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慶錫
1933년 1월 1일 ~
대한민국의 군인, 시인이다. 육군사관학교 생도2기 출신이다. 대한민국 육군 준장으로 예편하였다.
1933년 연기군 조치원읍 본정(현 세종특별자치시 조치원읍 원리 88번지)에서 출생 하였다. 이후 대전고등학교 31회로 졸업하고, 17세의 나이에 청운의 꿈을 꾸며, 첫 4년제 정규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했다. 이때 17세라는 나이로 인해 자격 미달이 되었지만, 같은 나이의 당시 권력자 원용덕 장군의 자제 원창희 씨의 육사 입교 압력이 육사 심사위원들에게 들어오자, 형평성 문제로 덩달아 박경석 생도도 합격되었다.
입교 보름만에 6.25 전쟁이 발발하자, 박경석 생도는 채병덕 당시 육군참모총장의 어이없는 명으로 윗 기수인 육사 10기생과 육사 생도대대로 편성되어 포천 방면으로 이동, 첫 전투를 치렀다. 졸업 및 임관이 머지않은 육사 10기와 달리 박경석 생도를 포함한 육사 11기는 입교한 지 보름째로 기껏 소총 영점을 맞추었을 뿐이라 실전에 투입될 처지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들은 채병덕 장군의 오판으로 전투에 투입되었고, 결국 애꿎은 생도 절반이 이 포천 전투에서 전사했다. 박경석 생도를 비롯한 생존자들은 끊어진 한강 다리를 구사일생으로 넘어 후퇴, 임시 수도인 대전 원동 국민학교에서 1기 선배인 육사 10기생들의 철모에 일명 반창고 소위 계급장을 붙여 주며 눈물의 소위 임관식을 치러 주었다.
이후, 전장에서 더 많은 위관장교 자원을 필요로 하자 정부는 이들을 신설된 육군 종합학교에 입교시켜 단기 교육 후 소위로 임관시켰다. 박경석도 이 때 임관된 초임장교 중 하나였다. 이들은 생도 2기 출신 1명을 제외하고, 전부 새로 신설된 제9사단(사단장장도영)의 소대장으로 갔다. 그 1명은 당시 권력자였던, 원용덕 헌병 총사령관의 아들 원창희 소위였다. 원창희 소위는 임관과 동시 후방의 육군본부로 배속받았다.
그후 박경석 소위는 여러 전투에서 생사를 넘나들었으며, 한 번은 북한군에 잡혀 포로가 되었지만 포로 수용소에서 탈영했다, 사실 북한군 사단장이 박경석 소위를 전향시키려 했지만 그게 안 되었고, 포로 생활도 도망가든 말든 자유로웠다고 한다.
1951년쯤, 전쟁이 교착 상태가 되자, 이승만 대통령은 전쟁 초기 육사 생도들의 안타까운 죽음을 기려, 미 8군의 도움으로 육사를 재건하려고 했다. 그러나 당시 중위 신분이던 육사 생도 2기생들은 육사 생도 복귀를 놓고 논쟁하다가 결국은 새로운 모집 공고에 의한 육군사관학교 재건으로 전두환노태우등이 판을 치던 그 육사 11기생들이 첫 정규 4년제 육사 생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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