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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서』 「임성진소왕전(任城陳蕭王傳)」 | ||
조창 | 조식 | 조웅 |
曹彰
(189? ~ 223년)
1 개요
삼국시대 위나라의 황족이자 무장. 자는 자문(子文). 위의 임성왕(任城王).
조조의 사남으로 생모는 변씨. 수염이 누래서 황수아란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2 생애
2.1 초기 생애
자에 문(文)자가 있지만[1] 문보단 무(武)에 뛰어났다. 어려서 활쏘기와 수레 몰기를 잘 했고, 근력이 보통 사람을 넘었고, 손으로 맹수를 때려잡았다.[2]
여러 차례 조조의 정벌을 따라갔다. 조조는 이를 마땅치 않게 여기고, 조조는 자기 자식들에게 글공부를 시켜봤는데 조창만 유일하게 반항했다. 이 때 조창은 조조에게 "저는 위청이나 곽거병처럼 무훈을 쌓고 싶지 이따위 글공부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일찍이 조조가 아들들에게 좋아하는 것을 물었을 때, 조창은 장수가 되기를 좋아한다고 답했다. 조조는 “장수가 되어서 어찌하겠느냐?”라고 하자 조창이 답했다. “갑옷을 입고, 날카로운 무기를 들고, 어려움을 만나도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사졸들의 앞에 섭니다. 상은 반드시 행하고, 벌은 반드시 분명히 하겠습니다.” 조조는 이 말을 듣고 크게 웃었다고 한다.
2.2 오환족 토벌
장수로서의 기질이 탁월하여 전예와 함께 오환족을 토벌하는 공을 세웠다. 싸움터에서 활에 맞아 화살이 여러 발 갑옷에 박혔는데도 물러서지 않고 분전했다는 것으로 보아 호전적인 열혈한이었던 듯 하다. 그리고 그가 총 지휘관임에도 불구하고 돌격대장처럼 닥돌적진에 몸소 뛰어드는 과감한 성격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그 뒤 200리 정도 떨어진 위치에서 적군이 포착되자 하루 밤낮을 강행군하게 하여 기습해 격파하는 등 상당히 적극적이고 과감하게 군을 지휘했다. 성격도 호방한지 규정의 두 배나 되는 포상을 전군에게 하여 장병들의 환심을 사기도 하였다. 더이상 포상이 필요한지? 선비족의 왕 가비능은 이 위세를 보고 귀순하였기에 조창은 북방을 평정하게 된다.
조조에게 보고하기 위해 장안으로 가는 도중, 보고할 때는 자만하지 않도록 처신하라는 태자인 조비의 충고를 듣게 되고, 이에 장안에 도착한 후 조조 앞에서 공을 다른 장수들에게 돌리는 말을 하여 조조가 그의 겸손함을 기뻐하였다 한다.
2.3 한중 쟁탈전
한편 조창이 오환을 토벌한 것과 같은 해인 218년에 조조는 유비와 한중 쟁탈전을 벌이고 있었다. 위략에 따르면 이때 유비의 양자 유봉이 산을 끼고 내려와 여러 차례 치고 빠지는 등 조조군을 도발하자 조조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유봉에게 이를 갈았다고 한다.
돗자리나 짜던 작자가 감히 가짜 아들(=유봉)을 보내 나에게 맞서는가. 내가 황수아(=조창)을 불러 너를 상대할테니 기다리거라.[3]
그런데 정작 조조의 아버지 조숭도 양자 출신이다
하지만 오환 원정을 마치고 돌아온 조창이 장안에 다다랐을 때 이미 조조는 한중에서 퇴각한 상태라 한중전에 투입되지는 않는다. 자리에 있지도 않은 조창을 들먹이며 유봉을 매도하는 것을 봤을때 조조의 신임이 상당히 두터웠던 것으로 보인다.
연의에서는 조창이 참전해 위기에 빠진 조조를 구하고 이어진 전투에선 유봉을 발라버리고 오란을 죽이는 등 맹활약을 하는 것으로 각색되었지만, 결국 전세를 뒤집지는 못한다.
2.4 후계자 쟁탈전
각각 바로 위와 아래의 형제인 조비와 조식이 후계자 쟁탈전을 벌이고 있을 무렵 언급도 안 되었는데 이는 위에서 언급된 바처럼 글공부를 싫어하던 조창이 제왕으로서 적성이 맞지 않아서였다.
낙양에서 조조가 죽기 전 조창은 군대와 함께 장안에 있었는데 조조가 그를 급히 불러서 갔지만 이미 조조가 죽은 상태였다.
당시 조비와 측근들의 여론은 조창을 의식했기에 조조가 죽자마자 절차를 생략하고 조비의 즉위를 추진해 하루 만에 모든 일을 처리했다 한다. (진교전) 일단 군권을 쥐고 있었던 데다 조조에게서 호출됐다는 명분이 있었기 때문인지 극도로 경계된 것으로 보인다.
뒤늦게 도착한 조창은 장례를 주관하던 가규에게 옥새의 행방을 물으며 위협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다가 가규에게 "대를 이을 사람은 따로 있으니 당신이 알 바 아니다."라고 무시당했으며 위략에 따르면 "선왕께서 나를 부르신 것은 것은 너를 후계자로 삼기 위한 것이었다."는 말로 조식을 부추겼으나 조식은 원씨 형제의 말로를 직접 보지 않았냐며 조창의 제의를 단칼에 거절했다고 한다.
