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라이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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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Lai Massacre (영어)
thảm sát Mỹ Lai (베트남어 慘殺美萊 참살미래)

1 개요

베트남 전쟁 중이던 1968년 3월 16일에 있었던 미군양민학살 사건이자 명백하게 진상이 증명되고 조금도 변명할 여지가 없는 명백한 제노사이드. 미군 역사상 사상 최악이라고 좋을 정도의 흑역사다. 미군 역사상 인디언 학살과 더불어서 이 정도로 변명할 거리가 없는 사건은 현재까지는 없다[1]. 게다가 더 황당한 건 보통 이런 사건 대부분이 고위 장교단이 연관된 경우가 많은 반면, 이 사건은 공식적으로는 정신나간 소위 한 명이 주도했고, 처벌도 거의 받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2 배경

당시는 구정 공세 직후, 미군의 반격작전 중이었다. 격렬했던 구정 공세를 격퇴하면서 분노한 미군은 대대적인 반격으로 잃어버린 지역들을 빠르게 수복하며 각지에서 베트콩을 격파, 섬멸해가고 있었다. 그러나 경험해본 적이 없는 치열한 전투가 반복되며 미군 역시 인명피해가 큰 상황이었다.

문제의 학살을 저지른 23보병사단 11여단 20보병연대 1대대 C중대는 전선에 투입된지 불과 4달밖에 지나지 않았으며, 구정 공세 이후 반격작전에서만 중대원 5명이 전사한 상태였다고 한다.

한편, 이와 별개로 미군 상층부는 구정 공세로 빼앗겼던 지역에 대한 수복작전을 준비했다. 피점령지구를 되찾는 것은 군으로서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고, 수복대상에는 손미 마을에 포함된 미라이 마을이 포함되어 있었다. 미군은 작전당시 이 마을을 핑크빌(Pinkville, 빨갱이(pinko) 마을 정도의 의미를 내포)이란 코드네임으로 불렀다고 한다.

3월 15일, 반격 명령을 받은 20보병연대 1대대는 작전회의를 통해 A, B 두 중대가 미라이 마을을 포위하고 C 중대가 마을로 진입하기로 했다. 베트콩 및 그 동조자로 의심되는 사람은 모조리 사살 및 체포하라는 지시와 함께. 사실 지시 자체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지만 그걸 알아들은 인간의 정신 상태가 문제였다.

3 학살

3월 16일, C 중대가 미라이 마을로 진입했으나 이미 베트콩 및 그 동조자는 다 도망간 상태였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 경우 상식적으로 보면 마을을 불태우고 주민들을 강제 소개한 다음 조사에 들어가는 게 상식이다. 그런데 미군은 가옥들을 수색하는 과정에서 남은 사람들을 모두 끌어냈다. 그 다음 묻지마 학살이 시작되었다.

이 학살로 약 150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학살되었으며, 이중에는 도망치는 여성과 아이들을 추격해서 사살한 경우도 포함되어 있다. 더 어처구니 없는 것은, 도망치는 민간인들에 대한 학살을 도망치는 적군 사살로 처리했다는 것. 게릴라 중엔 여성도 많았으니 그렇다 쳐도, 학교 다닐 나이도 되지 않은 아이들마저 게릴라로 치부한 것은…[2]

학살은 그걸로 끝난 것이 아니어서, 작전완료 보고 직후 도착한 증원부대가 인접한 미케 마을에서 학살을 저질렀다. 두 마을 합쳐서 학살된 민간인의 숫자는 약 300에서 500명 사이로 추정된다.

정말 다행히도, 모든 미군이 생또라이는 아니었다(...). 당시 정찰비행 중이던 미군 헬리콥터가 민간인 학살 현장을 목격하고 경악해서 생존한 민간인 구출을 단행했다. 이 과정에서 C 중대와 통신으로 치고받고 싸운 헬기 파일럿은 열받아서 캘리 소대원들이 방해할 경우 사살해도 좋다는 지시를 내렸고, 총기로 대치하면서 민간인 구출을 강행했으며, 최종적으로 아이 중심으로 서너 명의 민간인을 구출하는 데 성공했다. 생각보다 많이 못 구했지만 그건 구출할 때 썼던 헬기가 OH-23이라서 그랬다. 어떤 헬기냐면...


...이런 놈이다 보니 도저히 수용여력이 없었다.

애초에 OH-23은 100% 정찰 헬기다. 처음부터 제대로 된 구출시도를 할 여건이 아니었던 것.

