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한국어 | 모하마드 알리 진나 |
영어 | Muhammad Ali Jinnah | |
구자라트어 | ||
힌디어 | ||
별명 | 파키스탄의 국부 | |
생몰년 | 1876년 12월 25일 ~ 1948년 9월 11일 | |
출생지 | 영국령 인도제국 벵골 | |
사망지 | 영국령 파키스탄 총독부 카라치 | |
서명 |
1 개요
모하마드 진나 또는 모하마드 알리 진나
인도의 독립운동가이자 이슬람교 지도자였으며 인도 국민회의의 주요 구성원이었다. 그는 부유한 이슬람 가정에서 태어나 인도 민족주의자가 되어 영국으로 유학,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고 귀국하여 무료변론 등을 하였다.
인도 국민회의 내 힌두교도들이 이슬람 신자들을 차별하자 1930년대부터는 이슬람 분리독립운동을 추진, 영국 정부와 총독부를 상대로 인도 총독부와는 별도로 이슬람 거주지 총독부 설치 및 독립을 설득하여 1947년 파키스탄, 발루치스탄 및 동벵골 지역에 파키스탄 총독부를 설치하고, 인도와는 별도로 독립을 약속받는다. 이 때문에 파키스탄이 영국에서 완전히 독립(1955년)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지만 파키스탄의 국부, 파키스탄 건국의 아버지로 추앙받는다.
2 생애
청년 변호사 시절의 진나 |
처음에는 인도의 민족주의와 이슬람의 이익이 상충되지 않는다고 믿고 인도 국민회의 활동과 인도의 독립운동에 적극 가담하였다. 그러나 그는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 무저항 운동을 비판했고[1], 인도 국민회의에서 이슬람교 신자들에 대한 차별을 부르짖자, 결국 그는 1930년대부터 영국 총독부와 별도로 교섭, 이슬람 신자가 많이 살고 있던 인도 서북부와 동북부지역을 인도와는 별개의 독립국가로 독립시켜줄 것 또는 인도 총독부와는 별도의 총독부를 세워주고 자치권을 준 뒤 독립시켜달라고 호소했다.
1920년대에 그는 인도 국민회의를 탈퇴한다. 그러나 30년대 초까지만 해도 이슬람-힌두교 간 타협이 가능하리라 믿고 중재하려 노력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만다.[2] 1930년대에 가면 그는 별도의 이슬람 민족운동을 지도한다.[3] 이때문에 마하트마 간디와 자와할랄 네루와의 관계는 더욱 악화된다.
그의 설득은 받아들여져 1947년 영국은 파키스탄지역과 동벵골 지역[4] 등 이슬람인도인들이 많이 사는 곳에 별도의 파키스탄 총독부를 설치하고, 인도와는 별도로 독립시켜준다고 약속하였다.
그는 이슬람 지역 총독부 설치 및 분리독립을 주장하고 영국의 인도 총독들도 설득했다. 1947년 영국은 파키스탄, 발루치스탄과 아프간-인도의 국경지대, 동벵골 지역[5]을 포괄한 지역에 새로 파키스탄 총독부를 세운다. 그리고 자치권을 허용하면서 총리와 의회 설치까지 허용한다.
파키스탄 총독부의 총리(형식상 영국 여왕이 임명하는)는 파키스탄 총독부의 초대 총독으로 진나를 추천했고, 그는 1947년 8월 14일 초대 영국령 파키스탄 총독으로 부임한다. 이로서 파키스탄은 인도와의 별도 총독부 설치와 동시에 인도와 별도로 독립이 확정된다. 당연 마하트마 간디, 자와할랄 네루 등은 크게 반발하였다.
그는 인도 각지 및 인도차이나 주변지역, 히말라야 등에 흩어져 있던 무슬림들을 끌어모아 정착을 지원했고, 서구식 민주주의 제도를 도입했다. 오랫동안 결핵과 폐렴을 앓아왔던 그는 총독으로 재직 중이던 1948년 9월 11일 카라치에서 사망한다.
2.1 사후
그는 이슬람 인도인들의 국가 건설론을 주장했고, 영국령 인도총독부와는 별도의 이슬람 거주지 총독부 설치를 영국 정부에 청원하여 별도의 파키스탄 총독부를 설치하게 했다. 이는 파키스탄이 인도와는 별도로 독립하는 근거가 됐고, 진나는 생전에 파키스탄의 독립을 보지는 못했지만 파키스탄에서는 그를 국부, 건국의 아버지로 칭송한다.
3 기타
파키스탄 최대 국제공항[6]의 이름도 그의 이름을 따서 진나 국제공항이라 이름지었다.
4 실책
파키스탄, 발루치스탄 지역과 함께 이슬람인들이 많이 거주하던 동벵골 역시 파키스탄으로 독립했다. 이때는 동파키스탄이라 불렸다. 그러나 벵골어 사용을 탄압했다. 우르두어나 아랍어를 쓰는 파키스탄, 발루치스탄 주민들과 달리 벵골어를 사용했던 동파키스탄 벵골족을 탄압했다.[7] 처음에는 이슬람 탄압에 반발하여 같이 독립했던 동벵골 주민들은 점차 반발했고 결국 1956년에 벵골어도 파키스탄의 제2공용어로 지정되면서 해소되는 듯 싶었지만 동파키스탄에 대한 차별은 계속해서 이어졌고 특히 군부정권이 끝난뒤에 치러진 총선을 서파키스탄에서 인정하지않으면서 결국 격렬한 내전과 수십만명의 민간인 학살을 거쳐 1971년의 방글라데시 분리를 초래했다.[8]- ↑ 간디와 같은 힌두교 민족주의자였던 자와할랄 네루 역시 비폭력 무저항 운동에는 비판적이었다.
- ↑ 20년간의 화합 노력이 힌두교도 인도 국민회의 회원들에 의해 이슬람 배척으로 나타나자 점차 힌두교 신자들에 대한 반감이 생겼던 듯
- ↑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56835
- ↑ 오늘날의 방글라데시 지역이다.
- ↑ 현 방글라데시 지역
- ↑ 카라치에 있는 공항이다.
- ↑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070813010327322750020
- ↑ 힌두교도가 많았지만 같은 벵골족이 많이 사는 인도에서 방글라데시 분리독립을 지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