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와할랄 네루

역대 인도 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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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대임시대행
자와할랄 네루굴자릴랄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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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중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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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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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라 간디와 함께.

Javāharlāl Nehrū
जवाहरलाल नेहरू
쟈왘핧랋 네루로 발음한다 카더라
네로와 헷갈리면 심히 골룸하다!!
1889년 11월 14일 ~ 1964년 5월 27일

1 개요

마하트마 간디와 함께 인도 공화국독립을 이끈 독립운동가, 정치가. 인도 독립 후 초대 수상을 지냈다. 비폭력 운동을 벌였던 마하트마 간디와는 다른 적극적인 파업과 투쟁적인 독립 운동을 이끈 인물이다.

2 생애

알라하바드에서 부유한 집안에서 출생하여 15세 때 영국에 유학하여 명문으로 손꼽히는 학교인 해로 스쿨과 케임브리지 대학을 졸업하고 변호사 자격을 얻은 후 귀국하였다. 그 이후에 변호사일을 가지다가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마하트마 간디에게 감명을 받아 인도 독립운동에 뛰어들게 된다. 1916년 간디의 영향을 받아 그 해 국민 회의에 참가하였고, 1918년 자치 연맹 간사, 국민 회의 의원이 되었다. 1921년 벨기에 브뤼셀에서 개최된 피압박국 국민대회에 인도 대표로 참석. 영국 황태자(윈저 공)의 인도 방문 때 파업 투쟁을 주도하여 1922년~1923년까지 투옥되는 등 독립을 이루기까지 9차례 투옥되었다. 1923년 알라하바드 시의회 의장에 선출되고 인도 국민회의에 20년 이상을 국민회의 집행위원으로 활약하면서 인도 국민의 정신적 지주인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운동에 협력하는 실질적 리더 역할을 했다. 1929년 국민 회의파 라호르 대회의 의장으로 선출되었는데 이 대회에서 비로소 인도의 완전 독립이 결의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국민회의파 내각은 총사직하고 1942년 영국에 대한 인도로부터의 즉시 철수를 결의하여 간디와 함께 체포되면서 인도 국민을 시름에 빠지게 했다.

출소한뒤 1946년 임시정부의 부수상 겸 외상이 되고,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1947년 인도는 서파키스탄(현 파키스탄) 및 동파키스탄(현 방글라데시)으로 분리되어 독립 국가가 되었다. 독립국가 인도의 초대 수상 겸 외상, 연방관계상에 취임하여 뉴델리에서 아시아회의를 주재하고 제국주의와 식민지 제도에 대한 항전을 재선언하였다.

간디와는 독립투쟁을 함께한 양대 거두였지만 간디와 다르게 철저한 세속주의자였다. 이는 네루의 사회주의적 사상도 크게 작용했는데, 보수파였던 간디와 달리 네루는 초대 총리로 취임한 이래 민주주의 정치 체제와 사회주의 경제 체제를 결합하는 사민주의 체제를 만들었으며 1948년 인도 공화국 정부가 수립된 후에 카스트 제도를 헌법상 폐지하는 등 소위 네루식 사회주의를 실현하려고 했다. 그러나 보수적인 카스트 제도는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고 이를 막으려는 브라만 계층을 앞세운 간디의 저지를 받기도 했다. 마하트마 간디가 독립한지 1년 후 암살당하면서 네루에게 힘이 쏠리긴 했지만.

외교적인 중립주의 노선 역시 네루가 이후 인도의 국제관계에 남긴 큰 방향이다. 특히 제3세계의 성립에 중요한 역할을 한 반둥 회의를 주관한 사람 중 하나로 미국소련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신생독립국끼리 연대하여 국제질서를 유지한다는 전략을 다졌다. 반면 인접국과의 국경분쟁에는 적극적인 일면을 보여서 카슈미르에 출병하거나, 티베트문제로 막판에는 중국과 전쟁을 치르기도 했다. 하지만 네루는 파키스탄의 분리에 공헌한(?) 과오가 있었다고 했지만, 독립했을 당시 문맹률이 80%를 넘고, 카스트 제도가 뿌리깊이 박혀있었던 데다가 인도와 포르투갈, 프랑스가 직접 통치했었던 지역말고도 수백여개의 토호국이 잔존해있었던 인도에 의회민주주의 제도가 비교적 순탄하게 정착 될수 있었던 것과 절대 다수의 토호국들을 공화정을 체택한 인도로 비교적 큰 충돌 없이 통합시켜서(다만 카슈미르만큼은 예외다.) 인도가 수십-수백여개의 소국으로 분열되지 않게 된 것도 전적으로 네루의 업적이다.

