그의 족당들을 모두 죽이려 했지만 대비 안씨가 이인임과 그 족당들 전부 죽이는 것에 반대하자 최영은 임견미, 염흥방과 나머지 일당들은 죽이고 이인임은 사면시키려고 하면서 이성계, 최영은 이인임에 대한 처우로 인해 충돌한다.
우왕은 이인임을 찾아가 무장들이 집권하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에게 사면시켜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인임을 사면시키려고 하며, 이성계는 정도전의 조언으로 신진사대부들과 연합해 최영을 거의 설득하는 것에 성공한다. 그렇지만 이 사태로 인해 우왕이 이인임을 찾아가서 조언을 듣고 이인임이 피를 토한 수건을 이용해 동정론을 형성하자 최형은 죄인들의 처형, 이인임의 사면 일정이 앞당기고 이성계는 분노해 사직서를 내고 동북면으로 돌아가겠다고 선언하며, 이인임을 제외한 임견미, 염흥방 등 권문세족들의 처형이 집행된다.
정도전은 남은으로부터 우왕이 이인임을 찾아간 사실을 듣자 이인임이 중병이 아닌 것을 확신하는데, 정도전이 이인임의 문병을 가면서 하륜에게는 최영의 심부름을 온 척 하면서 하륜이 최영에게 확인하러 자리를 비운다. 그러나 정도전은 미리 이 틈을 이용해 우왕이 보낸 것으로 위장한 어가가 도착했다고 하면서 이인임이 성균관 대성전까지 가게 만들며, 최영을 미리 불러둔 것으로 이인임이 중병인 사실이 거짓임을 알게 하면서 이인임을 몰락하게 한다.
그리고 이인임은 이 사건의 배후의 숨은 진정한 승자인 사람들을 깨닫게 되었다.
6 여담
세종대왕 시대의 과학자인 익양공 이천(李蕆)의 아버지 이송은 염흥방과 친척(염흥방은 이천의 외숙이 된다.)이라서 연좌되어 생을 마감했을 때, 당시 13세이던 이천과 그 아우 이온(李韞)은 산 속 절의 승려가 불쌍히 여겨 동굴에 숨겨준 덕택에 살아 남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