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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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춘추전국시대의 사상가

墨子

전국시대의 사상가이다.[1][2] 성은 묵(墨)이고 이름은 적(翟)인데, 이름 외의 신상에 대해서는 이설이 분분하다. 오형 중 죄인의 얼굴에 문신을 새기는 묵형을 받은 인물이라 墨이라고 불렸다는 설이 있고, 혹은 피부가 검은 즉 노동자(하층민)출신 또는 외국인이라는 주장, 이외에 먹줄을 긋는 데 쓰는 도구를 묵이라 했으니 목수 등 장인이 아니었겠느냐는 말도 있다. 또는 묵가 학파 사람들이 검고 거친 옷을 입으며 강력한 규율을 가진 집단이었다는 일면에서 협사(俠士)[3]나 멸망한 나라의 군인 출신이 아니냐는 주장도 존재한다.

그의 생존 연도에 대한 정확한 정보는 없지만 그의 사상에 대해 그의 제자들이 기록하여 남긴 책인 묵자와 전후의 다른 사상가들과 선비들의 언급으로 그는 아마도 공자 사망 전후에 태어났고 맹자가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이전에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사마천사기에는 그의 열전이 실려있기는 하지만 기록이 매우 단편적이라서 그의 실존여부조차 의심받고 있다. 실존 인물라고 가정한다면 이를 뒷받침하는 가장 유력한 국가는 송(宋)나라인데 그 나라에서 대부로 지낸적이 있다고 나와있기 때문이다.

묵자의 논리는 개혁적으로, 그 근본은 유가에 있다. 묵자는 유교를 공부하였으나, 묵자는 유교가 기득권세력들의 권력을 인정하고 그들에게 통치를 맡겼던 것과 묵가가 생각하기에는 유가의 비현실적인 요소 몇가지에 불만을 갖고 있었고, 이를 혁파하고 일반 백성들을 중심으로 현실에 기반하여 묵자가 성립한 학파이다. 그러나 그런 묵자가 평등이라는 가장 비현실적인걸 연구했다는건 아이러니하다.

그의 사상은 그가 활동하던 당시 중국에서 유가보다 훨씬 성행했던 학문이자 종교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인구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농민들의 이익을 대변했으니... 때문에 후대의 유학 사상가 맹자는 "천하의 학설이 양주에게로 돌아가지 않으면 묵적(묵자)에게로 돌아간다."며 한탄한 바 있다.

묵가의 가르침은 다름아닌 모두에게 공평한 사랑(겸애兼愛)이었다.


그에 대한 당대의 평가는 공자보다 유능하다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가 가족관계나 과거는 묻지않고 사람들을 모여살게 해서 그 지방을 관리했을 때는 꽤 효율적으로 관리했고, 송나라를 침략하려던 초나라의 왕을 10일동안 걸어서 만나 설득하여 전쟁을 그만두게 했다.

초나라가 송나라를 공격하는 것을 저지하였고, 초나라가 정나라를 공격하는 것을 저지하였으며, 제나라가 노나라를 공격하려는 것을 막았다. 묵자가 송나라를 지날 때 비가 내려서 마을 여각에서 비를 피하려 하였다. 그러나 문지기가 그를 들이지 않았다. 묵자는 조용히 일을 처리하는 사람의 공로는 알아주지 않고 드러내놓고 싸우는 사람은 알아준다. <<공수>>

묵자의 사상 중 특히 미학에 대한 논설 중에서 가장 후대에 의해 거론 되는 것은 '예악의 무용성'일 것이다. 이를 '비악(非樂)'이라고 한다.

오늘날 임금이나 높은 벼슬아치들은 악기를 만드는 것을 국가에 필요한 일이라고 여기고 있지만, 그 악기들은 단순히 땅에 괸 물을 퍼 담고, 허물어진 흙담을 빚어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반드시 백성들로부터 거둔 많은 세금으로 큰 종과 북 그리고 거문고와 비파 더하여 피리와 생황 등의 악기를 만드는 것이다. 옛적에 성황들 역시 백성들로부터 많은 세금을 거두어 이로 배나 수레를 만든 적이 있다. 그들은 그것들을 다 만든 후에 말하였다.
"내 장차 어느 곳에다 이것을 쓸 것인가? 배는 물에다 쓰며, 수레는 뭍에서 쓴다. 그리하여 군자(君子)는 그의 발을 쉬게 하고, 소인(小人)들은 어깨와 등을 쉬게 하리라!" 그런 까닭에 백성들은 많은 재물을 내어 나라에 바치고도 감히 그 일에 불평하는 사람이 없었으니, 이는 어찌 된 일인가? 그것이 오히려 백성들의 이익에 들어맞았기 때문이다. 그런즉, 악기의 경우에도 백성들의 이익에 부합되는 것이라면, 또한 이와 마찬가지일 것이니, 나는 감히 그르다고 하지 않을 것이다. <非樂. 上>