특히 파키스탄 분리 이후에 힌두 극단주의를 인도 사회 주류에서 배제시키면서도[1] (사실 이는 마하트마 간디가 힌두 극우파에 의해 암살된 사건이 결정적인 요인이긴 했지만) 인도를 힌두교인"만의" 국가로 만들어내지 않고, 다원주의를 지향하는 세속국가로 만들어낸데다가 독재의 유혹에도 빠져들지 않았고, 굳건하게 민주주의 체제를 발전시킬려고 노력했던 점을 보면 정치적인 능력 하나는 특출하다는 걸 알수 있다. 실제로 아프리카 대부분의 나라는 물론이고, 당장 이웃 파키스탄이나 방글라데시, 미얀마만 봐도 군사독재 정권이 들어서서 야당인사를 감옥으로 내보내거나, 반대파들을 억누른 흑역사가 있으며, 네팔이나 부탄도 전제군주제 국가였었고, 스리랑카는 타밀족과 싱할리족의 내부 대립으로 내전이 벌어진 것과 대비가 된다. [2]

하지만 경제적인 면에 있어서 2차 산업에 대해 투자를 집중하면서도 1차 산업을 상대적으로 경시했었고[3] 특히나 산업정책 전반에 대한 국유화 정책을 실시하면서도 토지개혁을 주저하는 바람에 빈부격차 문제가 해소되지 않은데다가, 계획경제정책을 펴는 과정에서 부정부패 척결에 실패하여 결과적으로 비효율적인 경제체제를 갖추게 되어 1980년대까지 인도 경제가 도약하는데 실패하였다는 점때문에 네루를 비판하는 목소리 역시 있다.

3 네루의 후예들

브라만 출신의 거두 정치인이라 사후에도 미치는 영향력이 크다. 슬하에 딸 하나가 있었는데 딸인 인디라 간디[4] 역시 아버지를 따라 인도 독립운동에 참여했고 아버지 사후에 인도 역사상 최초의 여성 총리가 되기도 했다. 인디라 간디는 1980년 시크교도들의 독립운동을 강경 진압한데 대해 1984년 10월 앙심을 품은 시크교도 경호원에게 총격을 받아 암살당했다. 인디라 간디의 아들 라지브 간디 역시 인도의 총리를 지냈으나 그도 1991년 스리랑카 내전에 끼어들다가 타밀족의 자폭 테러로 어머니처럼 암살당하고 말았다.

하지만 라지브 간디의 부인(즉, 인디라 간디의 며느리이자 네루의 손자며느리)이자 이탈리아 출신의 소니아 간디 여사가 1998년 국민회의당 당수로 선출되어 인도 정계에 진출했다. 이후 소니아 간디는 2000년대 중반 국민회의당의 재집권, 만모한 싱의 수상 선출 등을 주도하는 등 인도 정계의 실력자로 자리잡았다.[5] 그녀의 아들인 라훌, 딸 프리앙카도 가문의 후광을 바탕으로 정계에 안착하면서 인도의 차세대 지도자로 부상 중. 말하자면 네루 가문의 영향력은 무려 4대에 걸쳐 인도 정계를 지배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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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루 가문의 위엄. 왼쪽부터 네루, 인디라 간디, 라지브 간디, 소니아 간디, 프리앙카, 라훌

4 기타

문필가로서 대표적인 저작인 세 권의 책이 국내에 번역되어 있다. <세계사 편력>(1934년), <자서전>(1936년), <인도의 발견>(1946년)이 그것이다. 제3세계에 박한 한국이지만 아무래도 영어로 쓰여있다 보니 쉽게 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

