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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우성 화백의 표준영정. 응???
해상왕
1 개요
張保皐 혹은 張寶高 (785년이전[1]~ 846).
통일신라의 호족. 어린 시절 당나라에서 벼슬을 했다가 본국인 신라로 돌아와 군인이 되었으며 훗날 청해진 대사가 되어 당시 한중일 사이의 바다를 지배하며 엄청난 부와 권력을 지녔던 인물이다.
그 힘은 실로 막강하여 비록 지방 호족이라고는 하나 중앙의 왕실에 까지 그 영향력이 미칠 정도였으며 실로 희대의 영웅이라 할만한 인물이다. 흔히 그를 수식하는 말로 '해상왕(海上王)'이라는 표현이 붙곤 한다. 물론 이는 당시 신라인들이 아니라 현대 한국인들이 붙여 준 이름이지만 한때 동아시아 해상에서 그가 지녔던 영향력을 생각하면 그리 틀린 말도 아니다.
바다에서 크게 활동했고 국제적인 인물이었기에 현대 대한민국 해군에서도 상당히 좋아하고 밀어주는 위인. 해군에서는 '대사'라 칭한다.
2 일대기
2.1 유년기
본명은 궁복(弓福) 혹은 궁파(弓巴)로, 이름(활보라는 뜻. 즉 활 잘 쏘는 사람에게 붙는 이름)으로 보아 활을 잘 쏘았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장(張)과 보고(保皐)라는 이름도 궁(弓)과 복(福)에 기초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삼국사기에서 그 출신을 알 수 없다고 한 것으로 보아 가문은 한미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출신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한데, 기병이었기 때문에 당시 서남해안 지역 섬에 목장을 운영하던 신라 귀족의 생활과 연관시켜 목동 출신으로 보기도 한다. 특히 전쟁사 교양서적을 여럿 낸 서영교는 아예 단정하듯이 썼는데 단정할 만큼 증거가 있는 건 아니다. 그 외에 친구 정연이 50리를 단번에 헤엄칠 수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바다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뛰어난 창술 등으로 이름이 높았지만 골품제라는 신라 사회의 외골적인 신분 제도로 인해서 장군이 될 수 없다는 사실에 분노한다. 헬신라 그러다가 자신의 스승으로부터 당나라로 가서 벼슬을 하면 크게 성공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모험임을 알면서도 동료인 정연과 열심히 무술을 배워 당나라로 떠난다.
2.2 청년기 : 당나라에서의 활동
당시 당나라에는 신라방이라는 일종의 코리아타운이 형성돼 있었고 장보고도 신라방을 거점으로 활동한다. 스승의 말대로 당나라는 이민족이더라도 능력과 실력이 뛰어나면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는 곳이었다. [2]
무예에 소질이 있는 장보고는 중국에서 당나라 군대에 입대해, 서주 무령군의 소장[3]로 출세한다. 무령군은 산동 반도에 웅거한 고구려 유민 출신 절도사 이정기 세력을 정벌하려고 만든 부대였는데, 이정기 세력은 당시 허난 성과 허베이 성을 연결하는 산동성 지역을 장악해 강력한 지방 군벌로 성장한 상태였다. 장보고는 무령군 소장 신분으로 이정기의 손자 이사도가 이끄는 평로치청번진 진압에 참전했다.
이후 군직에 몸을 담고 살다가 모종의 일로[4] 상업에 뛰어들어 이미 중국에서도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당나라 해적에게 잡혀 중국에서 팔려가는 신라인을 보고 뜻한바 있어 고국으로 돌아온다.
2.3 장년기 : 신라에서의 활동
신라로 돌아온 뒤 신라 42대 왕 흥덕왕에게 "중국이 우리나라 사람들을 자꾸 잡아가 노비로 삼으니 저에게 군사 1만을 주시면 제가 중국 해적들을 막겠다"고 하며 청해진을 건설, 이를 기점으로 상권을 장악했다.[5] 해로 안전 확보를 위해 원래 보고한 목적인 해적소탕에도 열을 올려 삼국사기에서는 장보고의 활약으로 신라인 노예 매매가 사라졌다고 기록하고 있고, 청해진은 사실상 당대 최고의 해상 무력집단으로 발전했다.
