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찬

1 후한 말의 인물

王粲
(177 ~ 217)

산양군 고평현 출신으로 건안칠자의 일원. 자는 중선(仲宣).

산양군 고평현 사람으로 유표와 동향 출신이며, 증조부인 왕공(王鞏)과 조부였던 남양태수 왕창(王暢)은 모두 삼공을 지냈다. 그의 부친인 왕겸(王謙)은 대장군 하진의 장사(長史)였는데 하진은 왕겸의 집안이 유명한 삼공의 집안이였으므로 인척 관계를 맺으려고 자신의 두 딸 중 한 명과 혼인하도록 주선하기 위해 보냈는데, 왕겸은 이를 거절해 미움을 받아 면직되면서 낙향했다가 병으로 죽었다.

왕찬은 동탁으로 인해 수도를 장안으로 천도한 뒤 채옹을 만나러 갔다. 당대 제일의 문사였던 채옹이 귀한 손님들이 가득 자리하고 있는 상황에서 왕찬이 문 밖에 있다는 말을 듣자 신발을 거꾸로 신고 나와 키가 작고 못 생긴 왕찬을 맞아들이니 주위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기는데, 채옹은 오히려 이 아이의 재주가 자신보다 나을 것이라고 하면서 우리 집에 있는 모든 서적과 문학 작품을 그에게 주어야 한다고 얘기를 할 정도였다.

왕찬은 특히 기억력이 천재적이었던 모양인데 길가에 선 비석을 쓱 흝고 지나가고도 외울 수가 있었고 바둑 두던 것을 중간에 판을 엎어버리고도 원상태로 복귀가 가능할 정도였다. [1]

193년에 사도 순우가가 왕찬을 초빙해 황문시랑으로 삼았는데 당시 왕찬의 나이가 불과 17세였다. 당시 왕찬이 천재로 얼마나 명성이 높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인데, 정작 왕찬 본인은 장안이 혼란스러운 상황이라 받지 않고 유표에게 의탁[2]하러 갔다.

유표는 왕찬의 조부인 왕창에게서 학문을 배운 제자였으며 왕찬과 고향이 같다는 인연이 있었지만 왕찬의 외모가 추하고 몸이 허약하다는 이유로 중용하지 않았다.

진수의 삼국지에서는 용모가 추하다는 이유로 중용받지 못했다고만 나오나 박물지에서는 보다 자세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본디 유표는 왕찬의 재능을 아껴 사위로 삼으려 했지만, 외모가 너무나 못생긴데다 왕찬이 사소한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성품임을 꺼려했기에 사위로 삼으려던 생각을 포기하면서 왕찬에게 재능은 뛰어나나 외모와 풍채가 너무 볼품없어 딸을 못 주겠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왕찬의 외모가 추하고 몸이 허약해 유표에게 소외되었다는 것은 삼국지 본전에서도 언급되지만 이에 따르면 처신의 문제도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처음엔 유표도 사위로 삼으려 할 정도로 그 재능과 명성을 중시했으나 왕찬의 자유분방한 성격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겨 사위로 삼기 부족하다고 여긴 것으로 보인다.

사실 외모 같은 문제를 때어놓고 순수하게 정략적인 측면으로만 봤을때 당시 남중국의 황제나 다름없는 대군벌이었던 유표의 입지상 왕찬이 유표의 사위가 되었다면 기실 부마나 다름없는데, 애초에 군벌시대 직전까지 군사 경험이 전무했던 유표는 그 정도 위치까지 성공한 군벌 치고는 기이할 정도로 군사적 재능이 부족했고, 영역의 확대를 군사적 진공을 통한 철저한 복속이 아니라 대부분 모략과 술수에 의존했다. 때문에 교천제 등의 번잡한 허례허식을 통해 부족한 권위를 세우며 내부의 입지를 다지는 경향이 강했는데 이런 유표의 특수성을 가장 잘 이해하고 최측근 노릇을 해야 할 왕찬이 번잡한 허례허식의 필요성에 대해 전혀 이해하지 못하거나, 이해하더라도 제대로 따를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하면 유표의 태도도 납득하기 어려운 것은 아니다. 여기에 금지옥엽으로 키운 딸을 몸도 허약한데다 못생긴 놈(...)한테 시집보내기 싫다는 감정까지 더해졌으니...

결국 유표는 왕찬 대신 왕찬의 사촌형인 왕개를 사위로 삼는데, 왕개는 왕찬과 달리 미남에 체격도 좋았다고 한다.

다만 왕찬이 유표의 이름으로 외교문서를 대필한 것이 아직까지 남아있는 것을 보면 아주 무시당한 건 아니고 포고문 작성 등의 행정업무에서 제법 활약한 것으로 보이나 이미 천재로 명성이 자자했던 왕찬의 네임벨류를 고려했을때 상대적으로 푸대접 당한 건 맞는 듯.. 왕씨 가문과 왕찬 개인의 명성을 고려해 한자리 주긴 했으나 실질적인 권력에서는 소외시킨 것으로 보인다.

장즐이 쓰고 배송지가 삼국지에 주를 달며 인용한 문사전에 따르면 훗날 유표가 죽고 유종이 뒤를 잇자 왕찬은 상승무패의 기세를 달리는 조조를 대적하기 어렵다며 항복할 것을 권했고, 이것이 유종이 조조에게 항복하는데 결정타를 날리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삼국지연의에서 왕찬의 유일한 등장 장면이다. 유표 사후에는 상황이 바뀌어 발언력이 꽤 강해졌을지도 모른다.[3]

조조에게 항복하게 되자 왕찬은 승상연, 관내후가 되었다가 후에 군모제주로 승진했다가 위나라가 건국되자 시중이 되었다. 216년에 조조를 따라 손권을 공격하러 갔지만 217년에 길에서 병으로 사망했다.