묵자는 '비악'을 통해 사회의 심미와 예술적 활동 영역에서 현실 생활 속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부귀의 대립이나 착취자와 피착취자들 간의 첨예한 모순 등을 폭로하고 있다. 바로 이 점에서 묵자의 '비악'은 나름대로의 긍정적인 가치를 지닌다. 그러나 한편에는 묵자의 '비악'은 고대 소생산자 계층의 극단적인 공리주의에서 출발하여 심미와 예술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非樂. 上>편에서 이에 대해 명확하게 지적하고 있다.[4]

묵자는 말했다. "인자가 해야 할 일은 반드시 천하의 이익을 도모하고 천하의 폐해를 제거하도록 힘써 구하는 것이니, 장차 그것으로써 천하에 법을 세워 사람들에게 이익이 되게 하는 일이면 하고, 사람들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 일이면 하지 않는다. 무릇 어진 사람이 천하를 위해 일을 도모하는 것은 눈에 아름다운 것, 귀에 즐거운 소리, 입에 맞는 맛, 그리고 자기 몸의 안락 등을 위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것들을 위해 백성들이 입고 먹는 데 필요한 재물을 빼앗는 것은 어진 사람이 할 일이 아니다.

묵자는 '비악'과 일체의 심미 활동을 반대하였지만, 미의 존재를 결코 부정하지 않았으며, 音, 色, 甘, 美는 모든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이며, 이들은 필요한 것이라는 점에 동의하고 있다. 더군다나 그는 물건의 실용적인 디자인에 대해서 굉당히 긍정적이다. 다른 기록에 따르면 묵자는 생황을 잘 불었으며, 음악에 조예가 있었다는 말까지 전해진다. 또한 묵자는 논리학의 개념을 논하며, 미(美)와 추(醜)는 객관적으로 구별되는 존재라고 주장하였다. [5]

묵자의 특이한 점은 사상가라기보다 기술자나 과학자에 가까운 일화가 많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아니 그보다 그의 전술이 더 묵자에 대한 대표적인 일화 중 하나가 삼년에 걸처 나무로 새를 만들었더니 날기는 했지만 하루만에 부서졌다는 것이며, 다른 사람들이 묵자의 주장을 가리키는 말 중 하나가 "지구는 둥글고 움직이고 있다는 주장"이었다. 흠좀무 또한 위에 나온 초의 송 공격을 포기시키려는 유세 도중 초의 기술자 공수반과 서로 나무 모형 병기를 만들어 모의 공성전을 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렇다고 사상가로서의 그를 평가절하해서는 안 될 점은 이 사람은 처음으로 노동의 중요성과 분업에 대하여 설파한 사람이다. 짐승들이야 털가죽 있고 풀 뜯어 먹으면 되므로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되지만, 인간은 노동이 없으면 빈곤하게 살 것이며, 나라가 어지러울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아랫 사람들이 아침부터 밤까지 부지런히 바느질하고 농사짓고 있으니 지도층도 열심히 정무를 봐서 그들에게 할당된 노동을 하라는 내용이 있다. 비공, 비악, 절장 등등 묵자 텍스트 내에서 등장하는 주제들마다 기반으로 깔리는 게 바로 이 논리이다.

제자백가들이 현란한 말솜씨를 자랑한 것과는 달리 묵자는 말솜씨가 없었던 것 같다. 이에 대해서 묵가 쪽에서는 "말솜씨가 너무 훌륭하면 말 자체에 정신이 팔려서 그 내용에 신경쓰지 않게 되기 때문에, 본질이 잊혀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일부러 말을 알아듣기 힘들게 하는 것이다." 라고 설명했다고 한다. 하지만 묵가의 논리는 예시와 비유를 이용한 변증법적이다. 이는 노자의 대교약졸(大巧若拙)과도 일맥 상통한다. 이것은 기득권층이 아니었던 두 사상이 공통으로 가진 분모일지도 모른다. 때문에 묵자가 하층민인 기술자 출신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그의 출신성분에 대한 인식이다.

묵가 교단은 종교적인 비밀결사[6]의 성격이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신자들 스스로의 재산도 교단 공동체와 공유하고 개인적인 명리를 탐하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했으며, 교리를 어기는 자는 자기 자식이라고 해도 주저없이 죽여버리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에 대해 연구하는 현대의 학자들중 일부는 그를 최초의 맑스라고도 부른다.

