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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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인물은 대한민국 법원의 판결에 의해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예우가 박탈되었습니다.[1]
대한민국 대통령
1대2대3대4대5대6대7대8대9대
이승만윤보선박정희
10대11대12대13대14대15대16대17대18대
최규하전두환노태우김영삼김대중노무현이명박박근혜*
† 대법원의 96도3376 전원합의체 판결전직 대통령의 예우가 박탈된 인물
* 헌법재판소의 2016헌나1 판결로 탄핵된 인물

틀:12.12의 주역들


대통령 기록관 존영[2]
이름노태우(盧泰愚 / Roh Tae-woo)
출생지일제강점기 경상북도 달성군 공산면(현 대구광역시 동구) 신용동
본관교하 노씨
출신정당민주정의당민주자유당
종교불교개신교
부모아버지 노병수, 어머니 김태향
형제자매남동생 노재우
영부인김옥숙
자녀아들 노재헌, 딸 노소영[3]
생몰년도1932년 12월 4일 ~ 현재 83세
재임기간1988년 2월 25일 ~ 1993년 2월 24일
서명


1 개요

대한민국의 제13대 대통령.

군인 출신으로서 전두환과 함께 12.12 군사반란의 주요 인물 중 하나이기도 했다. 전두환의 집권 이후 정치인으로 전향했으며, 제6공화국 출범 이래 직선제로 선출된 최초의 대통령이기도 하다.

2 생애

2.1 당선 전

2.1.1 성장기

1932년 대구광역시 동구 [4]에서 당시 면서기였던 노병수와 그 아내 김태향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노태우가 7살 때 동생, 즉 노태우의 숙부인 노병상의 중학교 입학시험을 배웅하고 돌아오던 길에 사고로 이른 나이에 목숨을 잃었다.

대구공산소학교(現 대구공산초등학교)와 대구공업중학교(現 대구공고)를 졸업했다. 또 육군사관학교를 추가합격으로 들어간 최고의 친구 전두환 대통령과는 달리, 당시 지역 명문이라 칭해지던 경북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한다.

고교 시절에는 이런 시도 썼다고 한다. ([오마이뉴스 기사], [오마이뉴스 기사(네이버)])

<여름의 저녁>

여름의 저녁 뻐꾸기 울고 피리소리 들려오누나
물은 고요히 잠자고 그 속에 달그림자 떠 있어......

두던의 잔디는 부드럽고 그 위에 몸을 높인 이 몸
잠자코 나는 여름 하늘의 별을 세노라.

어디서 들려오는 뻐꾸기 소리. 나는 고요히 물 위에 가벼운 돌을
던지다. 물은 잔작히 파도를 일으키고 달은 너울너울 춤을 추누나.

여름의 저녁 어느덧 밤은 물속에 든 달그림자와 함께 깊어간다.
그윽한 여름 개울의 잔디 두던에 고요히 밤은 짙어간다.

2.1.2 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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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시절 노태우(맨 왼쪽), 중앙은 월남 파병 당시의 노태우. 오른쪽은 같이 12.12 군사반란의 주역이었던 박희도.

육군사관학교 11기로 동기 전두환과 함께 육군 보병소위로 임관했다. 전두환이 조직한 군내 불법 사조직 하나회 출신으로 월남 파병을 갔다오고 군내 노른자위 보직들을 옮겨다니다 12.12 군사반란 당시 서울에서 가장 가까이 있던 자신이 지휘하던 제9보병사단에서 2개 보병연대를 차출, 반란 성공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
대위 시절 방첩대 정보과에 근무한 적이 있었는데, 이 때 방첩대장은 바로 이후에 원수지간이 되는 정승화였다. 당시 노태우가 정보과 일을 하면서 정치 분야에 지나치게 관심을 두자, 정승화가 이를 딱하게 여겨서 '이 일을 너무 열심히 하지 말게. 야전 지휘를 해봐야 진짜 군인이지.'라고 가볍게 충고한 적이 있었단다.

2.1.3 제5공화국

이후 전두환 정권에서 핵심인사로 자리잡는다.[5] 1981년 대한민국 육군 대장(국군보안사령관)으로 예편하였다. 이후 정무제2장관, 체육부(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내무부(현 행정자치부) 장관, 올림픽조직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전국구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직후 권익현의 뒤를 이어 민주정의당 대표위원에 임명되었다.