당대의 사건들을 모아 영웅기라는 사서를 썼지만 세월이 흐르는 동안 흩어져서 대부분은 남아있지 않다.

산법을 만들기도 하였고 그가 쓴 문장은 한 번 쓴 다음에 다시는 고쳐쓰지 않았는데도 완벽했다고 카더라. 대표적인 시로는 종군시와 칠애시가 있다.

박물지에 따르면 옥패(玉佩)를 패용하는 풍습이 한말에 사라졌으나, 왕찬이 시중으로 있을 때 과거의 패옥 풍습을 부활시켰다고 한다.

그의 두 아들은 왕찬이 죽은 지 2년 후에 일어난 위풍의 난에 휘말려서 둘 다 처형되어 왕찬의 대는 끊겼지만 5촌 조카 왕업이 양자가 되어 후사를 이었다. 참 아이러니한 것이 왕업은 유표의 외손자라는 것. 왕찬과 파혼한 그 유표의 딸과 왕개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이다.

1.1 미디어 믹스

삼국지 12,13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B급 문관 수준이지만 내정형 인재가 많다고 보긴 힘든 유표군인지라 나름대로 도움은 된다. 유표군에서 왕찬보다 나은 문관으로는 괴량, 괴월정도이며 이적과는 비슷한 수준. 물론 전투는 절대 기대하지 말자.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7/3/81/83. 혼란을 가지고 있어서 의외로 지력 81과 결합하면 전장에서도 제법 괜찮다.

삼국지 10에서는 6/4/82/84/57에 특기는 위압, 명사 2개뿐. 보통 문관계열에게 기본적으로 잘 주는 설전 특기는 항변, 반박인데 특이하게 위압만 주었다.

삼국지 11에선 지력 79,정치 80이지만 특기는 없어서 잉여무장,

삼국지 영걸전에선 특이하게 양양전투에서 군악대로 등장한다. 근데 적 군악대의 존재의의는 책략노가다에 있지만 양양 전투는 15턴이되면 전투가 종료되고 유비가 장판파로 내빼기 때문에 비중이 없으니 안습. 얘가 영걸전에 나온다는 거조차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다.

2 삼국시대의 인물

王贊
(? ~ 238?)

삼국시대 공손연의 수하의 인물.

현도태수로 233년에 손권이 공손연에게 사신을 파견해 양평으로 4백여 명이 도착하자 공손연이 그들을 도모하기 위해 그들 무리를 요동군의 여러 현에 나누어 두었는데, 그 중에서 진단, 두덕, 황강 등과 병사 60명을 현도군에 두었다. 왕찬은 2백 호와 3, 400백명 쯤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진단, 두덕, 황강 등이 군사를 일으켜 관리를 죽이기로 모의했고 장송이 이를 알려주자 왕찬은 곧바로 군사들을 모아 성문을 닫았지만 모의했던 관리들은 모두 성을 넘어 달아났다.

공손연이 위군의 공격으로 멸망하자 공손연이 임명한 관원들을 사마의가 모두 처형했기에 만약 이 때까지 살아있었다면 238년에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2.1 미디어 믹스

진삼국무쌍6에서는 공손연의 난에서 등장해 공손연군의 서쪽에 있는 작은 진채의 바깥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남서쪽 요충지 3곳 중에 한 곳이라도 장수를 격파하면 곽흔, 손종과 함께 위군을 격파하기 위해 남하한다.

진삼국무쌍7에서는 양평의 전투에서 등장해 양평성의 남쪽에 위치하다가 플레이어가 서쪽을 공격하는 틈을 타서 숙서, 유보와 함께 남동쪽의 위군 본진을 공격하기 위해 남하했다가 장춘화가 투입한 연노의 공격으로 혼란에 빠진다.
  1. 물론 직접 대국을 하는 당사자들의 기량이 상당하다면 제각기 자기가 둔 바둑을 다시 순서대로 재현하면서 재현이 가능하지만, 왕찬이 대단한건 옆에서 구경하는 입장이었는데 그걸 그대로 복원했다는 것.
  2. 덕분에 그 후에 일어난 이각, 곽사가 일으킨 삼보의 난을 피할 수 있었다.
  3. 다만 이때 왕찬은 조조가 기세를 설명하면서 백등에서 오환을 파하고, 강외에서 손권을 구축하고 , 농우에서 유비를 쫓아냈다는 말을 하는데, 배송지는 백등은 조조의 진군로와 완전히 동떨어져 오환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곳이며, 손권은 집권 이후 적벽대전 이전까지 조조와 쭉 화친관계였고, 결정적으로 유비는 당시 형주에 있었고 관농지방에 들어간 것은 훨씬 미래의 일이기에 왕찬이 그런 말을 했을 리가 없으며 장즐의 책 전체에 이런 사례가 일일히 적을 수 없을 정도로 많다며 문사전의 허황됨을 지적했다. 유표전만 봐도 항복파의 중심인물은 채모,괴월로 나타나는데 왕찬 자체가 항복파에 기울어졌을 가능성 자체는 충분하지만, 얘네들은 경력이나 세력 내의 입지에서 왕찬과 넘사벽급의 차이가 있다. 문사전의 기록이 오류투성이인 데다, 정황적으로 봐도 왕찬을 그렇게 거물급으로 보긴 어렵다는 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