4 폭로와 처벌

군부는 이 사건을 은폐하려 했으나, 이런 흑역사는 결코 은폐되어서도 안 되고 은폐될 수도 없는 법. 사진기자 로널드 해벌(Ronald Haeberle)이 찍은 학살 사진이 "라이프(Life)" 지를 통해 1969년 세상에 공개되고 프리랜서 기자인 시모어 허시(Seymore Hersh)에 의해 학살이 폭로되었다.

미군은 즉시 1대대 주요 지휘관과 사병, 상급부대 지휘관들을 조사하기 시작하면서, 상급부대에서부터 이미 마을을 초토화시키라는 명령, 확 쓸어버리라는 명령 등이 나왔다는 게 확인되었다. 이들이 구체적으로 학살을 하라거나 해도 좋다고 말한 건 물론 아니라지만 이쯤 되면 답이 없다. 밑에서 이상하게 알아들을 수 있는 구실을 준 건 사실이니까.

그러나 정작 체포된 장교 14명 가운데 형사처벌을 받은 건 사건 당시 현장지휘관이었던 소대장 윌리엄 캘리(William Calley) 소위뿐이었다. 상급부대의 명령은 명확한 학살 명령임이 증명되지 않은 점을 들어 관용어구 내지 오해로 넘어갔다.[3]


군 복무 당시 윌리엄 캘리 소위.(1943. 6. 8. ~) 인물이 제복보다 저렴한 지휘관.


현재의 윌리엄 캘리. 묘하게 호머 심슨스럽다. D'oh!

윌리엄 캘리(풀네임 : 윌리엄 로우 캘리 주니어(William Laws Calley Jr).) 소위는 지휘력이나 지적으로 장교로서 부적합한 인물로서, 전문대학(community college)조차 낙제한 학습 지진아였다. 이후 사회 밑바닥에서 여러가지 직업을 전전하다가 군에 자원입대했는데, 훈련병 시절 성적이 우수해서[4] 바로 간부후보생(Officer's Candidate)에 지원할 수 있었고 소위계급을 달았다. 이렇듯이 개인적 자질이 의심되었고, 소대장으로서 독도법같은 기초적인 것도 잘 몰랐다고 한다. 소대 내에서의 리더십이나 평판도 형편없어서 몇몇 소대원들은 그를 죽이려고(프래깅) 할 정도였다. 이런 사고뭉치 초짜 소위가 결국 사고를 친 것이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빠질 인간은 다 빠지고 돈 없고 뒷배경 없는 청년들만 베트남전에 끌려가던 소위 빈민개병제 시절이라, 그런 자가 장교 과정에 들어가는 게 가능했을 만큼 당시 미군도 형편없었던 것이 사실이다.[5] 당장 베트남전당시 죽은 미국 흑인의 수가 22%인데 정작 인구 비중은 12%에 불과했으니까.

윌리엄 캘리 소위는 민간인 학살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1971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가택연금으로 감형시키더니, 그마저도 3년 뒤에 해제되었다. 이뭐병. 때문에 미국이 진짜 민주주의와 자유의 나라나며 대차게 까이는 원인이 되었다.[6]

5 이후

이 사건으로 미국의 여론은 들끓어오르기 시작했고, 안 그래도 심화되던 베트남 전쟁 반대 여론이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당연히 북베트남은 미국 제국주의자 놈들이 베트남 오더니 민간인 학살이나 한대요 라며 선전에 적극 활용했다. 미국도 잘못한 게 명백해서 적극 반박은 못 하고, 그나마 미국 정부는 민간인 학살이 잘못되었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으며, 단지 개별 소부대의 만행이니 오해하지 말아 달라고 해명하는 정도였다.

이 사건은 미국의 베트남 전쟁에 대한 명분을 완전히 날려버렸고, 미국인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결국 68운동의 뒤를 이은 미라이 학살로 여론은 극단적으로 악화되어서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이 손을 떼는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

학살로부터 40년이 지난 후, 윌리엄 캘리는 뒤늦게 참회한다고 했으나 참회한다는 말로는 이미 죽은 목숨들에 아무런 보상도 못 된다. 그나마 반성이라는 걸 한 사람도 캘리 혼자다. 나머지는 다 캘리의 그늘 뒤에 숨어 있는 형편. 미라이 학살 20주년으로 제작된 미국 다큐멘터리에서 불명예 전역후 사업가로 변신해 고급차를 타고 다니는 캘리의 모습이 나와서 파문이 일어났다. 당연한 일인 게, 경범죄나 과실범죄를 저지른 것도 아니고, 그 많은 사람의 생명을 빼앗은 자가 종신형도 면했으면 평생 가난하게 살면서 참회해야 마땅한데 사업가가 되어 당당히 큰소리를 치고 다니고 있으니.[7] 그나마 이후 비슷한 짓을 저지른 범죄자들은 잡히는 족족 처벌 자체는 제대로 받고 있으니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하겠다.