전두환의 정치적 후계자로 낙점되어 5공 헌법대로 체육관 선거에 의해 당선될 예정이었으나, 6월 항쟁을 맞아 국민들의 개헌 주장을 전면 수용한 이른바 6.29 선언을 발표하게 된다. 당시에는 본인의 역사적 결단으로 포장하였으나 후일 전두환의 기획에 합의한[6] 것이었다는 논란이 있었고 후자가 사실에 더 가깝다고 보는 것이 다수 의견. 물론 고종사촌 처남인 박철언 등은 전자를 주장한다.


2.1.4 대통령 선거

"나, 이 사람. 보통사람입니다. 믿어주세요."[7]
"이제는 안정입니다"

보통사람의 위대한 시대, "이제는 안정입니다", "꿈도 아픔도 국민과 함께" 등과 같은 슬로건을 내걸었다. 장기간에 걸친 권위주의 정권, 군사 정권의 이미지를 불식시키고 안정을 원하는 국민들에게 호소력을 갖기 위해서 초점을 맞춘 선거캠페인을 전개했다. 당시 "보통사람의 위대한 시대"라는 슬로건을 두고 선거캠프 내에서 "보통 사람이 어떻게 대통령을 하냐", "이미지가 너무 약한 것 아니냐"는 부정적 인식도 있었지만 노태우 본인이 굉장히 흡족해했다고 한다.

그리고 마침내 1971년 이후 처음 치러진 대통령 직선제에서 약 36%의 득표율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다만 당선의 주된 이유는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 후보의 단일화가 실패하여, 표가 분산되었고 결선투표가 없는 단순다수 대표제로 당선자가 결정된 점이 컸다. 노태우의 득표율은 지금까지도 최저 득표율 기록으로 깨지지 않고 있다. 참고로 경부고속철도, 새만금 간척, 서울 도시철도 확충, 주거안정을 위한 신도시('주택 200만 호 프로젝트', 1기 신도시) 건설 등 오늘날까지 국가적 토목사업이자 여론의 좋은 떡밥이 되는 개발공약 상당수가 노태우의 대선공약에서 처음 발표되었고, 실제로 임기 중에 추진되었다.

2.2 대통령 시절

취임식의 노태우노태우 대선후보 포스터[8][9]
"보통 사람들의 위대한 시대"[10] 당선 직후 치러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예상과 달리 민주정의당이 과반수 의석 확보에 미달하여 여소야대 국회가 이루어졌고 지난해 6월 항쟁과 7~9월 노동자 대투쟁의 여운이 그대로 살아있었기에 엄청난 정치적 압박을 받게 된다. 이에 쿠데타의 주도자인 하나회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5공 청산론을 받아들여 전두환 정권의 핵심인사들을 대거 정리하고, 전두환과 이순자의 친인척들을 비리 혐의로 구속시킨다. 또한 전두환 정권에 비해 상대적이긴 하지만 군출신 인물들을 민간인으로 대체했다. 정권 말기가 될수록 본인이 졸업한 경북고등학교 출신을 권력 전면과 핵심에 고루 포진시켰다.

6.29 선언에 이어 또 한번 재야인사들에 대한 복권과 해금을 단행했다. 그리고 정치인에 대한 풍자의 자유를 적극적으로 허용하였다.[11] 이명박-박근혜 정권 들어와 언론의 자유가 사회적 논란이 되고, 특히 중견 방송인들을 중심으로 '이 때만도 못하다'는 비판을 쏟아낸 것을 보면 당시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냉전이 끝나는 세계적 분위기에 민첩하게 대처하여 1988년 7.7 선언으로 대북비난방송을 중단하는 등, 북한에 유화적인 정책을 폈고 92년 남북합의를 발표하는 성과를 거두는 등 물태우라 불린 개인의 안습한 이미지에 비하면 외교분야의 업적은 뚜렷한 편이다. 또한 폴란드를 시작으로 소련중국을 비롯한 공산권과 수교를 맺거나 관계를 회복했는데, 이를 북방외교라 하였다. 1988 서울 올림픽도 전에 불참하던 공산권 국가들이 모두 참여하는 등 성공적으로 개최했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을 불법으로 규정해 탄압하자, 이와 관련한 수많은 시위가 일어났다.

