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문서는 <a href="/w/형벌">형벌</a>(刑罰)에 관한 것입니다. <a href="/w/혈액형">혈액형</a>에 대해서는 O형 문서를, 조선시대의 인물에 대해서는 오형(조선)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목차
1 개요
2 고대 중국의 형벌
대개 부분적으로 시행했지만 이사처럼 대벽을 제외하고 오형의 모든 형벌을 종합선물세트로 시행한 뒤 요참형으로 죽은 사례도 있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집행자의 의지에 따라 여러가지 형을 복합적으로 받을 수 있다는 것으로, 주로 역적죄같은 중형의 경우에 적용되었다.
2.1 묵형(墨刑)
먹글씨로 죄명을 신체에 새기는 문신형이다. 가장 가벼운 형벌이지만 보통 얼굴같이 가릴 수 없는 부위에 새기는 일이 많아서 이 형벌을 받으면 24시간 내내 나는 범죄자다!라고 광고를 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당연히 제대로 된 직업에 종사할 수 없으며, 이마를 가리는 등 문신을 가리기 위해 남들과 다른 복장을 할 수 밖에 없어서 유사시 추적당하기 딱 좋다. 본격_고대_대륙의_전자발찌.jpg 한 문제 연간에 월형과 비형이 폐지되었음에도 묵형은 여전히 남아 노역형을 선고받은 죄수들에게 시행하기도 했으며 본래 여자에게도 시행을 했는데 원나라때 여자에게 자자형을 시행하지 않는 몽골의 풍습이 들어와 원의 법전은 물론이고 대명률에도 여자에게 자자형을 시행하지 않는다는 조항이 생겼다. 조선 영조 연간에는 아예 남자에 대한 자자형도 폐지하였다.
2.2 의형(劓刑)
코를 베어내는 절단형이다. 한자 모양도 깔끔하게 코(鼻)+칼(刀). 코를 벤다고 죽는 일은 그렇게까지 많지 않지만, 용모에 엄청난 손상이 가해지므로 심적 충격이 크다. 원래 코를 베는 것은 사람이 아니다라는 것을 의미하는 명예형의 의미도 크다.
이 형벌은 동로마 제국에도 있었는데, 왕위계승전에서 패배하거나 역적질을 한 권력가를 실각시킬 때 이런 형벌을 썼다고 한다. 나름대로 이유도 붙였는데 타국은 그냥 죽이지만 우린 기독교 정신에 입각해서 코를 베는 것 정도로 형벌을 줄였답니다. 물론 강력한 의지가 있는 사람은 유스티니아누스 2세같이 이런 형벌에도 불구하고 다시 복귀하는 경우가 있었다(...) 이런 사태가 발생한 이후에는 재범자의 경우에는 그냥 죽여서 영원히 복귀를 못하도록 했으며, 초범자의 경우에는 좀더 사망확률이 높고 자신의 능력을 복구하기 힘든 눈을 뽑는 형벌로 대체하였다.차라리 죽여
2.3 월형(刖刑)
발뒤꿈치를 잘라내는 절단형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아킬레스 건과 그 주변을 통째로 날리는 것으로, 이 형벌을 받으면 제대로 걷지 못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멀쩡한 사람을 장애인으로 만들어준다.
2.4 궁형(宮刑)
남자의 생식기를 잘라내는 거세형이다. 단, 여자는 유폐형을 시켰는데 평생 감옥에 유폐시키는 방법과 검열삭제 부분을 망가뜨려 성생활을 못하게 막는 방법이 있었다. 이 외에도 사적인 형벌로 여자의 검열삭제 부분에 자물쇠를 채우거나(...) 실로 꿰매는 형벌도 있었다고 한다. 리얼 정조대
월형보다 중형인 이유는 궁형받다가 죽는 확률이 더 높은데다가, 월형은 본인의 신체피해로 끝나지만, 궁형은 자손의 대를 끊어놓는다는 의미가 있고, 사람취급을 못받는 명예형의 의미가 크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형벌을 받는 대상자의 죄목을 보면 알겠지만 정말 무거운 형벌이다. 죄인에게 대벽(大僻)과 이 형벌 중 선택권이 있었다. 때문에 대벽을 선택하면 아무리 죄질이 나쁘더라도 죽을때 박수갈채를 받으며 죽었고 장례식도 매우 융숭하게 치러줬다. 하지만 궁형을 선택하면 보는 사람들마다 멸시하고 침을 뱉어가면서 조롱했다. 이래서 궁형이 명예형으로서 파급효과가 큰 것이었다. 한마디로 죽을 죄를 지은 주제에 궁형으로 대신 받고 뻔뻔하게 살아있다는 이유로 평생동안 조롱을 당하는 것이다.
