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0년경 사진
ジョン万次郎(ジョン まんじろう) 1827년~1898년
본명은 '나카하마 만지로(中濱 萬次郎)'. 에도 막부 말기(막말)에서 메이지 시대 인물. 통역가, 번역가, 교사.
토사 번의 출신으로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농업과 어업으로 먹고 살던 평민이었는데, 1841년 여름 14살 때 동료 4명과 고기잡이를 하러 나갔다가 표류, 일본에서 남쪽으로 750Km 떨어진 무인도에 도착. 돌을 던져 새를 때려 잡고, 빗물로 연명하다 미국의 포경선한테 구조되었다.
이후 10년간 포경선을 타고 세계를 항해하고, 미국에서 학교도 다니며 생활을 하다 일본으로 돌아왔다. 일본인 최초로 철도, 증기선을 탔고, 최초로 근대식 포경업에 종사했다.
1851년 음력 2월 2일 동료 3인과(한명은 도중에 사망) 류큐에 귀국, 류큐를 복속중이던 사쓰마 번에서 취조를 받았다. 평소 서양 문물에 관심이 많았던 사츠마 번주 시마즈 나리아키라에게 불려가 질문을 받기도 했다. 그의 지식을 높이 사 사쓰마 번의 사무라이들에게 서양의 조선술과 항해술을 전수하고, 번의 양학교(洋學校)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이윽고, 나가사키 봉행소를 옮겨져 긴 심문을 받고, 다시 토사 번으로 건너져 또 심문을 받았다. 귀국 1년 반만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토사 번의 취조에 동석했던 화가 카와다 소료(河田小龍)는 만지로의 이야기를 듣고 일러스트가 들어간 <표손기략(漂巽紀略)>이라는 서양 정보 책을 썼다.
26살 때의 만지로 |
귀향 후에는 토사 번으로부터 사무라이 신분을 받고, 토사 번의 번교(번이 세운 학교)에서 교수로 임명됐다. 이때 훗날 토사 번의 참정이 되어 대정봉환에 기여한 고토 쇼지로, 미쓰비시 기업을 창업하는 이와사키 야타로 등을 가르쳤다.
그러나 토사 번으로 돌아온지 4개월만에 1853년 흑선내항 사건이 발생하고, 미국에 대한 정보가 필요한 에도 막부에 불려갔다. 노중 아베 마사히로와 접견하고, 자신이 미국 포경선에서 일한 경험으로 미국의 개항 요구를 받아들일 것을 제안했다.
당시 미국의 포경업은 국가 주요 산업으로 미국은 일본 근해까지 자주 진출했다. 포경선은 한 번 출항하면 4년 정도 바다를 항해하며 고래를 잡았고, 물과 식량, 증기선의 원료인 석탄을 보급할 항구가 절실했다. 그러나 일본은 쇄국정책으로 일관, 항구를 개방하지 않고 난파해서 표류한 선원을 죄인 취급했다. 미국에서는 이런 일본을 야만적이라고 불만의 목소리가 컸다. 미국이 요구한 사항 제1조는 난파해서 표류해 온 선원을 보호하고, 항구를 개방하라는 것이었다. 실제 미국의 포경선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만지로는 항구는 개방하지만 통상은 안해도 된다는 조언을 했다. 막부는 이 의견을 검토해서 받아들였다.
이 공적으로 막부로부터 직참 하타모토의 벼슬을 얻고, 고향 이름을 따와 나카하마라는 성씨를 칭했다. 미일화친조약에서는 통역사로 발탁됐지만, 미국의 스파이라는 모함을 받고 페리 제독과의 직접 통역은 하지 못했다. 하지만 화친 조약 체결을 위한 회의가 열린 장소의 옆방에서 모든 문서를 점검하고 번역하는 활약을 했다.
이후 영어회화책을 저술하기도 했고, 번역, 영어 교사, 강연 등을 했다.
1860년 미일수호통상조약의 비준서를 교환하기 위해 일본 최초로 태평양을 횡단해서 미국으로 가는 선박 항해에서도 통역사로 동행했다. 이때의 선장은 카츠 카이슈(38살). 그러나 배멀미로 드러누워서 만지로가 배를 조종했다고 한다. 이 항해에는 후쿠자와 유키치(27살)도 군함부교로 꼽사리 동행하고 있었다.
1866년, 고향으로 돌아와서는 학교를 설립, 영어, 항해술, 측량술 등을 가르쳤다.
메이지 유신과 사카모토 료마 등 일본 개화파 인물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해외에 갔다왔는데도 벌을 받지 않고 오히려 막부의 벼슬을 얻었다는 사실과 외국의 정보를 얻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어, 1854년 미일화친조약이 체결된 직후, 24살 청년 요시다 쇼인은 조각배를 타고 쿠로후네로 찾아가 해외 밀항을 부탁했다가 페리 제독한테 거절당하고 옥살이를 했고, 요시다 쇼인의 제자 '초슈 파이브' 이토 히로부미 등은 번의 공금을 횡령해서 영국으로 밀항을 하기도 했다.
이런 흐름은 이와쿠라 도모미의 이와쿠라 사절단으로도 이어졌다.
영어는 회화 능력은 뛰어났지만, 어린 시절 학문을 배운 적이 없어서 영어 문장을 일본어로 옮기는 것은 서툴러서, 서양의 체계적인 학문 지식을 도입하려는 메이지 정부가 들어선 후에는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고 한다.
만지로 본인은 고래를 잡는 포경업을 일본에서 할려고 귀국했는데, 시대가 시대이다 보니 영어로 생업을 삼게 되었다. 도쿄대학의 전신인 학교에서도 영어 교사로 일한 적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