당시 일본 최고의 승려로 꼽히던 엔닌(圓仁)[6]이 불경을 구하기 위해 당나라로 무사히 갈 수 있도록 장보고에게 보호를 부탁했으며, 산둥 반도에는 적산법화원이라는 절을 세워 신라, 일본 등의 승려가 머물렀다고 한다. 이 적산법화원은 복원되어 지금도 중국에 있다. 또한 상술한 엔닌은 입당구법순례행기[7]라는 여행기에 장보고의 도움을 기록했다. 덕분에 장보고의 활을 든 영정이 지금도 일본 교토 히에이 산 적산선원에 있다. 행적과 명성이 한중일을 넘나들어 당시 동아시아 세계에서는 매우 국제적인 인물이었던 셈.
청해진이라는 독립된 환경에 막대한 수익을 바탕으로 장보고는 신라 조정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고, 중앙정계의 왕위다툼 끝에 밀려나 청해진으로 도망 온 김우징을 도와 쿠데타를 벌여 우징을 왕위에 올렸다.
그렇게 옹립시킨 신무왕이 1년도 못돼 승하하면서 그의 아들인 문성왕이 왕위에 오르자 권력욕이 강해져 자신의 딸을 왕의 아내로 들이려 했다가[8] 대신들의 반대로 무산되었고, 이후 장보고가 확대된 영향력을 바탕으로 예전처럼 군사반란에 힘을 보태지 않을까 두려움을 느낀 조정이 장보고의 휘하였던 염장을 사주해 암살해버렸다.리얼 염장질 이와 유사한 경위로 최후를 맞은 인물로는 훗날 고려의 무신정권을 열어젖힌 이의방이 있다.
하지만 장보고의 반역시기가 지나치게 별안간이라는 점을 통해 장보고는 기득권을 빼앗길 것이라는 불안에 휩싸인 진골귀족들에 의해 살해당한 이후 반란군의 수장으로 매도되었다는 가설도 있다. 엄청난 세력을 가졌던 그가 어떠한 실제적인 반역행위를 보이기도 전에 염장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점이 의문스럽다는 것이다. 더구나 그 시기는 문성왕의 혼인 시기와도 상당히 떨어져 있다(문성왕 혼인시기 4년 후에 난이 일어난다). 실제로 '속일본후기(續日本後紀)'에는 장보고의 부하 이창진(李昌珍)이 청해진에서 반항했고 염장이 이를 토벌했다고 나온다. 또한 장보고의 죽음의 시기도 841년 11월로 4년 앞당겨져 있다.
장보고의 근거지인 청해진은 장보고 사후에도 바로 없어지진 않았다...라기보단 이후 상황을 보면 못했다가 맞을 것이다. 851년에 청해진에 재차 토벌군을 보내 청해진을 완전히 없앴으며 청해진에 살던 주민들은 현재 김제시인 벽골군으로 강제이주시켰다.
3 의도적인 부각?
장보고가 현대에 들어 부각되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으며 여기엔 두 가지 설이 있다. 강준만 전북대학교 교수는 삼성그룹이 사카린 밀수 사건 이후 의도적으로 장보고를 띄웠다는 설을 제기했다. 애초에 집권 민주공화당의 정치자금을 대기 위해 중앙정보부와 손잡고 했던 밀수가 정권에 의해 뒤통수를 맞자 해상무역과 비운의 기업인 이미지가 있는 장보고를 주목하여 장보고 기념사업에 뛰어들었다는 것이다.[9] 즉 장보고는 삼성이 의도적으로 거물로 포장시킨 인물이라는 것. 반면 중앙일보에서는 김대중 정부의 지지를 받아 부각되었다는 설을 제기하면서 중앙일보는 삼성계열 신문인데? 대표적인 예로 소설-드라마 해신을 들었다. 그런데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기 전에도 지금과 인식은 딱히 다르지 않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80년대, 90년대에도 '장보고'는 위인전과 국사교과서의 중요부를 당당히 차지하였으며, 2000년대에는 불멸의 이순신 외에도 후삼국시대 시절의 왕건, 견훤, 궁예 발해의 건국자 대조영, 고구려의 연개소문, 주몽 등 그동안 사극에서 잘 다루지 않던 비(非) 조선시대 인물들을 방송국에서 집중적으로 조명하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을 다 다룬 다음에 드라마 '해신'이 나왔다. 더구나 '장엄한 사극'을 원하는 방송사들에게 대륙과 바다와 신분을 실제로 넘나들었던 '장보고'는 스케일이나 인생편력에서 구미가 당기는 소재. 동의
장보고의 행적상
- 전라남도 완도일대에 청해진을 세웠는데, 이는 김대중 대통령의 고향인 신안군과 가깝다.