사마천의 경우 이릉이 흉노와의 전투에서 악전고투끝에 흉노에 잡힌 일이 있었는데 다른 문무백관들이 모두 이릉을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을 때 사마천이 이릉을 변호하다가 죄를 뒤집어써서 대벽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사마천은 자신이 집필해야 할 사기(史記)를 완결할 때까지 죽을 수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궁형을 택했는데 그 이후로 사마천은 인간이 당할 수 있는 최대의 굴욕을 당하며 여생을 보내게 되었다.
2.5 대벽(大僻)
다른 형벌과 달리 이 형벌은 사형시키는 형벌이라서 받으면 반드시 죽는다. 목을 매달아 죽이는 교수형, 목을 베어 죽이는 참수형, 끔살시키는 능지처참이 있었다. 살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뿐인데 이거 대신 궁형(宮刑)을 받는 것이었다. 하지만 궁형을 당하면 그 이후부터는 인간 미만의 취급을 당하게 된다.
3 당률의 5형
중국 당(唐)의 법전인 《당률(唐律)》에서 체계화된 5가지 형벌집행 방식으로 명(明)나라의 기본법전 《대명률(大明律)》과 청(淸)나라의 기본법전 《대청률례(大淸律例)》로 계속 이어진다. 고려 때 도입되어 조선에도 이어진다. 사형(死刑)·유형(流刑)·도형(徒刑)·장형(杖刑)·태형(笞刑)으로 구분된다.
3.1 태형(笞刑)
- 형벌의 강도 : 10대~50대
태라는 것은 사람이 가벼운 죄가 있을 때, 가느다란 매로 치는 것을 말한다. 태 10대에서 태 50대까지 5등이 되는데 태 10대를 한 등으로 하여 더하고 줄인다. 그리고 여기서 가느다란 매라는 소리는 회초리같은 물건이라는 뜻이 아니라, 장형에서 쓰는 크고 아름다운 곤장보다 가늘다는 이야기다. 당연하게도 매우 아프다!
'대명률'에서 제시하는 이 "가느다란 매"의 규격은 이렇다. 작은 가시나무 가지로 만들며, 반드시 옹이나 눈을 깎아 상부관서에서 내린 교판에 맞추어 길이 3자 5치(약 105cm), 대두의 지름 2푼7리(약 0.8cm), 소두의 지름 1푼 7리로 하여 소두 쪽으로 볼기를 치도록 되어 있다. 또한 속형이 가능하였는데, 조선 초기의 경우 태 10~50에 따라 각각 오승포 3~15필(한 등급당 3필씩 증가)을 내면 형을 면할 수 있었다. 한편, 중국의 '대명률'에서는 동전 600문~3관(한 등급당 600문씩 증가)을 내면 면할 수 있었다.
3.2 장형(杖刑)
- 형벌의 강도 : 60대~100대
장이란 것은 사람이 죄를 범했을 때, 큰 형장, 흔히 말하는 곤장으로 볼기를 치는 것을 말한다. 장 60대에서 장 100대까지 5등이 되는데, 장 10대를 한 등으로 하여 더하고 줄인다. 보통 사극에서 주로 나오는 곤장치는 것이 장형인데, 한대만 맞아도 엄청나게 아프므로 곤장맞다가 죽는다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실감나게 만든다.
본래 북조 연간에는 장형 10대~50대, 채찍형 60대~100대 체계로 나갔는데[1] 수 문제가 채찍형의 잔인함을 문제삼이 채찍형을 폐지하고 채찍형은 장형으로 대체하고 장형은 장형때 사용하는 형장보다 가는 형장을 사용하는 태형으로 대체하여 이와같은 체계를 만들었다.
또한 이 형벌은 가장 그 폐단이 심했다. 본래대로라면 '대명률'의 규정을 기준으로 형구는 큰 가시나무 가지로 만들며 반드시 옹이나 눈을 깎아 상부관서에서 내린 교판에 맞추어 길이 석자 다섯 치(약 105cm), 대두의 지름 3푼 2리, 소두의 지름 2푼 2리로 하여 소두 쪽으로 볼기를 치도록 되어 있지만, 점차 형이 가혹해지고 교판에 맞지 않는 규격을 사용하는 등의 폐단이 심해져서 정종 2년(1400년) 흠휼전칙을 제정해 형구의 규격과 집행방법을 엄격히 규제했다.
