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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구팬들에겐 최악의 혐짤
1 소개
한국의 농구인. 지금은 폐교된 건동대학교 총장이자 2013년부터는 대한농구협회 회장이다. 전성기 기아자동차를 이끌었던 명 감독이자, 1982 뉴델리 아시안 게임 남자 농구 금메달 당시 감독이었던 인물.
1941년 10월 10일 생. 고향은 충청남도 아산군 온양읍이지만 상경해서 서울에서 학교를 다녔다.
2 경력
2.1 선수 경력
경복중 1학년 때 야구부였지만, 농구코트 청소가 싫었던 농구부 선배가 학교 모자를 뺐어서 농구 코트로 데리고 가서 청소하면 돌려주겠다고 하면서 농구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경복중과 경복고를 거치면서 농구를 계속했고, 연세대학교 입학 후에는 아예 국가대표가 되면서 완전한 농구인의 길로 들었다. 그러나 부상과 집안 형편으로 인해 선수 생활을 오래 하지는 못했다.
2.2 지도자 경력
결국 27세의 나이로 조흥은행 여자 농구단 코치가 되면서 지도자의 길로 접어들었다.
여자 농구 무대에서 조흥은행을 잘 조련하면서 명성을 얻은 후, 쿠웨이트 농구대표팀 코치가 되기도 했다. 그러다가 1978년 현대전자가 농구단을 만들 때, 코치 자리를 맡으면서 남자 농구 지도자로 데뷔하게 되었다. 그리고 현대의 감독 자리를 맡으면서 삼성과 라이벌을 형성하면서 지도자로서 본격적인 명성을 얻었다. 당시로서는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지도 방법과 끊임없는 연구 때문에 따르는 후배가 많은 편이었고, 그 결실이 1982 뉴델리 아시안 게임 남자 농구 금메달이었다.
한창 현대의 감독으로 재직하다가 1986년 기아자동차 농구단의 창단 감독으로 자리를 옮겼다. 엄청난 금액을 받았다는 설도 있지만, 일단 본인은 신생팀이 자리를 잡아야 한다는 명분에 끌렸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기는 한다. 기아자동차를 조련하면서 농구대잔치 5연패를 이끌고, 1988 서울 올림픽 국가대표팀 감독도 맡는 등 지도자로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올림픽 당시 개최국으로 예선 없이 본선에 자동 진출한 상황에서, 방열 감독은 토너먼트 8강 진출을 목표로 했으나 실패하였다. 순위결정전을 거친 최종성적은 9위.
그러나 연세대 출신인 방열이 연세대 출신의 유재학, 정덕화를 끼고 돈다는 오해를 사면서 기아자동차 내부의 연세대 vs 중앙대의 갈등이 터지고 말았고, 결국 방열은 이 사태에 대해 환멸을 느끼고 1992년을 끝으로 지도자의 자리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후임 감독에는 최인선이 임명되었다. 이 사태 덕분에 다른 중앙대 출신 기아 선수들과는 그럭저럭 화해한 편이지만, 항명의 주동자로 지목되던 허재와는 여전히 껄끄러운 편이라고 한다.[1][2]
2.3 교육자 및 해설자
1993년 경원대학교 교수 자리를 맡은 이후, 2007년 정년을 맞이할 때까지 경원대에서 교수 자리를 맡으면서 농구인에서 학자로 변신했다. 코치협회를 설립해서 활동했지만 여러 분란에 휘말리면서 사라졌고, 농구대잔치의 기획이나 프로 출범에 대해서 지지하는 등 행정 쪽에서도 비교적 두각을 나타낸 편이었다. 특히 농구에 관해서는 여러 외국 서적을 번역하거나 훈련 방법의 도입에 적극적이었다. 그 결과로 농구에 대한 많은 학술서를 쓰면서 농구 계의 학술적인 업적에 큰 기여를 했다. 여러 공헌 때문에 농구계에서의 신망도 두텁고, 교육자로서도 비교적 신망이 두텁다고 한다. 여러 농구계 및 체육학계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아서인지 2010년 건동대학교의 총장 자리를 맡아 체육계 출신으로는 유일무이한 대학 총장에 올랐다.
교수직 활동 와중인 1990년대에 MBC에서 농구 해설위원으로 활동한 바 있다.
2.4 행정가
꾸준히 200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농구 인기 몰락에 대한 비판을 이어가던 방열은 2013년 대한농구협회 회장 선거에 출마해서 현직 회장이자 국회의원인 이종걸, 한국농구연맹 총재이자 역시 국회의원인 한선교를 모두 제치고 회장에 당선되었다.[3] 행정가로써 평가는 최악, 우선 2014 농구월드컵 조추첨에 아무도 보내지않은 유일한 나라였다. 게다가 2014년 농구월드컵과 아시안게임 준비가 한창이던 대표팀을 자신이 기획한 대학생 대회의 흥행을 위해 대표팀 차출 불가의 원칙을 깨고 차출했다(그마저도 흥행은 대실패) 2015년 FIBA 아시아챔피언십의 행보는 그야말로 가관, 앞당겨진 시즌을 치뤄야하는 KBL의 감독인 유재학과 유도훈을 감독후보로 선발하지않나,이 둘이 거부의사를 표하자 공개모집을 하고도 지원자가 제대로 나오지않아 겨우겨우 김동광 감독을 선임했다. 대표팀 지원은 눈물나는 수준, 매니저와 통역을 뽑을 예산 부족으로 두업무가 동시에 가능한 인력을 뽑아 채웠으며, 대표팀의 훈련 상대는 대학교팀에 대표팀 인력 몇을 끼워뛰는 주먹구구 형식으로 치뤄졌다. 유니폼 조차 제대로 지원이 되지않아 작년에 썼던 유니폼을 입어야 했다. 2m 이상 선수는 비즈니스석에 태워보내는것이 규정인데, 2m가 넘는 최준용의 키를 199로 처리해 이코노미석에 태워 보내는가하면, 대표팀 선수들의 경기수당을 12만원에서 6만원으로 깎았고, 호텔의 세탁 서비스 비용을 주지못해 막내급 선수들이 욕조에 세제 풀어 유니폼 빨래를 해야했다. 중국 음식이 입맛에 맞지않아 대표팀은 부랴부랴 인근 한식당을 찾아 도시락을 시켰는데, 돈이 없어 인원에 맞게 주문하지도 못하는 것을 식당 주인이 딱하게 여겨 18000원 도시락을 10000원으로 할인해서 제공했다. 돈이 정말로 없었다면 이해가 갈수도 있는 부분인데, 방열과 농구협회 관계자들은 저렇게 아낀 돈으로 자신들은 비즈니스석을 타고 선수단을 방문했다. 그러면서 유명무실해질 2017아시아챔피언십대회를 개최하겠다고 하는걸 보면, 국제 농구계의 흐름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것으로 보인다.
3 기타
2012년 제18대 대통령 선거 직전 궉채이 전 인라인스케이트 국가대표 등과 함께 체육인 2013명 공동 명의로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 지지선언을 한적이 있다.
박한 전 고려대 감독과 함께 한국농구 역사상 최초로 경기 중에 정장을 차려 입은 감독이기도 하다. 1980년대까지 한국의 감독들이 스포츠맨십을 이유로 정장이 아닌 평상복+점퍼차림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이는 당시로써는 파격적인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