더불어 딸인 인디라 간디에게 보내는 편지를 교도소 안에서 썼는데 기네스북으로 세계에서 가장 긴 편지로 인정받을 정도로 엄청나게 많이 썼다. <세계사 편력>이 이 편지를 추린 것이다. 한국에선 3권짜리 책으로 나왔는데, 1500페이지에 달한다. 이 편지를 보면 한국에서 일어난 3.1운동을 매우 찬양하고 일본도 영국같은 제국주의이니 주의해야 한다고 안좋게 썼는데 이 때문인지 일본 극우들이나 혐한들은 반일적인 인물로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지들이 한 짓은 안 보이고

물론 무시하는 것은 넷 우익이나 일본 안에서나 그렇지, 인도에 가선 그런 소리 못한다.[6] 위에 나오듯이 네루의 후손들은 지금도 인도 정계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가진 정계 명문이다.(간디의 후손이 좀 듣보잡이 된 인도 정치계를 생각해보자)이러니 네루를 욕한다는 건 인도와 외교적 타격을 받을 일 밖에 되지 않는다. 때문에 일본 정치인들이 인도에 간다면 네루 무덤에 헌배하고 이들과 교류를 맺고자 굽신거리는게 현실이다.

인도의 독립 운동가이지만 자신을 "인도를 통치한 마지막 영국인"이라고 칭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인도인과 영국인의 중간쯤 위치에 놓았다. 네루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인도의 엘리트(대부분이 브라만)들도 영국에서 공부하고 영국의 문화를 많이 받아들였다. 독립후 60년이 넘은 시점에서도 인도 상류층은 자기 집의 실내 양식으로 영국식으로 꾸미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정치인들이 매스미디어에 나올 때 입고 나오는 다양한 전통 복장은 평소 복장이 아니라 일부러 입고 나온 정치적 프로파간다이다. 한국인이 보기에는 민족적 배신 행위로 보일 수는 있겠지만, 영국의 의회 정치 문화가 상류층에 내면화된 덕분에 높은 부패도에도 민주주의나 언론의 자유는 그럭저럭 잘 지켜지고 있다.

1917년 카말라 네루(Kamala Nehru. 결혼 전 성은 카울Kaul로서 델리의 브라만이다.)와 결혼을 했으나 자와할랄 네루 자신은 카말라를 썩 좋아하지는 않았다. 자신의 의사와 관계없이 집안의 관계에 따라 맺어진 정략결혼이기도 했고, 영국에서 수학한 본인과 달리 카말라는 영어도 잘 몰랐던 전통적인 힌두 여성이기 때문에 그랬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둘 사이에서 낳은 딸인 인디라 간디(태어날 때에는 인디라 네루인 셈)는 극진히 사랑했다. 1936년 카말라 네루가 죽고 나서 인디라 간디는 거의 퍼스트 레이디 노릇을 하다시피 했다.

영국 문화에 익숙하여 신사적인 태도를 갖추었고, 외모도 이목구비가 뚜렷한 미남이다. 그렇다 보니 주변에 여자들이 꼬였다.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이 에드위나 마운트배튼 백작부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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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루가 담배에 불을 붙여주는 여성이 에드위나 마운트배튼 백작부인이다.

그녀는 바로 인도 제국의 마지막 총독이었던 루이스 마운트배튼 백작[7]의 아내였다. 네루와 에드위나는 1947년(인도영국으로부터 해방된 해)부터 관계가 가까워진 것 같다. 육체관계는 없고 플라토닉하였다고는 한다. 백작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묵인하고 있었다. 헐리우드에서 이 로맨스(불륜)를 소재로 영화를 촬영하려고 했으나 인도 정부의 요청으로 프로젝트가 중단되었다. 아무리 긍정적으로 묘사한다 해도 네루란 거물은 로맨스 영화의 주인공으로 삼기엔 너무 민감하기 때문이다. 인도뿐 아니라 영국 왕실의 인척이 엮여있으므로 아마 영국 왕실도 싫어했을 것이다. [8] 인도 독립 이후 1960년, 그녀는 남편과 함께 당시 영국령 북보르네오의 코타키나발루 시찰 중 원인을 알 수 없이 사망하는데, 평소 자신이 죽으면 고향바다에 수장해달라는 그녀의 유언에 따라 영국 포츠머스 바닷가에서 영국 구축함 HMS 웨이크풀 호 선상에서 영결식을 가졌다. 이때 네루는 인도 해군의 구축함을 2대나 보내서 그녀의 유해를 호위하도록 했다고 한다. 진짜 사랑하기는 했던 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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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노는 형 세 인물의 관계가 매우 잘 드러난 사진.

