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잠

1 삼국시대 위나라의 인물

裴潛
(?~244)

삼국시대 위나라의 관료. 자는 문행(文行). 하동군 문희현 출신으로 아들은 배수.

1.1 생애

1.1.1 초창기

전란을 피해 형주로 가서 유표에게 빈객의 대우를 받으며, 그는 거기에서 사사로이 친하다고 일컫는 사마지왕찬에게

유표는 패왕의 재목이 아닌데, 서백[1]으로 자처하려고 하니 그의 멸망은 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남쪽의 장사로 갔다가 이거 두습이 한 짓이랑 똑같은데 배잠은 조조가 형주를 평정한 후에 사마지와 왕찬과 함께 조조 밑으로 들어가 참승상군사로 임명된다. 실컷 욕해놓고 하는 짓은 거기서 거기 두습은 조조한테 달려가기라도 했지 지방으로 나가 세 현을 다스렸으며, 중앙으로 돌아와 창조속으로 임명될 때 조조가 배잠에게 질문을 한다.

그대는 이전에 유비와 함께 형주에 있었소. 그대는 유비의 재략이 어떻다고 생각하시오?

이에 대해 배잠은

그로 하여금 중원에 있게 하면 사람들을 소란스럽게는 할 수 있겠지만 다스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만일 틈을 타서 요충지를 지킨다면 한 쪽의 군주는 충분히 될 수 있습니다.

라는 적절한 대답을 한다.

1.1.2 이민족 대군 방면

당시 대군(代郡)에는 오환왕과 대인 세 명이 각자 선우라고 칭하고, 대군의 정사에 간섭해 전임 태수가 그들을 바르게 다스릴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 조조는 여기서 배잠을 대군태수로 임명하고 그에게 정예병을 주어서 그들을 토벌하게 하게 하는데. 배잠은 사양하며

대군의 호구 수는 많고, 병사와 전쟁용 말은 항상 만여 필을 헤아립니다. 선우는 스스로 방종하게 지낸 시간이 오래되었음을 알고 내심 매우 불안해하고 있을 것입니다. 지금 병사를 이끌고 가서 그들을 토벌한다면 반드시 두려워하며 경내에서 항거할 것이고, 소수의 장수는 꺼리지 않을 것입니다. 응당 계획을 짜서 그들에게 대응해야지, 군대로 위협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는 병사는 모두 거절하고 수레 한 대를 타고 대군으로 가니 한바탕 싸움을 준비하던 선우는 놀라며 기뻐한다. 거기다가 배잠은 그들을 위로하고 진정시키니 선우 이하는 모자를 벗고 얼굴을 땅으로 향하고, 약탈했던 부녀자, 기계, 재물을 모두 돌려준다.

뒤이어 배잠은 군 내에서 선우와 협력했던 학온, 곽단 등 10여 명을 주살시키니 북쪽 변방은 매우 놀라 백성들은 그에게 귀의했으며, 대군에서 3년 재직했다가 중앙으로 돌아와 승상이조연이 되었다. 조조는 대군을 다스린 공을 칭찬하고 포상하는데, 여기서 배잠이 말한다.

저 배잠은 백성들에게는 비록 관대하지만 오랑캐들에게는 매우 엄합니다. 지금 후임자는 반드시 제 법령이 너무 엄하고, 정사는 너무 온화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오랑캐는 평상시 오만하고 방자해 지나치게 간대하면 반드시 흩어지게 되고, 또 이미 흐트러지고 나서 그들을 법률로써 규제하려고 하면 이것은 투쟁을 낳게 되는 원인이 됩니다. 형세에 근거해 추측하면 대군은 반드시 또 반란을 일으킬 것입니다.

한 마디로 나 아니면 쟤네들 통제 못한다는 소리
조조는 배잠의 이런 말을 듣자 너무 일찍 돌아오게 했다고 깊이 후회했는데, 과연 그의 말대로 수십 일이 지나자 선우 세 명이 반란을 일으켜 조창이 출진해 그들을 정벌하게 된다.

1.1.3 합비 공방전

그 후 배잠은 다시 지방으로 나가 패국의 상이 되었다가 연주자사가 되었으며, 219년에 손권이 합비를 공격하자 온회는 배잠에게 다음과 같은 말로 주의를 준다.

