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일화친조약

img_archive_01.jpg
<:> 미일화친조약 일본어본(복제품)

1854년 3월 31일에 에도 막부미국이 체결한 조약이다. 가나가와 조약(神奈川 条約)이라고도 부른다.[1] 일본측 전권은 하야시 후쿠사이(林復斎), 미국측 전권은 동인도 함대 사령관인 매튜 페리에게 일임되었다. 이 조약에 의해 일본은 시모다와 하코다테를 개항함으로써, 쇄국 체제는 종말을 맞이하였다.

1 개요

1853년, 필모어 대통령의 명을 받은 페리 제독은 함대를 이끌고 일본에 내항하여, 대통령의 개국·통상을 요구하는 친서를 가지고 막부에 이를 요구했지만 막부 측이 1년의 유예를 구하여 이를 받아들이고 일시 해산하였다. (쿠로후네 사건)
이듬해 1854년 2월 13일, 다시 도쿄에 입항하였다. 이후, 약 1개월 걸친 협의 끝에 같은 해 3월 31일에 총 12개조로 구성된 미일화친조약을 체결했다.
그 후, 현 시즈오카 현 시모다시로 협상의 장을 옮겨 같은 해 6월 17일에 화친 조약의 세칙을 정한 시모다 조약(전체 13 개조)을 체결하였다. 이는 향후 미일수호통상조약으로 계승된다.

2 내용

제 1 조
미일 양국·양 국민 사이에는 사람·장소의 관계없이 향후 영원한 화친이 맺어진다. 1조부터 어긋남

제 2 조
시모다와 하코다테를 개항한다.(시모다는 즉시, 하코다테는 조약 체결 일년 뒤) 이 두 항구에서 식수, 식량, 석탄, 기타 필요한 물자의 공급을 받을 수 있다.
상품의 가격은 일본 관료가 결정하고, 그 지불은 금화 혹은 은화로 한다.

제 3 조
미국 선박이 좌초 또는 난파한 경우 승무원은 시모다 또는 하코다테에 이송되어 미국인에 인도된다.
피난민의 소유 물품은 모두 반환되며 구조에 발생한 지출에 따른 변제는 필요없다.(일본 선박이 미국에서 조난 당한 경우도 마찬가지)

제 4 조
미국인 조난자 및 시민은 타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체제비는 없으며 감금되는 정도는 아니나, 일본의 공정한 법률을 따를 필요가 있다.

제 5 조
시모다와 하코다테에 임시 거류하는 미국인은 나가사키의 네덜란드인중국인과는 달리, 그 행동 제한이 없다.
행동가능 범위는 시모다에서는 7리(里) 이내, 하코다테는 별도로 정한다.

제 6 조
기타 필요한 물품이나 동의에 관해서는 양 당사국간에 신중하게 심의한다.

제 7 조
두 항구에서 금화·은화를 통한 구매 및 물물교환은 가능하다.
거래가 성립되지 않는 물품은 모두 가져갈 수 있다.

제 8 조
물품 조달은 일본 관리가 알선한다.

제 9 조
미국에 편무적(片務的)인 최혜국 대우를 준다.

제 10 조
조난·악천후를 제외하고 시모다와 하코다테 이외의 항구에 내항을 금지한다.

제 11 조
양국 정부 중 하나가 필요로 하는 경우에는, 본 협약 체결 일로부터 18개월 경과 한 후 미국 정부는 시모다에 영사를 둘 수 있다.

제 12 조
양국은 이 조약을 준수할 의무가 있다.
양국은 18개월 이내에 협약을 비준한다.
또한 시모다 조약에서는 다음과 같은 세칙이 정해졌다.

* 미국인의 이동 가능 범위는 시모다에서 7리 , 하코다테에서 5리 사방에 한한다. 무가·상가에 들어가는 것은 보류한다.
* 미국인에 대한 잠정적인 휴식처로 료센지(了仙寺)·교큐센지(玉泉寺)에 설치하고, 미군 묘소는 교큐센지에 둔다.
* 미국인이 짐승을 사냥하는 것을 보류한다.

3 트리비아

  • 일본이 서양세력과 맺은 최초의 근대적 조약.
  • 이 조약의 기본 방침은 존 만지로의 의견을 받아들인 것이다. 항목 참조.
  • 미국은 청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와의 무역을 위해 태평양 항로를 필요로 하였다. 당시 증기선에 보급을 위한 기항지로서 일본의 항구가 절실했다. 특히, 각기병​이나 괴혈병의 예방을 위하여 야채나 육류의 섭취가 필요했다. 또한 북태평양에서 고래 기름 을 목적으로 한 포경을 실시하는데 있어서 국교가 없는 상태에서 자국의 포경 선원의 인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불편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페리의 통상 교섭이 이루어졌고, 무리한 협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시모다·하코다테가 개항 항구로 선정된 것도 보급의 편의를 중시한 것이었다.
  • 향후 수정되고 보완되는 미일수호통상조약과는 달리, 이 미일화친조약은 미국의 보급 기항지 필요성이 다급했는지, 그렇게 불평등한 조약은 아니었다. 반막부파인 웅번들도, 이 조약에 대해서는 그렇게 열이 받지 아니하였으나 향후 본격적으로 조약을 맺는 미일수호통상조약의 불평등한 요구에 단체로 빡이돌은 상태에서 이이 나오스케고메이 덴노의 허가도 받지 않고 조약을 체결하자 눈새 막부에 대한 분노는 폭발하여, 일본은 메이지 유신 시대로 굴러가게 된다.
  • 미국은 일본에게 개항과 통상을 요구했지만, 존 만지로에게 미리 들은 정보에 의하면 미국에게 개항은 시급한 사항이지만, 일본의 쇄국 정책을 잘 알고 있는 미국은 통상까지는 바라지 않을거라는 것이었다. 에도 막부는 페리 제독이 통상 문제를 꺼내들었을 때는 딱 잘라 거부했고, 페리 제독도 통상은 시기상조라 여기고 "통상 문제는 이것으로 끝내죠."라고 순순히 받아들였다.
  • 일본어 조약서 원본은 에도 막부 말기 에도성 화재로 소실되었다. 조약서 원본 중 미국측 것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 보관되어 있으며, 현존한다. 위의 문서는 복제품이다.
  1. 일본에서는 이 명칭이 일반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