여소야대 국회의 압박을 버티지 못하고 여대야소의 정계개편을 시도하는데 첫번째 접촉한 대상은 놀랍게도 당시 제1야당이던 김대중평화민주당이었다. 그러나 김대중 총재가 이를 거절하자 1990년 1월에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과의 3당 합당을 성사시켰다. 현 새누리당의 전신인 민주자유당을 창당, 초대 총재에 추대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이 당시 3당합당에 반발하여 대학가에서 수많은 시위가 있었는데 노태우 정권은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 사건을 일으켜 모든것을 덮으려 하였다.

같은 해 10월 4일 국군보안사령부 민간인 사찰 폭로 사건이 발생해 국군보안사령부가 국군기무사령부로 바뀌고 역할이 축소되었다. 그후 며칠 지나지 않아서 민생치안 확립을 위해 10월 13일 범죄와의 전쟁을 선언하였는데, 시기가 미묘해서 정국전환용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노태우는 대통령 후보시절 작전권 환수를 공약하고, 다음 정권 때 평시작전권을 환수받게 된다. 1991년에는 한반도 비핵화를 공식 선언하고 UN에 북한과 동시 가입하였다. 31년만에 지방의회를 뽑는 1991년 지방선거가 다시 열렸다.여기서 민주자유당이 압승을 거둔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가 열렸는데 국가안전기획부에서 서울특별시 강남구 을 선거구[12]에서 흑색선전물을 살포하다 4명이 적발된다. 또 군 부재자투표 부정 폭로 사건이 발생하여 민주자유당이 선거에 불리해진다. 결국 민주자유당은 과반에 1석 모자라는 149석을 얻는다. 한때 200석이 넘는 정당이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참패한 셈.

이 선거로 노태우 정권의 레임덕은 가속화 되고, 노태우는 8월 민주자유당 총재직을 사퇴하고 9월에는 민주자유당을 탈당한다. 하지만 당시 총선패배는 오히려 당 대표였던 김영삼 대표에 대한 민정계의 불신론을 키운 것이지 노태우 대통령의 기반이 흔들린 것은 아니다. 노태우에게 탈당하라고 요구한 사람도 없었고 당시 92년 대선을 관권선거 없이 중립적으로 치루기 위해서 개각을 해야 한다는 야당과 시민사회의 요구가 거세게 일면서 노태우는 개각을 단행하고 여기에 더해서 민자당을 탈당하겠다고 한 것이다. 당시 노태우 대통령의 탈당주장은 전혀 없었던 것인데 상당한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김대중 역시도 이러한 결단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재임기간 중에 딸 노소영을 선경그룹 회장 최종현의 장남 최태원과 결혼시켰다. 여기서 끝나면 그럴 수도 있는데, 이 결혼 이후 제 2 이동통신 사업자로 선경이 선정된다. 대선 준비하던 김영삼 등의 반발에 밀려 선경은 사업권을 반납하였지만, 김영삼 정권 시기에 한국이동통신을 선경에 매각해서 SK텔레콤이 된다.

2.3 퇴임 후

다른 대통령들과 달리 철저히 침묵의 길을 선택했다. 윤보선, 최규하 전 대통령처럼 임기가 굉장히 짧았던 대통령도 아니고 재임기간이 그렇게 옛날도 아니었는데 이제는 국민들에게 별 존재감 없는, 잊혀진 대통령이 되었다. 전임 전두환과 후임 김영삼에 비해서 다소 개성이 약하고 조심스러운 이미지도 한몫하는 것 같다.

1995년 10월 5일, 서울 신라호텔에서 열린 경북고등학교 동창회 모임에서 노태우는 문화혁명 때 수천만명이 희생당하고 엄청난 걸로 말하자면 우리 광주사태는 아무것도 아니야라는 발언으로 여론의 거센 비판을 받았다.[노태우씨, 광주사태는 중국에 비해 아무것도 아니라 망언] 비판이 거세지자 처음에는 그런 얘기한 기억이 나지 않았으나 나중에 녹음 테이프를 들어보니 자신이 그런 얘기를 했었는가라며 어떻게 그런 얘기가 나올 수 있었는지 스스로도 놀랐다고 변명했지만, 도리어 빈축만 샀을 뿐이었다. [광주 피해자들에게 참으로 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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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기자회견에서 비자금 사건을 시인하고 사과하는 모습. 금액 규모도 그동안 알려졌던 4,000억원이 아닌 5,000억원으로 늘어났다.눈물을 닦는거 같아보이는건 기분 탓이다

재임기간 중 비자금(노태우 본인은 이를 '통치자금'이라고 표현했다)을 모금한 것이 발각되었고 비자금 사건에 대해서 사과했다.