이 시기는 비록 적이 있지만 걱정할 가치는 없습니다. 그러나 두려운 것은 남방을 정벌하는 군사에게 변고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 강물은 불어나고 조자효(조인)는 적지 깊숙이 들어가 고립되어 장래의 위험에 대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관우는 용맹해 전쟁을 잘 하므로 승기를 잡아 진군해 오면 반드시 근심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조서를 내려 배잠과 여공을 불렀는데도 배잠은 느긋하게 행동하자 온회는 다시 한 번 비밀스럽게 주의를 준다.

이것은 반드시 양양에서 위급한 상황이 나타난 것이니 그곳으로 달려가야만 합니다. 긴급하게 회합을 하지 않은 이유는 먼 곳에 있는 백성들을 놀라게 해 동요시키지 않으려고 한 것입니다. 하루 이틀 동안에 반드시 밀서가 있어서 그대에게 서둘러 오도록 할 것이고, 장료 등도 소집될 것입니다. 장료 등은 평소 군왕의 마음을 알고 있으므로 후에 불릴지라도 먼저 도착할 것입니다. 그대는 죄를 받을 것입니다!

이렇게 장료는 명을 받기도 전에 출발할 것이라는 말에 배잠은 그제서야 여공과 함께 군용물자까지 남겨두고 가벼운 차림으로 서둘러 출발하는데, 과연 얼마 뒤에 재촉하라는 명령을 받으니 겨우 시간에 맞출 수 있었다. 이렇게 온회 덕분에 벌을 받지 않게 된 배잠은 조조로부터 군대가 질서정연하다는 감탄을 받고 특별히 상까지 받는다.

1.1.4 조비 대 이후

220년에 조비가 즉위하자 중앙으로 들어가 산기상시가 되고 지방으로 나가 위군, 영천의 전농중랑장이 되어 군국(郡國)과 같이 인재 천거의 길을 열어달라고 주청해 농업관리가 벼슬에 나갈 길이 넓어지게 한다. 그 후 형주자사로 승진하고 관내후의 관직을 받는다.

226년에 조예가 즉위하자 중앙으로 돌아와 상서가 되고 다시 지방으로 나가서 하남윤이 되었고 태위군사, 대사농으로 전임되며, 청양정후로 봉해지면서 식읍이 2백호가 증가한다. 다시 중앙으로 돌아와 상서령이 되어 직무의 구분을 바르게 하고, 명실, 품평, 정책을 냈을 때 관소에서 결정하도록 하는 1백5십여 가지를 상주했다가 부친이 죽은 후에는 관직을 떠났다가 후에 광록대부로 임명되었다.

244년에 세상을 떠나 태상으로 추증되었고, 시호를 정후라고 했다. 아들 배수가 후사를 이었다. 검소하게 장례를 치르라고 유언했으므로 묘 안에는 오직 태좌 하나와 옹기 몇 개만을 두고, 그 나머지는 하나도 설치하지 않았다.

1.2 평가

부손은 배잠을 보고 끝내 청렴한 행실로 현달할 것이라고 증명했다고 했으며, 진수는 절조가 고상하며 재능이 탁월했으니 한 시대의 우수한 선비라고 평했다.

2 삼국시대 오나라의 인물

裴潛
(?~232)

삼국시대 오나라의 관료.

위나라의 배잠과 완벽하게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다.

232년 3월에 교위로 있을 때 손권의 명으로 장미, 허안, 만태, 주하, 하달 등과 함께 관리와 병사 4백명을 이끌고 금과 옥 및 진귀한 보물들을 보내면서 공손연에게 연왕으로 임명하려고 갔다. 그런데 공손연이 손권에 대해서 너무 먼 곳에 의지할 수 없는데다가 재물을 탐하는 것을 걱정했으며, 공손연이 사자를 보내서 군으로 오도록 유인했다.

요동에 도착해서 만태와 함께 따로 화물을 지니면서 말을 구입하려고 하다가 변심한 공손연에게 붙잡혔는데, 공손연이 군사가 많은 것을 보고 그들이 의심해서 먼저 일을 꾀할까 두려워 공격을 받아 붙잡혔다. 결국 주하만 빼고 장미, 허안, 민태 등과 함께 처형당했는데, 혼자 살아남은 주하마저 도망가던 길에 전예의 날씨 예측에 따라 주하가 갈 위치가 예측되어 위나라 군사에게 붙잡히면서 처형당한다(…).
  1. 西伯 : 주문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