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tthew Calbraith Per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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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페리 제독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이리 호 전투에서 활약한 미합중국 해군의 영웅 올리버 해저드 페리(Oliver Hazard Perry)[1] 제독의 동생이다. 쇄국을 하고 있던 일본의 에도 시대에 함대를 이끌고 내항하여 미일 화친 조약을 통해 일본을 개항하게끔 만든 사람이다. 내항 당시의 막부는 네덜란드어 통역을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의 문서에는 네덜란드어식 발음의 '페루리(ペルリ)'로 불렸으며 한자로는 피리(彼理)로 표기되었다.
1 일생
로드아일랜드 주 뉴포트에서 미국 해군 사략선장 크리스토퍼 레이먼드 페리와 처 세라의 사이에서 3남으로 태어났다. 1809년에 자신도 해군에 들어가고, 1812년부터 미영전쟁에 두 명의 형과 함께 참가한다. 1833년에 브루클린 해군공창의 조선소장이 되고, 1837년에 미국 해군 최초의 증기선 풀턴 함을 건조한다.
동년 해군 대령으로 승진하고 1841년에는 브루클린 해군공창의 사령관이 되었다. 증기선을 주력으로 하는 해군의 강화책을 진행함과 동시에 사관교육의 임무를 맡은 그는 증기선 해군의 아버지라고 칭송받게 되었다.
1852년 3월에 동인도함대 사령관에 취임하여 일본을 개국하라는 지령을 부여 받았다. 동년 11월 필모어 대통령의 친서를 휴대하고 버지니아 주 노퍽을 출항했다. 프리깃함 USS 미시시피 함을 기함으로 한 4척의 함대는 카나리아 제도·케이프타운·싱가포르·홍콩·상하이·류큐 왕국·오가사와라 제도를 경유하여 1853년 7월 8일, 우라가에 입항했다.
7월 14일에 막부 측이 지정한 구리하마에 호위를 거느리고 상륙하여 도다 우지요시·이도 히로미치에게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했다. 여기에서는 구체적인 협의를 진행하지는 않은 채 개국의 요구를 한 것으로 보이며, 만을 며칠간 측량한 후 식료 등 함대의 사정도 있어서 막부에 다음 해까지 유예를 주어 류큐로 돌아가 기항했다. (쿠로후네 사건 참조)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나면서 미국에 극동사정이 전해지는 중이던 1854년 2월 13일에 기함 USS 서스케하나 함 등 7척의 군함을 이끌고 현재의 요코하마 시 가나자와 구 앞바다에 육박해 조약체결을 요구하여, 3월 31일에 가나가와에서 미일화친조약을 조인했다. 또 그 후, 나하에 기항하여, 7월 11일에는 류큐 왕국과도 미류수호조약을 체결했다.
귀국한 후는 함대 복무 시절의 경험을 담은 원정기 등을 썼다. 만년에는 가발을 착용했다. 1858년 3월 4일에 64세로 뉴욕에서 죽었다. 묘소는 로드아일랜드 주의 아일랜드 묘지에 있다.
2 각종 매체에서의 등장
- 개그만화 보기 좋은 날에서는 부하장병들에게 무시당하고 딸내미한테 삥뜯기는 찌질이로 묘사되었다. 아무래도 일본인 입장에서 좋게 봐줄 수 없는 인물이라 이렇게 되었다는 얘기도 있으나 애초에 이 작품이 존경받는 인물이고 나발이고 싸잡아 망가뜨리는 작품이라 그렇게 큰 의미는 없을지도 모른다.
- ↑ 올리버 해저드 페리급 프리깃의 1번함 이름이 된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