한편, C 중대와 마찰을 빚어가며 민간인 구출에 나섰던 휴 톰슨 주니어(Hugh Thompson, Jr.) 준위와 동승해있던 2명은 1998년에 군인훈장(Soldier's Medal)[8]을 받아 그 공로를 치하받았다. 하지만 연도를 주목하자. 사건 터지고 30년이 지나서야 줬다(...).[9]
  1. 물론 이후에도 비슷한 범죄가 있었지만 인명피해가 적었고 여기에 가해자들은 법의 심판을 제대로 받았다.
  2. 물론 어린아이가 게릴라의 일원인 경우가 실제 존재하긴 했다. 철 들지도 않았을 어린 나이임에도, 주변 분위기 등으로 인한 (사회적) 압력으로 동조하게 되어 적극 참여하는 경우도 있다. 도의적 문제와 현실적 문제가 상충하여 복잡한 사안이긴 하다.
  3. 부대원 증언 중에서는 학살 전 날에 이미 학살명령이 있었다는 말도 나온다. 부대원과 상급 장교간의 증언이 일치하지 않는데, 실제 상급부대에서 직접적으로 학살을 언급했을 가능성보다는, 부대원이 죄를 공유하기 위해 거짓증언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4. 훈련병때 배우는 것은 리더십과 전혀 상관이 없기 때문에, 이것이 좋은 지휘관의 증명이 될 수는 없다.
  5. 그래서 은근히 사람들이 히피들을 까는 이유기도 하다. 대부분의 히피들이 잘 사는 놈들이기도 했고... 어쨌든 전쟁은 반대해야했다.
  6. 일반적인 시각으로 캘리 자신을 희생양으로 보는 경향이 많은데, 캘리 소위 자신 역시 장교로서는 대단히 부적절한 성격의 소유자였고 사건을 지나치게 확대한 책임은 분명히 있었다. 단순히 높으신 분의 명령만 수행한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행위는 분명히 책임이 있었고 윗선에서 덮어줄 영역을 넘어선 것이었다. 실지로 非육사 출신인 캘리가 벌인 짓 때문에 장교 선발 기준이 강화되었을 정도였다.
  7. 단, 이는 정서상 그렇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기본적으로 개인의 노력으로 인한 성과는 부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8. 명예훈장보다는 조금 급이 아래인 훈장으로, 어디까지나 평시 군인이 수상할 수 있는 훈장 중 최고 명예이다. 수상한 연도나 수상한 훈장 종류나, 인정하기 싫은데 국제적인 시선 때문에 슬그머니 처리하는 티가 역력한 것.
  9. 사실 사건을 정리하면서 휴 톰슨 준위에게 육해공의 항공근무자들이 모두 받을 수 있는 비행무공십자장(Distinguished Flying Cross. 나름대로 높이 쳐주는 훈장이긴 하다)이 수여되긴 했다. 그런데 톰슨이 받은 이 훈장의 증서에 써진 내용이 가관. 미군과 베트콩의 교전에 휘말려 부상당한 베트남 어린이들을 안전하게 구출하여 미월(美越)관계에 기여하였다는게 뭔 개소리라냐... 결국 빡쳐서 집어던져버렸다고. 이후 이 분은 계속 정찰헬기 조종사로 복무하다 몇 번씩이나 격추되고 마지막 격추에서는 척추를 다쳐서 재활을 하는 마당에 꼴통 국개의원들로부터 전우들을 팔아넘긴 배신자 소리나 듣고 살해협박이나 받는등 마음고생만 하다가 연금 수혜기간을 겨우 채우고 군복을 벗었다. 원래 해군 시설단(씨비즈)에서 만기 전역을 했기에 징병대상이 아니었는데도 통킹만 사건 듣고 나라 지키겠다고 일부러 한군두를 했건만 참 울화통이 치밀어오르는 군생활을 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