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성왕

75px
신라의 역대 국왕
45대 신무왕 김우징46대 문성왕 김경응47대 헌안왕 김의정
시호문성왕(文聖王)
김(金)
경응(慶應)
생몰년도음력? ~ 857년 9월[1]
재위기간음력839년 ~ 857년 9월 (19년)

1 개요

신라 제46대 왕. 45대 왕인 신무왕 김우징의 아들이다.

2 생애

아버지 김우징이 단 1년도 못있고 반년만에 죽자 왕위에 오르게 되었는데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는지 재위기간 내내 유독 반란이 많이 일어났다. 지못미이자 안습

즉위 3년만인 841년, 일길찬 홍필이 반란을 일으켜 문성왕 안습열전의 서막을 알렸다.

846년엔[2] 청해진대사이자 진해장군인 장보고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염문(염장)으로 하여금 장보고를 주살케하여 저지했으나 근거지인 청해진을 완전히 없애진 않았다.(라기보단 이후 상황을 보면 못했다가 맞을 것이다)

장보고의 난이 일어난 이유는 장보고 항목 참조

847년 이찬 양순과 파진찬 흥종이 반란을 일으켰다. 849년 이찬 김식과 대흔 등이 반란을 일으켰다. 851년엔 청해진에 토벌군을 보내 청해진을 완전히 없앴으며 청해진에 살던 주민들은 現김제시인 벽골군으로 강제이주 시켰다. 이처럼 각종 반란이 일어났으나 이것들을 죄다 진압하면서 결국 왕권을 다시금 안정시키는게 결정적 영향을 주었다. 이후 진성여왕 시기까지 신라는 꽤나 안정적인 상태가 된다.

그리고 죽기 전에 숙부인 김의정에게 왕위를 물려준다는 유조를 내리고 죽었다. 그러나...[3]

반란에 시달린 왕이라는 인식과는 달리 장보고와 청해진을 없애기 전까진 장보고에게 남해의 제해권을 주어 바다를 안정시켜 무역로를 안전하게 확보케하였고 그로 인해 활발한 무역과 사신왕래 등으로 당과의 관계 개선 및 신라의 경제를 풍족케 한 왕이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장보고와 청해진을 없애버림으로써 결정적으로 신라의 몰락을 가져온 왕이기도 하다.

3 삼국사기 기록

一年秋七月 문성왕 즉위하다
一年秋八月 궁복을 진해장군으로 삼다
二年春一月 예징을 상대등으로, 의종을 시중으로 삼다
二年夏四月 가뭄이 들다
二年 당 문종이 국학생을 추방하다
二年 기근이 들다
三年 전염병이 돌다
三年 일길찬 홍필이 모반하다
三年秋七月 당 무종이 왕과 왕비를 책봉하다
四年春三月 이찬 위흔의 딸을 들여 왕비로 삼다
五年春一月 시중 의종이 면직되고 양순을 시중으로 삼다
五年秋七月 호랑이 5마리가 신궁에 나타나다
六年春二月一日 일식이 나타나다
六年春二月 태백성이 진성을 범하다
六年春三月 우박이 내리다
六年 대아찬 김여를 시중으로 삼다
六年秋八月 혈구진을 설치하다
七年春三月 궁복의 딸로 둘째부인으로 삼고자 하다
七年冬十一月 우레가 치고 눈이 내리지 않다
七年冬十二月一日 해가 세 개 나란히 나타나다
八年 염장이 궁복을 죽이다
九年春二月 평의전과 임해전을 중수하다
九年夏五月 이찬 양순이 모반하다가 발각되다
九年秋八月 왕태자를 책봉하다
九年 이찬 위흔이 시중이 되다
十年 가뭄이 발생하다
十年 파진찬 김계명이 시중이 되다
十年冬十月 벼락이 치다
十一年春一月 이찬 의정이 상대등이 되다
十一年秋九月 이찬 김식과 대흔이 모반하다
十二年春一月 토성이 달에 들어가다
十二年 흙비가 내리다
十二年 사면하다
十三年春二月 청해진을 혁파하다
十三年夏四月 4월에 서리가 내리다
十三年 이찬 원홍이 당에서 불경과 어금니를 가져오다
十四年春二月 파진찬 진양을 웅진도독으로 삼다
十四年 조부에 불이 나다
十四年秋七月 명학루를 중수하다
十四年冬十一月 왕태자가 죽다
十五年夏六月 홍수가 일어나다
十五年秋八月 황충이 발생하다
十七年春一月 서남쪽 백성을 위로하다
十七年冬十二月 진각성에 불이 나다
十七年冬十二月 토성이 달에 들어가다
十九年秋九月 문성왕이 조서를 남기다

문성왕부터 삼국사기 11권이 시작된다.
  1. 왕이 유언을 내린후 7일뒤에 사망
  2. 속일본기엔 841년이라고 기록되어있으나 한국쪽 기록을 참고한다
  3. 이 후는 헌안왕 항목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