2.4 반란수괴·반란모의참여·반란중요임무종사·불법진퇴 등으로 인한 징역 및 대통령의 예우 박탈

1995년 검찰에 구속, 재판을 받게 되었는데, 이는 대한민국 전직 대통령 구속사건의 시작이었다.

정확한 죄목은 반란수괴·반란모의참여·반란중요임무종사·불법진퇴·지휘관계엄지역수소이탈·상관살해·상관살해미수·초병살해·내란수괴·내란모의참여·내란중요임무종사·내란목적살인·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뇌물) 로 인한 재판이었다.
정승화 당시 육군참모총장과 장태완 수경사령관 등 22명의 고발하였으나 검찰은 "성공한 쿠데타(내란)를 처벌할 수 없다"라며 공소권 없음을 내세워 방어를 해드렸다.
그러나 이후 3건의 헌법 소원으로 헌법재판소는 1995. 12. 15. 95헌마221등 에서 성공한 내란이라도 처벌 할 수 있음을 판시하였고, 이 후 국회에서 5.18 특별법이 제정되어 시효문제를 해결하였다.
이듬해부터는 전두환 등 신군부 인사들과 함께 과거 12.12 사태, 5.18 광주항쟁 유혈 진압 및 학살 등에 대해서도 재판을 받아 1심에서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이후 징역 22년 6개월로 감형되었으며, 결국 1997년 4월 대법원에서 징역 17년과 추징금 2,688억원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그해 말 제15대 대통령에 당선된 김대중의 건의를 받아들인 김영삼 대통령에 의해 12월 사면되었다.
이로 인해 〈전직대통령예우에관한법률〉에 의거해 전두환, 노태우는 기본적인 경호 이외의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를 박탈당했다.


2.5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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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으로 이송중인 노태우(2013년)

2002년 전립선암이 발발하여 수술을 받은 뒤로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되며 언론이나 공식석상에 모습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 상태다. 2004년 노무현의 전직대통령 만찬회에 초청받은것이 매스컴에서 드러낸 마지막 모습. 최근에는 소뇌 위축증 및 암이 재발하여 자택에서 요양을 받는 중이라고 전해진다. 위 사진을 봐도 알 수 있듯이 모습은 철처히 감추고 있으며, 병원에 입원할 당시에도 가명을 써가면서 등록할 정도로 그야말로 철통 보안속에서 지내고 있는 중이다. 현재도 건강하여 꾸준히 매스컴에 모습을 보이는 전두환과는 대조적. 아쉽게도 전두환의 건강은 따라하지 못했다

석방 당시에도 추징금에 대해서는 사면이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전두환과는 달리 추징금 납부를 매우 성실히 한 편이다.[13] 1997년 대법원 확정 판결이 있은 직후 추징금의 90%가량을 납부하였고, 2013년 말까지 분납해서 추징금을 완납하였다.

3 평가

해당 문서 침조.

4 선거이력

당 내부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

연도선거종류소속정당득표수(득표율)당선여부비고
1985제12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3번)민주정의당-당선1987년 사퇴
(대통령선거 출마)
1987제13대 대통령 선거민주정의당8,282,738 (36.6%)당선 (1위)역대 대선 최저득표율 당선