정사상 조조 사후 조창의 행적이 부실하지만 (위략을 배제하더라도) 가규와 실랑이를 벌이는 일화가 매우 위화감 넘치는 것은 사실이라 야심가였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은 종종 나온다. 이에 따르면 비록 군권을 쥐고 있었으나 군사력 이외의 정치적 입지는 전무했던데다 그런 약점을 보완해 줄 조식과의 공조도 거절당해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허리를 숙인 것으로 보인다.
조비가 즉위하자 조창은 자신의 제후국으로 돌아간다.
220년 조비는 그에게 5천 호를 추가해주어 1만 호를 다스리게 하였고, 221년 조비는 그를 공으로 봉했고, 222년 그를 다시 왕으로 봉하였다. 이토록 조비가 조창의 지위를 거듭 높인 것을 보아 조창이 조비에게 꽤 위협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2.5 죽음
왕이되고 다음 해인 223년, 수도에 와서 조비를 알현한 뒤 갑자기 병에 걸려서 수도에 있던 관저에서 죽었다.
정황상 조창의 죽음은 조금 미묘한데, 조비는 조창과 조식이 정치 권력을 쌓는 것을 경계하여 왕으로 봉한 다음 임지에 머물게 하고, 수도로 올라오는 것을 금지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조비의 형제들은 각자의 봉지에 연금된 상태였다. (예외는 가장 어린 동생인 조간정도 뿐.) 따라서 조창이 수도로 왔다면 분명히 조비가 조창을 불러들였다는 이야기다. 다른 형제들이 모두 연금된 상황에서 굳이 특별한 이유도 없이 조창만 불러들이고 그 다음에 조창이 죽었다... 어라?
세설신어에 조창의 최후에 대해서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조비가 조창을 불러서 연회를 열면서 독을 넣은 대추를 안주로 줘서 죽게 했다는 이야기다. 게다가 조비와 조창의 생모인 변씨가 이걸 살려보겠다고 우물에 가서 물을 길어오려 하자 아예 두레박 끈을 모조리 잘라 치워버렸다는 끔찍한 이야기다. 세설신어는 특성상 사서가 아니므로 액면 그대로 신뢰할 수는 없고 실제로 황실의 이야기가 바깥에 퍼질 리도 없겠지만 당시 사람들도 조창의 죽음을 상당히 미심쩍게 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설신어의 주된 독자들은 그냥 일반 평민이 아니라 당대의 귀족 계급으로[4], 당시에 이미 귀족 사회에서도 황제와 형제들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조창의 죽음을 미심쩍게 여기는 분위기가 퍼져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비는 조창이 죽은 뒤 즉각 뒤를 계승한 조창의 아들인 조해를 중모현으로 봉하고 봉토를 압류해 버린다. 그 뒤 1년 뒤 임성현으로 봉하였는데 그 뒤 조예가 즉위하고 나서야 임성국을 회복한다. 이때 조예는 그에게 식읍 2천 5백 호를 갖게 해준다.
3 평가
여러모로 우수한 장군의 자질을 갖춘 인물이었고 조조 사후에도 1만 호나 다스릴 정도로 위세가 대단했지만, 늦게 등장하는 바람에 재능을 꽃피우지 못한 아까운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20대에 오환에서의 활약 이후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는 형에게 중용받지 못해서 활약상도 전무하다.
단, 성격이 직선적이고 호방하여 술수와 음모가 난무하는 궁중의 암투와는 거리가 먼 인물인 것 같다. 조비가 그를 경계한다는 것이 분명해 보이는데도 곧이곧대로 상경해서 조비를 만나 곧바로 죽는 것도 그러하고. 근데 황제가 불렀는데 안 올라가면 반란 모의로 비칠 수 밖에 없다.
4 미디어 믹스
- 조창/기타 창작물 항목 참조.
- ↑ 이름이 '밝을, 무늬 창(彰)'인 것을 보면, 이 문은 문무 할 때의 문보다는 '무늬'의 의미로 쓰인 것이다.
- ↑ 아버지인 조조도 큰 개를 때려잡았다는 기록이 있다.
- ↑ 이 대사는 그나마 점잖게 옮긴 것이고 실제 상황은 조조가 상당히 빡치는 방향으로 전개 되었는데, 유비 본대와 처음으로 직접 조우하여 조조가 군대 앞으로 나와 유비와 1:1 말배틀을 하자고 하자 유비가 유봉을 대신 내보내어 공격하게 하였다고 한다. 그래도 조조는 소싯적 유비와 친분이 두터워 전투에 앞서 매너플레이 하자는 식으로 하려 했는데 위공인 자신이 친히 출영을 하였는데 대면조차 안하고 양아들을 내보내 뒷통수를 날린격. 이에 조조는 "돗짜리나 짜던 놈이 이젠 양아들따위나 내보내 나를 능멸하느냐? 만약 내 아들 황수아가 여기 있었다면 네놈을 짖이겨 만두소를 만들어버렸을 것이다!" 라며 격하게 분노하였다.
- ↑ 세설신어를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귀족들의 살롱문학이다.