진나라의 복돈이 거자를 맡고 있을 때 그의 아들이 살인죄를 저질렀다. 복돈은 나이도 많은 데다가 대를 이을 사람이라곤 그 아들 하나뿐이었다. 진나라 혜왕이 복돈에게 말했다.
“당신은 늙었고 또 외아들이니 죄를 감해 주겠소.”
“묵가의 법에 따르면 남을 죽인 자는 죽어야 하고, 남을 해친 자는 벌을 받아야만 합니다. 이것이 온 세상의 대의입니다. 나는 묵가 사람이니 묵가의 법을 지킬 수밖에 없습니다.”
복돈은 이렇게 대답하고 자기 아들을 처형하였다. 《여씨춘추》〈거사〉

이는 한편으로는 묵가의 사상을 높이는 요인이기도 했지만 묵가 사상이 널리 인정받는데 있어서는 치명적인 문제점이기도 했다. 그러나 당대에는 그러한 난점에도 불구하고 하층민 및 기술자 계층의 지지를 널리 받은 것으로 보이며, 맹자도 자신들의 위치를 위협하는 가르침이라는 의미로 '양묵지도'(楊墨之道. 양주와 묵적의 도)라고 표현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맹자나 양자도 자신들의 사상에 배치되는 묵자를 맹렬히 비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는 진실로 천하를 사랑하였다"며 그를 인정했다.

묵공의 혁리는 묵자의 수제자 중 한 명으로 묘사되며 묵자가 주창한 '겸애'를 실천하기 위해 아무 연고도 없는 양성을 지키러 오는 것이다. 많이 왜곡되고 과장되었지만 묵공에서는 묵자 사후 묵가가 어떻게 분열되고 사라져 갔는지를 보여준다.

어찌보면 고대 중국의 공산주의자다. 하지만 공산주의 중국에서도 배척받았다. 이는 하느님 사상(天志論)과 비폭력 사상 때문에 유물론과 계급투쟁의 적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현대에는 다시 '제자백가들 중에서는' 이라는 단서를 달아서이기는 하지만 그런대로 높이 평가하는 추세이다.
사상의 주가 되는 "겸애" 때문에 천주교(=기독교)가 조선에 들어올 때 역시 묵자의 일파로서 인식되어지기도 했다.

여담이지만 오기와 관련된 책자에서 이들이 나오는 장면이 있는데, 이러한 기록문물에서 묵가의 사람들은 좋은 방어술을 널리 알려 모두가 방어술만 익히면 전쟁이 나지 않을것이라 생각했기에 우주방어에 매우 뛰어난 자들이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묵가 사상의 기본인 겸애를 실천하는 방법들이 비전과 비공인 관계로 그는 공격법은 다루지 않았던 것이다. 묵자 편명을 봐도 제목이나 내용이 대부분 방어전술 위주로 쓰여져 있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치는 것을 악하게 보고 반대로 약한 자가 방어하는 것은 당연하다 여기는 이들로서 전쟁 자체를 모든 문제의 근원으로 봤기 때문에 전쟁이 벌어진다면 방어를 통해 공자(攻者)를 지치게 해 회담장으로 이끌어 화약을 맺는 것을 목표로 했다. 비(備)로 시작되는 일련의 편들을 보면(비성문,비고림,비수 등등...) "진정한 우주방어란 이런 것이다"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묵가의 전쟁에 대한 시각은 비공(非攻)편에서 잘 드러난다.

"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치면, 공격당한 작은 나라의 백성들은 농사를 짓는 대신 병졸이 되어 싸워야 합니다. 또한, 큰 나라의 백성들 역시 농사를 짓는 대신 병졸이 되어 싸워야 합니다."

군주들이 전쟁을 통해 패권을 쥐어봤자, 승전국 백성이나 패전국 백성이나 전쟁의 참화를 피해갈 수 없고, 천하를 굴러가게 하는 노동을 할 수가 없게 되니, 애초에 전쟁은 하지 말아야하며, 설령 누가 전쟁을 일으키면 공격자를 우주방어로 꺾어버려서 최대한 전쟁을 하지 않게끔 만들라는 게 포인트.

딴지일보에서 다룬 적이 있다.

중국에서 세계 최초로 발사한 퀀텀 통신 위성(Quantum-Communications Satellite)에 묵자(Micius)라는 이름을 붙였다.

2 서적

묵자의 사상을 기록한 책.