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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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따로 서예가 스승을 두는 등 노력하면서 많은 서예 작품을 남겼지만 경매에서는 거의 거래되지 않는다. 한 마디로 돈으로 교환되는 가치가 부족하다는 의미. 시장 가격은 80~100만 원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친구인 전두환 전 대통령의 시장가 절반 정도라 하겠다. 대통령 시절 위상과 똑같다. 열혈한 추종자 확보도 실패하고 정치적 업적도 그다지 인정받지 못한 결과물일지도.
  • 전두환과 노태우가 재판받은 시기인 1996년 방영된 SBS 코미디 프로그램 '코미디 펀치펀치'에는 '배워서 남주나' 라는 코너가 있었는데, 드라마 제4공화국에서 전두환 역으로 출연하던 박용식과 함께 역시 노태우 역으로 출연했던 김기섭이 캐스팅되었다. 여기서 김기섭의 친구야~ 라는 유행어는 당시에 대 히트였다. 덕분에 지금도 많은 이들이 노태우 성대모사를 할 때 흔히 '친구야'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둘 다 MBC드라마 출신이라는 게 아이러니. 더 아이러니하게 SBS의 코리아게이트에서 전두환을 맡았던 정종준도 여기 출연했다.
  • 물태우라는 물명예불명예스러운 별명이 있다. 드라마 제5공화국을 보면 이보시오 파진찬! 서인석이 연기하는 노태우의 물스러움(...)이 잘 묘사된다. 극중 '물태우 물태우 하니까 진짜로 물인 줄 아나?'라고 투덜거리는 장면도 있다(...) 하지만 대통령한테 물태우라는 별명이 있고 공공연히 사용되었음을 감안하면 당시 사회가 이전의 군부독재시기 보다는 상대적으로 유화국면이었음을 알 수 있다. 노태우 이전까지는 워낙에 대통령의 권위주의가 극심했기 때문에 대통령 희화화는 심지어 범죄가 되기도 했지만, 노태우는 ‘나를 코미디 소재로 다뤄도 좋다'는 공약을 내걸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기도 하다. 의미있는 치적에 들어갈 수 있는 부분.
  • 영어를 거의 원어민 수준으로 잘했고 체력도 동기 중에서 전두환과 1, 2위를 다툴 만큼 뛰어났다. 별명이 '태릉 타잔'이었을 정도로 체력이 좋았던 데다가, 그의 영어실력 덕분에 한때 영어 교관을 했을 정도로 팔방미인이었다. 그러나 스포츠 자체에는 흥미가 없었고 테니스를 치는 수준이였다. 축구나 야구, 복싱에도 관심이 많았던 전두환과는 대조되는 부분. 그래서 정치인이자 체육계 인사였던 민관식이 생전 회고록에서 둘을 비교하면서 은근슬쩍 노태우를 폄하했다.
  • 2015년 현재 암 투병중이고 건강상태가 좋지 못하다고 2015/11/22 kbs 뉴스가 밝혔다.
    • 같은 날 타계한 김영삼 전 대통령의 빈소에 직접 가지 못하고 아들 노재헌을 대신 보냈다. 빈소를 찾아간 노재헌은 고인의 아들인 김현철을 만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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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다 각자의 아버지와 완벽한 싱크로율을 보여주었다. 흑백처리하면 20년 전 아버지들이라 해도 믿을 기세 [#]


5.1 회의를 좋아하는 대통령

노태우 정부 시기에 회의를 굉장히 자주했다고 한다.[14] 당시 군사정부 이미지를 벗기 위해서 회의를 강화했으며, 덩달아서 정부 부처에서도 회의를 자주했다고 한다. 노태우는 취임하고 얼마 뒤, 식사 자리에서 “나는 이름부터 큰(泰) 바보(愚)니 당신들이 많은 의견을 내달라”는 우스갯소리를 하며 보좌진들의 의견을 적극 반영하기 위해서 회의를 자주 했다고 한다.

약간 유사할 수도 있는 증언으로 노태우 정부에서 청와대 정무비서관을 지낸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의 증언에 따르면, 두 가지 의견으로 팽팽하게 맞서는 사안이 있으면 참모들끼리 회의를 해서 결정하도록 했다고 한다. 또 적지 않은 사안들은 참모나 장관들에게 위임을 많이 했다고 한다.

그리고 김영삼 당시 민자당 대표와는 최소 일주일에 한번씩 청와대에서 회동을 가졌다고 한다. 당 대표와 매주 만나서 국정현안에 논의하고 대화를 했다.

5.2 전두환과의 비교

둘의 이력은 공통점이 상당히 많았다.

많은 공통점들이 있는데, 특히 국군보안사령관과 대통령은 노태우가 전두환의 후임이라는 점이 특이 사항이다.

다만 대통령이 된 이후의, 노태우의 국내/국외 정치활동의 노선은 전두환의 노선과는 거의 반대 성향이었다. 대표적인 진보인사인 손호철 서강대 교수가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진보적인 경제정책을 추진했던 대통령은 노태우 대통령] 이었다고 이야기했을 정도. 또한 추징금 납입에 있어서도 끊임없이 구설수에 오르내리는 전두환과는 달리 노태우는 가족과의 소송전까지 가면서 납부를 마친 상태이다.