역시 속형이 가능했는데, 조선의 경우 가장 낮은 장 60을 기준으로 오승포 18필을 내면 면할 수 있었고, 70부터 한 등급당 3필씩 증가하여 장 100일 경우에는 오승포 30필을 내면 면할 수 있었다. 한편, 중국 명나라의 '대명률'에서는 가장 낮은 장 60이 3관 600문, 그때부터 한 등급당 600문씩 증가해서 장 100일 때는 무려 6관을 내야 면할 수 있었다.
3.3 도형(徒刑)
- 형벌의 강도 : 1년+60대~3년+100대
도라는 것은 사람이 범한 죄가 조금 무거워 관에서 잡아놓고 강제 노역을 시켜 괴롭게 하는 일을 이른다. 도 1년에서 3년까지 5등이 되는데 장 10대와 도 반년을 한 등으로 하여 더하고 줄인다. 현대의 징역형과 비슷한 형벌로서 지금도 중국에서는 징역의 의미로 '도형'이라는 말을 쓴다.
하지만 강도면에서는 징역따위는 저리가라 할정도로 세다. 일단 위에 언급했듯이 장형을 먼저 받아서 곤장맞고 시작하는데다가, 불결한 시설인 감옥에 가둔다음, 날이 밝으면 끌어내서 채석장같은 힘든 일을 하는 곳까지 끌어낸다음에 채찍 맞아가면서 노예처럼 일하게 된다. 따라서 도형을 받고 1년이상 살아남으면 기적이라는 소리가 있을 정도다.
따라서 현대의 징역형이 도입된 다음에도 금고라는 형량이 만들어지게 된 원인을 제공했는데, 금고의 경우 감옥에 가두는 것은 동일하나 노역을 시키지 않으므로 자비로운 형벌이라는 명백한 이유가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사실 인권이 확립되지 않은 시기에서는 서양에서도 징역형은 강제노동이 심해서 사람이 살아남기 힘든 경우가 많았다.
3.4 유형(流刑)
- 형벌의 강도 : 2천리+100대~3천리+100대
유는 사람이 범한 죄가 무거우나 차마 죽이지 못하고 먼 고장으로 쫓아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하는 벌이다. 쉽게 말해 귀양. 유 500리를 한 등으로 한다.
강도 설명에서 보면 알겠지만 곤장을 때린 뒤 유배를 보내는 것이라 유배를 가는 죄수 입장에서는 장난아니게 고통스러운 일이었다고 한다. 유배를 가는 길에서 죽는 경우도 있었다고 할 정도. 거기다가 유배지까지 거리가 형장에서 충분하지 못할 경우에는 이리저리 길을 빙빙 돌아 가면서 거리를 늘리는데, 국토를 끝에서 끝까지 가야 3천리를 겨우 맞추는(...) 조선에서는 아예 유배 전용 코스를 만들어서 거기를 도는 방식으로 형을 집행했다고 한다.
게다가 코스의 목적지가 바로 우리가 아는 그 유배지. 보통 원주민도 살기 힘들고 기후환경이 안좋은 산간오지나 절해고도같은 곳을 택하며, 국가에서 유형자에 대한 지원을 안하기 때문에 거지꼴로 살기 딱 좋다. 덤으로 언제 석방될지 기약이 없다. 그래서 강제노역이 없고 감옥에 가두지도 않는데도 유형이 도형보다 형량이 높은 것으로 나오는 것이다.
후한시대에는 유배지에 따라 형벌의 강도가 달라졌는데 어지간한 중형은 회계로 유배되는 것이었고 일남[2]으로 유배되는 것은 준사형(準死刑)으로 취급되었다.
3.5 사형(死刑)
원칙적으로는 아래의 두 가지 방식으로 구분한다.
목숨을 박탈하는 만큼 형벌 중 가장 무거운 것이다.위 형벌들로도 충분히 목숨을 박탈할 수 있다. 둘 중 그나마 나은 것은 교수형. 참수형은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없다. 유교적 관념에서 큰 치욕이었던 신체의 훼손이 가해지는 참수형이 더욱 중형이었다. 물론 죽이는 방법이야 능지처참이나 거열형 같이 신체가 토막나는 경우도 있지만 이런 것은 원래 법전에는 명시되어 있지 않는 것으로, 어지간한 경우가 아니면 시행되지 않았다. 사약을 내려 죽이는 사사(賜死)도 마찬가지인데, 이 경우는 신체를 온전히 함과 동시에 임금이 죽음을 하사하는 형식이므로 조선에서 시행한 사형 방식 중에서는 가장 죄인을 예우한 형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