묵자의 사상이 담긴 저서로 묵자와 그의 제자들을 비롯한 묵가학파의 학설을 정리한 묵자가 전해지고 있다. 이 책은 묵가가 소멸한 후에 중국에서도 사실상 거의 잊혀지다시피 한 책이다. 묵가의 시조 묵적이 도교신선으로 편입되고, 묵자는 도교의 경전인 도장(道藏)에 편입되었고, 원래 71편 중 53편 밖에 남아 있지 않고 제대로 판본이 정리되지 않은 상태로 전해져 왔으나 청나라 시대에 고증학이 유행할 시기에 비로소 재평가되어 새롭게 연구되기 시작했다. 특히 현존하는 내용 중에 묵자가 직접 저술했다고 하는 《경상(經上)》, 《경하(經下)》, 《경설상(經說上)》, 《경설하(經說下)》, 《대취(大取)》, 《소취(小取)》등 6편은 따로 《묵경(墨經)》혹은 《묵변(墨辯)》으로 불리는데 논리학과 자연과학에 관련된 논문집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묵경의 문체가 일반적인 한문의 문체와는 대단히 다른 문체인 방행독법(旁行讀法)으로 구성된 문체로 되어 있고, 중간에 시간이 흘러서 오기된 글자도 있어서, 한문에 익숙한 중국 전통사회의 학자들도 이 부분을 제대로 해독할 수 없을 정도였다. 아무리 영어를 잘 한다 하더라도 각종 수식과 전문용어가 포함된 영어로 된 물리학 논문을 읽는 것은 전공자가 아니면 쉽지 않은 것을 생각해 보면 된다. 현대의 학자들에 의해서 비로소 묵경 부분의 해독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동양의 전통적인 사고방식과는 대단히 다르고 오히려 현대의 형식논리학이나 자연과학의 사고방식과 유사성을 보여 준다. 묵자가 타임슬립한 현대인이라서 그렇다. 열기구도 만든다. 그래서 중국 전국시대의 공돌이들은 어떻게 세상을 바라보았을까에 대해 알고 싶다면 묵경 부분을 참고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다만 현재 통용되는 묵자 판본은 오랜 세월에 방치되어 훼손이 심하여 너무 늦게 복원이 이루어진탓에 기존의 문장들이 엉키고 설켜서 내용이 중복되거나, 오탈자등이 많아서 내용의 해설이 생략되고, 전국시대 당시의 저술이 맞는지도 의심되는 등 현재 묵가의 사상을 완벽히 이해하는건 유감스럽게도 매우 어려운 일이다. 노자의 경우처럼 곽점초간, 백서본이 나온것 처럼, 묵자도 선진시대의 죽간이 훼손없이 발견된다면 완벽 복원이 가능하다. 단, 많은 주석서가 등장하여 묵가 사상에 근접하게 접근 할수 있으니, 좋은 주석서의 도움이 필수이다.

그러나 국내의 묵가 번역서들은 대부분 부분만을 발췌 번역한 것이 상당수이며, 완역본은 신동준의 번역본이 유일하다. 다만 본문/직역 외에 여러 다른 번역본들의 해석도 같이 실어놓아 읽기에는 좋지만 책이 상당히 두껍다.

3 ~먹자의 경상도 방언

ex) 대화가 필요해에서의 김대희가 하는 60%의 대사. 밥 묵자.
  1. 그가 말한 겸애는 사실상 '집단이 극초분할화되어 나라도 가족도 구별짓지 않는 절대평등 및 공유의 세상'이라는데, 이것이 가히 2500~3000년을 앞서간 사상가인지는 일단 그런 세상이 성큼 다가오고 나서야 논할 만하다. 그리고 이상적 공산주의도 그의 이상에는 미치지 못할 정도인지는 이상적 공산주의자들과 묵적과의 정교한 비교가 필요한 작업이나 원본이 그대로 남아 있는 이상적 공산주의자들과 원전의 보존이 문제다. 그리고, 묵자는 당시 시대상을 감안해 볼 때 묵가의 첨삭이 당연히 가해졌을 것이며 고고학적 발견이 있지 않은 이상 묵적 개인 사상의 원형을 불리할 수 없기 때문에 비교 자체가 무의미하다.
  2. 기술혁신을 고평가하는 의견도 있으나 오히려 기술혁신을 반대한 학파를 찾기 어렵다. 아마도 이론으로서의 과학발달과 경험으로서 기술진보나 발명을 혼동한 듯하다. 또한 유교의 허례허식을 비판해 본들 그 시절에 평등이나 방어술만을 논하는 묵자의 비현실성 역시 오히려 가소로운 점이 있다. 어차피 둘 다 출발점은 선한 마음의 존숭에 있다.
  3. 예를 들면, 예양이나 형가 같은 인물들.
  4. 출처 : 中國美學史. 李澤厚
  5. 출처 : 中國美學史. 李澤厚
  6. 그러나 도가처럼 비전 수준의 암흑종교까지는 아니었던 걸로 간주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