- 해상무역을 통해 경제적 부를 일구어 냈는데, 경제 대통령 이미지를 앞세운 김대중 정부 시기에는 해양수산부를 많이 밀어주었다.[10]
- 신라 중앙정치의 탄압을 받은 장보고는 빨갱이로 몰렸던 김대중과 겹친다.
강준만의 가설에 따른다면 삼성은 2~3을, 중앙일보의 가설에 따른다면 김대중 정부는 1~3번을 주목한 것이라 생각된다. 다만 만약 그렇다면 이순신과 장보고가 띄워진 시기는 거의 동일하게 된다. 이순신 역시 이전부터 그랬으나, 1970년대 이후로 더욱 강조되었다.[11] 가설이 맞다면, 장보고 역시 이미 알려진 상태에서 다소나마 더 강조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거의 소설 수준인데
그러나 드라마 해신은 2004년 노무현 정부 시기에 방영되었고, 당시 해군출신인 윤광웅 국방장관은 전군에 시청하도록 했으니 김대중 정부가 이를 이용하려 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게다가 원작 소설을 집필한 최인호는 정치적으로 한나라당에 우호적인 작가로 특별히 이사람이 김대중을 염두에 두고 썼다고 보기는 어려울 듯하다.
그리고 일단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것은 장보고는 이미 당대~고려시대 때 나름 영웅으로 알려진 인물이라는 것이다 당나라의 시인 두목은 자신의 문집 번천문집 중에서 따로 장보고와 정연에 대한 기록을 남겼고, 신당서 편찬자 중 한 명인 송기 역시 당나라에는 곽자의와 장보고가 있었다는 식으로 높이 평가했다. 거기다 김부식은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에서 김유신을 평하는 과정에서 을지문덕의 지략과 장보고의 용기도 드높고 뛰어나지만 기록의 부족으로 중국 기록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으나 김유신은 그렇지 않았다는 식으로 기록을 했다. # 즉 장보고는 이미 오래전부터 아주 훌륭한 영웅으로 알려져 있었던 것이다. 조선의 실학자이자 국학자였던 안정복도 동국통감에 실린 최보의 사론을 빌어, 저서 동사강목에서 "장보고가 반란을 일으켰다고 확실한 증거가 나온 것도 아닌데다 애초에 '도와주면 딸을 왕비로 맞겠다'고 약속해놓고 그걸 입 싹 닦았으니 빡치는 것도 당연하지 않겠냐"며, 신무왕을 즉위시키는데 일조한 공신인만큼 죄를 지었어도 공을 감안하면 죽일 것까지는 없었는데 죽였다고 장보고의 편을 들었고, 그와 함께 신무왕을 즉위시키는데 일조했던 김양이 장보고가 죽을 때 한 마디 변호하는 말도 해 주지 않았다며 장보고가 자기와 세력이나 공적이 대등한 것을 내심 꺼려서 그런 것 아니냐고, 어떻게 해석하면 장보고의 죽음에 김양이 배후에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지적하고 있다.
4 각종 매체
- 드라마 해신은 장보고를 다루었으며, 극중 장보고는 최수종 분. 기존 최수종 스타일의 주인공을 그대로 끌어왔고 장신이었다는 장보고에 비해 키가 작았기 때문에 다소 논란이 있으었나 호연과 괜찮은 시청률로 크게 부각되지는 않았다.