인도에서 떠도는 음모론으론, 마하트마 간디와 함께 인도인들이 인도 독립에 기여한 인물로 존경하는 찬드라 보세를 암살한 인물이 네루라는 설이 있다. 정신적인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간디를 제외하면 현실 정치에서 네루와 겨룰 인물은 찬드라 보세가 사실상 유일하였고, 이에 네루가 손을 써서 찬드라를 제거했다는 설. 물론 음모론의 특성상 명확한 증거는 없다.

사진에서 종종 쓰고 있는 흰 모자를 인도에서는 보통 네루 캡(cap) 혹은 간디 캡 이라 부른다.

김대중 대통령이 영국유학을 갔다가 정계복귀를 하며 창당하여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의 평화, 민주적 정권교체를 이룩한 새정치국민회의가 이 네루의 국민회의파에서 따왔다는 말이있다.

  1. 하지만 이들 힌두 극우파는 1970년대부터 다시 지방조직을 구축하기 시작하고, 1980년대 후반 들어 이들이 포함된 정당인 인도 국민당이 급속히 성장하기 시작하여 1991년 총선에서 아요디아 모스크 파괴사건을 통해 전국적인 인지도를 얻으면서 제1야당이 되더니 90년대 중반에 아예 연립정부를 구성하여 집권하게 되었다. 하지만 사회 정책은 영 신통치 않았고, 핵무기 개발등으로 트러블을 일으키는 경우가 잦아 2004년에 결국 정권을 빼았겼다가, 모디가 돌풍을 일으키면서 2014년 총선에서 재집권하게 되었다.
  2. 다만 딸인 인다라 간디가 1970년대 중반들어서 경제가 침체된데다가 농업부분의 생산성이 크게 향상되어(이른바 "녹색혁명") 곡물생산량이 크게 불어났지만 부의 재분배에 별다른 신경을 쓰지않으면서 농민들의 불만을 사 인기가 크게 떨어지고, 1975년 법원에서 금권선거에 자신의 피선거권을 박탈하는 판결을 내리자 인디라 간디는 이에 불복하여 비상사태를 선포하고나서 야당탄압이나 강제적인 산아제한정책등 막가파식 독재정치를 펼친적이 있었다. 결국엔 2년도 버티지 못하고 GG치고 민주주의 체제로 복귀되었지만... 그래도 수시로 쿠데타가 일어난 파키스탄이나 아예 쿠데타로 정권이 뒤엎어지던 방글라데시같은 곳에 비하면 양반
  3. 다만 비슷한 시기에 일본이나 북한, 한국 등도 2차 산업에 적극적으로 육성했었고, 농촌인구가 대거 도시로 몰려들었던지라 딱히 네루만 탓하기엔 묘하다.
  4. 마하트마 간디와는 무관하다. 인디라의 남편은 페로젠 간디로 마하트마 간디와는 단지 성씨만 같은 사람이다. 뉴델리의 공항 이름은 인디라 간디 국제공항이다.
  5. 일반적인 경우라면 집권당 당수인 소니아 간디 자신이 수상이 될 수 있었지만, 이탈리아 태생이라는 점을 고려해서 막후 실세가 되는 편을 선택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아울러 자신의 시어머니, 남편이 수상으로 재직하다가 피살당했던 위험부담도 고려되었을 가능성도 충분.
  6. 터키에서 터키인에게 아타튀르크를 욕한다고 생각해보자. 어떻게 될까?
  7. 1900~1979. 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부군인 에드버러공 필립 마운트 배튼의 삼촌이며, 빅토리아 여왕의 증손으로 여왕의 친척이기도 했다. IRA의 폭탄테러 공격으로 자신의 요트에서 끔살당했다.
  8. 비슷하게 태국의 국왕과 서양여인의 러브스토리인 <왕과 나> 나 <애나 앤드 킹> 같은 작품도 태국인들은 왕실모독이라며 굉장히 싫어하며 상영금지 처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