5.3 애증의 전두환과의 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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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대 대선 전당대회 당시의 노태우와 전두환

서술한대로 전두환과는 뗄래야 뗄 수가 없는 사이였다. 인생의 파트너이기도 했지만 대통령 재임 중 '5공 숙청'으로 전두환을 백담사[15]귀양 보내버리는 애증의 관계이기도 했다. 전두환 입장에서는 본인이 직접 노태우를 대통령으로 만들어주었다고 생각했는데 대통령이 된 후 말을 듣지 않아 상당히 괘씸해했다고 한다. 반면 노태우는 스스로 직접선거를 통해서 대통령이 되었다고 생각하였고 체육관 대통령인 전두환과 쌍으로 엮이는 데 상당히 불쾌해 했다고 한다. 결국 둘의 골은 깊어지며 10년간 만남을 가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던 중 2014년 8월 13일 전두환이 노태우의 자택을 방문하여 10년만의 재회가 이루어졌다. 당시 노태우는 뇌질환으로 휠체어로 거동하고 정상적인 의사소통도 불가능할 정도로 건강상태가 상당히 나빠져 자택에 갇히다시피 지내면서 치료를 받아왔다고 한다. 전두환은 누워있는 노태우에게 "나를 알아보겠는가" 라고 물었고, 옆에 있던 부인 김옥숙이 "알아보면 눈을 깜박이라"고 말하자 노 전 대통령이 눈을 깜박였다고 한다. 10년간 애증 겹치는 묵은 정을 마지막이 되기 전에 미련없이 풀어내려 했던듯.[16]


6 관련항목

  1. 반란수괴·반란모의참여·반란중요임무종사·불법진퇴·지휘관계엄지역수소이탈·상관살해·상관살해미수·초병살해·내란수괴·내란모의참여·내란중요임무종사·내란목적살인·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뇌물)"과 같은 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판결, 확정되어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예우가 박탈되었음. 대법원 1997. 4. 17. 선고 96도3376 전원합의체 판결
  2. 공식 초상화
  3. SK그룹의 회장인 최태원 회장의 부인이다.
  4. 당시엔 달성군 공산면.
  5. 팟캐스트 방송 이이제이에 따르면 5공 초기 김종필에게 2인자로 처신하는 법에 대한 조언을 들었다고 한다.
  6. 대통령을 사실상 거저(...) 먹으려다가 경쟁을 치러야 했으니 처음에는 거세게 반발하였다고 한다.
  7. 하나회 출신이라는 군부독재의 이미지를 씻어내기 위한 노력으로 대선에 쓰인 슬로건이었다.
  8. 이거 말고도 이 당시에 초등학생 여자 어린이(1980년생)를 품에 안고 찍은 게 하나 더 있다.


  9. 이것은 캐리커쳐이며 실물 포스터를 추가바람.
  10. 노태우 대통령 취임식의 취임사 제목이었다. 이 슬로건은 노태우 정부에서 청와대 공보수석을 지낸 김학준 교수가 제안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11. MBC 코미디언 최병서가 우연히 대통령 당선자 신분으로 MBC를 방문했던 노태우를 만나 성대모사를 선보이자, 노태우가 감탄하여 대통령을 코미디 대상으로 삼아도 좋다는 약속을 했다고 한다. 다만 최병서에 의하면 이후 방송에서 정치인 풍자 코미디를 할 때에도 안기부 등으로부터 약간의 압력을 받았다고도 한다.
  12. 민주자유당 김만제, 민주당 홍사덕, 신정치개혁당 이신범 등이 출마
  13. 처음 불거질 때부터 수감생활, 추징금 납부 등 모든 면에서 전두환과는 정말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확인되지 않은 소식에 따르면 돈관리 제대로 못한다고 전두환에게 타박도 들었다고(...)
  14. 총리실에 근무했던 정두언이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의 공직사회를 비평한 <최고의 총리, 최악의 총리>에서 언급되었다.
  15. 당시에는 수도와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첩첩산중, 그야말로 문명과 단절된 곳이었다
  16. 비슷하게 김영삼 전 대통령도 2009년 여름, 서울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해 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을 병문안하여 애증을 풀어내려는 움직임을 보였으나, 이미 김대중 대통령이 의식을 찾지 못하던 상태라 화해를 이루지는 못했다. 대신 국장이 끝난 이후 동교동 출신 정치인들을 초청하여 위로하였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