- 태조 왕건에서는 한두 세대 앞 시대의 인물이므로 대사로 언급되는 정도이지만, 왕건이 장보고의 청해진 시절에 구축된 인맥을 통해 견훤의 무거운 세금에 시달리던 나주 호족 오다련을 설득, 나주 지역을 점령한다.
- '바다의 전설 장보고'의 주인공도 이를 본딴 것으로, 동명의 인물로 장보고(바다의 전설 장보고)가 출연한다. 이에 대해서는 항목 참고. 그리고 설정상으로 황금배의 전 주인인 위대한 제독으로 추정된다.[12]
- 오세영의 소설 <만파식적>에서는 조연으로 등장, 민애왕 시기를 배경이로 역사대로 반정을 돕지만, 김우징 측을 신뢰하지 않아서 사로잡힌 주인공을 풀어주면서[13] 보내어 민애왕을 빼돌려 청해진에서 보호하여 보험으로 삼으려 하지만, 주인공이 장보고의 부하들에게 민애왕을 넘기고 안심하고 돌아선 사이 다른 자객이 민애왕을 죽여서 실패한다.
- 국산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인 장보고전에서는 청해진군의 영웅(수비장 스킨)으로 등장한다. 스토리 자체가 가상 스토리라서 시대배경과 청해진의 수장이라는 점 말고는 이름만 따 온 수준.
5 기타
- 본의 아닌 개그 소재가 되기도 한다. 가령 A:야 너 어디가? B:어 나 저기 장보고(시장 좀 보고) 올게 라는 식으로...
근데 왜 써놓고 미안해지냐... - 은근히 최치원과 이미지가 많이 겹친다. 주목받지 못하는 출신에 당나라에서 경력을 쌓아 귀국해 입지를 얻은 점, 비극적인 최후 등등. 다만 문(文)적인 이미지와 무(武)적인 이미지가 확연히 갈리긴 한다.
- 1994년에 일본에서 그의 얼굴을 본따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목상이 발견되었다.당시 기사
- 대한민국 해군의 본격적인 첫 잠수함 SS-061 장보고함은 그의 함자를 따서 명명되었다(그보다 이전에는 특수임무용 소형 잠수정이 있었을 뿐).
- 동일규격 형식의 함종은 1번함의 이름에 따라 지칭되는 관례에 따라, 장보고함 이후 같은 모델의 잠수함들은 통틀어 "장보고급 잠수함"이라 일컫는다. 이 경우 1번함을 "네임 쉽(name ship)"이라 한다.
- 2014년 완공된 우리나라의 제2 남극 과학기지의 이름도 남극 장보고 과학기지로 결정되었다.
- 일본 전국 시대의 다이묘인 다케다 신겐 가문의 조상은 신라사부로 미나모토노 요시미츠(新羅三郎源義光, 신라삼랑원의광)라고 전해져 내려온다. 이때 신라사부로(新羅三郎, 신라삼랑)는 신라명신(新羅明神) 신사의 세번째 아들이라는 뜻인데(혹은 성인식을 받은 세번째 아들) 이름대로 신라에서 도래한 신으로 여겨진다. 이 신라명신은 엔닌이 당에서 귀국할 때 나타난 신인데 그가 곧 장보고라는 설이 있다. 물론 요시미츠의 신라사부로는 오미 신라묘진(신라명신) 앞에서 성인식을 치뤘기 때문에 붙은거지 요시미츠 밎 다케다 가문과 한국사의 신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그의 큰형 요시이에는 하치만신 앞에서 성인식을 치뤘기에 하치만타로, 둘째 형 요시츠나는 교토 카모신사에서 성인식을 치뤄 카모지로로 불렸다.
- 일본 교토 적산서원에 활을 든 장보고의 영정이 모셔서 있다.
- '장보고'는 사실 '장흥 보성 고흥'의 약어이기도 하다(...). 전남 남해안에 동서로 꽁꽁 붙어있는 세 지역. 근데 이게 단순 개드립으로 치부하고 넘어갈 수는 없는 게, 실제로 이 세 지역에서 2016년 2월에 행정협의회를 구성하면서 이름을 장보고라고 정해버렸다(...). 정작 인물 장보고와는 별 인연이 없는 곳이라는 게 흠.[14] 그리고 서로 인접한 지역이긴 하나 광역 생활권이 다르고 교류도 잘 없던 지역이긴 하다. 그리고 이 드립이 그 옆의 강진군과 함께 20대 총선 선거구로 실현되어버렸다.
- 참고: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 ↑ 장보고가 805년에 당나라 무령군 소장으로써 고구려 유민 이정기가 세운 제나라의 번진토벌에 참전한걸 감안할때 관직에 나가는걸 최소한 20세로 보더라도 785년 이전에 태어난것이 된다.
- ↑ 특히 절도사 중에는 유난히 이민족 출신들이 많았다. 고선지, 부몽영찰, 이정기, 복고회은, 가서한, 그리고 안록산.
- ↑ 일종의 장교. 하서절도사 휘하의 관직으로 1천에서 5천 정도의 군사를 거느리는 직책이었는데, 지금의 대위~중령 사이 정도의 직위였던 것으로 보인다.
- ↑ 후에 정연이 몰락하고, 장보고에게 의지하기를 망설인 내용이 있는데 장보고가 무관을 그만둔 일이 정연과 관련되었다는 추측이 나오기도 한다. 다만 정확히는 알 수 없다. 참고로 해신(드라마)에서는 장보고가 때려잡은 옛 고구려 유민 출신 군벌 이사도가 자기는 조상 고구려의 옛 땅을 되찾는 것이 목적이었는데 당군에서 일하는 장보고 너 때문에 실패했다라고 말해서 이 때 충격을 받아 결국 당나라 장수일을 때려치는 계기가 된다. 통일신라가 삼한일통 프로파간다를 시도하고 있었긴 하지만 아직 한민족 의식은 미진한 시절이었기 때문에 가능성은 낮다.
- ↑ 그런데 당시(828년) 통일신라 형편상 1만의 군사를 줄 수 없었다. 따라서 1만의 군사라는 것은 신라정부의 일부군사들과 추가로 장보고의 사병일 것이라는 설도 있다. 사병이 맞다면 장보고는 서양의 사략선처럼 진짜로 정부의 허가만 받았지 제멋대로 해적질(...)을 한 셈이다. 물론 해적을 때려잡긴 했지만 불법 군사 조직 (...) 이후 장보고의 행보를 보면 정말 해상 마피아가 따로 없다. (...)
- ↑ 천태종 승려로, 일본에서는 지가쿠 다이시(慈覺大師)로 더 잘 알려져있다고 한다.
- ↑ 동방견문록, 대당서역기와 함꼐 세계 3대 기행문으로 꼽힌다. 단, 한국에서는 입당구법순례행기 대신에 왕오천축국전 또는 표해록을 넣는 견해도 있다.
- ↑ 이미 신무왕이 왕이 되기 전에 자신을 도와주면 장보고에게 사돈결의를 사전에 약속했었다는 이야기가 삼국유사에 있다. 그런데 그 신무왕이 금방 죽어버렸고 장보고는 후임 문성왕에게 약속 이행을 요구한 것.
- ↑ 한국 현대사 산책 1970년대편
- ↑ 참고로 김대중 대통령은 20대 시절에 목포 인근에서 해운업으로 성공했고, 이를 기반으로 정계에 진출하였다.
- ↑ 당시 군사독재 정권에는 (일제의 괴뢰국인 만주국까지 포함해서) 일본군과 일제관료 출신들이 상당수 포진해 있었고, 급속한 한일협정 체결에 따른 반감까지 상당했다. 이런 취약한 정통성을을 가리기 위해서 군부독재 정권은 의도적으로 독립유공자 후손들을 적극적으로 중용하며, 거의 국수주의에 가까운 민족주의 교육을 강화했다. 이 와중에 왜군의 침입에 맞선 이순신을 민족사 최고의 영웅으로 엄청나게 띄운다.
- ↑ 실제로 유령섬 에피소드에서 장로가 전설의 제독의 초상화를 보여주는데 바로 장보고의 초상화였다.
- ↑ 이 주인공은 무열왕계 후손이다.
- ↑ 청해진을 설치한 완도군의 바로 옆동네 지자체들이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